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y 10, 2022

“안식의 날” (The Day of Rest)

Preacher:
Passage: 히브리서 (Hebrew) 4:9-11
Service Type:

“안식의 날”

(The Day of Rest)

7-10-22

본문말씀: 히브리서 (Hebrew) 4:9-11

9 그런 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There remains, then, a Sabbath-rest for the people of God;)

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for anyone who enters God’s rest also rests from his own work, just as God did from His.)

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함이라 (Let us, therefore, make every effort to enter that rest, so that no one will fall by following their example of disobedience.)

[설교 요약]

            오늘 히브리서 기자는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v.9)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에게 남아 있고, 또한 들어가기를 힘쓸 안식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안식’ (the God’s rest)입니다.

그리고 창세기에서는 그 하나님의 안식은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심)” (창. 2:3)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히브리서기자는 <히브리서 3-4장>을 통해 결코 그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이스라엘민족>을 한 본보기로 들어 우리에게 영적 경각심을 주고 있습니다. 결론은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음으로 그분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 (히. 3:19)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안식은 오직 믿음을 통해 들어가는 것임을 말씀은 강조합니다.

이것을 기억하면서,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안식을 누려 나갈 있을까?”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그것은

첫째 순종치 않는 자는 안식에 들어 갈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함이라” (v.11)고 히브리서기자는 말합니다. ‘광야에서 방황하던 이스라엘’민족은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권능의 손길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고 불순종함으로 그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히. 3:18-19).

둘째, “복음 듣는 자가 믿음으로 결부시킴으로써” 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계속해서 ‘약속의 가나안 땅’에 들어갔던 이스라엘민족’ (출애굽 2세대)도 안타깝게도 안식을 누리지 못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히. 4:8).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믿음으로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결부 (적용/ 실천)시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안식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셋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쉼으로써” 입니다: 하나님의 참된 안식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마. 11:28~29)고 주님은 우리를 그의 안식으로 초청하십니다.

우리 성도의 진정한 안식은 그리스도께 나아와 우리의 모든 무거운 짐을 내려 놓고, 그 분의 멍에를 매고 배움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날마다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의 가벼운 짐을 짊으로 약속하신 성령충만의 은혜와 안식 누리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저는 오늘 성도 여러분과 함께 <히브리서 4장>의 ‘안식’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오늘날과 같이 산업화되고 사회가 다양하게 분화된 사회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있어서 문제는 더 이상 ‘먹고 입고 자는 의식주’의 문제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원하고 추구하는 선진화된 사회를 살아간다는 것은 달리 표현할 때 복잡다난한 사회현상 가운데 수없이 많은 정보의 홍수와 변화무상한 상황과 맞닥뜨려야 하는 긴장감의 연속 속에서 살아가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단순한 긴장을 넘어서서 정신적인 그리고 영적인 깊은 스트레스와 갈등을 야기함을 봅니다. 이로 인한 많은 현대인들의 심적 고통이 심화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큰 이슈는 적지 않은 크리스챤들에게 있어서도 이 불안과 갈등의 문제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입니다.

오늘 히브리서 기자는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v.9)라고 말합니다. 이 한마디 문장을 통해서도 우리가 비록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면서도 많은 경우 하나님이 주시는 지정한 안식을 안타깝게도 여전히 누리지 못하고 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 곧 그분 안에서 누리는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것일까요? 오늘 말씀 가운데 바라기는 히브리서 기자의 격려와 같이 “하나님께서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며 그의 안식을 누릴수 있는 복된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사실 이 ‘안식’이라는 주제는 성령에게 다뤄지는 주제 중 가장 오래되고 심오한 주제의 하나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시는 창조사역을 6일동안 완성하시고 나서, 2장을 시작하면서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 이더라” (창. 2:3)고. 그리고 성경은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모든 창조의 사역을 마치시고 안식’하실 뿐 아니라, 이 날을 복주셔서 ‘안식일’ (The Sabbath Day)로 정하시고 택하신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영원토록 거룩히 구별하여 지킬 것을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구약성경에 보면 ‘안식일’과 관련한 (=파생된)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으로서 ‘안식년’ (the sabbatical year)과 ‘희년’ (jubilee)사상도 있습니다. 이것 한가지 한가지가 얼마나 깊은 영적 상징성과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는 굿이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언제 가까운 시일에 한번 집중적으로 이와 같은 구약의 <안식일>과 관련한 의미를 다뤄 보기 원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안식’의 주제가 방대하고 심오하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그 중에서도 히브리서 기자가 언급한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는 안식”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를 살펴보겠습니다. 다시 말해, 기자가 성도들에게 도전하는 ‘우리 성도가 들어가기를 힘써야 할 안식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실 ‘안식’과 관련한 자료를 ‘웹사이드’나 여러 책자들에서 찾아보면, 대부분 ‘안식일’에 관련한 자료가 대부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있어서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서 부터 ‘주님의 날’ (The Lord’s day) 곧 ‘주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이유와 그 주일에 어떻게 안식을 누릴 것인가가 주된 주제임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우리 성도가 안식하는 내용에는 ‘주일을 통해서 안식을 누리는 것’도 분명 포함되어 있지만, 정확히 말할 때 오늘 말씀에서 말하는 ‘안식’ (the rest)는 보다 포괄적이고 본질적인 개념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저는 오늘 본문에서 언급한 ‘안식’이 의미하는 바를 성도 여러분과 더 구체적으로 이해해 가고자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안식’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안식’ (the God’s rest)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시. 95:11)고 시편에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다윗을 빌어 그 안식은 곧 ‘하나님의 안식’임을 밝히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안식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앞장 <히. 3:19>에서 기자는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히. 3:19)고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함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대전제, ‘오직 믿음으로만’ 진정한 안식을 누려 나갈 수 있음을 이제 우리는 분명히 기억하면서,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안식을 누려 나갈 수 있을 것인가? 에 대해서 더 구체적으로 이해해 가고자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오늘 본문을 통하여 출발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첫째 순종치 않는 자는 안식에 들어 갈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함이라” (v.11)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기자는 “저 순종치 않는 자들의 본에 빠지지 말자”고 성도들을 격려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기자가 지적한 ‘순종치 않는 자’는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그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불순종했던 이스라엘민족’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400년동안 애굽에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모세를 통해 그분의 강한 손과 편 팔을 통해 바로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40년 광야생활을 통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셨음에도 그 선하신 하나님께 끊임없이 불순종함으로 진노케 했던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악한 영적상태는 우리 성도들에게도 시사하는 중요한 의미가 있기에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오늘 본문 앞장, <히. 3장>에서 매우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 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히. 3:18-19)고. 그의 결론은 이스라엘민족이 그 수없이 많은 기적과 전능한 능력으로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나시고, 광야에서 생수가 나게 하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하나님은 이끄셨음에도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선언하신 이유인 것입니다. 그 출애굽한 이스라엘 1세대는 오직 ‘하나님을 믿고 순종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모두 광야에서 죽음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믿지 않음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고 안식을 누리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둘째, “복음 듣는 자가 믿음으로 결부시킴으로써” 안식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앞의 <3장>에서 살펴본데 이어서, <4장>에서도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복음의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믿음으로 결부시키지 않는 자인 것입니다. “그들과 같이 너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히. 4:2)라고. 제가 이 부분을 강조해서 말씀드리지 않을수 없는 것은 우리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믿음의 적용’ (결부)의 중요성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히브리서기자가 <3-4장>에서 ‘안식’을 어떻게 비유하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는 <3장>에서 앞서 살펴본데로 ‘광야의 이스라엘 1세대’는 하나님을 믿지 않음으로 불순종하여 모두 죽었다고 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은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구원받지 못한 불신자’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이제 <4장>에 오면 하나의 큰 국면의 전환이 있습니다. 그것은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이스라엘 2세대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입성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된 이스라엘민족은 영적으로 ‘구원받은 성도’를 상징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영적인 2분법에 의해 구원받은 성도와 구원받지 못한 불신자를 구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오늘의 주제가 되는 ‘안식의 문제’에 있어서는 가나안에 입성한 이스라엘민족이 여전히 안식을 누리지 못하였음을 기자는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히. 4:8-9)고. 이 말은 약속의 땅에 들어간 것 자체가 하나님의 안식을 누리는 것이 아님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부분을 심각하게 다루는 이유는 ‘구원받았다고 확신하는 크리스챤’에게 있어서도 궁극적으로 볼 때, 끊임없이 그들을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괴롭히고 고통으로 내모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식하지 못함을 보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내가 구원받았는가? 아닌가?’의 이분법이 아니라,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삶의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불안과 염려 가운데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만약 성도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적 상태에 있어서는 여전히 참 평화를 누리지 못함을 여러분이 인정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한 분명한 성찰이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안식 곧 ‘하나님의 안식’을 누리지 못했기 때문임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안식은 사전적의미에서 볼 때, ‘동작이나 일을 멈추다’ ‘불안이나 방해로부터 자유롭다’ ‘잘 고정되다’ ‘무엇에 대해 확신하다’ 그리고 ‘의지하다’는 뜻이 있음을 봅니다.

그런데 제가 ‘안식’이란 바로 ‘하나님의 안식’이라고 했는데 이 안식은 정확히 <창세기 2장>에서 ‘모든 창조의 사역을 마치시고 일곱째날 안식하신 것’ (창. 2:3)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첫 인간부부 아담과 하와는 그 하나님의 안식을 누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뱀의 거짓말을 믿고서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 나무 열매를 따먹게 되었을 때, 그 안식은 끝이 난 것입니다. 그들은 죄의식과 불안과 공포에 질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피했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아담과 하와가 누렸던 그 하나님의 안식을 우리는 다시 누릴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 칠일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쉬신 것처럼 (히. 4:4) 첫 인간부부와 같이 우리 성도들도 그 안식을 누릴 수 있는가가? 오늘 말씀의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말씀드리지만 ‘내가 구원받았는가 아닌가’를 넘어서는 우리의 복되고 충만한 영적 상태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은 ‘복음을 듣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믿음과 결부시킬 수 있는가?’에 열쇠가 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복음을 우리의 믿음과 결부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셋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쉼으로써” 안식합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사도 요한이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이런 아름답고 복된 음성을 듣습니다.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계. 14:13)라고. 천군 천사가 여기서 외치는 소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지키고 죽은 모든 성도들이 장차 누리게 될 최종적인 안식’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주를 향한 모든 믿음의 수고를 그치고 이제부터 영원토록 주와 함께 쉬며 안식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누릴 하나님 나라에서의 최종적인 안식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못지않게 중요한 성도의 안식은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안식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고 그분 안에서 누리게 되는 안식입니다.  이 안식은 바로 주님께서 세상의 무거운 짐 가운데 얽눌리고 고통받는 자들을 향해 선포하신 약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마. 11:28~29)고 말입니다.

주님은 인생의 무거운 짐 아래 수고하고 고통받는 자들을 향해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초청 (=약속)하실 뿐 아니라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이해해야 할 중요한 영적 원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쉼, 곧 안식을 얻기 위해선, 그분의 멍에를 메고 그분께 배워야 한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분의 멍에는 무엇이며, 또한 무엇을 그분께 배워야 할까요? 스펄전목사는 “나의 멍에를 메(라)”는 의미를 “만일 너희가 나에 의해 구원받기 원한다면, 나를 너의 주인으로 모시고 너희 자신을 나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만일 그렇치 않으면 너희 영혼이 쉼을 얻을수 없을 것이다”라고 해석했습니다. 사실 여기에 역설이 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그 멍에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것은 ‘댓가지불’ (paying the cost)의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멍에는 쉽고 그 짐은 가볍습니다 (마. 11:30). 왜냐하면, 우리 주께서 직접 그 멍에를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주의 영, 성령을 통해 우리와 함께 그 멍에를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명절 끝날에 서서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요. 7:37,38)고. 성경은 우리 성도가 누릴 참된 안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안식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그분께 날마다 나아가서 그분께 배움으로 진정한 안식을 누리길 축원합니다. 그분의 가벼운 멍에를 지고 그분 안에서 참된 평화와 기쁨과 쉼을 성령안에서 누리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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