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16, 2021

“나의 하나님” (My God)

Preacher:
Series:
Passage: 역대상 (1 Chronicles) 29:17
Service Type:

“나의 하나님”

(My God)

5-16-21

본문말씀: 역대상 (1 Chronicles) 29:17

17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시는 줄 내가 아나이다. 내가 정직한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즐거이 드렸사오며 이제 내가 또 여기 있는 주의 백성이 주께 즐거이 드리는 것을 보오니 심히 기쁘도소이다” (I know, my God, that you test the heart and are pleased with integrity. All these things have I given willingly and with honest intent. And now I have seen with joy how willingly your people who are here have given to you.)

[설교 요약]

            과연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다윗의 고백과 같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는가요? 다윗의 오늘 본문말씀은 그의 인생의 마지막 시기에 해당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다윗은 기뻐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하고, 정직한 마음으로 중심의 예물을 드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다윗은 자신이 직접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지는 못할찌라도 그가 왕위에 있는 동안 온 힘을 다해 그의 아들을 통해 건축될 거룩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 ‘건축예물’을 준비했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다윗이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함으로써 평생의 삶을 살아왔던 신앙의 비결을 이해할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 누구의 하나님도 아닌 ‘나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의 삶이었던 것입니다.

먼저 ‘성전’은 히브리 원어로 ‘벹 엘로힘’ (beth Elohim)으로써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 (=집)’ (The House of God)이라는 뜻을 지닙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모세의 ‘성막’ (The Tabernacle) (BC 1445) 그리고 솔로몬의 첫‘성전’ (BC 1005)과 그 이후 두번째 성전 (BC 538)이 이스라엘 민족을 만나 주셨던 하나님의 성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눈에 보이는 성전에서 성도의 제사 (=예배)를 받으시는 개념은 영적인 의미로 확대되어 발전함을 예수님은 한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밝히셨습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요. 4:21)고. 그리고 이 성전의 개념은 다시 사도 바울에 의해 성도 개개인이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 (고전. 6:19)임과 동시에 교회공동체가 예수님을 모통이돌로 하여 지어져가는 성전 (엡. 2:20~22)이라는 것으로 발전됩니다.

이것이 ‘성전’의 뜻과 그 개념이 확장된 것이라면, 저의 마지막 질문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의 성전을 영적으로 이루어갈 것인지? 를 다윗의 모습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함’으로써 (v.11~12,14,16) 입니다: 다윗왕은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대상. 29:14b)라고 어느 것 하나 그분께로 부터 오지 않은 것이 없음을 고백했습니다.

둘째, ‘정직으로 행함’으로써 (v.17,19) 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그는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시는 줄 내가 아나이다.” (v.17a) 라고 하나님을 향해 기도합니다. 다윗은 정직과 성실함으로 날마다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 ‘기쁨으로 드림’으로써 (v.9,13~14,17) 입니다: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데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대상. 29:14a) 라고 다윗과 백성들은 기쁨의 제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자원함과 감사를 통한 기쁨의 제사인 것입니다.

바라기는 그 누구의 하나님도 아닌, ‘나의 하나님’되신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성도 여러분의 남은 삶이 거룩한 성전으로 지어져 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과연 성도 여러분에게 있어서 어떤 하나님이신지 묻고 싶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여러분 자신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묵상해 보기 원합니다. 과연 하나님은 오늘 다윗의 고백과 같이 여러분에게 ‘나의 하나님’이십니까? 아니면 여전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그리고 다윗의 하나님은 되실찌라도 ‘나의 하나님’이라고 그분을 부르기에는 서먹하고 막연한 관계인가요?! 만약 아직까지도 내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라기는 오늘 말씀을 통해 ‘그 누구의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성도 여러분 자신의 하나님을, 즉 ‘나의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 가운데 고백하고 확신으로 그분을 부르는 여러분 모두 되시길 기대합니다.

다윗의 오늘 본문말씀은 그의 인생의 마지막 시기에 해당합니다. <역대상>의 마지막장인 <29장>은 ‘성전 건축에 쓸 예물을 준비하는 모습’과 ‘다윗의 감사기도’가 그 주제를 이루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다윗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짓기 위해 자기 자신과 백성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성전건축에 쓸 예물을 드림을 기뻐하고, 또한 이렇게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림을 감사하는 기도를 구체적으로 드리는 모습 가장 마지막 기록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물론 그가 숨을 거두기 전에 솔로몬에게 마지막 유언에 해당하는 말을 남긴 부분 (왕상. 1~2장)을 제외하면 말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다윗은 기뻐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하고, 정직한 마음으로 중심의 예물을 드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다윗왕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경외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마음의 부담을 가졌습니다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허락치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하였느니라. 네가 내 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 즉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대상. 22:8) 고 하나님은 다윗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보라, 네게 한 아들이 태어나리니 그는 평강의 사람이라 ~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리니 ~ 저가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할지라” (대상. 22:9~10) 고 말씀하시고, ‘평강/평화/안식’이라는 의미의 ‘솔로몬’이라는 그의 아들을 통해 자신의 성전을 건축할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비록 다윗은 자신이 직접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지는 못할찌라도 그가 왕위에 있는 동안 온 힘을 다해 그의 아들을 통해 건축될 거룩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 ‘건축예물’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다윗은 백성들을 모으고 자신이 정성을 다해 모은 건축예물을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바침을 공포하였을 때, 그 말을 들은 지도자들과 백성들 또한 성전 건축을 위한 예물을 자원함으로 즐거이 드렸던 것입니다. 수천년의 세월동안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과 삶의 중심에 있었던 하나님의 성전은 이렇게 다윗과 백성들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에 기초한 자원함으로 드리는 기쁜 예물로서 세워진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다윗이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함으로써 평생의 삶을 살아왔던 신앙의 비밀 (=비결)을 이해할수 있습니다. 그 누구의 하나님도 아닌 ‘나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의 삶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본문의 다윗과 백성들의 하나님의 ‘성전건축을 순전함’으로 시작하는 모습에서 잘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성전’ (The Holy Temple)은 무엇을 의미하며, 어떻게 우리 믿음의 공동체는 하나님의 성전을 이루어갈 수 있을까요? 저는 함께 <성전의 의미>와 <어떻게 하나님의 성전을 영적으로 이뤄갈 것인지?>를 성도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면서 ‘나의 하나님’과의 더 성숙된 영적 관계가 깊어질 수 있는지를 묵상하기 원합니다.

먼저 ‘성전’은 히브리 원어로 ‘벹 엘로힘’ (beth Elohim)으로써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 (=집)’ (The House of God)이라는 뜻을 지닙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의 거하시는 집, 성전은 어디입니까? 물론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그의 아들, 솔로몬을 통하여 건축하고자 했던 성전, 소위 ‘솔로몬 성전’이라고 불리워졌던 성전이 하나님이 거하셨던 대표적인 성전, 곧 하나님의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웅대하고 아름다운 솔로몬 성전도 영원하지 못했습니다. 남유다 왕국이 바벨론에 의해서 패망하게 되었을 때, 성전도 함께 무참히 파괴 (BC 587)되었습니다. 두번째 성전은 소수의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솔로몬성전보다 규모는 작았지만 페르시아왕 고레스의 후원을 받아 다시 건축하게 되었고 (스. 6:8~12), 그 후에 헤롯대왕 때 크게 확장하여 40여년에 걸쳐 아름답게 지었습니다. 그럼으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건축한 하나님의 성전에만 하나님이 거하신다고 믿고 그것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북쪽의 사마리아인들은 그림신 산에 성전을 지어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여러분도 잘 기억하시듯이, 주께서 수가성의 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는 중에 그녀는 이렇게 주께 질문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요. 4:20)고 말입니다. 이 말은 사마리아인들은 하나님이 그립신산의 성전에 거하신다고 주장하고, 반대로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예루살렘성전에 거하신다고 주장하니 과연 어느 것이 맞느냐는 것입니다. 이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요. 4:21,24)고. 주님의 이 말씀은 과거 모세의 ‘성막’ (The Tabernacle) (BC 1445) 그리고 솔로몬의 ‘성전’ (BC 1005) 가운데 거하신 하나님은 더 이상 어느 특정한 장소에 국한되어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영과 진리)로 예배드릴 때 우리를 만나주시고, 그곳이 어느 곳이 되었든지 하나님이 거함으로 거룩한 성전이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했다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성전의 개념을 ‘하나님을 믿는 성도 (=성도의 몸)’이라고 설명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 6:19) 여기서 ‘하나님의 성전’ (집)이 과거의 거룩하고 웅대한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을 믿는 성도 자신 (몸)으로 구체화되고 발전되어가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될 때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 성령이 거하심으로 결국 하나님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우리 성도 한사람 한사람이 성전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전의 의미를 가장 미세한 세포조직의 의미로 볼 때는 성도 한사람 한사람이지만, 이 성전은 존재가 신비로운 것은 각각의 성도가 함께 연합함으로써 동시에 거대한 성전을 이룬다고 바울은 영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이것은 모든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함께 그분의 몸을 이룸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엡. 2:20~22) 그리스도를 머리로 함께 지체로 연결된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잇돌 (기초돌)로 하여서 함께 서로 연결됨으로 성전으로 지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 안에서 성령을 통해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인 성전으로 자라간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세의 성막 이후 하나님의 거하시는 처소는 솔로몬 성전을 거쳐서 작게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 자신 그리고 크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함께 지체로 연결되어지는 교회 공동체 (=개교회 & 우주적 교회)가 성전이 되어 영적으로 거룩하고 아름답게 지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랍고 신비하신 권능은 그의 택한 자녀를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개인과 공동체를 사용하셔서 거룩하신 자신이 거하실 처소로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게 ‘성전’의 개념이 확장되고 발전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대략적인 ‘성전’의 뜻과 어떻게 그 개념이 깊어지고 확장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저의 마지막 질문은 어떻게 하나님의 성전을 영적으로 이루어갈 것인지? ()에 대해 다윗의 성전을 건축하는 모습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함’으로써 (v.11~12,14,16) 입니다: 우리가 지난시간 악인의 특성을 살펴봤지만, 그들은 죄악된 길에 들어서기를 서슴지 않고, 교만한 자의 자리에 앉기를 좋아합니다 (시. 1:1). 그러나 복있는 자, 곧 의인은 늘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묵상하기에 죄를 멀리하고 겸손히 행동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겸손한 것일까요? 물론 말이 공손하고 행동이 교만하지 않은 것도 겸손일수는 있겠으나, 진정한 겸손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왔음’을 인정할 수 있는 영성에서 시작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고전. 15:10)고 했던 사도 바울은 고백은 그의 전인생을 한마디로 표현한 고백인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의 겸손을 넘어선 영적 진실임을 압니다. 사도 바울 한 사람뿐 아니라, 모든 성도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다윗왕이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며 정확히 고백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대상. 29:14)라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전에서 그분 앞에 서게 된다는 것은 그분의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을 마음 중심에서 찬양하고 경배하며, 나의 나된 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요, 어느 것 하나도 그분께로 부터 오지 않은 것이 없음을 겸손히 고백하는 데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둘째, ‘정직으로 행함’으로써 (v.17,19) 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다윗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시는 줄 내가 아나이다. 내가 정직한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즐거이 드렸사오며” (v.17) 라고 하나님을 향해 기도합니다. 여기서 ‘정직’이라는 단어를 <NIV>성경에서 찾아보면 <integrity>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Integrity”는 우리 말로 하면 <정직, 성실, 충성, 온전함>이라고 표현됩니다. 제가 다윗의 삶을 통해서 여러 번 여러분에게 도전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언제나 인정하고 감사했지만 그것에 그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은혜에 기초해서 성실하게 하나님의 성전을 쌓아 나가고, 그분의 의로우심에 의지해서 날마다 정직한 마음으로 그분의 존전 앞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시편 78편>의 기자인 ‘아삽’은 다윗의 삶을 이렇게 한문장으로 요약했습니다. “이에 저가 그 마음의 성실함으로 기르고 그 손의 공교함으로 지도하였도다” (시. 78:72)라고. 하나님 아버지와 더 깊은 인격적 관계로 나아가는 성숙된 자녀의 모습이 바로 ‘마음의 성실함과 손의 공교함’인 것입니다.

셋째, ‘기쁨으로 드림’으로써 (v.9,13~14,17) 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자녀의 올바른 삶의 자세가 ‘마음의 성실함과 손의 공교함’이라면, 마지막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는 그런 정직과 성실함으로 살아가는 자녀가 결과적으로 누리게 되는 열매인 것입니다. 이런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감사>는 내가 억지로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태양과 물과 적절한 영양분이 공급될 때 과일은 풍성한 열매 맺듯이, 이 기쁨은 노력의 대상이 아니라 열매의 대상인 것입니다.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데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 또 여기 있는 주의 백성이 주께 즐거이 드리는 것을 보오니 심히 기쁘도소이다” (대상. 29:14,17) 라고 다윗과 백성들은 기쁨의 제사를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참된 신앙의 세계는 언제나 자원함과 기쁨입니다. 부득이 함과 의무로 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즐거움과 감사로 드리는 자의 삶의 열매를 기뻐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런 기쁨의 드림이 바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우리 심령의 성전이요, 우리 공동체의 성전임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은 언제나 신뢰와 사랑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했습니다. 때로 원수를 무찌르고 승리의 개가를 부르는 기쁨의 순간도 있었고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가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는 것 같은 영혼의 밤을 경험하기도 했지만,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언제나 ‘나의 하나님’이었습니다. ‘너의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그는 살아생전에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성전을 자기의 손으로 건축하지는 못했지만, 오늘날 우리 성도들조차도 부러워할 만큼 하나님과 영적 성전을 아름답게 건축하면서 그분께 영과 진리의 예배를 드리며 깊은 사랑의 관계를 맺어 갔던 것이라 저는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바라기는 그 누구의 하나님도 아닌, ‘나의 하나님’되신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여러분의 남은 삶이 거룩한 성전으로 지어져 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