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y 24, 2022

“겨자씨만한 믿음” (Faith Like A Mustard Seed)

Preacher:
Series:
Passage: 마태복음 (Matthew) 17:19~20
Service Type:

“겨자씨만 한 믿음”

(Faith Like A Mustard Seed)

7-24-22

본문말씀: 마태복음 (Matthew) 17:19-20

19 이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0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 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설교 요약]

            어느날,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간청했습니다.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 하더이다” (마. 17:15-16)라고. 그리고 그를 데려왔을 때, 주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그 아이에게서 나갔습니다 (v.18).

나중에 제자들이 예수께 조용히 묻었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v.19)라고. 그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v.20a). 그리고나서,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v. 20b)고 도전하십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겨자씨 한알 만한 믿음’일까요? ‘겨자씨 한알’은 비록 작을찌라도 살아 있는 씨앗입니다. 그럼으로 그것이 땅에 심기워질 때 큰 나무로 자라나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로 설명하시면서 ‘겨자씨’의 생명력을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마. 13:31-32)고.

또한 주께서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v.20)라는 말씀은 문자 그대로의 뜻이 아니라 비유의 의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산을 옮긴다’는 뜻은 <‘문제를 극복’하거나 ‘가장 힘든 장애물을 제거함>을 말하고자 할때, 사용된 표현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빠져 있지만, 마가는 ‘왜 우리는 능히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라고 묻는 제자들에게 주께서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막. 9:29)고 말씀하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살아있는 믿음, 곧 ‘한알의 겨자씨의 믿음’을 가질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열쇠가 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기도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적은 믿음’과 ‘한알의 겨자씨 믿음’의 차이를 봅니다.

  • ‘적은 믿음’은 ‘하나님이 곧바로 응답하지 않으면 의심’하지만, ‘겨자씨의 믿음’은 ‘기도로 인내하며 약속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 ‘적은 믿음’은 ‘예수님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포기’이지만, ‘겨자씨의 믿음’은 ‘인생의 먹구름과 고난의 안개를 뚫고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시간 우리를 향해 “너희에게 겨자씨 한알 만한 믿음이 있느냐?”고 질문할 것을 믿습니다. 바라기는 기도 가운데 '겨자씨처럼 살아있는 한알의 믿음'을 마음 밭에 심어 장성한 믿음으로 거두는 우리 공동체 되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는 잘 압니다. 우리 크리스챤은 어떠한 행위에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불러 주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와 같이 믿음은 우리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구원받을 뿐 아니라, 신앙생활의 귀한 열매 맺고 승리하게 하는 중심적인 요소인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과연 믿음은 무엇인지?’라고 하는 자문을 하게 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과연 나의 믿음은 문제없는 것인지? 나의 믿음은 주께서 칭찬하는 믿음인지? 하는 것이 때로는 궁금하고 두렵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만일 믿음이 겨자씨 한알만큼만 있으면!?”이라고 도전하시는 믿음은 과연 무엇인지를 함께 묵상하기 원합니다. 이를 통해 주를 믿는 믿음의 반석위에 견고히 서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된 <마태복음 17장>은 예수께서 그의 세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과 더불어 산에 오르셔서 그 얼굴과 옷이 해같이 희게 변하게 된 사건에서 출발합니다. 소위 ‘변화산’사건입니다. 기록된 대로 우리 주님은 높은 산에 오르셔서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대화하셨습니다. 이 장면을 본 베드로는 얼마나 황홀했던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주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마. 17:4)고 말입니다. 이때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고 구름 속에서 이런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v.5)는 하나님의 음성인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도 영광스런 체험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해같이 빛나는 형상으로 변하시고, 하늘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예수를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선언하시는 이 놀라운 광경을 목도한 제자들의 마음은 천상을 경험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이 사건이 있고나서, 그 세명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산에서 내려왔을 때, 어떤 사람이 예수께 나아와서 이렇게 간청했습니다.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 하더이다” (v.15-16)라고. 예수님이 3명의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오른 사이에 남아 있는 9명의 제자에게 이 아이의 아버지는 그 아들을 고쳐줄 것을 구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고쳐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v.17)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를 데려왔을 때,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때부터 나으니라” (v.18)고 마태는 기록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하기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왜 이 아홉명의 제자들은 귀신을 좇아내지 못했는가?’하는 점입니다. 이것에 대해 무엇보다 먼저 생각할 것은, 이 소년의 경우는 결코 간단한 케이스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해야합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한 다른 복음서에서 보면, 마가는 “벙어리 귀신들린 내 아들” (막. 9:17)이라고 아이의 상태를 그 아버지가 말하면서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막. 9:18)고 주께 설명합니다. 귀신들린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는 주께서 귀신을 꾸짖으실 때에 그가 나갔다고만 묘사되어 있지만, 누가는 “귀신이 (아이를)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사” (눅. 9:42)라고 더욱 구체적으로 그 상황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아이를 사로잡았던 귀신이 매우 악하고 강력한 영임을 알수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 악한 귀신은 보통의 영적 능력을 가지고는 결코 쉽게 쫓아낼 수 없는 강력한 귀신이란 사실입니다. 제자들이 상대하기에는 매우 힘든 영임에는 틀림없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해해야 두번째 사실은 이들 예수님께서 세우신 12 사도에게는 그 당시 주를 믿는 다른 자들과는 상당히 구별된 영적 훈련과 권세가 주워졌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는 오늘 본문보다 앞선 <마. 10장>에서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 10:1,8)고 이미 기록한바 있습니다. 주께서 이미 그 열두사도들에게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던 것입니다. 마가도 제자들이 주의 주신 권능을 통하여 능력 행했음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막. 6:12-13)고. 이와 같이 주님은 이미 그의 제자들을 복음의 증거자들로 세우셔서 사단의 능력을 제어하고 그의 머리를 밟을 권세와 능력을 주셨으며, 그들도 귀신들이 자신들에게 항복한 것을 직접 경험하고 기뻐 돌아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오늘 9명의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것일까요?

여기에 9명의 제자들의 문제점이 나타납니다. 그들의 문제점은 바로 ‘믿음’에 있었습니다. 사실 그동안 그들은 늘상 주님과 함께 동고동락했기에, 문제가 생기면 주께서 곧바로 그것을 해결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은 다른 것입니다. 지금 주께서 그들 곁에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은 주께서 의도하신 것임을 알수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갑작스럽게 귀신들린 소년의 아버지가 아들과 함께 찾아와서 귀신을 쫓아 달라고 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도 살펴봤듯이 그 아들을 사로잡은 귀신은 매우 강력하고 사나운 영임을 알수 있습니다. 그 아버지의 설명대로 “귀신이 아들을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막. 9:22a)라고 말입니다. 처음에는 그 제자들이 틀림없이 이렇게 시도했겠죠!?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더러운 귀신아, 물러가라’고. 그런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분명 몇번 더 같은 시도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귀신은 쫓겨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들은 자신에게는 이 강력한 악한 귀신을 제어할 능력이 주어지지 않았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사단 앞에서 주눅들고, 창피를 톡톡히 당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제 기가 죽고 믿음이 마구 흔들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앞서 본대로, 주님은 언제나 그러하듯 그의 놀라운 능력으로 그 악한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제자들과 예수님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주께 조용히 물었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v.19)라고. 그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v.20a)고. 여기에서부터 우리가 잘 이해해야 하는 것은 주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말그대로 ‘제자훈련’을 행하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없는 사이에 제자들 스스로 허락하신 하나의 과제를 행하도록 기회를 주셨으나, 그 결과가 그리 좇지 않았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상당히 실망했고 풀이 죽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배움이라는 것이 그러하듯 중요한 것은 한번의 과제를 잘 수행했느냐 아니냐 보다도 그것을 통해 무엇을 그들이 배울수 있느냐 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왜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는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그것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주신 미션을 감당하기에는 아직까지 믿음이 적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이런 엄청난 도전의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v. 20b)고 말입니다. 주께서 ‘겨자씨 한알만큼의 믿음이 너희에게 있느냐?!’는 도전은 무척 놀라고 충격적인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주님의 ‘겨자씨 한알’의 비유는 그동안 크리스챤들에게 있어서 대표적으로 잘못 오해되어진 말씀의 하나인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면 ‘겨자씨 한알의 믿음’이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많은 크리스챤들은 이것을 ‘아주 작은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시는 ‘겨자씨 한알의 믿음’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흔히 이해하듯 마치 ‘아주 작은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의미는 ‘살아 있는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그 믿음이 아무리 작다고 할찌라도 살아 있는 믿음은 자라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겨자씨 한알은 눈에도 금방 띄지 않을만큼 작은 알갱이지만, 그 씨앗이 땅에 심기워져 싹이 나고 자라날때 많은 새들이 날아와 보금자리를 삼고, 여러 짐승들의 쉼터가 되어주는 그늘을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만약 그 믿음이 살아 있다면 말입니다. 이것이 주께서 천국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겨자씨의 생명력을 이렇게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마. 13:31-32)고. 처음엔 비록 겨자씨처럼 작다 할찌라도, 살아있는 믿음은 반드시 장성한 믿음으로 자라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문자 그대로 ‘산을 들어 옮긴다’는 뜻이 아니라, 비유적인 의미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산을 옮긴다’는 의미는 <‘문제를 극복’하거나 ‘어려움을 제거’할수 있는 능력>을 말하고자 할때, 주로 사용된 표현이라고 성경학자들은 말합니다. 그럼으로 주님은 ‘만약 너희에게 겨자씨 한알만 한 살아 있는 믿음이 있다고 할찌라고, 그 믿음은 당면한 문제를 극복하고 놀라운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라고 도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가는 ‘왜 우리는 능히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라고 묻는 제자들에게 주께서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막. 9:29)고 말씀하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은 빠져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악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아홉명의 제자들 뿐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 성도들에게도 어떻게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 (눅.10:19)하신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넉넉히 얻고, 살아 있는 믿음으로 계속해서 영적으로 자랄수 있는 길은 오직 기도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주님의 말씀에서 기도의 중요성을 다시한번 깨닫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당시 9명 제자들의 문제가 믿음에 있었다면, 그 근본이유는 그들이 기도를 통해 겨자씨 한알처럼 살아 있음으로 점점 더 자라나 거대한 나무를 이루는 살아 있는 믿음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님은 지적하시고, 도전하심을 저는 믿습니다.

그렇다면 주께서 제자들에게 책망하시는 ‘적은 믿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왜 주님은 그의 제자들을 향해 ‘너희의 믿음이 적은 까닭이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응답’이 있을 때만 믿는 믿음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면 여러분이 처음 믿기 시작할 때 하나님은 여러분의 기도에 속히 응답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믿음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 두번 기도했음에도 응답하지 않으시면 낙심하는 것이 적은 믿음입니다. 또 이 적은 믿음은 ‘예수님이 함께 하실 때만 믿는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처럼 그들은 몇번 귀신을 좇아 내고자 시도해 보지만, 그들이 행하지 못했을 때 곧 포기해 버리고 믿음 못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주께서 그들에게 분명히 약속하셨음에도 그들은 허락하신 권세와 능력을 믿지 않고 곧바로 포기한 것입니다. 이것이 적은 믿음인 것입니다. 주께서 주신 약속의 권세와 능력을 확신하지 못하고, 주님을 믿음의 눈으로 보지 못하는 약한 믿음인 것입니다.

이것이 적나라하게 잘 드러난 또 한번의 사건이 예수께서 밤에 호숫가를 걸어오셨을 때, 배에서 그것을 목격한 제자들이 처음엔 유령으로 생각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가 나중에 주님임을 알게 됩니다. 그때 용감한 베드로가 주님께 자신도 주님처럼 걸을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주님은 그에게 손을 내밀어 물위를 걷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 가지 못하고 물에 빠져들어갔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몇 발자국 못가서 눈앞에 일렁이는 풍랑에 마음이 빼앗겨서 강한 두려움과 공포가 몰려왔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주님을 바라보던 그의 시각은 삽시간에 일렁이는 파도에 빼앗겨 버린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믿음은 작동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럼으로 주님은 베드로에게 손을 내미시며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마. 14:24-31).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도전하심을 믿습니다. “너희에게 살아 있는 믿음이 있느냐?”고 말입니다. 이 살아 있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지금 당장 내 손에 아무것도 없다 할찌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인내로 기다릴 수 있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크신 능력을 신뢰하며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는 믿음이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또한 이 믿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고 눈 앞에 큰 파도와 먹구름이 앞을 가릴지라도 의심하지 않고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믿음이 살아 있는 믿음인 것입니다. 조금 전 베드로처럼 주님의 손에 이끌려 몇 발자국 걷다가 눈 앞에 일렁이는 풍랑에 마음이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상황 가운데서도 주님은 졸지 않으시고 그분의 강한 팔을 내게서 거두지 않으신다는 믿음이 살아 있는 믿음이요, 큰 믿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와 같은 ‘살아있는 믿음’은 오직 ‘기도 이외는 나올수 없음’을 주님은 여러분과 저에게 도전하십니다. 비록 그 시작이 겨자씨 한알만큼 작고 미미하다 할찌라도 그 믿음이 살아 있을찐대 그 믿음은 반드시 자라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믿음을 향해 커져 나갈 것을 믿습니다. 지난 주부터, 우리 교회에서 함께 ‘특별새벽기도’를 통해 함께 우리 각자와 서로의 중보기도제목을 놓고 힘을 모아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께서 이렇게 우리를 향해 격려하고 도전하심을 믿습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마. 7:11)라고. 이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함으로, 기도로서 포기하지 않고 구하고 찾고 두드림으로 마침내 그 복된 약속을 받아 누려 나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