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tember 10, 2023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The Promise Of The Father)

Preacher:
Passage: 사도행전 (Acts) 1:4~5
Service Type: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The Promise Of The Father)

9-10-23

본문말씀: 사도행전 (Acts) 1:4~5

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On one occasion, He gave them this command: “Do not leave Jerusalem, but wait for the gift my Father promised, which you have heard me speak about)

5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For John baptized with water, but in a few days you will be baptized with the Holy Spirit.)

[설교 요약]

지난 주 ‘사도행전’ 서론에 해당하는 첫 시간에 이어 오늘 두번째 시간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말씀에서 주님은 승천하시면서 이렇게 분부하십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v.4)라고. 여기서 질문은,

  • 무엇을 기다리라는 것일까?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곧 ‘성령충만’입니다
  • 왜 기다리라는 것일까? 왜냐하면 성령충만 받지 못하면 주의 증인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성령충만’의 약속은 이스라엘의 긴 역사를 통해 선포되었는데, 예레미야을 통해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겠다)” (렘. 31:33)고 하시고, 에스겔의 입술을 통해 “내 영을 너희 속에 두고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겔. 36:27)라고 ‘성령충만’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은 그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 질것을 다음과 같이 알려 주십니다.

  • 언제: ‘몇 날이 못되어’ (임박한 미래)
  • 어디서: ‘예루살렘에서’ (지금 있는 그곳)
  • 어떻게: ‘성령으로 침례 받음으로’ (‘성령충만’ 받음으로)

그렇다면, 왜 주님은 약속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실까요? 그것은

첫째, ‘순서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들은 지금 당장 세계 만방으로 흩어져서 내 증인이 되어라”라고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아직 증인의 삶을 감당할 상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직 ‘성령충만’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세상으로 먼저 약속을 기다려야 했던 것입니다 (v.4).

둘째. ‘성령충만을 받아야만 증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지는 말씀에서 왜 성령충만을 받아야만 하는지를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1:8)고. <오직 성령이 임하셔야>만 ‘다이나마이트’와 같은 권능을 받아 주의 증인이 될 수 있음을 주님은 밝혀 주십니다.

셋째, ‘성령충만은 명령이 아니라 선물이기 때문 입니다: 사도 바울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엡. 5:18)고 에베소 성도들에게 도전합니다. 그 이유는 ‘성령충만’은 단순히 명령의 차원을 너머선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풍성한 삶의 통로가 되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성령의 충만하신 은혜로 죄를 이기고, 인격의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주의 증인의 삶을 능력으로 감당해 나가는 아포슬 공동체되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지난 주 ‘사도행전’ 서론에 해당하는 첫 시간에 이어 오늘 두번째 시간입니다. 우리가 앞시간에 살펴본 것과 같이 누가복음의 저자인 누가는 <누가복음>에 이어 두번째로 <사도행전>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상은 동일한 인물, ‘데오빌로’라는 이방인 고위관리로서 이 글을 통해 그의 믿음을 더 확고히 하고, 궁극적으로는 우리 교회공동체가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 성령의 능력으로 땅 끝까지 주의 복음을 증거하는 주의 증인이 될 수 있음을 밝힌 것이 이 글의 목적이라고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먼저 쓴 글, <누가복음>과 이어지는 <사도행전>을 연결하면서 한가지 사건을 겹치게 (overlap) 진술합니다. 다시 말해, ‘누가복음’의 제일 마지막 부분이요, ‘사도행전’의 제일 첫 부분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40일동안 제자들에게 보이시고 승천하시면서 명령하시고 약속하시는 장면입니다 (눅. 24:46~53). 이것이 오늘 사도행전 본문을 포함하여 <1장 4~11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앞으로 진행될 사도행전의 전체내용에서 근거가 되는 말씀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무엇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이요, 어떻게 이 약속을 받을 수 있는지를 함께 이해해가는 복된 시간 되시길 기대합니다.

우리는 먼저 사도행전을 큰 그림에서 잠시 살펴볼 때, 이 사도행전이 전개되는 기간은 1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보이시고 승천하시며 분부하신 이후 마지막장, 28장에서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입성하여 셋집에서 2년동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장면에 이르기까지 대략 30여년의 시간을 누가는 언급하고 있음을 우리는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기독교회 2천년 역사의 관점에서 ‘30년’이라는 것은 매우 짧은 기간일수도 있겠지만, 이 기간동안 사도행전에서 언급된 초대교회의 기록은 상당히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도행전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초대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또한 어떻게 놀라운 부흥 가운데 급속도로 이방세계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될 수 있었는지? 에 대한 중요한 단초를 제공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저자 누가가 밝힌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명하시고” (v.2)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1차적으로 주께서 승천하실 때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말씀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 28:19,20)는 주님의 명령이 그 대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주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으로 주신 <영적 영향력을 포괄적으로 의미>하는 것으로 많은 신학자들은 해석합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침례 요한에게 침례 받으셨을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주께 임하셨고, 제자들과 삼년 반의 공생애 기간과 십자가의 죽으시고, 부활하여 승천하시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충만하신 성령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영으로 충만하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끼치신 영적 영향력 위에 약속하신 성령을 주셔서 영의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시고, 세상 끝까지 나아가 주의 증인이 되게 할 것을 명령하신 사실> 이 모두가 ‘성령으로 명하셨다’는 뜻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와 같은 주님의 명하심은 그의 제자들에게 장차 땅 끝까지 이르러 주의 충성된 증인이 되도록 이끄시는 미션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말씀에서 유의해서 보아야 하는 것은 주께서 이미 <2절>에서 이와 같이 주의 제자들에게 미션을 명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4절>에서 다시 또 다른 한가지 사항을 구체적으로 명령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v.4)는 것입니다. ‘왜 제자들은 기다려야 ’ 하는 것이며, 또한 ‘무엇을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먼저 무엇을 기다려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이 오늘 말씀의 제목인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분명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구체적으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일까요?’ 이것은 <약속의 성령님>이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행하실 복되신 사역/능력>인 것입니다.

바로 구약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의 종들을 통하여 장차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충만하신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제자들은 성령님을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선 이스라엘의 긴 역사를 통해 그들의 죄악과 불순종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은 먼저 심판과 징계를 선언하셨을 뿐 아니라, 구원과 회복의 말씀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약속의 말씀을 보자면, <예레미야 31장>인데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집과 유다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렘. 31:31~33)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 날이 이른 후에 하나님 아버지는 그의 백성의 마음 가운데 ‘자신의 법(=율법)’을 새겨 넣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이 질문에 가장 잘 설명해주는 말씀의 하나가 <에스겔 36장>의 말씀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감동케 하셔서 이렇게 또한 약속하십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고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겔. 36:26~27)라고.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그의 자녀들의 마음 속에 새길 수 있다는 것일까요? 그것은 ‘새마음을 주심으로’ 가능한 것이요, 이 새마음은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을 우리 마음 속에 두심으로 육신의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시킴으로 그의 선하신 법을 우리 마음에 새길 수 있음을 하나님은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말씀이 구약의 대표적인 ‘성령을 약속’하고 ‘성령으로 행하실 중심되는 사역’에 관련한 말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구약의 긴 역사를 통해 약속하신 것은 하나님의 영, 성령님인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바로의 압제 아래 신음하던 이스라엘을 이끌어 내시며,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그분의 백성’이 되기 위한 <계약/언약>을 체결하고, 소를 잡아 그 피로서 ‘이 언약을 이스라엘민족이 지키면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복을 받고, 만약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아 끊어지게 될 것’을 서약식을 통해 맹세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한마디로 <옛언약> (The Covenant)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이스라엘민족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마음을 굳게 하고 하나님과 체결한 언약을 거역함으로써 범죄하고 그분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입니다. 바로 약속하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때까지 말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경에 예언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어린 양’ (The Lamb of God) 곧 ‘화목제물’ (the propitiation)로 온전히 십자가에서 드려지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그를 믿는 모든 자를 살리는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해야 하는 것은 앞서도 살펴본 것과 같이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많은 선지자를 통해 “약속하신 성령님을 언제 보내시는가?”하는 점입니다. “과연 하나님은 언제 그의 영, 성령을 보내시는 것일까요?” 물론, 여러분과 저는 주께서 승천하시고 나서 2천여년이 지난 시대를 살아가기에 그 때를 이미 압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을 주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 그 당시 제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볼 때,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그러나 감사한 것은 오늘날 우리 크리스챤 뿐만이 아니라, 그 당시 제자들도 그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도록 주님은 분명하게 오늘 말씀에서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첫째, 공간적으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그곳에 머물면서 기다리라는 것이고, 둘째, 시간적으로 <몇 날이 못되어> 받게 된다는 것이며, 셋째, 그 약속은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약속은 ‘성령으로 침례’받는 것이요, 이것이 며칠이 못되어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이 합심하여 기도했을 때 불의 혀같이 임하신 ‘성령충만’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주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구약의 긴 역사를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을 다시 환기시키시면서, 언제 어디서 어떻게 받게 될 것을 명확히 밝혀 주시는 것입니다. 이 약속은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바로 제자들이 지금 거하고 있는 예루살렘에서, 성령의 충만한 임하심으로 성취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 이상 더 분명하고 희망적인 약속이 더 있을까요? 왜냐하면, 그 약속의 성령님을 수만리 떨어진 먼 곳에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현재 살아가는 예루살렘에서 주실 뿐 아니라,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은 임박한 미래에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왜 주님은 제자들에게 약속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는지?를 살펴봄으로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기 원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첫째, ‘순서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너희들은 지금 당장 세계 만방으로 흩어져서 내 증인이 되어라”라고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을까요?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지금 그런 상태가 아닙니다. 제자들의 지금 상태에서는 결코 주님의 충성된 증인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의 수제자 베드로조차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주께서 잡히시기 하루 전날 ‘주님과 함께 죽겠습니다!’라고 충성 맹세하던 그가 불과 하루도 지나지 않아 새벽닭이 울기전에 3번씩 주님을 저주하고 부인했지 않습니까?! 이것이 적나라하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못한 주의 제자들의 인간적인 모습이었습니다.

만약 성도 여러분과 제가 성령의 충만을 받지 못한다면, 우리 또한 ‘나는 베드로보다는 나아!’라고 결코 큰소리 칠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은 이미 아셨습니다. 이제 자신의 부활을 목격하고 나서 그의 제자들은 이제 기쁨과 확신 가운데 그의 증인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러나 주님은 또한 아셨습니다. 이런 그들의 용기와 확신조차도 만약 하나님아버지의 약속을 받지 못한다면 그리 오래가지 못하여 실패로 돌아갈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v.4) 주님은 그의 충성된 증인이 되는 첫걸음은 우리의 ‘충성맹세’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약속을 받는 것임을 제자들이 깨닫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제자들이 충성된 주의 증인이 되기 위해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약속을 기도 가운데 기다려야 했던 것입니다.

둘째. ‘성령충만을 받아야만 증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하신 바라고요?! 그렇습니다. 바로 ‘성령의 충만하신 임하심’입니다. 이것이 앞서 살펴본 것처럼, 수천년 구약의 역사를 통하여 강조하여 약속하신 바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성도 여러분이 제가 언급했던 구약 선지자의 예언과 약속에서 한가지 깨우치셨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그 약속은 장차 이 땅에 오실 ‘메시야’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신 것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임박한 십자가의 죽으심을 앞두시고 제자들에게 보혜사 성령님을 약속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 16:7)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과연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으신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고, 살아나셔서 40일간 제자들에게 자신을 보이시고 나서 이제 승천하시면서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8절>에서 이렇게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1:8)고 말입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셔야>만 우리는 권능을 받고, 그의 참된 증인이 된다고 주님은 밝혀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권능’ (power)이라는 말의 헬라어 원어는 ‘두나미스’인데 이 단어에서 영어의 ‘다이나마이트’가 파생된 것입니다. 마치 ‘산을 파괴시키는 다이나마이트’와 같은 ‘힘’과 ‘파워’가 여기서 말하는 ‘권능’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권능’이 바로 ‘성령충만을 통해 받게 되는 권능’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약속하신 성령충만을 추구하십니까? 그리고 그 권능을 받으셨습니까?

셋째, ‘성령충만은 명령이 아니라 선물이기 때문 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요한복음>을 시작하면서, 우리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접하게 된다는 것이 어떤 축복된 존재가 되는 것인지를 이렇게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2). 사도 요한은 이 놀라운 진술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써 누리게 되는 영적 은혜와 복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권세’ (power)라는 한 단어로 강력하게 웅변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우리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주시는 이 약속의 말씀은 단순한 명령의 차원이기 이전에 ‘선물’이자 ‘축복의 권세’로 주신 말씀임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4복음서에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모든 축복된 삶은 오직 ‘성령님의 충만함’을 통하여 비로소 성취되는 것임을 저는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호세아 선지자의 입술을 통해 우상숭배라는 깊은 영적 간음에 빠져 있던 북 이스라엘백성을 향해 이렇게 통렬하게 그들의 상태를 고발하십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호. 4:6) 여기서 ‘지식’이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을 때 우리 인간은 망할 수밖에 없다는 영적 실존을 하나님은 고발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날 수 있을까요? 물론,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성경공부하고, 오늘처럼 설교말씀을 듣고 우리 각자의 삶 속에 적용하는 이 모두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과 함께 결코 놓쳐서는 안되는 한가지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결론적으로 그들에게 도전하고 격려하듯이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엡. 5:18)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게 될 때, ‘흩어져 있는 반짝이는 진주알들이 하나의 실로 꿰어짐’으로 비로소 그 가치를 발휘하듯 우리 크리스챤들도 성령충만을 받게 될 때 그 성령의 열매를 통해 진정한 믿음을 작동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좇아 행하는 주의 제자로서 발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성령충만을 사모하십니까? 성령충만을 기다리십니까? 먼저 주의 증인으로 살아가기를 추구하기 전에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그 어떤 것보다 먼저 성령충만을 받으라고 명하십니다. 아니 성령충만을 선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왜냐하면, 이 하나님의 영이시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게 될 때, 우리는 죄를 이기고, 풍성한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권능을 받아 땅 끝까지 이르러 비로소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충만은 결코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성령충만은 우리 구원받은 성도는, 주님을 따르는 모든 그분의 제자는 반드시 받아야 하는 필수사항인 것입니다. ‘의무도 책임’도 아닌 ‘특권과 권세’로 주신 선물인 것입니다. 우리 아포슬교회에 속한 성도 한사람 한사람 가운데 이런 충만한 성령의 권능으로 여러분이 살아가고 있는 그곳에서, 그리고 여러분의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복된 주님의 제자 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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