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ust 27, 2023

“내 잔이 넘치나이다” (My Cup Overflows)

Preacher:
Passage: 시편 (Psalms) 23:5
Service Type:

“내 잔이 넘치나이다”

(My Cup Overflows)

8-27-23

본문말씀: 시편 (Psalms) 23:5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Surely goodness and love will follow me all the days of my life, and I will dwell in the house of the Lord forever.)

[설교 요약]

다윗의 <시. 23편>말씀은 수천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성도의 마음에 잔잔한 감동과 깊은 영혼의 각성을 일깨웁니다. 저는 오늘 다윗이 자신의 선한 목자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만족과 기쁨에 겨워 “내 잔이 넘치나이다”(v.5)고 고백한 그 의미를 함께 묵상하기 원합니다.

이 시편23편은 ‘다윗이 노년에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황망히 도피하던 시절에 지은 시’로 추정합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성경 전체에서도 대표적으로 아름답고 충만한 기쁨과 평화를 노래한 다윗의 시가 도리어 그의 극심한 고난 한가운데서 지은 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물론, 그것은 목자되신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순전한 신뢰와 사랑일 것입니다. 그러나, 시편23편을 묵상하면 할수록 그것이 출발점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다윗의 믿음 이전에 다윗을 다윗되게 한 하나님의 은혜임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것이 시편 23편을 강력하게 꿰뚫고 흐르는 주제요, 다윗이 ‘내 잔이 넘치나이다’고 고백하는 핵심일 것입니다. 곧 ‘선한 목자되신 하나님 아버지의 부족함이 없으신 돌보심의 은혜인 것입니다.

바로 이 선한 목자되신 하나님의 사랑과 임재가 평생에 그를 따르고 계심을 다윗은 그 인생의 처절한 사망의 골짜기를 통과하면서 놀랍도록 깨닫았던 것입니다.

이 상황을 초월하여 신실하게 그를 따르셨던 하나님의 권능의 은혜를 깨닫았기에 다윗은 더 이상 절망하지 않았고, “내가 여호와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v.6)고 선한 목자의 품 안에 안긴 한 마리 양으로서 자신의 행복을 노래하며 이 시를 마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다윗이 오늘 시편23편에서 고백한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인가요?’ 그것은

  • ‘풍성한 채워주심’ 입니다 (v.2)
  • ‘영혼의 안식’ 입니다 (v.3)
  • ‘보호하심과 상 베푸심’ 입니다 (v.4~5)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의 평생의 삶을 통해 임하시는 선한 목자되신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의 손길을 영의 눈을 떠 깨닫을 수 있고, 감사로 고백함으로 다윗과 같이 ‘내 잔이 넘치나이다’는 기쁨과 즐거움의 복된 삶을 누려 나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저는 오늘 성도 여러분과 <행복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다시 말해, ‘기쁨과 즐거움’의 삶인 것입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 약속하신 우리 주님의 가장 크신 축복은 충만한 기쁨과 즐거움임을 믿습니다. 물론 이 기쁨과 즐거움은 먼저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자녀가 되어 구원받은 자에게 주어지는 최상의 열매로 주어지는 삶인 것입니다. 오늘 <시편 23편>의 본문말씀은 <시편 150편> 가운데서도 성도 여러분도 잘 아시는 것처럼 가장 아름답고 영감에 충만하다고 일컬어지는 대표적인 시편말씀의 하나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23:1)로 시작하는 다윗의 <시. 23편>말씀은 수천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성도의 영혼과 마음을 강력하게 휘어잡고 흔들어 깨웁니다. 왜냐하면 이 찬양의 노래에서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다윗의 순전한 믿음과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니 우리를 구원하실 뿐 아니라, 날마다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되신 신실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깊고 강력하게 이 시편은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선한 목자의 품에 안기어 참된 안정감과 기쁨에 충만한 한마리 양’이 되어 하나님 아버지를 더욱 사랑하고, 신뢰함으로 날마다 기쁨과 감사의 잔이 넘쳐나는 복된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사실 다윗이 지은 오늘 본문 <시.23편>의 작성연대를 두고 신학자들 사이에서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정확히 다윗이 오늘 본문 23편을 언제 지은지를 특정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적지 않은 신학자들이 의견을 모으는 이 시편 23편의 작성시기는 다윗이 고백하는 것처럼 선한 목자의 보호와 인도 아래 한점 고통과 생명의 위협없이 푸른 초장에서 풀을 뜯는 양의 모습과 같은 평화로운 상황에서 다윗이 이 시를 지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시기는 도리어 <그가 노년에 그의 아들 중 한명인 왕자 압살롬이 자신을 반역하여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고자 했던, 그의 인생에서 가장 위급한 때>에 지은 시라고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추측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다윗의 경우는 몇 주전에도 살펴본 것처럼 젊은 날 사울 왕의 시기와 질투로 인하여 죽음의 사선을 수없이 넘는 고난의 시기를 거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 그가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허락하신 수없이 많은 영광과 존귀의 삶을 긴 세월 넘치게 누리고 난 이후, 갑작스럽게 찾아온 이와 같은 왕자의 반란은 심히 당황스럽고 고통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젊은 날 사울 왕을 피해 도피했던 시기와도 비교할 수 없는 더 깊은 치욕이기에, 노년에 그가 아들의 반란을 피해 도피하던 이 시기는 따라서 그의 전 인생에 있어서 절대절명의 위기의 순간이라 해도 전혀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이런 절망스럽고, 마치 그의 전 인생의 공든 탑이 무너지는 순간과도 같은 이런 고난의 한 복판을 거치면서 다윗은 그 영혼 깊은 곳에서 너무나도 맑고 깨끗한 생명수 물을 마실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젊은 날, 양무리를 충성스럽게 지키며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신뢰했듯이, 아니 어쩌면 그때보다도 더욱 선한 목자되신 하나님 아버지의 지켜 주심과 동행하심을 뼈저리게, 그리고 그 깊은 영혼의 밑바닥에서부터 깨닫고, 한점 거짓 없이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사랑을 고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어떻게 다윗은 그의 인생의 가장 어두운 고난의 골짜기 한가운데세서 절망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참된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사랑을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어떻게 다윗은 그토록 감사할 수도, 기뻐할 수도, 희망을 가질 수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놀랍도록 이해해 나가고 전적인 신뢰함으로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그 무엇보다도 다윗의 한결 같은 <하나님을 향한 전적 신뢰>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분명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런 다윗의 순전한 믿음도 결국 다윗을 지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로보건데, 다윗의 믿음이 그를 지켜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다윗을 지켜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다윗을 다윗 되게 했던 그의 하나님을 향한 그 뜨거운 믿음의 원천은 사실 하나님 자신의 다윗을 향한 ‘용서와 사랑’ 그리고 ‘의롭게 하심과 풍족히 채워 주시는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더 깊이 경험하면 할수록 깨닫게 된 진리인 것입니다. <로마서4장>에서 사도 바울이 밝혔듯이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 바로, 다윗의 행복한 고백’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롬. 4:6).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을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롬. 4:7,8/ 시. 32:1,2)라고. 다윗은 용서받은 자신의 은혜를 노해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회개함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때 죄 없다고 용서해 주시고, 주홍 같은 붉은 죄를 흰 눈같이 씻어 주시는 그분의 사랑에 감격하여 <시. 32편>에서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시. 32:2)라고 기뻐 노래했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렇게 주께 죄 사함 받고, 의롭다고 여기심을 받은 자신의 행복이 너무도 크기에 그는 이렇게 그 찬양을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 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찌어다” (시. 32:11)라고. 이 고백은 결코 자신이 흠이 없고 잘나서 가 아니요, 오직 하나님께서 그 많은 자신의 허물과 죄를 씻어 주심으로 죄사함 받게 되었고, 정직히 자신의 죄를 고백했을 때 의롭다고 불러 주시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그는 자격 없는 자가 누리는 기쁨과 행복에 겨워 크게 소리쳐 주님을 찬양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처럼 죄와 허물에 용서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받은 성도들, 곧 의인들을 향해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라고 의롭게 된 성도들과 함께 연합하여 이 좋으신 주님을 찬양할 것을 목소리 높여 권고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시점에서 한가지 중요한 질문을 여러분과 해 보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다윗 한사람에게만 이런 감격스럽고 복된 삶을 허락하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에게만 죄 용서하여 주시는 사랑과 의롭다고 불러 주시는 칭의의 은혜를 주시는 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다윗 한 사람에게만 주시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은 아니라는 것을 잘 이해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모든 택한 자녀들에게 그 은혜의 단비를 차별없이, 부족함 없이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왜 우리에게는 다윗에게서 보게 되는 이런 감격과 기쁨의 고백이 없는 것인가요? 그것은 우리 각자가 주께 ‘받은 복을 세어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 각자가 하나님께 간구한 그 수많은 간구의 제목들을 주께서 신실하게 응답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쁨은 쉽게 잊어버리고 (잠시요) 끝없는 사건사고에 대한 하나님의 도우심 만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우리 모두는 조용히 내 평생을 통해 나와 함께하시고 넘치게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끝없으신 은혜를 되돌아보고, 헤아려보는 마음의 여유가 없고 영적 눈을 상실한 때문은 아닐까요?!

이 점을 생각할 때, 우리 크리스챤의 불행의 시작은 그 어떤 외부로부터 오는 상황 (조건/형편)이 아니라, 바로 우리 각자의 내부로부터 시작됨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의 은혜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다윗이 깨닫고 누렸던 그 하나님 아버지의 신실하신 돌보심과 동행하심의 은혜를 놓친다는 것입니다. 이점이 오늘 본문, <시편 23편>을 통해 우리 각자가 깨닫아 나가고, 배워 나가고 도전 받아야 할 핵심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결코 다윗 한사람에게만 ‘선한 목자’가 아니시요, 하나님의 자녀된 여러분과 저에게도 동일한 ‘선한 목자’되신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점을 이해하셨다면, 오늘 제목과 같이 우리는 어떻게 ‘내 잔이 넘치나이다’는 기쁨과 감사의 삶을 살수 있을까요? 저는 우리 각자가 ‘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주시는 기쁨과 감격을 어떻게 누릴 것인가에 있어서 오늘 <시편 23편>본문에서 특별히 한 절을 주목합니다. 그것은 오늘 시편의 마지막 절인 <6절>입니다. 다윗은 이 깊은 영감과 감격의 찬송을 이렇게 마감하고 있습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라고. 여기서 다윗은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게 될 것’을 소망하고 또한 다짐하며 이 시를 끝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는 것은 무슨 상태를 뜻하는 것일까요? 어떤 신학자는 이것은 ‘다윗이 앞서 고백한 것처럼 과거의 하나님께서 베푸신 부족함이 없는 은혜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는 상태는 ‘미래에 하나님과 영원토록 함께 할 상태’라고 해석합니다. 쉽게 말해, 우리 성도가 육신의 옷을 벗고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가서 그분과 함께 영원토록 누리게 되는 동거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해석에 많은 크리스챤들이 공감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크리스챤 장례식에 가면 가장 많이 읽혀지고 낭독되는 대표적인 말씀의 하나가 <시편 23편>이요, 그중에서도 마지막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다윗의 이 고백은 과거와 미래의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현재에서 미래 곧 영원으로 이어지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이해합니다. 바로 ‘내가 선한 목자되신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하는 그 때는 그것이 과거가 되었든, 현재가 되었든 또한 미래가 되었든 상관없이 영원으로 이어지는 여호와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영적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다윗이 그 어떤 상황과 형편 가운데서도 이렇게 자신이 여호와의 집에 영원토록 거하는 영의 충만한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이 오늘 <본문 5절>의 “내 잔이 넘치나이다”는 고백의 중심되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우리 각자는 이런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를 누리고 있는지를 다윗의 고백한 내용을 중심을 잠시 살펴보면서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기 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일까요? 먼저 <시편 23편>에서 다윗이 고백한 선한 목자되신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는 <풍성한 채워주심>입니다. 다윗의 표현대로 말한다면,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은혜)” (v.2)인 것입니다. 이것은 광야의 이스라엘민족에게 아침에는 만나로 저녁에는 메추라기로 날마다 임하셨던 주님의 공급하심과 같이, 우리 각자에게 그 필요를 따라 풍성한 채워 주시는 “일용할 양식의 은혜”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영혼의 안식>입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며,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은혜)” (v.3)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함 받은 자가 누리는 복중의 복입니다. 잠언서 기자의 고백과 같이 세상의 무진장한 부귀와 영예와 쾌락을 누리면서도 늘 불안과 염려에 사로잡힌 자, 곧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지만, 의롭다고 불리는 자가 사자처럼 담대한 것은 주께서 여러분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붙드시기 때문입니다 (잠. 28:1). 그 뿐 아니라, 주의 넘치는 은혜는 <보호하심과 상 베푸심>입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여러분의 내면만을 의롭게 지켜 주실 뿐만 아니라, 더욱 적극적으로 외부로부터의 악한 자의 공격에서 우리를 지켜 주시고, 더 나아가 원수 앞에서 성도 여러분을 존귀하게 높여 주시는 상을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그 어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닌다 할찌라도 아버지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여러분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더 나아가 원수들 앞에서 기름을 발라 주심으로 성도 여러분에게 영광스러운 상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한 목자되신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입니다. 다윗을 기쁨과 만족, 감사와 찬송으로 그 영혼의 잔이 넘쳐 흐르게 했던 기쁨의 원천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에게 임하신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여러분은 깨닫으십니까? 기억하고 고백하십니까? 여러분들에겐 그런 기억이 없다구요? 과연 그럴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동안 여러분의 삶의 여정 가운데 때를 따라 도우시는 선한 목자되신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더욱 깨닫고, 고백하고 누려 나갈 수 있는 복된 여러분의 삶 사시길 소망합니다. 잠언서에 보면, 이스라엘의 ‘아굴’이라는 사람은 이런 지혜에 충만한 간구를 주께 드립니다. 그것은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잠. 30:7-9)라고. 진정한 복은 부귀도 아니요, 가난도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깨닫고 충만히 누리는 자의 삶인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삶을 관통하는 핵심이요, 오늘 그가 ‘내 잔이 넘치나이다’고 고백한 진정한 이유일 것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성도 여러분의 평생에 정녕 따라다님으로, 여러분을 이끄시고 때로는 징계도 하시고, 마침내 여러분의 잠자는 영혼을 흔들어 깨워서 그분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는 장성한 인격으로 성장케 하시고, 그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거함으로 날마다 그 기쁨에 넘치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