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tember 17, 2023

“성령으로 침례를” (Be Baptized With The Holy Spirit)

Preacher:
Passage: 사도행전 (Acts) 1:5
Service Type:

“성령으로 침례를”

(Be Baptized With The Holy Spirit)

9-17-23

본문말씀: 사도행전 (Acts) 1:5

5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For John baptized with water, but in a few days you will be baptized with the Holy Spirit.)

[설교 요약]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승천하시면서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행.1:5)고 제자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의 주제가 되는 ‘성령침례’ (=성령세례/ the baptism with the Spirit)는 ‘성령충만’ (The filled with the Spirit)과 더불어 신학적으로 중요하면서도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키는 것도 사실입니다.

먼저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에 있어서 크게 <3가지 신학적 견해>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A)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서로 다르다”는 견해: ‘성령세례’를 ‘중생’ (regeneration)으로 이해함 (빌리 그레함 목사와 다수의 한국 장로교파 지지)

B)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본질적으로 같다”는 견해: ‘성령세례’는 구원받은 성도에게 주어지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라고 표현. 이 ‘성령세례’는 ‘성도가 원하면 믿음으로 취할 수 있다’고 주장함 (오순절파 지지)

C)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는 견해: ‘성령세례’는 <B의 견해>와 같이 구원받은 성도에게 주어지지만, ‘성도 마음데로 취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베푸시는 특별한 성령의 임재하심’으로 이해함 (로이드 존스 목사와 청교도파 지지)

그렇다면, 무엇이 주께서 말씀하시는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다는 뜻일까요? 그것은

첫째, “성령세례는 예수님만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1장>에서 침례자 요한은 “나는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 그 (그리스도)가 곧 성령으로 침례주는 자 인줄 알라” (요. 1:26,33)라고 예수님 만이 ‘성령으로 침례주실 분’이심을 증거했습니다.

둘째, “성령세례는 선지자들의 약속의 성취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의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장차 성령을 충만하게 부으셔서 그의 백성들에게 새 영과 부드러운 마음을 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 (렘. 31:31-33; 겔. 36:26-27)이 오순절 성령강림에서 출발한 성령세례의 역사입니다.

셋째, “오직 성령이 임하심으로 참된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왜 우리 성도가 성령 침례를 받아야 하는지?’를 <8절>에서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v.7-8)라고. 성령의 능력만이 참된 주의 증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성령의 임재하심으로 영적 부흥과 충만한 은혜를 누리는 우리 아포슬 공동체 되길 기도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는 지난 시간 <사도행전 1장 4-5절> 본문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중심주제는 주께서 승천하시며 제자들에게 명하심과 동시에 약속하시는 말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v.4)는 것입니다. 바로 몇 날이 못되어 오순절에 불의 혀같이 충만하게 주실 <성령의 임재하심>의 사건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 주 말씀에서 한가지 빠진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5절>의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는 말씀입니다. 그 빠진 이유는 이 말씀의 의미는 잠깐 몇 마디로 나누고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오늘 별도로 다룰만큼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저는 믿기 때문입니다. 과연 무엇이 주께서 제자들에게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고 선포하신 뜻일까요? 오늘 말씀의 의미를 함께 묵상하고 살펴 나가면서, 주의 약속하신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 축복된 은혜’가 성도 여러분 각자의 삶과 저희 교회 위에 충만히 역사하시길 기대합니다.

제가 2주전에 사도행전 강해를 시작하면서, 앞으로 사도행전 설교를 너무 자세히 다루지 않고, 큰 그림에서 생략할 것은 생략하고 진행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제가 이렇게 오늘까지 한절 한절 천천히 설교하는지 궁금해하는 성도도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1장에서는 그렇게 간단히 넘어갈 수 없을 만큼의 중요한 주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말씀이 진행되어 가면서 빨리 나가는 부분도 있을 것임을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의 주제가 되는 ‘성령 침례’ (=성령세례/ the baptism with the Spirit)와 ‘성령 충만’ (the filled with Spirit)은 우리 기독교에 있어서 신학적으로 중요한 주제가 되지만, 한편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키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점은 크게 볼 때, “성령은 누구신가?” 라는 신학 주제인 <성령론> (pneumatology)에 있어서 오늘 본문말씀을 특별히 신학성경 말씀에 언급되어 있는 ‘성령침례’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는 우리 성도의 성화와 관련해서도 중요한 논점 (=이슈)가 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성령침례’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더 나아가서 ‘성령침례’와 ‘성령충만’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는 성경말씀을 이해하는 정도나 신학적인 관점에 따라 교단이나 개인별로 다양한 견해가 우리 프로테스탄트 교회 안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시간은 교리공부 시간은 아니지만, 앞서 제가 말씀드렸듯이 ‘성령은 누구신가?’ 라는 질문은 단순한 신학적 혹은 교리적 관심사일 뿐 아니라, 실제 우리 성도들의 삶에 있어서 절대적인 영적 영향력을 미친다고 저는 믿기에 저는 좀더 집중적으로 ‘성령의 사역’을 살펴보기 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성도의 신앙성장을 가져오는데 있어서 ‘성령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그로인하여 성령을 향한 더 깊은 신뢰와 순종’은 신실한 성도들이 추구하는 <개인과 신앙공동체의 진정한 영적 부흥>을 누려 나가는 열쇠가 된다고 저는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말씀이 성도 여러분의 신앙정도에 따라서 다소 어렵고 딱딱하게 느껴지는 분들도 있겠으나, 히브리서기자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우유만 먹을 것이 아니라, 단단한 음식도 먹을 것’을 (히. 5:11-12) 도전한 것처럼 영적으로 튼튼한 성인으로 자라나기 위해선, 오늘 본문과 같은 말씀도 우리 신앙성장에 필요함을 이해하시고 좀 정신을 집중해서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먼저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에 있어서 크게 <3가지 신학적 견해>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것은

먼저)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서로 다르다”는 견해입니다: 이런 성령님의 사역에 대한 견해는 무엇보다도 ‘성령세례’를 ‘중생’ (regeneration)과 같은 의미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생이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접하게 될 때, 내 죄가 사함 받게 됨으로 성령에 의해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 3:5). 따라서 이런 ‘중생’ 곧 ‘거듭남’이나 ‘영적 출생’으로 표현될 수 있는 ‘한 사람이 구원받는 순간’이 ‘성령세례’라고 했을 때, 이것은 오직 그가 구원받게 될 때 한번만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비해, 성령충만은 그 사람의 영적 상태에 따라 여러 번 반복해서 충만해지기도 하고 침체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전혀 다른 개념이라고 이해하는 견해인데, 빌리 그레함 목사나 한국의 상당수 장로교단에 속한 신학자들이 이 견해를 지지합니다.

다음으로)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본질적으로 같다”는 견해입니다: 이런 견해의 핵심은 성령세례나 성령충만은 둘 다 이미 성령으로 거듭난 구원받은 성도에게서 일어나는 성령의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앞에서 본 것처럼 ‘성령세례’를 ‘사람이 처음 구원받을 때 일어나는 성령사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은 소위 ‘오순절 성령운동’라고도 하고, ‘케리스메틱 무브먼트’ (은사운동)을 추구하는 크리스챤들에 의해 주로 강조되어 왔습니다. 이들은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거의 같은 개념 (=현상)으로 이해하고, 이런 ‘성령세례’ (혹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게 될 때 ‘성령충만’받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이런 성령의 능력을 받았다는 확실한 증거로 ‘방언’이나 ‘병 고침’ 혹은 ‘예언’과 같은 ‘성령의 은사’ (the gifts of The Spirit)를 받는 것을 예로 듭니다. 그러나, 제가 지난 시간에 언급했듯이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충만’은 유사한 점도 있겠으나, 성령충만을 통해 맺히는 ‘성령의 열매’ (갈. 5:22,23)나 ‘내적 충만’ (요. 4:7-14)과 ‘성령의 은사’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생각했을 때, 어떤 특정한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는 것이 마치 성령의 충만을 받은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위험한 성령이해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번째로)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는 견해입니다: 먼저 이 신학적 견해를 지지하는 말씀의 하나인 <사도행전1장 4~8절>에서 주님은 ‘성령세례’를 약속하셨는데, 만약 첫번째 견해처럼 성령세례가 중생, 곧 거듭남이라면 사도행전 1장의 주님의 12사도를 포함한 모든 제자들은 그때까지 구원받지 못했다는 결론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복음서의 기록에서 볼 때, 모순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이 견해의 요점은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1번째 견해와는 달리 구원받은 성도에게 임한다는 점에서는 2번째 견해와 같은 관점을 가집니다.

그러나, ‘성령세례가 무엇인가?’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이해에 있어서는 2번째 견해와도 큰 차이를 나타냅니다. 그 한 예로서, ‘오순절 성령파’로 대표되는 2번째 견해는 ‘성령세례’는 성도가 원하면 언제나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성경의 약속데로 구하고 받은 줄로 믿으라’고 이들은 주장합니다. 그러나, 세번째 견해를 지지하는 ‘정통적인 청교도교도들’과 ‘마르틴 존스’목사와 같은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일부는 이런 성령세례는 우리가 마음데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이와 같은 성령세례는 전적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뜻대로 행하시는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 성령의 세례를 사모하고 추구해야 한다고 이들은 말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세례가 개인과 교회 공동체에 진정한 부흥을 가져오는 성령의 능력이시기에, 이런 성령의 임재를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비해, 성령충만은 우리가 구함으로 받을 수 있고, 또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직 충분히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다 다루진 못했지만, 대략적으로 현재 기독교회 안에서 이해되고 있는 성령의 임재에 대한 몇 가지 주요 견해들을 알아보았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 주께서 약속하신 ‘성령세례’를 어떻게 신학적으로 잘 이해하느냐 도 중요하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주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고 약속하신 성령세례 곧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는 의미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일 것입니다. 저는 이점을 함께 살펴봄으로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무엇이 주께서 말씀하시는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다는 뜻일까요? 그것은

첫째, “성령세례는 예수님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한복음을 읽어보면, <요한복음1장>이 시작되면서 침례자 요한은 자신이 혹시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 (=그리스도)가 아닌가 하고 묻는 사람들에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요. 1:20)고 분명히 밝힙니다. 그리고 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 그 (그리스도)가 곧 성령으로 침례주는 자 인줄 알라” (요. 1:26,33)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에서도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실 것이요 ~” (마. 3:11,12)라고 침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을 향한 핵심적인 <사역과 권세>가 ‘성령으로 침례’주시는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 요한과 마태는 침례 요한의 증언을 통해 침례 요한, 자신이 ‘물로 침례를 주는 자’라면 예수 그리스도는 ‘장차 성령으로 침례를 베푸실 분’이심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쫓아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모든 죄에서 건져 내시고, 우리를 구원할 구세주(메시야)의 사역을 완성하시고, 이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성령으로 세례 받게 될 것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예수님이 성령세례를 베푸신다는 것은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을 보내신다는 뜻입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 16:7)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승천하셔서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이제 자신을 대신하여 우리를 도우실 보혜사 성령을 보내셔서 그분의 사역인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요. 16:8)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은 이런 성령세례를 주관하시는 분이 바로 자신임을 거듭 확인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 “성령세례는 선지자들의 약속의 성취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서 함께 살펴본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면서 이제 몇 날이 못되어 받게 될 성령세례는 주께서 십자가에 고난 받기 전날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성령 (요.14~16장)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 14:26)고 말입니다.

한편, 이 성령님은 이미 구약성경에 하나님의 많은 종들을 통해 보내실 것을 약속하신 영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고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에스겔 36:26~27) 그렇습니다. 구약성경을 통해서 수없이 많은 주님의 종들의 입술을 통해서 오실 메시야를 예언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약속하셨듯이, 그 약속의 기간만큼이나 긴 기간을 통해 약속하신 것이 바로 초대교회에 임한 ‘성령세례’의 약속인 것입니다. 바로 새 마음을 주셔서 우리 육신의 굳은 마음을 제거하시고, 또 새 영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율법을 자원하는 심령과 즐거움으로 행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딱딱하게 돌처럼 굳은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하나님의 율법을 행하고자 하는 혁명적인 변화는 결코 우리의 노력이나 결심에서 가능하게 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오랜 역사를 통해 주실 것이라 약속하신 성령을 부어 주심, 곧 충만한 성령의 부어 주심을 통하여 성취된 것입니다.

셋째, “오직 성령이 임하심으로 참된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사도행전1장>의 내용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께서 아직 승천을 앞두고 제자들과 함께 계셨을 때, 그 제자중에 한 명이 이렇게 주님께 질문합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v.6)라고. 이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v.7-8)라고.

여기서 제자들과 예수님의 주된 관심이 달랐음을 보게 됩니다. 제자들의 가장 우선적인 관심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 (=이스라엘의 독립)이었지만, 주님의 관심은 ‘제자들이 성령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왜 주님은 제자들이 성령세례 곧 충만한 성령의 임재를 그 무엇보다도 관심 가지셨고, 또한 가장 우선적으로 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오직 성령이 임하셔야만, 제자들이 권능을 받아 참된 주의 증인이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실 때 제자들이 권능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충성된 증인이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만이 ‘성령과 불로 침례’를 주시는 권능의 주님이시요, 이런 성령세례는 구약의 긴 역사를 통해 약속하신 불의 혀 같은 성령의 임재하심이요, 주의 제자를 참된 그의 증인으로 세워 주시는 주님의 권세요 은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교단이나 개인마다 서로 다른 신학적 논쟁을 할 것이 아니요, 성경에서 분명히 밝혀 주시는 ‘성령으로 침례’ 받는 것이 무엇임을 우선적으로 이해하고, 주께서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님의 그 권능과 은혜를 함께 누려 나가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의 삶 가운데, 그리고 우리 아포슬 공동체 위에 이런 성령으로 침례를 풍성히 누리는 주의 은혜가 넘치시길 소망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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