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y 17, 2022

“서로 사랑하자” (Let Us Love One Another)

Preacher:
Series:
Passage: 요한일서 (1 John) 4:7~8
Service Type:

“서로 사랑하자”

(Let Us Love One Another)

7-17-22

본문말씀: 요한일서 (1 John) 4:7-8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Beloved, let us love one another: for love is of God; and every one that loves is born of God, and knows God.)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He that loves not knows not God; for God is love.)

[설교 요약]

            사랑의 사도, 요한은 우리 성도를 이렇게 격려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v.7)라고. 그렇다면, “왜 우리 성도들은 사랑해야 하는가?”하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마가복음에서 한 율법학자가 모든 율법 가운데서 가장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이지를 묻는 질문에 대해 “첫째는 이것이니 ~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막. 12:29~31)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신명기 6장>과 <레위기 19장> 말씀을 통해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이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임을 밝히셨습니다. 즉 모든 하나님의 말씀 (=율법)의 핵심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번째 질문은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명하시는 것인가?’입니다. 이유는

  • 하나님의 속성’에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사도요한이 선언하듯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v.7-8)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은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오늘 본문 뒤의 <18절>에서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죽게 하기까지 사랑하셔서 우리를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것이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한 이유인 것입니다 (요일. 4:9-11).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이렇게 분명히 명령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4)고. 우리 주님은 구약에서 이미 주어진 ‘사랑의 명령’을 ‘옛 계명’이 아니라 ‘새 계명’으로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죄씻음바 되고, 그의 생명의 빛을 소유한 자만이 진정으로 ‘서로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일. 2:8).

바라기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온 힘을 다해 사랑하고, 그를 통해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며, 이로써 형제 자매를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는 복된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저는 오늘 성도 여러분과 함께 다시 ‘사랑’에 대해서 묵상하기 원합니다. ‘단일곡’으로서 세상에서 가장 많이 불려지고 있는 곡은 ‘생일축하 합니다’ (Happy birthday to you!)라고 시작하는 <생일축하 곡> 입니다. 이 곡이 단일곡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불려지는 노래라고 합니다. 그러나 비록 노래의 장르는 제각기 다르다 할찌라도 그 노래의 주제가 <사랑>을 다룬 노래는 그 숫자가 생일축하 곡과 비교 할수 없을만큼 수없이 많은 것입니다. 아마도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을 가릴 것없이 모든 노래의 적어도 절반 이상은 그 주제가 ‘사랑’에 관련한 노래일 것을 저는 넉넉히 추측해 봅니다. 어디 그것 뿐 입니까? 시와 소설등의 문학은 또 어떠하고, 그림과 영화는 어떠합니까? 이와 같이 사랑이 인간 삶의 확고한 주제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사랑은 그야말로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요소가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물과 공기와 같이 그것을 떠나서는 인간이 살수 없는 그런 것이라고나 할까요? 물론 사랑이 그토록 인간에게 강력하고도 필요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것이 늘 선하고 유익한 영향력을 미친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때로 그와 반대되는 부정적인 영향력도 미치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사랑한다고 하면서 상대를 괴롭히는가 하면, 사랑한다고 하면서 상대를 파멸로 내모는 애증의 불행한 결과도 적지 않게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가서 기자의 고백과 같이 “사랑은 죽음같이 강한 것” (아가. 8:6)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크리스챤에게 있어서도 사랑은, 아니 우리 크리스챤에게 있어서는 그 사랑이 더욱 더 그 말씀처럼 ‘죽음같이’ 아니 ‘죽음보다도 더욱 강력한 것’입니다. 그럼으로 사랑의 사도, 요한은 우리 성도를 이렇게 격려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v.7)라고.

제가 오늘 ‘사랑’에 관한 말씀을 시작하면서 먼저 성도 여러분과 생각해 보기 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왜 우리는 사랑해야 하는가?”하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물론 우리 인간 대부분은 태생적으로 사랑을 좋아하고, 그 사랑을 주고받기 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우리 크리스챤의 경우에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만 하는 것인가?’하는 점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누군가 만약 그것을 저에게 묻는다면 저는 분명히 “그렇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 크리스챤들은 ‘사랑’을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의 선택사항이 아니라, 반드시 서로를 사랑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것에 대한 성경에서 보게 되는 가장 중요하고 첫번째로 기록된 말씀으로 저는 <신명기 6장>말씀을 생각하게 됩니다. 모세는 40년 광야생활을 끝내고나서 마지막 죽음을 앞두고 여호수아를 필두로 가나안 땅에 나아가는 출애굽 2세대 이스라엘민족에게 하나님의 중요한 명령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12:28)라고. 그리고 우리는 이 <신명기 6장>말씀이 성경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율법학자의 질문에 대한 답에서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 율법학자가 주께 나아와 이렇게 묻었습니다. “(선생님) 모든 율법 중에 어느 것이 첫째가는 계명입니까?” (막. 12:28)하고. 그때 주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막. 12:29~31)고 하셨는데, 이것은 바로 <신명기서 6장과 레위기 19장>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주님의 대답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 (그 당시는 ‘구약의 말씀’)을 요약하고 요약해서 한 문장으로 줄여서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이라고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모든 율법 중에서도 가장 첫째가는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은 그의 백성 이스라엘민족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허락하시면서, 그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첫번째 명령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힘입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해 볼 때, 구약의 이스라엘의 긴 역사에서 그들이 가나안 땅에서 보였던 우상숭배와 탐욕과 죄악된 삶의 밑바닥에는 단순히 율법을 어겼다는 표면적인 이유보다는, 그 이면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음으로 인한 것이 모든 문제의 근본 이유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과 이스라엘민족과의 관계를 <왕과 백성>, <선한 목자와 양>, <부모와 자녀> 그리고 <남편과 아내>의 다양한 관계를 비유로 예시함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이런 깊은 사랑의 관계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그의 선지자들을 통해 물으시고 그 사랑을 촉구하시고, 그들의 사랑 없음을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사랑을 명령하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첫째) ‘하나님의 속성’에 기인하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 요한이 사랑의 사도답게 이렇게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잘 요약하여 밝혀주고 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v.7-8)라고. 그 사람의 존재가 어떠하냐가 그의 삶을 결정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속성 곧 본질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그 하나님의 본질을 정확히 ‘사랑’이라고 정의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우주만물에 존재하는 창조물의 모든 사랑의 출발은 그분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하는 생명체 (=피조물)의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그 사랑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본질상 사랑이신 하나님은 필연적으로 그 만드신 바 된 우리 인간에게 사랑을 요구하실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를 한마디로 묘사해 보라면, 저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짝사랑”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짝사랑은 불행한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인격적으로 사랑하지 않을 때 그 진정한 사랑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크신 능력을 수없이 경험하고도 그분의 사랑은 당연한 것으로 치부하고, 세상의 헛된 신들에게 우상숭배하고 육신의 정욕대로 살아가는 영적 간음을 끊임없이 저지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타락한 이스라엘을 향해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 (렘. 3:22)고. 그들의 수많은 죄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시한번 그들을 사랑으로 부르시고 또한 고쳐주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요한은 오늘 본문 뒤의 <18절>에서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그의 자녀인 우리 성도들을 사랑하셨기에 우리들의 사랑받기를, 그리고 우리들이 서로 간에 사랑할 것을 요구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있어서 ‘서로 사랑해야’하는 까닭은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무도 분명히 사랑을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이렇게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요. 13:34-35)고. 그런데, 주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것을 ‘새 계명’으로 주신다고 말씀하셨다면, 여기서 <새 계명> (A new commandment)이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계명’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 목 박히시기 전날 다시한번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첫째가는 계명’을 분명하게 기억케 하심으로써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love one another)는 이 짧은 문장으로 말입니다.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살펴본데로,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이 모든 구약말씀, 곧 하나님의 모든 율법의 첫째가는 명령’ (계명)이라면,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은 사실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옛 계명’을 정확히 다시 밝히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서로 사랑하라’를 ‘옛 계명’으로써가 아니라 ‘새 계명’으로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구약의 성도들은 율법이 선한 것인 줄은 알았지만, 그 선한 율법을 안타깝게도 지켜 행할 만한 능력이 그들 속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가 새로운 계명인 것은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 자신을 영접하고, 그 빛의 능력으로 행하는 새 언약에 속한 성도들만이 그 사랑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은 구약과 동일한 사랑의 명령이지만, 이것이 지금은 전혀 새로운 차원의 명령이 된 것은 그 명령하시는 주님의 빛과 생명의 능력으로 인해 우리 성도는 ‘온전히 그 사랑의 명령을 실천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점을 사도 요한은 성도들에게 ‘서로 사랑하기를 격려’하면서 이렇게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요일. 2:8)고 말입니다.

이제 저는 다시 처음 여러분에게 드렸던 질문으로 돌아와 다시 이렇게 질문해 봅니다. “왜 우리 크리스챤은 서로 사랑해야만 하는 것인가요?” 그 이유를 저는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시기에’ 그 사랑이신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자녀인 우리 성도들에게 사랑을 명령하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바로 구약에서 하나님의 옛 계명과 신약에서 예수님의 새 계명은 한결같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서로 사랑합니까?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성경말씀의 근거만으로도 우리 하나님의 자녀, 곧 주님의 몸된 교회 공동체는 서로 사랑해야 할 이유가 충분할텐데도 왜 우리는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사도는 ‘우리가 서로 뜨겁게 사랑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고 우리를 도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가 <4장>을 마무리하면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요일. 4:20)고 도전하는 이유입니다. 이 말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 형제를 사랑할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요일. 4:21). 지금 사도가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가 믿음이 약해서나, 착하고 열심히 살지 않아서나, 혹은 그리스도께 대한 충성심 (순종)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우리를 도전합니다. 형제에 대한 사랑치 않음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사랑치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라고 우리 성도를 사랑으로 격려하는 요한의 말씀을 되뇌어 봅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서로를 향한 진정한 사랑을 행하기 원하지만, 우리 앞에는 그 사랑을 행치 못하게 가로막고 있는 수없이 많은 장애물과 우리 자신의 사랑의 한계를 직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안타깝게도 서로를 사랑하지 못할 이유들을 수천, 수만가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과연 사랑할 수 있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그 사랑은 도데체 어디에서 출발해야 할까요? 저는 바로 “하나님을 사랑함”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 출발해야 함을 믿습니다. 이것이 나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며, 더 나아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는 시작임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렇게 평이한 듯 하면서도 깊은 사랑의 본질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4-7)고. 성경은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에게 서로 사랑하기를 권면하고 명령합니다. 왜요?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는 사랑이기 때문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살을 찢으시고 그의 보배로운 피를 흘려 우리를 살리신 것은 바로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으므로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요일. 4:11).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게 하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반드시 서로 사랑을 해야 할 마땅한 이유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남은 삶이 더욱 하나님을 깊이 사랑해감으로 그의 사랑안에서 주님의 몸된 형제와 자매를 뜨겁게 사랑하는 복된 주의 자녀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