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e 26, 2022

“하나님의 은혜” (The Grace of God)

Preacher:
Passage: 고린도전서 (1 Corinthians) 15:10
Service Type:

“하나님의 은혜”

(The Grace of God)

6-26-22

본문말씀: 고린도전서 (1 Corinthians) 15:10

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But by the grace of God I am what I am, and His grace to me was not without effect. No, I worked harder than all of them – yet not I, but the grace of God that was with me.)

[설교 요약]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첫번째 편지를 쓰면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로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자신이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며 모든 사도보다 더 수고하고 힘쓴 것도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라고 고백합니다.

사실 우리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는 실로 바다와 같이 깊고 넓은 그분의 선하심과 사랑의 핵심임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러나 그분의 은혜가 광활한 만큼 우리는 그 은혜를 막연한 종교적 수식어로 취급할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강력하게 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1년후에 고린도 성도들에게 보낸 두번째 편지를 마감하면서 이렇게 의미심장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고후. 12:9)라고.

사도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체화되었음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사도바울에게 넘치는 그리스도의 은혜일까요? 그것은

첫째, ‘바울을 구원하신 은혜’입니다: 먼저 사도 바울이 사도 바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주께서 그를 구원하신 은혜로 가능한 것입니다. 주께서 그를 죄와 사망의 흑암의 권세에서 건지셔서 그리스도의 나라로 옮겨주셨기 때문에 (골. 1:13-14)에 가능한 것입니다.

둘째, ‘모든 사도보다 더 수고하게 하신 은혜’입니다: “~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v.10) 사도는 모든 사도들 보다 더 많이 수고한 것이 자신의 능력과 열심의 결과가 아니라, 주의 은혜임을 깨닫았습니다. 그러기에 더욱 겸손할 수 있었고, 주의 은혜 안에 거할 수 있었습니다.

셋째, ‘육신의 가시를 통한 은혜’입니다: 사도는 주님으로부터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고후. 12:9)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그의 그 고통스런 가시를 없애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것을 통하여 그분의 은혜 안에 거하는 통로로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교만함이나 열등감에 사로잡히지 않고, 오직 주의 은혜 안에서 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의 남은 날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아름다운 입술의 고백으로 날마다 흘러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첫번째 편지를 쓰면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로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자신이 이방의 사도로 택함 받은 것도, 그리고 담대히 복음을 증거하며 모든 사도보다 더 수고하고 힘쓴 것도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이 고백은 사도 바울만의 고백이 아니라고 저는 믿습니다. 이 고백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성령으로 인치셔서 그리스도의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고 구원을 완성시켜 가시는 분이 하나님 아버지이심을 믿는 모든 거듭난 성도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것을 믿습니다. 이 복된 고백이 주님 오시는 날까지 성도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의 삶의 고백이 되고, 입술의 열매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물론 우리 크리스챤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축복된 것인지를 잘 압니다. 그러나, 적지 않은 크리스챤들에게 있어서 문제점은 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은 정말이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구체적이고 체험적인 강력한 능력이라 보다는, 하나의 ‘언어적인 수식어’정도로 취급될 때가 많음을 보게 됩니다. 이를테면, ‘좋으신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함의 막연한 표현으로 붙이는 대표적인 수식어로 ‘은혜’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챤이 기도할 때나, 혹은 찬양할 때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만큼 즐겨 사용하는 말도 드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으리 만큼 크고 놀라운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가 로마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써 구원에서 제외된 자기 동족, 유대인들을 향한 그 완전하신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지혜를 성령의 충만한 계시로 깨닫음으로 이렇게 노래하는 것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롬. 11:33)라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된 <고전 15장>은 소위 <부활장>으로 불릴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확실성과 그 중요성’을 웅대하게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 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 하셨으리라.” (고전. 15:12~13)라고 말입니다. 사도는 <고전 15장>에서 우리 크리스챤이 결코 놓쳐서는 않되는 우리 기독교신앙의 핵심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인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만약 다시 살아 나시지 않으셨다면, 복음의 메시지가 약속하는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 받고, 의롭다 함을 받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모든 약속이 효력이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모든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오실 메시야의 구속의 사역이 성취되는 ‘십자가의 죽음’이 죄와 사단의 권세를 이기고 승리했다는 그 어떤 증거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서 잠 자는 자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일으키심으로 산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시고, 십자가로 영원한 승리를 거두셨다’고 세상만방에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이 부활이 그토록 복되고, 복음의 핵심일진대 사도 바울이 이런 영광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그는 오늘 본문에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가장 위대하게 빛나는 곳은 바로 갈보리 언덕위의 ‘십자가’임을 우리는 복음의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선하신 보배 피를 흘림으로 우리를 대신해 죽으심으로, 그를 믿는 모든 자의 죄를 씻어 주심으로 의롭다고 불러주시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게 하시는 존귀하고 영광스런 은혜를 허락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는 이 땅에 우리를 위하여 보내신 독생하신 그의 아들 안에 속해 있는 영광을 비춰 주시면서, 자신의 영광 가운데 충만한 은혜를 드러내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요한이 선언했듯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는 의미임을 믿습니다.

저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라는 제목의 말씀을 나누면서, 이 방대하고 심오한 바다 같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주제를 더 구체화하고 피부로 느끼기 위해 그의 은혜가 영광 가운데 빛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까?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신 은혜는 무엇입니까? 이런 그리스도의 은혜를 사도 바울은 그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첫번째 편지를 보낸 1여년후에 두번째 그의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이렇게 놀랍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고후. 12:9)라고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이 기억하시듯이 사도는 자신에게 ‘육체의 가시’가 있었음을 회고하고, 그 육체의 가시가 떠나가기를 세번씩이나 간절히 주님께 구했다고 그는 고백합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의 답변은 ‘그래 네가 나를 위해 그토록 충성했으니, 내가 너의 육신의 가시를 없애 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는 것이었습니다 (고후. 12:7-8). 왜 주님은 마치 사도의 간구를 거절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런 뜻밖의 대답을 하시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 지점을 더 곱씹어 봄으로서 무엇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은혜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인지를 이해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사도바울에게 넘치는 그리스도의 은혜일까요? 그것은

첫째, ‘바울을 구원하신 은혜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데로 바울은 과거 하나님을 향한 잘못된 열심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를 심히 핍박하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없애고자 혈안이 되었던 바리새인 청년 사울로 살아갔던 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어느날 그를 알던 사람들에게는 전혀 믿기지 않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고백하는 180도 전혀 새로운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빌.1:21). 그가 이와 같이 ‘이방의 사도’가 되어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놀라운 전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오직 주의 은혜가 아니고는 설명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몸된 성도들을 일망타진하여 처단하고자 다메섹 언덕을 말을 타고 달려가던 사울 청년에게 홀연히 나타나셨습니다. 주님은 정오의 빛 가운데 나타나셔서 자신을 사울에게 나타내시고, 겸손한 ‘작은 자’라는 의미의 바울로 충성스런 주님의 사도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행. 9:4-6)고 주님은 그를 택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크리스챤들이 이 사도행전 본문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만나신 장면을 두고 그를 제자로 삼으신 점을 강조함을 보게 됩니다. 물론, 그를 택하여 이방의 사도로 삼으신 것은 두말할 나위 없는 그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무엇보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주께서 청년 사울을 구원하셨다’는 점이라고 믿습니다. 다시 말해, 유대전통과 잘못된 하나님을 향한 열심 가운데 사단의 권세에서 헤메이다 죽을 수 밖에 없었던 그를 건지셔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 받고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 주신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골. 1:13-14)고 사도는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을 사도 바울 되게 허락하신 것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청년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 받음으로 말미암아 사단 마귀의 흑암의 나라에서 그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 주신 주의 구원의 은혜가 있었기에 사도 바울은 사도 바울로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주의 구원하신 은혜가 없었다면, 바리새인 사울의 회심은 기대할 수 없으며, 더욱이 이방의 사도로서의 삶은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을 택하셔서 흑암의 권세에서 그분의 나라로 옮겨주신 주의 구원의 은혜를 성도 여러분은 더욱 분명히 깨닫고 있습니까?

둘째, ‘모든 사도보다 더 수고하게 하신 은혜입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v.10)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숨김없이 자신이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신약성경의 절반가량에 해당하는 <13권>의 서신서를 집필한 저자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처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나서 그가 순교 당하기까지 20여년 기간동안 총 3차에 걸친 긴 선교여행을 통하여 주의 복음을 증거하고자 수없이 많은 고난과 죽음의 사선을 넘었던 것입니다. 그는 고난의 그 모든 순간을 이렇게 회고합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후. 11:23-27)라고. 그러나, 그가 이것을 숨김없이 우리와 나눔은 자랑코자 함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결코 자신의 자랑이 될 수 없음은 ‘이런 자신의 모든 충성과 목숨을 건 수고’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그는 결코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점을 제가 묵상하다가 자칫 우리 크리스챤이 걸려 넘어지게 되는 심각한 <영적 올무>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교만>입니다. 처음엔 순수하고 겸손하게 주님을 믿고 따르다가, 어느정도 신앙의 연륜이 쌓이고 사람들이 자신을 칭찬하고 주목하게 되면 어느 순간 찾아오는 ‘영적 교만이라는 덫’입니다. 이것이 정확히 지난주 큐티 본문말씀이었던 <사무엘상>에서 보여준 사울 왕의 몰락의 원인인 것입니다. 사울은 처음 하나님께서 자신을 택하여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어 세워주실 때, 겸손함으로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도우심으로 적국들을 무찌르고 왕권이 강해질수록 교만해 갔던 것입니다. 왕권이 강력해지면 질수록 하나님께는 불순종하고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고 인간의 평가를 더욱 두려워하며 인간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교만의 종이 된 것입니다. 이 교만의 덫은 단지 사울 왕에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주의 일을 열심으로 행하고, 의롭고 충성되게 살았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주의 제자들에게 찾아오는 매우 교묘하고 강력한 덫이 바로 <영적 교만>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렇다면 사도는 이 교만의 무서운 덫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었을까요? 이것이 바로 주님의 역설적인 은혜인 것입니다.

셋째, ‘육신의 가시를 통한 은혜입니다: 저는 이것이 앞서 잠시 언급했듯이 사도가 고린도 성도에게 보내는 두번째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고백할 수 있었던 자신의 결론이었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주의 환상과 계시의 충만을 경험하고 셋째 하늘에 이끌려 올라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이한 천상의 낙원을 체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교만하지 않고 자고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고후. 12:1-4). 이러한 그리스도의 은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도 바울이 3번씩 간절하게 자신에게서 떠나기를 위해 주께 구했던 ‘육신의 가시’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사도의 육신의 가시입니까? 성경학자들은 그것을 사도가 가졌던 ‘간질병’, ‘약한 안질로 인한 눈병’ 혹은 ‘외모의 헨디캡’으로 추측합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던지 간에 사도는 이 육신의 연약함이 자신을 늘 찌르는 가시가 되어 고통받았고 그로 인해 주께 그것이 없어지기를 간절히 구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데로 우리 주님은 그의 충성된 제자의 간구를 들어주지 않으시고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 (고후. 12:9a) 뜻밖에도 주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바울의 가시’ 바로 바울이 늘 고통스러워하고, 불편해하고, 부끄러워하고, 얼른 없애 버리기를 원하는 그 가시와 같은 것을 통해 ‘내 은혜’가 넘치게 할 것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주님의 능력은 오히려 우리 성도의 약함을 통하여 온전하여 지게 된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감사한 것은 사도가 이런 주님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육신의 가시는 더이상 부끄러움도 고통스러움도 아니요, 이제는 자신을 교만이라는 덫에 빠지지 않고 주의 충성된 제자로 끝까지 푯대를 향해 달려 갈 수 있도록 자신을 찔러서 영적으로 깨어 있게 지켜주는 넘치는 주님의 은혜임을 그는 깨닫았다는 것 입니다. 이것이 이어지는 사도의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고후. 12:9b)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여러분께 한가지 묻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육신의 가시를 자랑합니까? 그것이 비록 어떤 육체적인 헨디캡이든, 자라온 환경이든, 부끄러운 과거든, 여러분의 삶에서 떠나기를 원하는 그 어떤 것이 되었든 간에 여러분은 이제 주님은 이것을 사용하셔서 그의 은혜의 통로로 사용하고자 하심을 이해하십 (=깨닫으십)니까? 나의 약하고 부끄러운 것을 통하여 주의 강하심과 자랑스러움을 이루시는 주님의 역설은 심히 놀랍습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역설은 주께서 친히 심히 부끄럽고 저주스러운 십자가 위에서 보혈의 피를 흘려 우리를 구원하심으로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십자가로 바꾸신 사건에서 너무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여러분이 자랑스러워하고 만족하는 그것 뿐만 아니라, 부끄러워하고 없어지기를 원하는 그 육신의 가시까지도 주님은 그분의 은혜의 도구로 사용하심을 깨닫으십니까? 그 가시를 통해 영광스럽게 주님의 전능한 능력을 발휘하는 통로로 주께서 사용하실 것을 믿으십니까?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의 남은 삶이 하나님의 은혜로 풍성하여지기를 소망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 주님 오시는 날까지 그 은혜가 넘쳐 흐르기를 소망합니다. 겸손을 가장한 영적 교만도 아니요, 나의 육신의 가시를 부끄러워하고 단지 없애 버리고자 열등감도 아니요, 이 모든 것을 사용하셔서 여러분을 깍아내시고 아름다우신 주님의 형상으로 빗어 나가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풍성한 여러분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이 날마다 넘쳐 흘러서 성도 여러분의 아름다운 입술의 고백이 되길 축원합니다. 아멘.

Topic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