July 31, 2022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 (Teach Us To Pray)

Preacher:
Series:
Passage: 누가복음 (Luke) 11:1
Service Type: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

(Teach Us To Pray)

7-31-22

본문말씀: 누가복음 (Luke) 11:1

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One day Jesus was praying in a certain place. When He finished, one of His disciples said to Him, “Lord, teach us to pray, just as John taught his disciples.”)

[설교 요약]

            우리 크리스챤은 기도만큼 우리의 영성에 깊은 영향을 끼치는 것이 없음을 잘 알면서도, 기도만큼 여전히 어색하고 익숙하지 못한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주님은 “(침례)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 (v.1)라고 청하는 주님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먼저 <웨스트민스터 신학사전>에 보면, ‘기도’ (prayer)는 “인간이 하나님께 찬양 (praise), 경배 (adoration), 회개 (confession), 감사 (thanksgiving), 간구 (supplication), 중보 (intercession)로 나아가는 행위”라고 정의합니다. 그리고 이 ‘기도를 통해 인간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그분의 사랑과 인도하심, 그리고 그의 은혜를 누리게 된다’고 기도의 결과를 말합니다.

무엇보다 주님은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눅. 11:2) 라고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여” (Father)라고 부르라 하십니다. 이와 같은 ‘아버지와 자녀’로서의 관계는 우리 크리스챤의 기도의 시작이자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기도와 관련한 몇가지 대표적인 질문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기도가 더욱 깊어지고 온전히 행해지기를 기대합니다.

첫째, <왜 우리는 기도하는데 어려움을 겪는가?’>하는 점입니다: <리처드 포스터>는 그의 책, ‘기도’에서 “실제로 기도를 막는 주요한 요인으로서 ~ 기도에 관한 더 많은 것을 알고, 철학적인 문제들과 위대한 기도의 전승을 더 잘 이해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여긴다 ~ 그러나 우리가 막상 기도하게 될 때, 우리는 낮아지고 통제권을 조용히 넘겨주고 무능한 자처럼 된다는 사실이다”라고 말합니다. 막상 기도할 때 우리가 느끼는 이와 같은 무기력함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습 그대로인 것입니다. 기도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무엇때문에 하나님을 멀리 느끼느냐?>는 점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피해 멀리 숨어 계신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나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 13:5)고 하나님은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 느끼는 것은,

  • 단순히 나의 ‘느낌’ (감정)으로 인 함입니다
  • 때로 하나님은 ‘침묵’하심 (=멀리 계심)으로 그 자녀를 훈련 (성숙케) 하십니다 (욥. 23:8-10)
  • 한편 ‘우리의 죄’가 하나님과의 사이를 가로막기도 합니다 (시. 66:18)

셋째, <우리는 기도의 필요성을 깨닫는가?>하는 점입니다: 주님은 ‘아버지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아버지를 향한 자녀의 열정과 사랑이 결국 우리의 기도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단순히 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기도 가운데 여러분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내려 놓고, 그분의 선하심과 은혜로 풍족하게 응답받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첫걸음이 됨과 동시에 ‘성령의 충만을 통해 자녀됨의 확신과 영적 권세’를 누리게 되는 마지막걸음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사실 우리 크리스챤은 기도만큼 우리의 영성에 깊은 영향을 끼치는 것이 없음을 잘 알면서도, 기도만큼 여전히 어색하고 익숙하지 못한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주님은 “침례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 (v.1)라고 청하는 주님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바라기는 오늘 말씀 가운데 성도 여러분 모두 한걸음 더 기도와 가까워지고, 살아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복된 기도의 용사로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도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주께 어떻게 기도할 것인지를 묻었을 때,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모범’이 이어지는 <2-4절>의 말씀입니다. 저는 조만간에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즉 <주기도문>의 내용에 대해서 자세하게 살펴보는 시간 갖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기도에 대한 보다 일반론적이 면서도 우리가 한번쯤은 꼭 집고 넘어가야 할 몇가지 점들을 살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특별히 우리 교회에서 지난 2주동안 ‘특새’로 함께 기도에 힘쓴 은혜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번 ‘특새’를 계기로 좀더 기도의 능력과 복을 누리는 성도 모두 될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우리 각자가 어떻게 기도의 삶을 시작할 것인지에 대한 기초적이면서도, 중요한 몇가지 점을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무엇이 기도입니까?’ <웨스트민스터 신학사전>에 의하면 ‘기도’ (prayer)는 “간청/ 애원하다” (to entreat)라는 헬라어 <프레카리>에서 유래했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기도’는 “인간이 하나님께 찬양 (praise), 경배 (adoration), 회개 (confession), 감사 (thanksgiving), 간구 (supplication), 중보 (intercession)로 나아가는 행위”라고 정의합니다. 그리고 이 ‘기도를 통해 인간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그분의 사랑과 인도하심, 그리고 그의 은혜를 누리게 된다’고 기도가 가져오는 결과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적용할 것은 이것입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눅. 11:2) 라고. 주님은 그 무엇보다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기도를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Father, hallowed be your name) (v.2)라고. 그 당시 아무리 경건하고 믿음 좋은 유대인들은 결코 하나님을 향해 부를수 없었던 것이 “아버지”라는 호칭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것과 같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름조차도 소리내어 부르는 것을 금기시했던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영광스럽고 가까이하기엔 거룩하고 두려운 분이시기에 그분의 이름도 모음을 뺀 자음만으로 불렀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야훼’ ‘아도나이’라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구약의 성도들은 선지자나 예언자를 위시한 그 누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감히 부르는 자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여”라고 하나님을 부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한마디의 놀라운 하나님을 향한 호칭의 변화에서 우리 성도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떻게 근본적으로 변화된 것인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 되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놀라운 권세와 영광이 허락된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곧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our Father in heaven)로 모시고 살아간다는 것은 혁명적인 신분의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의 기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결정해 주는 중요한 근거라고 믿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나아와서 기도드리는 분은 영광과 존귀로 거룩하신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또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기도의 모든 내용을 새롭게 하고, 무한한 확신과 믿음으로 구할 수 있는 이유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아버지와 자녀’로서의 친밀한 관계에서 우리의 모든 기도는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우리를 언제나 참된 기도가 어디에서 출발해야 하는지를 확신케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은 조만간에 더 상세하게 살펴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도 여러분과 함께 기도에 대해 생각해 보기 원하는 것은 우리 각자가 기도를 실천하기 위해 먼저 이해해야 할 몇가지 점 등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도데체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 그분께 영광 돌리고, 사랑과 신뢰의 대화를 나눔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청년시절부터 지금까지 기도에 대해 개인적으로 경험했던 어려움과 또 이것을 고민했던 앞서간 우리 믿음의 선배들과 여러 영성가들의 글들을 통해 이런 기도와 관련한 몇가지 먼저 이해해야 할 점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왜 우리는 기도하는데 어려움을 겪는가?’>하는 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도 때로 빈벽에다 대고 얘기하는 듯한 답답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은 아주 멀리 계시고, 나의 기도에는 전혀 관심가지지 않으시는 듯한 휑한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저 개인적으로 볼 때, 제가 기도하기 힘들게 만들었던 것은 기도에 대한 이런 부담감이 아니었던가 생각해 봅니다. 그러면서 나 스스로 ‘나는 아직까지 기도에 대해서 너무도 잘 모르고 있었던 것같애!?’ ‘나는 아직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기도의 방법과 내용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 못해!!’라고하면서 기도하는 것에서 스스로 움추려 드는 것입니다. <리처드 포스터>는 그의 책, ‘기도’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기도하지 못하도록 막는지 우리는 분명히 알지 못한다 ~~ 실제로 기도를 막는 요인은 여럿 있겠지만, 가장 우선적으로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한 요인은 특별히 현대의 고학력자들에게 있어서는 <기도에 관한 모든 것을 먼저 완전히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 뿐만 아니라 기도에 따르는 철학적인 문제들을 더 연구하고 위대한 기도의 전승을 더 잘 이해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여긴다 ~ 그러나 우리가 막상 기도하게 될 때, 우리는 낮아지고 통제권을 조용히 넘겨주고 무능한 자처럼 된다는 사실이다”라고 포스터는 고백한 바 있습니다.

과거 제 자신이 그랬고, 또한 여러 크리스챤 성도들이 마찬가지로 기도에 있어서 겪는 어려움은, 이와 같이 기도 가운데 낮아지고 통제권이 넘어간 무능한 자 같은 무력감 때문은 아닐까 하고 저는 생각해봅니다. 마치 처음 수영을 배울 때, 물에 가라앉지 않고자 허우적대면 댈수록 더욱 물 속에 가라앉는 무기력감과 무능함이라고 나 할까요?! 그러나 수영을 배워 보신 분은 이해하듯이 물에 내 몸을 완전히 내 맡기고 잠길때 비로소 몸이 물 위로 자연스럽게 뜨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중요한 것은 이러한 우리의 감정에 집중하기 보다, 기도함에 있어서 ‘내 내면에 존재하는 순수한 것과 불순한 것, 이타적이기도하고 이기적이기도 한 우리의 모든 복잡미묘한 동기를 그대로 하나님께 내 맡기라’고 <포스터>는 우리에게 조언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이중성에도 불구하고 용납하여 주실만큼 위대한 분임을 우리는 기도 가운데 점점 더 깨닫아 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기도에 있어서 행할 최우선적인 것은 있는 그대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더 보태지도 말고 더하지도 말고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야하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무엇때문에 하나님을 멀리 느끼느냐?>는 점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피해 멀리 숨어 계신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마치 하나님은 귀먹은 자같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신 것처럼 우리는 스스로 느끼는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때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존재가 된 것같이 하나님의 침묵을 고통스럽게 경험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성도의 느낌이 마치 하나님이 내게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심하면 그분이 아예 존재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강한 의심을 낳게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가 이해하고 인정해야만 하는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침묵은 우리 성도의 유익을 위하여 계획된 신적인 의도하심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을 향해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사. 40:27-28)라고. 하나님은 결코 귀먹지 않고 눈먹지 않았다고 그의 종을 통해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분의 자녀에 대해 귀기울이고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왜 우리는 여전히 ‘침묵하시는 하나님’으로 느끼는 것일까요? 그것은 첫째로) 우리의 감정에 기인합니다. 성경은 언제나 우리는 어떤 경우에서도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 13:5)고 히브리서 기자는 밝힙니다. 어떤 경우에서든지 하나님은 우리를 홀로 고아와 같이 내버려두지 않으시겠다는 다짐인 것입니다.

그러나 둘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는 자의 문제로 인하여 하나님이 멀리 계심을 영적으로 인식할 수 있음을 신학자들은 지적합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기도하는 자가 죄를 고백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시. 66:18)고 시편시인은 우리의 죄악이 하나님의 귀를 막게 할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또한 다윗은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시. 32:3)라고 회개하지 않는 심령가운데 오는 고통을 토로하였습니다. 바로 죄가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를 갈라놓은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마음이 불신으로 가득 찰 때,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히. 11:6)라고 히브리서기자는 선언합니다. 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을 진노케 하고, 그분을 우리와 단절시키는 것은 그분을 향한 불신, 곧 믿음없는 마음입니다. 그럼으로 여러분이 기도할 때 하나님이 멀리 계심을 깨닫게 될때,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각자의 믿음을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셋째, <우리는 기도의 필요성을 깨닫는가?>하는 점입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적지 않은 크리스챤들이 기도에 힘쓰지 않는 실제적인 이유로써 기도의 필요성을 깨닫지 못함을 볼 수 있습니다. 왜 크리스챤이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일까요? 그 대표적인 것으로 그들은 ‘하나님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나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신데, 내가 굳이 기도해야만 들으시는 하나님인가?!’ 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혹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지만, 나머지는 내가 노력해야지 하나님께 달라고 보채기만 한다고 되는게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크리스챤도 있습니다. 전자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 주시겠지 하는 ‘무책임’형이라면, 후자는 ‘내가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는 ‘무한책임’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두 경우 모두 성경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기도를 단지 나의 필요를 충족할 수 있는 수단으로써 간주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주께서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말씀하신 “아버지여”라는 우리 자신과 하나님 아버지와의 본질적 관계에서 시작되는 기도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이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23:1)로 시작하는 다윗의 시는 묵상할 때마다 깊은 영감과 감동을 주는 ‘선한 목자되신 하나님’에 대한 찬송의 시인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선한 목자되신 하나님과 그의 신실하신 돌봄 받는 양인 다윗과의 끊을 수 없는 사랑의 관계가 클라이막스에 이르는 지점이 <4절> 말씀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 23:4)라고. 다윗 한사람 뿐 아니라, 우리 모든 구원받은 성도가 누릴 수 있는 가장 복되고 강력한 은혜는 선한 목자되신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누리는 평화와 안정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 끊을 수 없는 긴밀한 관계에서 그 어떤 원수도 헤치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과 안정감입니다. 비록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를 헤매고 다닌다고 할찌라도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기도가 필요한 본질적인 이유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 ‘기도의 본’을 가르쳐 주시고 나서, 이어지는 <5-13절>에서 비유로써 기도에 더욱 힘써야 할 것을 도전하신 것도 바로 그 이유인 것입니다. ‘만약 어떤 친구가 밤에 멀리서 찾아왔는데 집에 먹을 것이 없다면, 이웃이 비록 밤늦어 잠들어 있다 할찌라도 가서 문을 두드리고 빵을 좀 꾸어 달라고 강청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강청함으로 인해 꾸어주지 않겠느냐?’고 제자들에게 주님은 반문하십니다. 주님의 결론은 “구하라, 찾으라, 그리고 두드리라” (v.9)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참된 축복과 은혜를 부어 주시고자 함인 것입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눅. 11:13)고 말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아버지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약속하신 모든 좋은 것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으로부터 4,000여년 전에 이 땅에 살았던 야곱이란 인물을 여러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쌍둥이 형 에서의 뒷발꿈치를 잡고 태어났고, 그의 평생은 야곱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답게 ‘자신의 야망과 세상의 재물’을 움켜잡고자 철저히 투쟁하고 쟁취하며 험악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사실 야곱만큼 현대인의 기질을 잘 대변하는 성경인물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는 아버지 이삭과 형 에서를 속이고 도망갔다가 이제 20년만에 다시 재회해야만 하는 마지막 밤을 그는 ‘얍복강가’에서 보내며 그의 신비롭고도 상징적인 행위가 <창세기 32장>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모든 가족과 짐승을 먼저 강건너 보내고, “홀로 남아 어떤 사람과 씨름했다” (창. 32:24)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그 사람이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인하여 ‘환도뼈’ 곧 ‘허벅지 관절’을 쳤지만, 야곱은 가고자 하는 그를 끝까지 그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왜일까요? 그 이유는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창. 32:26)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야곱은 무슨 축복을 더 원하는 것일까요? 12명의 아들과 수백마리의 양과 소와 염소를 소유했지만, 이제 날이 밝으면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오는 형 에서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당할텐데 야곱은 무슨 축복이 더 필요하다고 여러분은 여기십니까? 과연 이 순간 야곱은 무슨 축복을 원한 것일까요? 그때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창. 32:27) 하나님은 단지 그의 이름을 야곱에서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황태자”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고 바꿔 주셨는데 사실은 야곱의 모든 것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과거의 야곱으로 되돌아 가지 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성경에서 기도를 통하여 본질적인 하나님과의 영원한 축복의 관계 안으로 들어간 자의 삶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바라기는 날마다 기도로써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 성도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 가운데 여러분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내려 놓고 그분의 선하심과 지켜주심과 은혜를 구하고 찾고 두드림으로 마침내 야곱과 같이 응답받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