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 29, 2018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My grace is sufficient for you)

Preacher:
Passage: 고린도후서 (2 Corinthians) 12:7~10
Service Type: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My grace is sufficient for you)

4-29-18

본문말씀: 고린도후서 (2 Corinthians) 12:7~10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육체에 가시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번 주께 간구 하였더니

9 내게 이르시기를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때에 강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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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 여러분은 어떤 삶의 무거운 짐이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오늘 사도바울이 고백한 것과 같은 ‘육체의 가시’ 는 무엇 입니까? 누구도 그 가시를 사랑하거나 즐거워 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그 가시로 인한 자신의 약함을 비관하거나 자포자기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랑하고 기뻐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약함이 도리어 그리스도의 강하심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되기 때문 입니다. 자신의 약함이 도리어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에게 머물게 되는 통로가 되기 때문 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성도 여러분도 여러분이 고통받는 그 약함으로 인해 좌절하거나 낙심할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약함을 자랑하고 약할때 곧  주의 능력으로 강해지는 놀라운 믿음의 비밀을 삶으로 누리시기를 기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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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서 보면, 사도바울은 고린도성도들에게 보내는 두번째 편지를 마무리 하면서 자신의 간증을 하고 있습니다. ‘ ~ 하나님께서 나의 육체 가운데 <가시> 주셨다' (v.7a) 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 가시로) 나를 치셔서 너무 자고 (=교만) 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v.7b) 는 것 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육체에 거하는 그 어떤 고통과 고난 가운데 있는 놀라운 하나님의 뜻을 깨닫았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고린도성도에게 보내는 편지를 마무리 하면서 간증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자신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몸으로 함께 부르신 고린도성도들을 포함한 모든 주의 제자들도 <반드시> ‘육체의 가시' 가 있고, 그로인해 고통과 고난의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그가 성령의 깨우치심을 통해 알게 되었기 때문 입니다. 그러므로, 그 육체의 가시로 인해서 낙심하고 좌절할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약함을 자랑하고 기뻐하자고 사도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격려하고 도전하는 것 입니다.

왜 사도바울은 그의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나의 약함을 자랑한다’ 는 아리송한 말로 강조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고린도교회가 많은 은사를 가진 성도들로 가득찼지만, 그들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능력은 상대적으로 보기 힘들었기 때문 입니다. 그들 안에는 서로 갈라짐과 육체적 타락과 하나되지 못하는 많은 문제가 끝이지 않았기 때문 입니다. 바로 진정한 성도의 영적 열매는 얼만큼 큰 은사를 가졌느냐가 아니라, 내가 고통받고 약한 그것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은혜가 나를 채워주심을 경험 했느냐에 있다고 그는 힘주어 주장하고 있는 것 입니다. 따라서 그들도 지금부터는 자신의 은사와 능력을 더이상 자랑하지 말고, 오히려 자신의 약함과 고난을 자랑하라는 것 입니다. 그리스도가 채워주시는 은혜의 자랑인 것 입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결론적으로 성도들에게 꼭 전하기 원했던 그의 중심적인 메세지였던 것 입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된 <고후. 12장> 에서 사도바울은 자신이 누리게 된 <3가지 은혜>를 설명하고 있고 있습니다. 그것은 ‘셋째 하늘’에 올라 갔던 경험 (v.2) 과, ‘여러 계시’를 받은 경험 (v.7a), 그리고 ‘육체의 가시’가 자기속에 머무는 경험 (v.7b) 이라고 그는 말 합니다. 그렇다면, 셋째 하늘 (=천국) 에 올라갔던 경험이나 여러 특별한 계시와 같은 경험은 크리스챤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엄청난 주의 은혜이자 특권임을 인정하겠지만, <육체의 가사>가 어떻게 은혜가 된다는 말인가요?’ 라고 반문하는 분도 있을 것 입니다. 이렇게 질문하는 분에게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답변하겠습니까?

이제 ‘과연 <육체의 가시>가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바울은 어떤 육체의 가시가 있었는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육체의 가시’ (a thorn in the flesh) 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나의 육체 가운데 가시처럼 남아서 나를 계속해서 찌르는 것’ 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살아가면서 목에 생선가시가 걸렸다던지, 혹은 손바닥에 나무가시가 박혀서 고생한 경험이 한두번은 있을 것 입니다. 만약 그 가시를 빼지 않고 놔 둔다면 말할 필요없이 그 가시는 계속 여러분을 찌르고 괴롭힐 것 입니다. 이렇게 내 몸에 박힌 가시처럼 내 몸에서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나를 괴롭히고 찌르는 것이 나의 ‘육체의 가시’ 인 것 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그의 육체의 가시로 인해서 계속 찔림을 받고 괴로와 했다는 것 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고통으로 인해서 그 가시가 떠나가기를 3번씩이나 간절히 주께 기도 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바울의 육체의 가시였을까요?’ 과연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누구도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성경에 그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언급된 곳이 없기 때문 입니다. 다만, 많은 성경학자들은 아마도 그것은 ‘그의 간질병 (epilepsy), 눈병, 혹은 그의 외모에 대한 핸디캡’ 중의 하나일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그의 ‘간질병’이 그것이라고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그의 간질병이었던 혹은 그 어떤 다른것이냐가 아니라, 그로 인해 그는 육신적으로 매우 힘들어 했고 그 육신의 가시가 떠나가기를 그가 주께 간절히 3번씩이나 기도했다는 사실 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뜻밖에도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것 입니다. 왜일까요? 주께서 사도바울을 덜 사랑하셔서 일까요? 아니면, 사도바울이 주께 덜 충성하여서 일까요? 솔직히, 만약 자신의 믿음을 통해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누릴 사람이 있다면, 그 중에 사도 바울이 첫손까락에 꼽힌다는 것을 반대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그는 진실로 주님을 사랑했고,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주를 위해 그의 삶을 던진 사람 입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육체에 있는 고통으로 인해 주께 간절히 그것이 떠나기를 구했지만, 주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다는 것 입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my grace is sufficient for you) (v.9) 라고. 왜 주님은 그의 사랑하는 제자, 이방민족을 위하여 특별한 은총으로 세우신 그의 그릇, 그의 종의 간청을 들어주지 않으시는 것일까요? 마치, 거절하는 것처럼… 그러나, 이 주님의 응답,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는 말씀이 얼마나 최상의 주님의 돌보심이요 은혜임을 사도바울은 영의 눈을 열어 깨닫을수 있었습니다. 바라기는 사도바울 뿐 아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도 여러분을 향한 주의 은혜가 과연 무엇인지? 그 은혜가 얼마나 완전하며 여러분을 생명과 승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은혜인지 깨닫음으로 그 은혜 안에 풍성해 거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원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왜 사도바울이 자신의 약함 (=육체의 가시)을 자랑하는지?’ 에 대해 살펴보기 원합니다. 그것을 다르게 표현한다면, 오늘 설교 제목과 같이 “왜 주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말씀하신 것일까?” 라는 것이 될것 입니다:

첫째, ‘너무 교만하지 않게 하시는 은혜’이기 때문 (Because His grace keeps him from becoming conceited) (v.7): 사도바울이 그의 육체의 가시로 인해 주께 3번씩 그것이 떠나기를 간구했을때 주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응답 하셨습니다. 왜일까요? 그가 깨닫은 첫번째 이유는 그것은 자신을 ‘너무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는’ 주의 은혜라는 것 입니다. 그는 이미 앞에서 살펴 보았드시 ‘셋째 하늘’에 올라 갔을뿐 아니라 ‘여러 특별한 계시’를 받는 영적 은혜를 경험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뜻밖에도 ‘육체의 가시’라는 별로 반갑지 않은 고통을 바울의 삶속에 주심으로 그를 아프게 했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주신 이유는 그 무엇보다도 그에게 이미 주신 놀라운 영적 은혜로 말미암아 그가 교만해지지 않토록 그를 지켜주는 더욱 넘치는 주의 은혜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 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하나님의 보좌 가장 가까이에서 그를 찬양하던 광명의 그룹 천사장이 그분을 처음으로 거역한 사단마귀가 되었다는 사실과, 완전하게 지음받은 첫인간 부부가 하나님을 거역한 타락한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은 바로 그 중심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체고 그와 같이 되고자 하는 ‘교만’이 있었음을 생각할때 이해할수 있습니다. 이 무서운 교만으로 부터 지켜주시는 은혜가 얼마나 넘치는 주의 은혜인지를 말 입니다. 여러분은 주께서 많은 은혜내려 주실때 교만하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까? 이것은 단순히 내가 ‘자신 있다, 혹은 없다!’라고 외치기 이전에 나를 구원하실뿐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그 구원을 완성해 가시는 주님은 나를 아신다는 것 입니다. 사실, 여러분과 저는 내 자신조차도 나를 잘 알지 못할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게 다짐하고 결심했지만 내 뜻데로 되지 않는 나 자신을 말 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가시를 없애달라고 간구하는 바울을 향해 ‘그 가시는 바로 나의 최상의 은혜이다. 그 가시는 너를 넘어트리는 것이 아니라 세워주는 내 은혜다. 너를 교만에서 막아주고, 겸손과 믿음으로 세워주는 나의 가장 족한 은혜중의 은혜다’ 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 입니다. 성도 여러분에게는 어떤 육신의 가시가 있습니까? 이 가시는 꼭 육체의 헨디켑만은 아닐 것 입니다. 이 가시는 때에 따라서는 나의 연약한 의지, 혹은 환경이나 관계성에서 오는 아픔이나 고통일수 있는 것 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가시가 여러분을 망하게 하는 그 무서운 교만으로 부터 지켜주는 주의 은혜임을 깨닫는가? 하는 것 입니다.

둘째, ‘약할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무는 은혜’이기 때문 (Because  His grace may rest on him through his weakness) (v.9): 여러분도 잘 아시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이라는 찬송가가 있습니다. 그 곡은 한때 흑인 노예선 선장이었던 ‘존 뉴턴’ (John Newton) 이 자신과 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주의 은혜에 감격하여 지은 찬양시에 곡을 붙인 것 입니다. 그 곡은 이렇게 시작 됩니다;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That saved a wretch like me. I once was lost, but now am found. ~ “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그런데, 이 영어 찬송가사를 직역해 보면 또한 감동이 있습니다; “놀라운 (주의) 은혜, 그 얼마나 달콤한 그 음성인가?! 그 음성이 나 같은 죄인을 살리셨도다. 나는 한때 죽었던 (=잃어버린) 자였지만, 이제 생명을 얻었네 (=찾았네)!!” 라고. 여기서 다시한번 확인할수 있는 진리는 ‘주님을 떠난 삶은 잃었던 삶 이었지만, 이제 '주 안에서 생명을 얻은 삶은 되찾은 삶이 되었다’ 는 것 입니다. 흑인노예를 팔아 넘기고 죽이기까지 했던 노예선장이라는 지울수 없는 자신의 ‘치욕적인 지난날의 가시’는 도리어 주님의 그를 구원하신 은혜 안에서, 그의 남은 삶을 ‘흑인 노예들의 해방’을 위해 온전히 자신을 던질수 있었던 복된 삶으로 되찾게 되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과거의 ‘치욕적인 기억의 가시’들을 감추거나 포장하려 하지않고, 도리어 그 고통과 약함을 통하여 도리어 주의 능력이 그의 남은 삶에 넘쳐 흐르도록 자신을 비어 드린 것 입니다. 자신의 가시를 통해 도리어 주의 능력의 지극히 큰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을 이 시간 모두 소개하기엔 시간이 부족 합니다. 성도 여러분은 자신의 약함과 약점을 통해 도리어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의 능력이 흘러 넘치도록 자신을 비우는 은혜의 통로가 되게 하고 있습니까?

셋째, ‘육체의 가시를 주신 주의 사랑을 깨닫는 은혜’이기 때문 (Because His grace let him recogrize  about the reason why a thorn in the flesh was given) (v.10): 저는 지난주 시편 큐티 말씀을 보다가 이런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에 고통을 주셔서 그들을 낮추셨으니, 그들이 비틀거려도 돕는 사람이 없었다” (시. 107:12) 라고. 시편기자는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신음하던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그 선하심으로 광야로 이끌어 내셨지만, 그들의 불신과 거역함으로 ‘그들의 마음에 고통을 주셔서 그들을 낮추셨다 ~’ 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오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라는 주님의 우리 인생을 향한 말씀을 통해 ‘과연 우리는 얼마만한 가시를 가져야 주의 은혜를 깨닫을수 있을까?’ 라는 마지막 질문을 우리 각자가 할수 있기를 원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징계와 고난은 세상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그의 택한 자녀에게 실로 유익한 것이요, 그의 자녀를 보호하시고 포기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강력한 표현임을 그동안 여러차례 말씀 드렸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확신 한다면, 성도 여러분이 이제 하루 빨리 깨닫아야 하는 것은 ‘그의 사랑하는 자녀를 다루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방법’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 입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는 그 선한 뜻데로 그의 자녀를 다루시는 것 입니다. 선하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는 때로는 그의 자녀들을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고, 원수들 앞에서 우리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주심으로 우리를 존귀한 그의 자녀로 높여 주시지만,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깊은 고통의 웅덩이 가운데 빠트리시기도 하시는 것 입니다. 왜 입니까?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 입니다. 나를 그의 빛된 자녀로 성장시키고 끝까지 그의 구원을 완성시키시기 때문 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까지 낮아지고 약해져야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계속적으로 거하게 할수 있을까요? 어디까지일까요? 찰스 스펄쳔 목사는 오늘 본문말씀의 설교에서 이렇게 선언 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여러분을 하나의 접시로 다루신다면, 그는 당신을 거꾸로 뒤집어 엎고 그 남은 것들을 깨끗히 훔쳐 닦아내고 빈그릇으로 비우게 할 것 입니다 ~ 하나님은 결코 여러분의 그릇이 다 쏟겨지고, 아주 깨끗이 그 찌꺼기가 닦겨 짐으로 아무것도 남지않는 정결한 그릇이 되기 전까지는 여러분을 사용하지 않으실 것 입니다” (“Strengthening Words from the Savior’s lips”/  C. H. Spurgeon) (2 Cor. 12:9) 라고 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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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스펄젼의 표현대로 만약 여러분의 인생이라는 접시에 여러분 스스로 온 힘을 다해 준비한 공들인 음식이 다 거꾸로 완전히 엎질러지고 완전히 빈그릇으로 닦여 졌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손길로 인함임을 깨닫았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도바울은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 (v.10) 고 고백 합니다. 내 인생이 거꾸로 뒤엎이고 내 계획이 닦여 나가는 고난과 그 고난 앞에 홀로 선 나의 연약함은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 을 깨우쳐 주시는 주의 은혜인 것 입니다.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케 하시는 주의 은혜인 것 입니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 안에 충만히 거하게 하시는 넘치는 주의 은혜인 것 입니다. 이 풍성한 주의 은혜안에 머무는 삶을 사시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