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tember 3, 2023

“성령으로 명하시고” (Given Commandments Though The Spirit)

Preacher:
Passage: 사도행전 (Acts) 1:1~3
Service Type:

“성령으로 명하시고”

(Given Commandments Though The Spirit)

10-3-23

본문말씀: 사도행전 (Acts) 1:1~3

1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 하였노라

3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를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설교 요약]

이번주부터 <사도행전>을 강해설교 시작하는데, 오늘은 사도행전의 <서론>에 해당하는 시간입니다.

먼저 이 책의 ‘저자’는 ‘<누가>입니다. 그런데, 누가의 직업은 ‘의사’ (doctor)였으며, 한편 ‘역사학자’이기도 했습니다. 누가는 신약성경 가운데 ‘누가복음’과 함께 ‘사도행전’의 저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라 근거로서는

  • 동일한 저자가 동일한 수신자 (데오빌로)에게 그의 글을 보내고 있음을 밝힘 (눅.1:3/행.1:1)
  • 두 글 모두에 의학용어가 40여 군데 사용된다는 점 (행.3:7, 9:18, 13:11, 28:8)
  • 저자는 사도 바울과 함께 선교여행에 동참한 동역자라는 점 (행. 16~28장)

이런 점들을 종합해 볼 때, 전문적인 의학지식이 있고 두 글을 모두 작성한 사도 바울의 선교여행의 동역자는 누가였을 것임에 대해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동의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이

  • ‘쓰여진 시기’는 <A.D 62년 전후>이고
  • ‘장소’는 <로마감옥>으로 추정합니다. 그리고
  • ‘수신자’는 <데오빌로> (그 당시 이방인 고위관리)였고
  • ‘기록 목적’은 <그리스도의 영, 성령의 충만케 하심으로서 그의 몸된 교회를 부흥케 하고, 땅끝까지 이르러 주의 증인이 되게 하실 것을 밝히심>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한편, 사도행전은 ‘내용면에서 크게 두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 전반부는 <1~12장>까지로서 “사도 베드로의 사역”이 그 핵심 내용이고,
  • 후반부는 <13~28장>으로서 “사도 바울의 사역”이 중심을 이룹니다. 여기서 누가는 정확히 대칭적인 형태로 두사도의 행적의 유사성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일차적으로 사도 “바울의 사도권을 옹호”하고, 궁극적으로는 베드로의 유대인 전도사역에서, 바울의 사역으로 상징화되는 “이방인 선교사역으로 복음이 확장”해 감을 그는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앞으로 진행되는 사도행전 말씀을 어떤 관점에서 보아야 할까요? 그것은 <사도행전에 가득찬 복음전파의 역사는 바로 ‘교회공동체’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시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이 주체가 되신다는 관점>일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 성령님으로 인하여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그리고 아포슬 공동체가 함께 <사도행전 29장>을 ‘현재진행형’으로 써나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저는 이번주부터 성도 여러분과 함께 <사도행전>에 대한 강해설교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물론 우리 기독교의 ‘추수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와 같은 주요 절기나 시기적으로 나눌 필요가 있는 주제에 대해서는 사도행전 설교를 행하는 사이사이에 또한 나눌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도 아시듯이 <사도행전>은 총 28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신약성경에서 보자면 비교적 긴 말씀의 하나입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이번 <강해설교>에 있어서 ‘사도행전’의 내용을 세분화하여 오랜 시간 설교하기보다는, 큰 그림에서 사도행전의 주요한 사건과 그 주제와 연관된 내용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아무쪼록 이번에 시작하는 <사도행전 강해설교>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 보이시고, 승천하시면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초대교회의 역사를 이해하고, 우리 아포슬교회도 이와 같은 <사도행전>의 역사에 동참하기를 기대합니다. 다시 말해, 주께서 승천하시면서 약속의 ‘성령을 기다리라’ 명하신 후 몇 날이 못되어 마가의 다락방에서 모여 합심으로 기도하던 제자들 위에 불의 혀같은 성령충만의 역사가 임했고, 이것이 기독교회 2천년 역사의 태동을 알렸고, 이어지는 강력한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구원받는 자가 교회 안에 흥왕케 되는 놀라운 사건으로 가득찬 총28장의 사도행전에 이어서 우리 각자와 교회도 이제 ‘사도행전 29장’을 써 내려갈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사도행전>의 첫 메시지를 시작하면서 <서론>에 해당하는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무엇보다도 사도행전은 여러 신학자나 신실한 성도들이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이라고 한마디로 정의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은 그만큼 그 첫 시작에서부터 그 마지막까지 성령의 충만케 하심이 주의 제자들과 그 공동체 가운데 강력하게 역사하셔서 이끄심이 그 내용을 이루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제 사도행전의 개괄적인 면을 살펴보자면, 먼저 이 책의 저자는 <누가>입니다. 누가는 그 직업이 ‘의사’ (doctor)였으며, 한편 ‘역사학자’이기도 했습니다. 누가는 신약성경 가운데 ‘누가복음’과 함께 ‘사도행전’의 저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거기에는 몇 가지 근거가 있는데 <첫째>는 ‘누가복음’에 보면 말씀이 처음 시작하면서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다” (눅. 1:3,4)고 누가복음의 수신자는 <데오빌로>라는 사람임을 저자는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저자가 또한 ‘사도행전’을 시작하면서 동일한 ‘데오빌로’를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자는 사도행전을 시작하면서 오늘 읽어 본 것처럼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 (행.1:1a)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보듯이 저자는 동일한 ‘데오빌로’라는 특정인에게 보낼 목적으로 그의 두번째 글인 ‘사도행전’을 쓰고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 사도행전은 먼저 쓰여진 <누가복음>에서 구체적으로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행.1:1,2)고 말한 그 연후에, 이어지는 사건들의 기록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일한 저자가 동일한 수신자에게 연속된 두편의 글을 보낸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또 <두번째>근거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사용된 ‘술어’가 상당부분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저자 누가는 의사였다고 조금 전에 말씀드렸는데, 이 사도행전에서 여러 번 헬라어의 ‘의학용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3:7, 9:18, 33, 13:11). 그런데 이런 의학용어들이 누가복음의 단어들과 40여군데나 공통되게 사용된다고 신학자들은 지적하고 있는데, 이것은 의학적 전문지식을 가진 의사 출신이었던 누가가 두 글을 작성했을 가능성을 더욱 높여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번째>는 저자 자신이 바울의 동역자임을 ‘우리’라는 용어를 여러 번 사용하여 밝히고 있는데 (16:10-17, 20:5-15, 21:1-18, 27&28:16), 이것은 저자가 사도 바울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바울의 전도여행에 함께 했던 동역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곧 바울의 <2 & 3차 전도여행>과 <예루살렘 입성>, 그리고 <바울의 로마호송>에 참여했고, 더욱이 의학적인 전문지식이 있는 동역자였다는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은 그 당시 누가 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본서 사도행전이 누가에 의한 기록이란 사실에 대해서 사도 요한의 제자였던 초대교회 지도자 <폴리갑>대주교, 폴리갑의 제자인 <이레나우스>, 역사가 <유세비우스>등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바입니다.

다음으로 기록장소와 연대에 대해 살펴보면, 장소는 <로마 옥중>이고 그 시기는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있던 기간에 해당하는 대략 <A.D 62년>전후인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리고 수신자와 사도행전의 <기록목적>에 대해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수신자는 이미 앞에서 언급했듯이 ‘하나님의 친구’ 혹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는 뜻을 가진 <데오빌로>라는 사람인데, 누가가 ‘누가복음’을 시작하면서 그에게 <각하>라는 존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로 보건데 ‘데오빌로’는 그 당시 사도행전에 언급된 <벨릭스 총독>이나 <베스도>와 같이 비슷한 동급의 이방인 고위관리로서 그의 복음사역을 후원한 인물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행. 24:3, 26:25).

한편 사도행전의 ‘기록 목적’은 1차적으로 ‘수신자인 데오빌로의 신앙을 더욱 확고히 하고자 함이요, 궁극적으로는 ‘사도행전’을 통하여 <교회의 역사는 성령으로 교회 안에 강력히 내주하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임을 증거하고자 함>입니다. 그럼으로 이것을 통해 그리스도의 영, 성령으로서 구약에서부터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에게 예언으로 주신 ‘구원의 편만한 역사’, 곧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은 이스라엘민족을 너머서서 이제 모든 이방인들에게 충만하게 퍼져 나가 증거되어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모든 구원받을 자들을 부르신다>는 것이 누가가 이 사도행전을 통해 밝히고자 하는 목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10:9-48, 11:18).

이제 오늘 본문말씀에 대해 살펴보면, 누가는 이렇게 복음의 말씀을 시작합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v.1-2)라고. 저는 여기서 한가지 부분에 주목하게 되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라고 누가는 진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것은 1차적으로 주께서 승천하실 때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말씀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 28:19,20)는 주님의 명령이 그 대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주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으로 주신 영적 영향력을 포괄적으로 의미하는 것으로 많은 신학자들은 해석합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침례 요한에게 침례 받으셨을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주께 임하셨고, 십자가의 죽으시고, 부활하여 승천하시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충만하신 성령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영으로 충만하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끼치신 영적 영향력 위에 약속하신 성령을 주셔서 영의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시고, 세상 끝까지 나아가 주의 증인이 되게 할 것을 명령하신 사실> 이 모두가 ‘성령으로 명하셨다’는 뜻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으로 불려진다고 한 것이 바로 그런 의미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에 드러난 사도들의 행전은 곧 성령의 강력한 이끄심이요, 사도행전의 핵심주제가 되는 <교회>의 놀라운 부흥의 역사 또한 성령의 주도적이고 강력한 도우심이 없다면 상상조차 힘들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내용상에 있어서 한가지 눈 여겨 볼 점은 사도행전은 크게 2부분으로 나누어지게 되는데, 그 전반부는 <1~12장>이고, 후반부는 <13~28장>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나누는 근거로서, 그 전반부는 사도 ‘베드로의 사역’ 곧 ‘이스라엘 민족들’을 대상으로 한 사역이 그 핵심 내용이고, 후반부는 사도 ‘바울의 사역’ 곧 ‘이방민족들’을 대상으로 한 사역이 중심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사도행전에는 사도 베드로와 바울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도들의 행적에 대해서는 언급되어 있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사도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사역했었다는 정도로 언급되고, 야고보 사도는 순교했다는 것이 그에 대한 기록의 전부이고, 그 이외의 제자들은 언급은 전무합니다. 따라서 이 글을 ‘사도행전’이라고 불리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찌되었건 사도행전의 내용구성에 있어서 누가는 베드로와 바울 두 사도의 행적을 교대로 배치할 뿐 아니라, 그들이 행한 행적을 놀라울 만큼 대칭적으로 비교하여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3장>에서 사도 베드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날때부터 앉은뱅이인 사람’을 고친 반면 (3:1~10), <14장>에 사도 바울은 ‘루스드라’라는 지역에서 또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을 고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4:8~18). 또한 베드로의 그림자만 덮여도 사람이 낫게 되는 기적이 있는가 하면 (5:15~16),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만 환자에게 얹어도 낫게 되는 이적이 있었습니다 (13:45). 더 나아가 베드로가 죽었던 ‘다비다’ (=도르가)를 살린 것에 대비시켜서(9:36~41), 바울은 죽은 유두고를 살린 사건을 누가는 대칭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20:9~12). 그 중심이유는 바울의 사도권을 옹호하고 증명하고자 함이며, 더 나아가 베드로가 복음사역을 유대민족을 대상으로 했다면, 바울은 유대민족을 너머서서 이방민족을 대상으로 확장해 갔음을 이와 같은 두가지 대조적인 내용을 통해 강조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사도행전> 후반부인 13~28장에서, 사도 바울이 본격적인 사역을 행하는 내용에서는 저자 누가도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그가 사도 바울과 동역자로서 함께 선교사역에 동참했기에 주어를 ‘그들’이라고 서술하지 않고 ‘우리’라는 1인칭을 사용함으로서 누가 자신도 이 사도행전의 역사의 주역이자 증인의 한사람임을 간접적으로 주장(표현)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사도행전의 서론에 해당하는 말씀을 통해서, 앞으로 이 사도행전을 어떤 관점에서 볼 것인지를 생각하며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기 원합니다. 이것은 이 글에 등장하는 어떤 사람이 되었건, 그가 사도 베드로가 되었건 사도 바울이 되었건 관계없이, 그 인물이 대단하고 위대한 행적을 했다는 기록이 아니라, 그 한사람 한사람을 능력으로 이끌고, 그들이 함께 모여 시작된 ‘교회공동체’를 이끄시는 분은 교회의 머리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시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이시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성령은 그리스도 예수의 영이시기에 그 사역의 중심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하는 것’이며,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하심이 성령을 통해 역사하심으로 복음이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편만하게 증거되는 ‘현재진행형’의 성령행전 역사임을 누가는 사도행전을 통해 누누히 강조하고 있음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종들을 통하여 수천년 동안 예언하신 그대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될 때 죄 용서함을 받고 구원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된 교회라는 축복된 영적 공동체의 일원이 된 것입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그의 영 성령을 통하여 함께 주의 몸된 우리 아포슬교회 성도들이 함께 성장하고 자라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 주신 아들과 딸의 특권을 발휘하고 복음전파의 명령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이 우리 각자에게 그리고 우리 아포슬 공동체에게 주는 ‘위로와 소망’이자 ‘미션과 도전’임을 믿습니다. 바로 우리는 지금, 함께 <사도행전 29장>을 성령 충만함으로 써 내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사도행전 29장>을 함께 쓸 준비가 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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