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tember 24, 2023

“나의 증인” (My Witnesses)

Preacher:
Passage: 사도행전 (Acts) 1:8
Service Type:

“나의 증인”

(My Witnesses)

9-24-23

본문말씀: 사도행전 (Acts) 1:8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But you will receive power when the Holy Spirit comes on you; and you will be my witnesses in Jerusalem, and in all Judea and Samaria, and to the ends of the earth.)

[설교 요약]

우리는 지난 시간, 주께서 승천하시면서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v.5)는 말씀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성령으로 침례 받게 될 것’이라는 의미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성령으로 침례를 베푸시는 목적은 오늘 본문에서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주님의 참된 증인’이 되게 하심 입니다. 오직 성령의 충만을 입을 때, 권능을 받아 땅 끝까지 이르러 주의 충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다면 ‘누가 주님의 증인인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 4복음서에서 예수님 가까이 있었던 2부류의 그룹이 있음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그 한 그룹은 ‘군중들’ (multitudes)이고, 다른 한 그룹은 ‘제자들’ (disciples)입니다.

‘군중’은 <’오병이어’사건>처럼 ‘먹거리’를 해결해 준다면, 혹은 ‘육신의 병’을 고쳐 주거나 ‘자신의 바램’에 부합하면 구름 떼처럼 주께로 몰려왔다가, 맞지 않으면 떠나 버리는 자들입니다 (요.6:66). 그러나 ‘제자’는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의 주인’ (요. 6:68)임을 믿기에,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자인 것입니다 (눅. 9:23).

그렇다면, 누가 주님의 증인된 제자일까요?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증인의 조건?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경험적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바라” (요일. 1:1)고 자신과 제자들이 함께 경험한 영원한 생명의 말씀 되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경험’은 증인의 필수적 조건입니다.

둘째) “정직한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4장>에서 유대지도자들이 사도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하지 말라고 경고했을 때,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행. 4:19-20)고 담대히 선포합니다. 증인이 되기 위해선 어떤 위협이 있어도 거짓 없이 ‘정직’하게 증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증인’이라는 단어의 ‘헬라어 원어’는 <마르튀스>로서 ‘순교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심으로” 우리는 권능을 받아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주님의 참된 순교자적 증인의 삶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복된 증인이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는 지난 시간, 주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말씀의 의미를 묵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v.5)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주께서 말씀하신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그때 함께 나누었듯이 ‘성령침례’ (=성령세례)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성령론>에 입각한 ‘신학적 견해’는 매우 다양할 수 있겠으나, 기록된 성경을 통해 분명히 드러난 주님의 성령침례를 약속하신 이유를 우리는 결코 놓치지 말아야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첫째, ‘예수 그리스도만’이 제자들에게 ‘성령으로 침례’를 베푸시는 분이시요(요. 1:26~33), 둘째 성령침례는 오랜 기간동안 ‘구약의 여러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강림의 성취이며 (겔. 36:26-27), 셋째 성령침례를 받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권능을 받아 ‘주님의 참된 증인’ (v.8)이 될 수 있음을 주님은 이 성령으로 침례받는 사건을 통해 밝혀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여기서 우리가 함께 질문해야 할 한가지가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것은 ‘누가 주님의 증인인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가 과연 주께서 ‘너는 나의 증인이다’라고 인정하실 사람인가? 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그리스도의 증인’된 우리 성도의 삶에 대해 살펴봄에 있어서, 먼저 <이 ‘증인이 된다’는 것이 왜 이토록 중요할까?>라고 우리는 자문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믿고 따르는 그의 제자된 우리들을 증인으로 세우시길 기뻐하시고 또한 그 증인이 되기에 합당한 권능도 주시고자 하시는가?”하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주께서 떡 몇 조각으로 굶주린 자들을 먹이셨을 때, 그리고 맹인과 앉은뱅이, 심지어 죽었던 자들을 그 놀라운 권능으로 살리셨을 때 몰려왔던 군중 (=무리)은 수없이 많았지만, 주님의 이름을 증거하고 그분이 걸어가신 삶의 본을 좇아 가고자 하는 제자는 많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또한 주님의 생명의 말씀을 셀 수 없을 만큼 듣고, 그분의 전능하신 도움의 손길을 수없이 경험한 군중은 많지만, 그분이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충성되게 행하고 주께 받은 구원의 은혜를 증거하고자 하는 제자는 너무도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어쩌면 이런 <군중>과 <제자>의 불균형은 2천년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니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그 퍼센트(비율)로 봤을 때 오늘날이 2천년전 초대교회때와 비교되지 않을 만큼 <군중>이 <제자들>을 압도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다시 말해, 오늘 본문말씀을 포함한 <사도행전>이 쓰여졌을 초대교회 당시에 비해 오늘날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참된 주의 증인된 제자들이 적은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군중>와 <제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먼저, ‘군중’ (multitude/crowd)은 <자기의 관심과 이해득실에 따라 맞으면 왔다가, 안 맞으면 떠나가는 자들>이 군중인 것입니다. 먹을 것을 주면 오고, 병 낫게 해주면 오고, 내게 도움이 되면 오는 것 (나의 소원성취를 시켜주면 오는 것)이 군중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상황이 내게 긍정적으로 펼쳐질 때까지는 모여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황이 불리하고 힘들어지면 언제든지 떠나는 것이 또한 군중인 것입니다.

기억하시겠지만, 우리 주님은 자신을 제자로써 따르고자 하는 자들을 향해 이렇게 도전의 말씀을 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눅. 9:23)라고. 주님은 아무나 ‘나의 제자’라고 부르지 않으실 것을 분명히 선언하십니다. 누가 제자라고요?! ‘오직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는 자’를 주님은 <나의 제자다>라고 불러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지점이 ‘군중’과 ‘제자’가 명백히 갈라지는 지점이라 믿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주께서 자신을 <생명의 떡> 곧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고 밝히시고,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요. 6:51)고 그를 따르는 많은 자들을 향해 선언하십니다. 그때 적지 않은 무리들의 반응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들은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요. 6:52)라고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그리고 나서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요. 6:60)라는 말을 남기고는 그들 중에 많은 무리들이 물러가고 두번 다시 주님과 함께 다니지 아니하였음을 요한은 기록합니다 (요. 6:66). 그때 주님은 열 두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십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렇게 주께 대답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요. 6:68)라고 참된 제자의 귀한 고백을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주님을 더 이상 따르지 않고 물러간 많은 무리들과 베드로를 포함한 사도들을 구분 짓는 차이점일까요? 베드로는 고백합니다.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요. 6:69) 그렇습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아들이자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깨닫았다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나는 생명의 떡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육신에 속한 자들은 이것을 단순히 사람의 살을 먹는 것과 같은 기괴한 일로 밖에는 달리 이해할 수 없었지만, 베드로와 제자들은 이것이 육신이 아닌 영적인 의미임을 깨닫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들은 성령의 도우심을 통하여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었고, 더욱 더 깊이 알아 나갔던 것입니다 (마. 16:16).

이제 저는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성도 여러분에게 질문 드렸듯이 “누가 과연 주님의 증인인지?” “누가 과연 주께서 ‘너는 나의 증인이다’라고 인정해 주실 자인지?”를 함께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그리스도 증인의 조건?” (The condition of the witnesses of Christ?)이라고 제목을 붙여 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합당한 조건일까요? 그것은

첫째, “경험적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제가 먼저 ‘증인’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았는데, <어떤 사실을 증명하는 사람> (표준국어 대사전)이라고 간단히 정의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먼저 하나의 법적인 용어임을 알 수 있는데, 만약에 여러분이 법정에 증인으로 서 보신 경험이 있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법관은 증언하기에 앞서 이렇게 선서하게 합니다.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거짓말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를 맹세합니다”라고. 이렇게 선서하고 나서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이 무엇인지를 숨김이나 보탬이 없이 목격한 그대로를 진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증인의 법적 역할이요, 의무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일반적 의미에서 증인이 되는 첫걸음은 어떤 ‘사건/사람’과 관련된 나의 구체적인 경험이 존재해야만 증인으로서 자격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만약 내 자신이 그 어떤 사람을 전혀 알지 못하고, 만난 적도 없다면, 나는 처음부터 그 사람과 관련된 증인으로서 부적격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신지를 알아가고, 배워가는 핵심적인 말씀인 <사복음서>와 신약성경의 대부분의 저자들은 예수님과 3년반 동안 공생애를 경험했던 사도들 혹은 매우 특별한 경우이지만, 부활하신 주님의 영을 만났던 사도 바울과 같은 자였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실제로 예수님을 눈으로 보았고, 손으로 만졌고, 함께 인격적인 교제를 경험했던 주의 제자들입니다. 한마디로 ‘주님의 증인’으로써 자격이 합당한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 1서>를 시작하면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바라” (요일. 1:1)고 사도요한이 고백하는 의미입니다. 생명의 말씀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도 요한과 여러 제자들이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주목하고, 손으로 만진 그리스도께 대한 생생한 경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 각자는 ‘나는 예수님을 눈으로 보았는가, 손으로 만져 봤는가, 그분을 인격적으로 경험한 적이 있는가?’ 묻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없이는 주의 증인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정직한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이제 그렇다면, 아마 여러분의 마음에 이런 질문을 하고 싶은 분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지만, 솔직히 주님을 저의 육신의 눈으로 보지도 손으로 만진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저는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자격이 있는 것입니까?”라고 말입니다. 만약 여러분은 이 질문을 받았다면, 어떻게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저는 이 질문에 대한 가장 훌륭한 대답의 하나는 사도 베드로가 소아시아에 여러 흩어져 있던 성도들을 향한 그의 첫번째 편지에서 잘 답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벧전. 1:8,9)라고. 여기서 사도 베드로는 주님의 증인이 될 수 있는 중요한 근거는 믿음임을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여러분과 제가 육신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지 못했다 할지라도, 손으로 만지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그분의 영광을 볼 수 있고, 생명의 말씀을 깨닫아 주를 영접함으로 구원을 받아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노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정확하게 부활하신 주께서 의심하는 도마에게 하신 말씀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다시 말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베드로와 여러 제자들이 이를 증거했을 때, “내가 그의 손의 못자국을 보며 ~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요. 20:25)고 이를 의심하는 도마를 1주일가량 지난 후 만나주신 주님이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요. 20:29)라고.

물론 주님을 보고도 믿지 않은 유대종교지도자들과 주님을 만났던 수없이 많은 무리들보다는 보고서라도 믿은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주님께서 어떤 자를 진실로 복되다고 하십니까? 바로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믿는 우리들입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자부심과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비록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보지 못했다고 우리의 믿음이 약한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영의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진리를 깨닫게 될 때 주님은 우리를 향해 복되다고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내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정직하고 신실하게 증거하는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5장>을 보면, 유대 종교의 최고 지도자들인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베드로와 사도들을 불러서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행. 4:18)고 위협했을 때,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행. 4:19-20)고 담대히 선포합니다. 물론 베드로와 요한은 유대지도자들의 말이 단순한 엄포만이 아니라, 실제로 혹독한 고난과 죽음까지도 감수해야 하는 위협임을 잘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듣고, 보고, 깨닫은 생명의 주님을 정직하고 충성되게 사실대로 증거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님을 여러분에게 어떤 불이익이 오고, 신상에 심각한 위협을 감수하더라도 진실하고 충성되게 증거할 삶의 준비가 되었습니까?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은 주님과의 경험뿐 아니라 주님의 증인으로서 세상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진실만을 증거하고자 하는 용기와 충성된 자세를 가질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셋째,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증인’이라는 단어의 ‘헬라어 원어’는 <마르튀스>로서 ‘순교자’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초대교회 당시 예수님을 믿고 따랐던 ‘주의 제자들’은 또한 ‘주의 증인들’로 불렸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은 것입니다. 진정한 주님의 제자는 그분을 믿음으로 보고 듣고 경험한 그대로 증거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증인’이 된다는 것은 그 당시 초대교회에서는 ‘순교자’를 의미했음을 우리는 ‘증인’이라는 헬라어 원어, ‘마르튀스’에서 잘 이해할 수입니다. 로마 황제, ‘가이사가 신이다’라는 거짓고백을 거부하고,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고백의 증거는 초대교회 당시 순교 당함을 뜻했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증인’(witness)은 곧 ‘순교자’(martyr)를 뜻했던 것입니다.

제가 지난 8월에 ‘순교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함께 나누며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과연 죽음으로써 신앙을 지키는 순교자가 될 것인지 아닌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주님은 그의 제자된 우리 모두에게 ‘순교자적 삶을 살라’고 도전하고 격려하심을 저는 믿습니다. 왜냐하면, 앞서도 살펴본 것과 같이 <순교자적 삶>이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는 삶’이요,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이런 복된 순교적 삶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순교자적 삶은 결코 여러분의 의지와 노력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영,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서만 가능한 삶인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 15:26)라고 주님은 우리를 도우실 보혜사 성령님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친히 증거하시고, 그의 권능으로 우리가 참된 주의 증인으로 열매 맺고 승리하도록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2천년전 주의 제자들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이렇게 주님의 제자된 우리를 향해 이렇게 약속하시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v.8) 이 신실하신 성령님과 함께 그리스도의 참된 증인의 축복된 삶을 함께 누리나가시지 않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