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9, 2021

“아침에 주의 인자 하심을” (To proclaim your love in the morning)

Preacher:
Series:
Passage: 시편 (Psalms) 92:1,5
Service Type:

“아침에 주의 인자 하심을”

(To proclaim your love in the morning)

5-9-21

본문말씀: 시편 (Psalms) 92:1,5

1 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의 정숙한 소리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 (It is good to praise the Lord and make music to your name, O Most High, to proclaim your love in the morning and your faithfulness at night, to the music of the ten-stringed lyre and the melody of the harp.)

5 여호와여 주의 행사가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심히 깊으시니이다 (How great are your works, O Lord, how profound your thoughts!)

[설교 요약]

우리 크리스챤의 신앙생활은 마치 변화무상한 날씨 같습니다. 구름끼고 혹독한 밤을 보내다가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면 먹구름은 사라지고 화창한 평화의 아침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크리스챤의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소망의 아침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시. 92편>은 <안식일에 부르는 찬송시>라는 부제가 붙은 시입니다. 안식을 맞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묵상하며 가슴 깊은 곳에서 경배로 올려드리는 ‘찬송의 시’ 입니다.

찬양은 결코 하나님의 기분을 좋게 하고자 하는 ‘말잔치’ (lip service)나 비현실적인 외침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성도의 신앙고백이자, 그분의 선하심과 아름다우심에 대한 끊임없는 깨닫음이자 감격인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여전히 이런 찬양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거북해 하거나 형식적으로 마지못해 하는 성도가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시 말해,왜 성도 중에는 하나님께 찬양하지 못하는 자가 있을까요?” (Why some Christians do not praise God?)

첫째, ‘영적 잠에 빠져 있기 때문’ (Because they are spiritually falling asleep) 입니다: 사도 바울은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롬. 13:11)고 성도를 향해 영적 잠에서 깨어나길 촉구했습니다. ‘영적 잠에 빠졌다’는 것은 ‘영적으로 감각이 (=깨우침)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상황에 빠지게 되는 주된 원인은 다음의 2가지 잘못된 선택에 기인합니다. 이것이 성도가 찬양하지 못하는 ‘두번째’와 ‘세번쨰’이유입니다.

둘째, ‘이 세대를 본받기 때문’ (Because they conform to the pattern of this world) 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이 세대를 본받게 될 때’ 그는 영적 잠에 빠지게 됩니다. ‘이 세대를 본받는다’ (롬. 12:2)는 것은 ‘이 세상의 가르침 (=가치)를 따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돈을 사랑하고, 권력을 추구하고, 육체의 정욕을 즐기는> 이 세상의 가치를 따르는 것입니다.

셋째, ‘말씀을 묵상하지 않기 때문’ (Because they do not meditate the Word)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지 않고 묵상하지 않는 성도가 영적 잠에 빠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것입니다. 식물이 물을 공급받지 못할 때 시들어 죽듯이 말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시. 1:2) 라고 말씀 안에 깨어 있는 성도는 고백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시간마다 여러분의 영혼의 찬양 가운데 임하실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감사와 기쁨이 충만한 여러분 모두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 크리스챤의 신앙생활은 마치 변화무상한 날씨를 경험하는 것과 같지 않느냐 하고 저는 생각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노라면, 어느 날은 구름끼고 흐린가 하면, 어느 날은 혹독한 추위와 강풍 가운데 견디기 어려운 모진 날씨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언제 끝날지 모른 것 같은 폭풍우치고 음산했던 날씨도 그 다음날 자고 일어나면 언제 그러 했느냐는 식으로 모든 먹구름은 사라지고 따스한 햇살 가운데 화창한 평화의 아침을 맞이함을 우리는 쉼없이 경험합니다. 저는 이것이 정확하게 우리 크리스챤의 신앙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님 한분만을 믿고 믿음생활 한다는 것이 때로는 혹독한 날씨와 같이 여러가지 상황 속에서 큰 난관에 부딪히기도 하고 암담한 순간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다음날 아침 눈을 떴을 때 모든 먹구름 물러가고 평화로운 새아침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은혜인 것입니다.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 (v.1) 오늘 시인의 고백과 같이,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는 아침마다 그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그의 자녀를 인도하시고 지키실 뿐 아니라, 때로 피할 수 없는 환난의 밤이 찾아왔을 때 피할 길을 예비하시는 아버지시기에 우리는 그를 찬양하고 감사의 제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인자와 성실하심이 끝이 없으신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더 깨닫고 그 분께 합당한 감사와 사랑을 날마다 올려 드리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오늘 본문말씀, <시. 92편>은 시편 전체에서 유일하게 <안식일에 부르는 찬송시>라는 부제가 붙은 시입니다. 이 말은 이 시가 ‘안식일에 성전에서 불려졌다’ 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절>에 이어지는 <2절>과<3절>은 반복해서 <1절>이 반복된다고 <현대인의 성경>은 표기하고 있습니다. 주일날 예배때 찬양하는 가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반복해서 부르듯이, 오늘 찬양시에서도 <1절에서 3절>까지 같은 가사를 반복해서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잘 알듯이,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에게 모세를 통해 10계명으로 지킬 것을 명하신 대표적인 율법의 하나인 것입니다. 일주일의 7일째 되는 날을 안식일로 정하시고 그 날을 거룩히 구분하신 것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출. 20:8)고 하나님은 명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안식일을 지켜야하는 것일까요? 안식은 단순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는 것 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하신 것과 같이 “안식일을 기억하고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안식을 기억하고 거룩히 지키는 중심에는 오늘 시편가사에서 보듯이 <하나님을 기뻐하고 그분께 감사를 올려 드리는 찬양>이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어떤 유대인 저술가는 오늘 본문을 설명하면서, 안식일을 ‘메시야 왕국’과 관련시키면서 이 시편을 항상 안식을 취하게 될 <다가올 메시야 왕국시대를 위한 시와 찬송>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것은 안식일 하루 뿐 아니라, 날마다 아침과 밤마다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바로 그분을 찬양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마치는 것입니다.

다시 생각해 봤을 때, 시편 본문말씀과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시기는 수천년의 시간적인 차이를 나타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과 신약을 꿰뚫고 지나가며 여전히 없어지지 않는 2가지 신앙의 핵심적 주제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 첫째는 구약 유대인들의 중대한 신앙의 표징이었던 <할례>이고, 또 한가지는 오늘 시편말씀의 주제가 되는 <안식일>인 것입니다. 오늘날 프로테스탄트 신앙인들이 구약의 이스라엘성도들과 문자적으로 똑같은 ‘안식일’과 ‘할례’를 행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그 영적 의미는 묵상하면 할수록 그 영적 깊이와 가치가 시간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살아남을 저는 믿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영의 충만함으로 깨닫았듯이 <진정한 할례>는 ‘하나님을 영으로 예배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하며, 자신의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것’ (빌. 3:3)이며, <참된 안식>은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허락하신 모든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진정으로 쉼을 누리는 것’ (마.11:28)이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형식과 밖으로 드러난 행위가 아니라, 그 속에 감추어진 <할례와 안식>의 영적 의미는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어 가면 갈수록 더욱 빛을 발하고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시편기자가 참 안식의 주인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기뻐하고 찬양하는 성도의 삶은 아무리 강조하고 강조해도 저는 과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경배는 우리 모든 성도들의 존재이유이자 모든 축복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오늘 말씀을 성도 여러분과 나누며 실제적인 여러분과 저의 문제점을 나눌수 있기 원합니다. 그것은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이런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찬양의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렇다면 왜 성도 중에는 하나님께 찬양하지 못하는 자가 있을까요?” (Why some Christians do not praise God?)

첫째, ‘영적 잠에 빠져 있기 때문’ (Because they are spiritually falling asleep) 입니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가 그분을 찬양하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자녀가 되기전까지는 절대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지금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문제점을 제기하는 그룹은 불신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인 것입니다. 문제는 이들이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올바른 찬양을 올려드리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왜 이런 안타깝고도 불행한 일이 발생하는 것일까요? 이런 크리스챤들의 대표적은 특징을 말하자면 그것은 한마디로 이들이 ‘깊은 영적 잠’에 빠져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깊은 영적 잠에 빠져 있기에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하고, 그분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3장>을 마무리해 가면서 이렇게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도전과 격려를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 왔음이니라” (롬. 13:11)고 말입니다. 이런 바울의 표현을 통해서 그 당시 로마교회 성도 가운데 적지 않은 성도들이 깊은 영적 잠에 빠져 있음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적 잠에 빠졌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영적으로 감각이 없다/ 깨우침이 없다/ 정신차리지 못한다’는 뜻이 아닐까요. 마치 ‘술을 잔뜩 마시면, 술 기운에 취해서 정상적인 판단력이 마비되고 깊은 잠으로 빠져 들 듯이’ 영적으로도 그러하다는 말입니다. 자기 스스로는 똑똑하고 사리 분별력이 있고, 지혜롭다고 여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영적 상태는 잠자는 자처럼 어리석고 하나님께 대한 감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크리스챤이 왜 생긴다고 생각합니까? 자신은 노력하지만, 연약함을 어쩔수 없다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어쩔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의 잘못된 선택 때문인 것입니다. 그 잘못된 선택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둘째, ‘이 세대를 본받기 때문’ (Because they conform to the pattern of this world) 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이 세대를 본받게 될 때’ 그는 영적 잠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세대를 본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 세상의 가르침을 따른다’ 혹은 ‘이 세상의 가치관에 영향 받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바울은 <롬. 12장>을 시작하면서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 즉 영적 예배를 드리자’라고 성도들에게 도전하고 나서, 그들에게 밝힌 영적 원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2) 고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의 가치를 본받는 상태가 될 수 있음을 사도는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사도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고 강하게 도전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와 같은 선한 도전에도 불구하고 이 세대를 본받을 때 그 결과물은 무엇일까요? <시편 1편>의 저자가 묘사하듯, “악인의 꾀를 좇게 되고, 죄인의 길에 서게 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게 되는 것”입니다. 악인의 어리석은 꾀를 대단하다고 좇으며, 죄인의 길에 어느 순간부터 들어 서며, 교만한 마음과 곧은 목으로 죄를 사랑하는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세대를 본받은 자의 열매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이 세대를 본받고 있습니까? 아니면 물리치고 있습니까?

셋째, ‘말씀을 묵상하지 않기 때문’ (Because they do not meditate the Word) 입니다: 깊은 영적 잠에 빠진 크리스챤이 적극적으로 행하는 것이 ‘이 세상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라면, 반대로 소극적으로 행치 않는 것이 ‘말씀을 묵상하지 않는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시편 1편>의 저자는 ‘누가 복 있는 자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도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으며’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시. 1:2) 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그것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에는 단 한명의 예외도 없습니다. 마치 물을 공급해 주지 않은 식물이 점점 더 말라가듯이, 생명의 물되신 말씀을 가까이하지 않는 성도도 영적으로 말라가고 죽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듯이, 이번 5월달, <매일성경> 큐티본문으로 ‘잠언서’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잠언서>말씀의 주제는 ‘어떻게 지혜를 얻을수 있을것인가?’ 입니다. 그런데, 지난 주 말씀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분명하게 그의 자녀들에게 어떻게 이 소중한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인지를 밝혀 주심을 볼수 있었습니다. “너희는 내 책망을 듣고 돌아서거라. 보아라, 내가 내 영을 너희에게 보여주고, 내 말을 깨닫게 해 주겠다” (잠. 1:23)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책망을 통해 악한 길에서 되돌아설 때, 하나님은 그의 영 성령의 충만을 주셔서 지혜와 진리로써 그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기뻐하며 찬양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그 중심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지 않고 묵상하고 있고 있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로 말미암아 여전히 깊은 영적 잠에 빠져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눈물의 선지자라고 불리는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힘들고 어두웠던 시절을 거치며, 동족의 죄악과 불순종으로 인해 바벨론에게 멸망당하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함께 담당해야 했습니다. 이런 심판을 경험하며 참혹한 죽음과 전쟁의 잿더미 가운데서도 예레미야를 좌절과 절망으로 생을 마감하지 않을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였습니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애. 3:22~23)라고 그는 고백합니다. 아침마다 새롭게 소망주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이 있었기에 우리가 진멸되지 않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이요, 새로운 희망으로 눈뜰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찬양하십니까?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 그 인자하심이 무궁하시고 성실이 끝이 없으신 이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마음 깊은 곳에서 찬양하십니까? 바라기는 이렇게 찬양하는 여러분의 영혼에 하나님의 허락하신 축복이 넘치기를 소망합니다. 날마다 시간마다 여러분의 영혼의 찬양 가운데 임하실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감사와 기쁨이 충만한 여러분 모두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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