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ust 20, 2023

“안식할 때” (A Sabbath-Rest)

Preacher:
Passage: 히브리서 (Hebrews) 4:9~11
Service Type:

“안식할 때”

(A Sabbath-Rest)

8-20-23

본문말씀: 히브리서 (Hebrews) 4:9~11

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함이라

[설교 요약]

            히브리서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하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선지자보다도, 천사보다도, 모세나 여호수아보다도, 그리고 아론보다도 더 나은 사역자요 크신 대제사장이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선언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포함된 <히. 3:1~4:13>내용은 그 ‘소주제’가 <예수 그리스도는 모세나 여호수아보다 우월하심>이고, 그 우월하심의 핵심은 ‘하나님의 안식을 주실 수 있는 권세와 능력’임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안식하다’는 말은 ‘히브리’ 원어로 <쇠바트>이고, 영어로는 ‘rest’로써 ‘쉬다’ ‘안식하다’ 혹은 ‘휴식하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리고 “네가 ~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창. 3:19)라는 말씀 때문에, (땀 흘려) <일하는 것>이 <안식>의 반대라고 오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처음 창조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할 뿐만 아니라, 모든 창조만물을 다스리고 보존할 미션’을 명령하셨습니다 (창. 1:28). 천지만물을 다스리고 보존하는 것은 실로 이마에 땀이 흘러야 가능한 노동의 미션이지만, 이것을 축복으로 주셨다는 것은 <안식과 일>이 반대가 아닌 것입니다.

이제 어떻게 우리는 이 안식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그것은

먼저) “믿음으로써” 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그 놀라운 권능과 구속의 능력을 경험했음에도 그분을 믿지 못함으로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히. 3:18~19) 고.

다음은) 순종을 통해” 입니다: 한편 순종하지 않은 자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순종은 믿음의 열매이자 결과입니다.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히. 4:6) 라고.

마지막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만이 그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안식 안으로 담대히 나아가게 우리를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 그러므로 우리가 ~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 4:14,16)

바라기는 ‘아직 안식할 때가 남아 있을 때’에 주님의 의로우신 옷을 입고 성령의 충만하신 도우심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 참된 안식을 누려 나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안식을 약속하십니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면, 성경이 처음 시작하는 <창세기 2장>을 시작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나서, 하나님 자신이 먼저 안식하셨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을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창.2:2)라고. 성경에 언급된 개념 가운데서도 이 안식이라는 개념은 ‘구원’이라는 개념처럼 우리 크리스챤의 삶에 있어서 핵심적임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은혜와 축복의 대표적인 개념의 하나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한편 그 의미는 쉽게 이해할 수 없을만큼 깊고 넓은 개념인 것도 사실입니다. 바라기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약속하신 축복된 안식의 은혜를 성도 여러분의 평생의 삶 가운데 점점 더 풍성히 누려 나갈수 있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절에서 보면, 히브리서기자는 과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민족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건져내셔서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거하게 하셨을 때 그의 종 여호수아 때에도 그들이 안식을 누리지 못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v.8)라고 말입니다. 기자는 약속의 땅, 가나안 땅으로 이스라엘민족을 이끌고 들어간 민족의 지도자 ‘여호수아’조차도 그들에게 안식을 줄 수 없었음을 먼저 환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 대신 하나님은 그 후에 <다른 날>을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른 날’은 무슨 날일까요? 그 날은 바로 ‘안식을 누릴 날’ 곧, 약속하신 하나님의 온전한 안식에 들어가는 날’인 것입니다. 그 안식은 무엇일까요?

먼저 오늘 본문에서 의미하는 안식의 의미를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히브리서에서의 말씀의 전개과정을 좀더 자세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히브리서의 주제는 <그 어느 누구의 직분이나 사역보다 더 나은 사역을 수행하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선지자보다도, 천사보다도, 모세나 여호수아보다 더 나은 사역자이며, 또한 대제사장 아론보다 크시고 더 나은 대제사장이심을 히브리서기자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큰 그림에서 봤을 때, 오늘 본문은 <히. 3:1~4:13>내용에서 그 ‘소주제’가 <예수 그리스도는 모세나 여호수아보다 우월하심>이라고 요약되는 내용에 포함되는 말씀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한편 앞장 <히. 3장>은 그 주제가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인데, 대제사장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모세보다도 더욱 충성되고 영광 받으실 만한 ‘하나님의 온 집을 맡은 그분의 아들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온 집을 맡은 그분의 <충성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안식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만’ 온전한 안식을 이룰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사실 <히. 3장>에서 보면, 모세와 함께 출애굽한 이스라엘백성들은 불행하게도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일으켰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그 이유는 그들이 광야에서 40년동안 마음을 강퍅하게 하여 항상 미혹된 마음으로 범죄함으로 하나님을 진노케 했다는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노하여 맹세하시길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시편 95:11/히. 3:11)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수천년 전에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그의 백성 삼으신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마음을 강퍅케 하여 순종치 않음으로 불행히도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하나님 집의 사환인 모세와 그의 후계자 여호수아조차도 이 안식을 그들에게 주지 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의 불신과 불순종 뿐만 아니라, 그들의 죄를 사하여 줄 죄사함의 권세가 모세와 여호수아에게는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안식은 무엇?’이며, ‘어떻게 우리가 이 안식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안식에 대한 사전적 의미를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안식하다’는 말은 ‘히브리’ 원어로 <쇠바트>이고, 영어로는 ‘rest’로써 일반적으로 ‘쉬다’ ‘안식하다’ 혹은 ‘휴식하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리고 성구사전에서 히브리어 <쇠바트>는 “안식일”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일주일의 일곱째날로써 예배와 안식을 위해 구별되어진 날” (출.20:8, 신 5:14)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안식한다’고 하면, 마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창세기3장>에서 “네가 ~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창. 3:19)라는 말씀에서 우리 인간이 노동을 하고, 이마에 땀에 흐르는 것이 마치 인간 (아담)의 범죄한 결과라고 잘못 인식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미 <창. 1장>에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나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창. 1:28)고 축복과 동시에 명령으로 이와 같은 말씀을 주신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하나님은 첫 인간 아담을 처음 창조하시고 ‘땅을 정복하고, 모든 창조물들을 다스리고 보존하는 이마에 땀이 나야만 가능한 ‘노동의 미션’을 축복으로써 주신 것입니다. 그럼으로 흔히 말하듯 ‘일 (노동)’은 ‘안식’과 반대의 개념이 아니라, ‘일’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느냐에 따라서 축복이 되기도 하고, 저주가 되기도 함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이제 어떻게 우리는 이 안식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그것은

먼저) 믿음으로써”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히. 3:18~19) 성도 여러분도 잘 아시는 것처럼,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민족만큼 하나님의 권능과 구속의 능력을 한꺼번에 누린 백성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이와 같이 그들이 믿지 못한 것이 하나님 잘못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믿음’은 내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많이 받았다고 자동적으로 생기는 것도 아니라, 나에게 이런 은혜를 주신 분이 누구인지에 대한 깨닫음과 각성의 문제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나에게 구원의 은혜를 허락하실 뿐 아니라, 날마다 그분의 폭포수 같은 자비하심으로 부어 주시는 분이 하나님 아버지이심을 깨닫고 믿을 때, 점점 더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참된 안식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순종을 통해”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히. 4:5~6) 만약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향한 당신의 믿음을 증명해보라’고 요구 받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그것을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믿음은 사람들 앞에서 단순히 행동으로 증명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우리 각자는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거짓없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생각해볼 때,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라” (마. 7:16)는 예수님의 도전의 말씀과 같이 우리의 순종을 통해 믿음의 진위를 우리는 알 수 있고, 증명할 수도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백세 되어 낳은 아들을 순종으로 드렸던 것처럼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순종은 우리의 그분에 대한 믿음이 참된 것임을 증명해 주는 중요한 시금석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히. 4장>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거듭 거듭 이스라엘민족이 불순종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안식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된 이유임을 강조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함이라” (히. 4:11) 라고 말입니다. 불행히도 가장 하나님의 권능을 많이 경험했던 이스라엘민족이 하나님을 믿지 못했고, 그로 인해 그분께 순종치 않음으로 안식을 누리지 못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도전과 교훈을 주는 말씀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니라 ~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 4:14,16) 성도 여러분, 왜 예수님 만이 우리에게 안식을 주실 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죄의 속박에서 자유케 하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그분의 피의 권세로 우리를 죄에서 꺠끗이 씻어 주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뿐 아니라, 우리가 그의 의로우심을 옷 입고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 평화와 안식을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께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For the Son of Man is Lord of the Sabbath) (마. 12:8)고 선언하신 이유일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의 참된 대제사장 되시며, 우리의 죄를 위하여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셔서 희생제물로 드려진 예수님만이 우리 앞에 가로놓인 두꺼운 휘장을 찢으시고, 우리가 그분의 의로운 옷을 입고 담력을 얻어 하나님의 지성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도우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세상의 무거운 짐 가운데 수고하는 인생들을 향하여 그 분 안에서 누릴 안식으로 여러분과 저를 이렇게 초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28-29)라고 말입니다. 그 어떤 선지자도, 천사도, 모세와 여호수아도, 대제사장도 줄 수 없었던 참된 마음의 쉼과 하나님과 평화하는 안식을 주님은 그분 안에서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이점이 히브리서기자가 오늘 본문말씀을 포함해서 우리 성도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것을 이어지는 <13절>까지 강조하고 나서, <14~16절>에서 갑자기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큰 대제사장 되심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것’을 성도들에게 격려하고 도전”하는 이유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 이유는 곧 우리의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는 안식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이라는 시간을 우리가 살아가면서, ‘아직 우리에게 안식이 남아 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충만한 도움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안식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아직도 힘겹고 무거운 짐을 지고 날마다 수고하고 힘겨운 탈출구조차 없는 인생의 험난한 싸움의 한복판에서 방황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금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얻고자 그토록 힘겹고 고단한 인생의 싸움을 계속하십니까? 이제 그 싸움을 그만둘 생각은 없으십니까?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의 이런 힘겹고 무거운 인생의 짐을 주님의 발 아래 내려 놓을 수 있는 여러분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로 말미암아 모든 우리를 얽매고 무겁게 속박하는 인생의 짐들을 다 주님께 내어 드리고, 그 인생의 힘겨운 무게에서 자유하시고 그 대신 우리 주님의 쉽고 가벼운 짐을 지고 그분과 동행하시길 기대합니다. 바로 ‘오늘이라는 때’에, ‘아직 안식할 때가 남아 있을 때’에 주님의 의로우신 옷을 입고 성령의 충만하신 도우심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더욱 깊고 넓은 안식을 누려 나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

Topic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