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2, 2021

“성령충만” (II) (The Fullness of the Holy Spirit)

Preacher:
Series:
Passage: 시편 (Psalms) 42:1~2
Service Type:

“성령충만” (II)

(The Fullness of the Holy Spirit)

5-2-21

본문말씀: 시편 (Psalms) 42:1~2

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As the deer pants for steams of water, so my soul pants for you, O God.)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My soul thirsts for God, for the living God. When can I go and meet with God?)

[설교 요약]

            지난 주에 이어 ‘성령충만’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충만하신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만이 여러분과 저는 나의 존재를 깨닫아 누릴 수 있고, 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약속하신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이해했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성령충만을 받을 수 있는지?> 그리고 <무엇이 성령충만의 결과인지?>를 오늘 함께 이해하기 원합니다.

오늘 <시편 42편>의 시편기자는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모든 힘과 마음을 집중해서 하나님 한분만을 찾고 있습니다. 목마른 사슴이 생명수를 찾아 헤메이듯이, 시인은 생명과 구원되시는 하나님을 간절히 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바로 성령의 충만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성령충만을 받을 수 있을까요?” (How can we be filled with the Holy Spirit?) 그것은,

첫째, ‘성령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남으로써’ (We may be filled with the Spirit by growing the knowledge Him)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님은 모든 것을 살피시므로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알아 내십니다” (고전. 2:10)라고 말합니다. 성도의 영적 충만의 출발은 언제나 성령께로 돌아감에 있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지속적인 성령을 향한 신뢰와 관심, 그 분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남이 성령충만의 시작입니다.

둘째, ‘자신에게 설교 함으로써’ (We may be filled with the Spirit by talking to ourselves) 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5절>에서 시인은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시. 42:5)고 자신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자아’의 말을 듣기 전에, 먼저 스스로에게 ‘설교’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죄를 회개함으로써’ (We may be filled with the Spirit by repenting our sins) 입니다: ‘죄’가 심각한 것은 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의 사랑의 관계가 파괴되고, 성령이 급격하게 소멸된다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심령 가운데 하나님은 그의 영을 통하여 우리를 깨끗케 하시고 사도요한이 말했듯이 그의 성령을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요일. 1:9).

넷째,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써’ (We may be filled with the Spirit by abiding in Christ) 입니다: 예수님은 “내 안에 거하라 ~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요. 15:4~5)라고 말씀 하셨읍니다. 주님의 제자된 우리가 성령을 통해 그분 안에 거함으로 많은 과실을 맺는 것입니다. 충만한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의 남은 삶이, 믿음 따로 삶 따로 겉도는 삶이 아니라 기쁨과 소망 가운데 성령의 충만한 열매를 맺으시길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저는 성도 여러분과 지난 주에 이어 ‘성령충만’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지난 시간 말씀을 시작하면서, 저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하는 성도들이 적지 않음을 지적했습니다. 그 오해의 중심에는 성령님의 ‘성삼위의 하나님’이심을 간과함에서 출발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럼으로 많은 성도들이 성령을 내 마음대로 이용하는 ‘에너지/파워’와 같은 비인격적 존재로 인식하거나, 어떤 ‘부리는 영’ 정도로 그분을 대하는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성령의 사역’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천지만물을 창조 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계속해서 성화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성도에게 있어서 성령충만이 반드시 요구되는 이유는 이 충만하신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만이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영광스러운 존재를 깨닫아 누릴 수 있고, 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약속하신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충만은 모든 크리스챤들에게 있어서 반드시 추구하고 누려야 하는 영적 축복과 권세의 근거인 것입니다. 성령충만이 결코 선택사항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했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성령충만을 받을 수 있는지?> 그리고 <무엇이 성령충만의 결과인지?>를 오늘 함께 이해하기 원합니다.

오늘 <시편 42편>의 설교본문 저자로서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망명길에 올랐던 다윗’이라고 추정하는 학자도 있고, 혹은 ‘다윗의 망명시 그와 함께 했던 고라 자손의 한사람’이라고 추측하는 성경학자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 저자가 둘 중 누가 되었건 지금 시인의 영적 상태가 기쁘고 성령충만한 상태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오히려 구체적으론 알 수 없지만 매우 힘든 환경과 복잡한 인간관계로 인하여 자칫 깊은 ‘영적 침체’의 늪에 빠질 수 있는 위험성을 시인은 고백하며 호소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성령충만’의 본문말씀으로 오늘 말씀을 정한 이유는 우리 성도에게 있어서 성령충만을 가져오게 하는 내적 상태로서 오늘 본문만큼 우리에게 훌륭한 본을 보여주는 말씀도 흔치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하는 것은 시편기자는 자신을 압박하고 위협하는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그 상황 자체를 불평하거나 그의 원수들에 대해 분노하기 보다는 모든 힘과 마음을 집중해서 더욱 하나님 한분만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한 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지치고 목마른 사슴이 생명수를 찾아 헤매이듯이, 시인은 생명과 구원되시는 하나님을 간절히 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겪는 모든 고난과 아픔, 불평과 분노까지도 사람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와 숨김없이 토로하는 것입니다.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v. 5) 간절히 하나님을 추구하고 그분의 은혜를 갈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바로 ‘성령충만’입니다. 시인은 자기 인생의 가장 위태롭고 험난한 상황 속에서도 그 속에 함몰되어 영적 침체에 빠지기를 거부하고, 그 반대편으로 온 힘을 다해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얼굴’을 향해서입니다. 이것이 우리 성도가 성령충만으로 나아가는 가장 적극적인 삶의 자세요, 영적 동기인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성령충만을 받을 수 있을까요?” (How can we be filled with the Holy Spirit?) 그것은,

첫째, ‘성령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남으로써’ (We may be filled with the Spirit by growing the knowledge Him)입니다: 우리는 ‘왜 성도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하는가?!’에 대해 지난 시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한가지 ‘사실’에 있어서 원인과 결과가 서로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듯이 우리 크리스챤의 ‘성령충만’에 있어서도 그러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령이 도대체 누구신지? 그리고 그분의 성도를 위한 일하심 (=사역)은 무엇인지를 우리가 더욱 깨닫아가고 이해하는 만큼 우리는 더욱 성령님을 신뢰할 뿐 아니라 그의 충만한 임재를 갈구하는 것입니다. 막연하게 ‘성령충만을 받으면 좋고, 안 받아도 상관없다’가 아닌 것입니다. 성령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요, 또한 존재하는 모든 자연만물을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창조하시는 사역’, 또한 주의 택한 백성들을 거듭나게 함으로 ‘구원하시는 사역’ 그리고 구원받은 성도가 계속해서 장성한 성품으로 ‘영적 성장케 하는 사역’을 행하심을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성령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실 뿐 아니라, 평생을 통하여 구원받은 자의 신분에 합당한 <영적 성장>(=성화)을 이루시는 주체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성도의 신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성령을 아는 지식에서 자란만큼 더욱 깨닫게 되고 또한 깨닫은 만큼 그 선하신 성령을 신뢰하고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을 통해 그 비밀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성령님은 모든 것을 살피시므로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알아 내십니다” (고전. 2:10)라고. 그럼으로 우리가 어떻게 성령의 충만을 받을 수 있느냐를 이해함에 있어서 그 출발점은 언제나 성령께로 돌아가서 살펴보는 것입니다. 나의 노력과 의지 이전에, 성령충만의 주권자 되신 성령님께로 돌아가서 그분은 어떤 분이시며, 그분은 무엇을 기뻐하시고 무엇을 슬퍼하시는 지에 대해 이해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지속적인 성령을 향한 신뢰와 관심, 그 분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남이 성령충만의 시작점임을 저는 믿습니다.

둘째, ‘자신에게 설교함으로써’ (We may be filled with the Spirit by talking to ourselves) 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시. 42편> 말씀에서 시편기자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을 걸고 있음을 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시. 42:5)고 말입니다. 이 말씀을 강해함에 있어서 <로이드 존스>목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 이것이 우리 믿음의 싸움에서 얼마나 결정적인지요! 우리는 스스로에게 진리를 설교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여러분 대부분의 삶이 여태껏 불행한 것은 여러분이 자신에게 말하는 대신 자신의 말을 듣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로이드 존스/ ‘영적 침체’)라고.

제 견해로 볼 때, 이러한 로이드 존스목사의 영적 가르침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에게 끊임없이 부정적이고 비관적으로 말을 거는 ‘자아’의 말을 듣기 전에, 먼저 스스로에게 ‘설교’해야 (=말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와 같은 영적 원리가 우리 자신을 ‘영적 침체’에 빠지지 않토록 자신을 지킬 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성령충만을 받을 수 있는 삶의 토양을 형성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거듭난 성도들은 어떤 부정적인 환경 속에서 수동적으로 침체의 늪에 빠져서는 안되며, 도리어 적극적으로 그것을 거부함으로 신실한 수많은 성도들이 보여준 것처럼 환경이 앗아 갈수도 환경이 줄 수도 없는 충만한 삶으로 자신을 성장시켜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 ‘죄를 회개함으로써’ (We may be filled with the Spirit by repenting our sins) 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서 살았던 다윗의 삶이 어떠 했는지를 우리는 시편과 성경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랬던 그가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충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 죄를 범하고 나서 지은 시가 <시. 51편>인데,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죄를 범하게 되었을 때 일어난 심각한 변화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이<시편 51편>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 나를 쫓아내지 마시며, 주님의 성령을 나에게서 거두어 가지 말아 주십시오” (시. 51:11)라고 다윗은 고통스럽게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우리의 하늘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죄’가 심히 무섭고 공포스러운 것은 이 죄로 말미암아 신속하게 하나님과 우리의 사랑의 관계가 파괴되고 그분을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으로 대하게 된다는 사실니다. 이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 성령이 급격하게 우리 속에서 소멸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의 사도, 요한은 우리 영생을 소유한 성도가 평생을 통해 죄에 대해 어떠한 자세로 살아야 하는 지를 <요한일서>에서 잘 지도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요일. 1:8~10) 비록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으로 인하여 때때로 범죄한다 할찌라도, 우리의 평생을 통해 날마다 진심으로 우리의 죄를 자백하고 겸손하게 하나님께 나의 죄를 고백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고 깨끗케 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깨끗케 하심을 입을 때, 비로소 다윗이 간절히 구한 것과 같이 ‘주의 성령을 넘치게 부어 주시는 충만한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넷째,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써’ (We may be filled with the Spirit by abiding in Christ) 입니다: 저는 성령충만을 어떻게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 말씀을 마무리해가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만 함을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우리 주님은 이 땅에서 십자가의 쓴 잔을 마시기 전날,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과 마지막 시간을 보내시면서 주님과 성도의 관계성을 이런 아름답고도 본질적인 비유로써 강조하시고 도전하셨습니다. 그것은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인 것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 15:4~5) 고 말입니다. 포도 나뭇가지가 포도나무 원둥치에서 떨어지면 결국 말라 죽듯이, 주님을 믿는 우리들도 만약 주님 안에 붙어 있지 않으면 이와 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함으로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고 말라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께서 우리에게 그분 안에 거하라고 도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하시고자 함입니다. 포도나무 원 둥치로부터 영양분을 듬뿍 공급받음으로써 그의 제자들이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고자 함입니다. 그런데 ‘주님 안에 거한다’는 의미가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서 <요. 15장>을 계속 읽어보면, 그것은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한다” (v.7)이요, 또한 “주님의 사랑안에 거한다” (v.9)는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께 거함으로써 거두게 되는 열매는 곧 ‘주님의 기쁨’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요. 15:11)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될 때, 우리는 주님의 기쁨을 충만하게 열매로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충만의 열매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주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으셨습니까? 아니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셨습니까? 오늘날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하는 크리스챤들 가운데, 여전히 세상적이고 불행한 크리스챤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적지 않은 이유에 중심엔 성령의 충만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든 그의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풍성한 삶은 과연 무엇일까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시는 삶,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는 삶은 도대체 무엇을 뜻할까요? 이것이 바로 약속하신 진리의 영, 성령께서 자신의 충만을 통해 허락하시는 열매임을 믿습니다. 바라기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의 남은 삶이, 믿음 따로 삶 따로 겉도는 삶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기쁨과 소망 그리고 승리의 충만한 삶을 주님 만나는 날까지 누려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