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y 3, 2022

“아브라함의 믿음” (The Faith of Abraham)

Preacher:
Series:
Passage: 로마서 (Romans) 4:1-3
Service Type:

“아브라함의 믿음”

(The Faith of Abraham)

7-3-22

본문말씀: 로마서 (Romans) 4:1-3

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What then shall we say that Abraham, our forefather, discovered in this matter?)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If, in fact, Abraham was justified by works, he had something to boast about —but not before God.)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What does the Scripture say? “Abraham believed God, and it was credited to him as righteousness.”)

[설교 요약]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복음의 진리를 로마서에서 설명해 나가면서 <롬. 4장>에서 그<믿음의 본보기>로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소개합니다.

비록 우리 모든 인간은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 (롬. 3:22)를 통하여 의롭게 된다고 <로마서 3장>에서 밝히고 난 다음 <4장>을 시작하면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아브라함의 믿음일까요?” 저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창세기에서 기록한 그의 전생애를 통해 크게 3단계에 걸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첫째,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창세기 12장>에서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창. 12:1)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이미 ‘지시한’ 것이 아니라, 미래에 ‘지시할 것’ (I will show you) 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히. 11:8)라고 아브라함의 막막한 심경을 묘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땅에 마침내 도착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권능을 그가 온전히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핵심은 ‘자식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 뭇 별을 셀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창. 15:5)고.  그러나 그가 그 약속의 아들 이삭을 얻게 된 것은 부르심을 받은지 25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오늘본문에서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롬. 4:3)고 아브라함이 인내함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고 바울은 지적합니다. 약속하신 하나님을 의심치 않고 끝까지 믿음으로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께 철저하게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에게 백세되어 얻은 아들을 바치라는 명령을 하십니다 (창.22:2). 인간적 눈으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을 그는 어떻게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히. 11:17-19)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는 하나님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생명의 주 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럼으로 그는 순종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설교 전문]

            우리 크리스챤의 관점에 있어서 ‘믿음’이라는 단어만큼 쉬운 듯 하면서도 어려운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무엇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요, 의롭다고 인정함 받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인지에 대해서 우리는 때로 혼돈을 겪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가지 믿음에 대한 확실하고 위로가 되는 진실은 ‘하나님을 향한 참된 믿음’은 결코 시간과 환경에 따라서 바뀌고 변질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왜 신구약 성경은 한결같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을 우리 성도의 믿음의 본으로 정의하고 있는 이유라고 저는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무엇이 진정한 믿음인지 알기를 원합니까?’ ‘무엇이 맹목적인 믿음도, 두마음 품는 믿음도 아니요, 온전한 믿음인지 알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을 진지하게 말씀을 통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여 주신 아브라함의 믿음이 무엇인지?’를 더욱 분명히 깨닫고, 각자의 믿음에 적용할 수 있는 성도 여러분의 복된 삶 되기를 기대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정수를 로마서에서 설명해 나가면서 <롬. 4장>에서 <믿음의 본보기>로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소개합니다. 그렇다면, 이 복음과 아브라함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그것은 사도가 <로마서 1장>을 시작하면서 이렇게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함과 같으니라” (롬. 1:16~17)고 말입니다. 사도는 이와 같이 선포하고 나서, ‘누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된 자이며, 그의 믿음은 과연 어떤 믿음인가?’를 더 치밀한 영적 논리로 설명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가 <롬. 3:19>에 이르기까지 먼저 밝히고자 했던 것은 ‘모든 인간은 의롭지 못하고 죄악 되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 (롬. 3:23)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인간의 죄악된 존재가 어떻게 의롭다 함을 받게 되어 질수 있을까요? 사도는 이것을 <롬. 3:21>에서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롬. 3:21)고 인간의 영적 상황의 대반전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의’입니다. 그리고 사도는 더욱 구체적으로 이 ‘의’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 (롬. 3:22)라고 밝힙니다. 다시 말해, 우리 성도의 모든 의로움의 근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말미암아 가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롬. 3장> 후반부에서 복음의 진수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화목제물로 삼으시고, 그를 믿는 모든 자를 그 피로 씻어 주심 (=죄 용서하심)으로 의롭다고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도는 <롬. 3장>에서 우리 인간이 어떻게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복음의 원리’를 탁월하게 설명하고 나서, 이제 <롬. 4장>에서 그 믿음은 실제적으로 어떤 믿음인지를 구체적인 보기를 들어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사도가 그 믿음의 가장 훌륭한 본보기로써 그 당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랐던 성도들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수천년 전에 살았던 ‘아브라함’을 통해 영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아브라함의 믿음일까요?” 저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창세기에서 묘사하는 그의 전생애를 통해 크게 3단계에 걸쳐서, 그의 믿음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첫째,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먼저 <창세기 12장>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렇게 그에게 지시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창. 12:1-2)라고. 물론 하나님께서 이렇게 성도 여러분을 찾아오셔서 말씀하셨다면 여러분은 무척 기쁘고 영광스럽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나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가겠다”고 여러분은 말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 본문말씀을 살펴보면서 설명한 데로 아브라함의 결단이 결코 간단하지 않는 것은 그가 어떤 상황 가운데서 길을 떠난 것인지를 이해할 때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go to the land that I will show you)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미 지시한 땅’이 아니라 ‘앞으로 지시할 땅’이라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어떤 가야할 목표지점도 알려 주지 않으시고 일단 먼저 떠나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때의 아브라함의 심정이 어떠 했을까를 상상해 봅니다. 흔히하는 말로 ‘황당했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이런 그의 심정을 잘 표현한 것이 <히브리서 11장>의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히. 11:8)라고 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약속받은 땅에 대한 어떤 구체적인 정보를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어떤 지도 한장이나 네이게이션도 없이 어디로 가야 할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길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지금으로부터 4천여년 전의 그 당시에 혈혈단신으로 일가친척 아비집을 떠나 외딴 곳을 여행하거나 그곳에서 정착하고자 시도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볼때, 목숨을 건 무모하기까지 한 위험천만한 행위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길을 떠났고 마침내 그 땅에 도착했다고 성경은 밝히고 있습니다 (창. 12:5). 성도 여러분은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다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어떤 상황이나 여건을 초월하셔서 그를 선하게 인도하시고, 반드시 지시할 땅으로 안전하게 이끄실 하나님임을 그는 신뢰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은 순진한 믿음이요, 맹목적인 믿음이라고 여기십니까? 이때는 과학과 정보가 발달하지 않은 사회였기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만 믿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까? 저는 찬찬히 4천여년 전 아브라함 당시와 2022년 현재와 차이점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시간에 관계없이 의심하는 자의 눈에는 여전히 부정적이고 불가능해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의 눈에는 반드시 이루어지는 말씀으로 받아 드려진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철학과 문학과 과학과 어떠한 테크놀로지가 이것을 바꾸지 못하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권능으로 온우주를 운행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임을 신뢰했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그는 갈바를 알지 못하는 가운데 지시하실 땅을 기대하며 첫발을 내디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믿음”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핵심은 ‘자식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아들 몇 명 주겠다’는 정도가 아니라,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할 것이고)” (창. 12:2) “~ 뭇 별을 셀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창. 15:5)고 그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약속은 아브라함 생전이 아니라, 그가 죽고 긴 세월을 통해 점진적으로 성취되는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단 한명의 아들도 허락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창. 12장>에서 아브라함을 처음 부르셨을 때 그의 나이는 75세였는데, 결국 그가 약속의 아들 이삭을 사라를 통해 얻을 때 그의 나이는 무려 100세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창. 21장). 이런 사실은 결국 하나님은 그에게 약속하신 아들을 25년이라는 길고도 고통스러운 인내의 시간을 통과하고 나서야 허락하셨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약속의 후손을 주시기 전에 이런 지난한 풀무불의 시간을 통과하게 하시는가 하는 것은 어쩌면 아브라함 뿐 아니라, 우리 모든 성도들의 한결같은 아픈 질문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 성도들의 질문에 대한 변함없는 한가지 진실은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믿음으로 인내함으로 그 약속을 기다릴 것을 기대하신다’는 것임을 저는 깨닫게 됩니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하나님은 그 분의 선한 뜻데로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기다림’이라는 혹독한 훈련을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도가 로마서에서 밝히는데로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 5:3-4)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우리 모든 거듭난 성도들의 믿음의 ‘표준’ (the pattern)으로 제시하면서 오늘 본문에서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롬. 4:3)고 인용한 성경이 바로 <창세기 15:6>말씀인 것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무엇을 믿었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의 종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 아니라, 그의 몸에서 날 자식을 통해 그의 상속자로 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곧 약속의 아들을 반드시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 약속의 아들을 통하여 밤하늘에 반짝이는 뭇 별과 같이 수많은 후손을 허락하실 것임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의 나이 99세, 그리고 사라의 나이 89세가 되어 생산 (=임신)이 불가능한 상황임을 알고도 인내함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설명했습니다. 제에게도 이 기다림의 혹독한 훈련은 진행 중입니다. 그러나 믿음만이 이 과정을 인내함으로 통과하며, 또한 승리케 함을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을 뿐 아니라, 인내함으로 이 고통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습니까?

셋째, “하나님께 철저하게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마지막 시험을 하십니다. 백세되어 나은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가서 번제로 바치라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 22:2)고 말입니다. 물론 이와 같은 하나님의 명령은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는 매우 가혹할 뿐 아니라,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명령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하나님의 명령에서 두가지 점 (하나님의 도덕성 & 신실함)이 강하게 충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어떻게 선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죽여 바치라고 명하실수 있는가?’하는 점입니다. 어떻게 선하시고 긍휼이 넘치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죽여서 바치게 하는 몰렉과 같은 가증한 신의 제사를 요구하실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백세가 되어 약속의 아들 이삭을 주시고 나서, 이제와서 어떻게 그 아들을 바치라고 명령하실 수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약속을 어기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여기서 이슈는 ‘만약 이 아들이 죽으면, 이 아들을 통해 약속하신 밤하늘의 별과 같이 많은 후손도 존재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아브라함의 순종에 대해서 심지어 우리 크리스챤들 중에서도 잘못된 평가를 내리기도 합니다. 이런 아브라함의 행위를 ‘비정한 아버지’ 혹은 ‘맹목적 믿음을 소유한 자’라고 말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중요한 한가지 점을 이해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과연 어떤 마음의 동기로 이삭을 바치고자 했던가 하는 점입니다. 다시 한번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 성도들에게 우리 믿음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향한 놀라운 믿음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되는 말씀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히. 11:17-19)라고.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만약 약속의 아들 이삭을 바치게 하셨다면, 그분께서 친히 그 아들을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것을 아브라함은 믿었다는 것입니다. 무엇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런 명령을 하시는지는 그가 비록 잘 이해하지 못했을 찌라고, 그 명하신 하나님은 반드시 아들을 다시 살리시는 생명의 주관자 이심을 그는 믿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아들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다시 살리심으로 결코 ‘헛된 신’들처럼 잔인한 인신제물을 받지도 않으시고, 또한 그 아들을 통해 하신 약속을 파기하는 ‘거짓말쟁이’가 아님을 그는 확신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하나님의 선하심에 근거한 아브라함의 온전한 믿음이 끝까지 그분을 향한 철저한 순종으로 이어지게 했음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았던 것은 그의 아들, 이삭을 순종함으로 드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의 믿음을 증명한 (=인친) 사건인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은 것은 <창. 15:6>에서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과 형편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이라는 아브라함의 ‘순전한 믿음’입니다. 오직 이 믿음을 통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불러 주셨던 것입니다. 이런 아브라함과 같은 순전한 믿음, 모든 상황과 형편을 초월한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승리하고 풍성한 약속의 열매 맺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