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ober 20, 2019

“내 이웃은 누구 입니까?” (Who is my neighbor?)

Preacher:
Series:
Passage: 누가복음 (Luke) 10:29,36~37
Service Type:

“내 이웃은 누구 입니까?”

(Who is my neighbor?)

10-20-19

본문말씀: 누가복음 (Luke) 10:29,36~37

29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But he wanted to justify himself, so he asked Jesus, “And who is my neighbor?”)

36 네 의견에는 이 세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Which of these three do you think was a neighbor to the man fell into the hands of robbers?”)

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The expert in the law replied, “The one who had mercy on him.” Jesus told him, “Go and do likewise.”)

 

[설교 요약]

소위 ‘착한 사마리아인’이라는 제목으로 불리는 주님의 비유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는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 <2가지 질문>을 하는것이 필요합니다. 먼저 첫번째 질문은, 무엇이 예수님께서 이 비유에서 우리에게 도전하시는 것일까요? 하는 것 입니다.

첫째, ‘내가 좋은 신분을 가졌다고 좋은 이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 강도만난 사람을 못본채 지나쳤지만, 오히려 이스라엘인들에게 업신여김을 받던 한 사마리아인이 그를 구했던 것 입니다. 내가 지금 어떤 신분으로 있느냐가 곧 내가 좋은 이웃이 되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주님은 도전하시는 것 입니다.

둘째, ‘나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순종하는지 점검해야 한다는 것: 그당시 종교지도자들의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기 보다는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하심에 대해 고민하면서 온 힘을 다해 실천하고자 하는 인격적 결단이 부족한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그 다음 질문은 누가 나의 이웃인 강도만난 자일까요?하는 것 입니다.

첫째,내가 질문을 바꿀때만 보이는 자’ 입니다: 우리의 질문은 궁극적으로 ‘내 이웃은 누구인가?’ 에서 ‘나는 강도만난 자의 이웃인가?’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내 이웃이 누군지?’에 대해 관심은 가질지언정 ‘강도만난 자가 누군지?’에 대해선 대부분 관심이 없기 때문 입니다.

둘째,상처받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 입니다: 그 사람이 외적으로 얼마나 건강하고, 돈이 많고, 지적이고,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많은 사람이라고 그가 아무런 문제도 없고 나의 도움도 필요치 않다고 보는 것이 잘못된 판단 입니다. 나의 선입관을 내려 놓을때 내 가까이에 있는 강도 만난자를 볼수 있습니다.

셋째,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자’ 입니다: 아직까지 구원받지 못한 불신자 뿐 아니라, 구원 받았음에도 영적으로 자라지 못하고 성도들도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자 인것 입니다.

사도바울은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롬.1:14)고 고백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들도 사도바울처럼 하나님의 사랑에 빚진 자가 되어 아직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함으로 강도만난 삶을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또 한명의 착한 사마리아인으로 살아가시길 기대 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 모든 크리스챤들에게 있어서 매우 반갑고 적극적인 하나님의 명령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하라’는 말씀일 것 입니다. 그러나 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있어서 또한 가장 부담스럽고 힘든 명령임에도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 주님은 오늘 본문을 포함한 <누가복음 10:29~37>의 예화를 통해 ‘진정한 이웃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우리에게 일깨워 주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내 이웃은 누구인지?무엇이 참된 이웃 사랑인지?’에 대한 주님의 가르치심을 바로 깨닫아 성도의 귀한 본분을 삶으로 행해나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기대 합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신선한 도전은 ‘우리 크리스챤들은 얼마나 자주 과거를 잊고 살아가는 자인가?’ 하는 것 입니다. 그리고 과거를 잊었기에 현재에서도 우리 자신을 옳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잘못된 착각속에 살아간다는 것 입니다. 그것은 무엇 입니까?그것은 ‘우리 모두는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존재였다’는 것 입니다. 우리 중 단 한사람도 자신을 스스로의 죄에서 구원할 자가 없고, 영적 사망상태에서 스스로의 행위로 살아날 자가 없었다는 것 입니다. 그런 절망적인 상태에 있던 우리가 삶의 소망과 구원의 은혜를 누릴수 있는 근거는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조건없는 사랑으로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그를 영접하는 자에게 허락하시는 영생의 선물로 가능하게 선포하는 성경의 진실은 우리 크리스챤들은 쉽게 망각 하는 것 입니다.

이것이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과거의 삶이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런 우리의 과거를 망각할때 현재의 우리를 잘못 이해하게 되는 것 입니다. 언젠가 부터 우리는 내 자신의 훌륭하고 칭찬받을 행위에 근거하여 자랑하고 의롭게 되었다고 스스로 여기고 있는 것 입니다. 이런 착각속에 빠지게 될때 나타나는 현상은 나의 이웃을 사랑할수가 없다는 것 입니다. 단지 내가 할수 있는 것은 편을 가르는 것 입니다. 내편은 덮어주고, 남의 편은 판단하고 적대화 하는 것 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말씀, 소위 ‘착한 사마리아인’이라는 제목으로 불리는 주님의 비유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늘 본문 앞절과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 합니다. 한 율법학자가 주님께 찾아와서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v.25)라고 질문 했습니다. 주님은 도리어 그에게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 되었느냐” (v.26)고 물으셨고, 그는‘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v.27)는 말씀임을 대답했고, 주님은 “네 대답이 옳도다”라고 칭찬하시고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v.28)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말씀은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제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수 있을까요?’라고 질문한 연장선 상에서 논리적으로 이해할수 있는 말씀이라는 것 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이것을 행하면 살리라’. 즉 ‘영생을 얻게 될것이다’라는 것 입니다. 그때 이 율법학자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렇게 질문 합니다. ‘그런데요, 선생님! 그렇다면 저의 이웃은 누구 입니까? 제가 사랑해야 할 이웃은 누구 입니까?’라고 말 입니다. 이런 그의 질문에 대해서 누가복음의 저자, 누가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v.28) 즉 ‘자기가 옳바른 사람임을 보이려고’ 이런 질문을 한다고 주석을 달고 있습니다. 이런 율법학자의 질문에 대해서 주께서 주신 대답이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말씀인 것 입니다.

그렇다면 더 상세한 것으로 나아가기 전에 먼저 우리가 이해해야 할 점은 이것 입니다. 첫째,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하심은 해도 좋고 않해도 좋은 것이 아니라 반드시 행해야 하는 것 입니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v.28)는 주님의 도전은 우리의 분명한 행함을 요구하고 있는 것 입니다. 둘째, ‘우리는 너나 할것없이 이웃이 누군지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이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 입니다. 이것이 주께서 유대인 율법학자,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잘 이해하고, 충성스럽게 행한다고 자처했을 그에게 주시고자 하셨던 동기요, 또한 이 말씀을 묵상하는 모든 크리스챤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도전이라 믿습니다.

이제 저는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 <2가지 질문>에 대해 성도 여러분과 함께 살펴봄으로서 주께서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통해 우리 성도들에게 주시는 가르침을 이해하기 원합니다. 먼저 첫번째 질문은 이것 입니다. 무엇이 예수님께서 이 비유에서 우리에게 도전하시는 것일까요? (What is the challenge to us from this parable?) 하는 것 입니다.

첫째, ‘내가 좋은 신분을 가졌다고 좋은 이웃이 아니다는 것’: 오늘 비유에서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가 되는 곳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가 가는 어느 한 지점’임을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 레위인등이 등장하는 주어진 상황을 종합해 볼때 강도 만난 자, 즉 가진 물건을 강도에게 약탈당할 뿐 아니라 옷을 빼앗기고 심하게 얻어 맞아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간 사람은 유대인이라는 추측을 어렵지 않게 해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초주검이 되어 쓰러져 있을때 어떤 제사장과 레위인이 차례로 그 길을 지나갑니다. 이들은 누구 입니까? 제사장은 말 그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제사로 예배를 드리는 것을 맡은 종교 지도자이고,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제사장을 도와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감당하고 여러모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위해 구별된 삶을 살도록 임명받은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첫번째는 제사장이 그리고 그 다음은 레위인이 차례로 강도만나 거반 죽게 된 사람을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못본채 스쳐 갔던 것 입니다. 왜일까요? 그 이유에 대해서 신학자들은 몇가지 해석을 하고 있는데 결론은 이 모든 것은 구차한 변명임을 알수 있습니다. 제사장은 서둘러 가야만 했는데 그것은 시간 맞혀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드려야 했다거나, 레위인도 제사장을 도와서 종교적인 규례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것 등 입니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께서 과연 그냥 놔두면 죽을수 밖에 없는 사람을 버려두고 자기에게 제사 드리고자 온 이들 종교지도자들을 기뻐하셨을까요? 저는 결코 기뻐하지 않으실것을 믿습니다. 주님은 말씀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5:23,24)고. 만약 형제와 불화한 것도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께 예배 드리기 전에 먼저 화해하고 와서 온전히 예배 드리기 원하신다면, 하물며 하나님께서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기시는 한 생명을 먼저 살리고자 우리가 할때 얼마나 더 기뻐하시겠습니까? 내가 지금 어떤 신분으로 있느냐가 내가 좋은 이웃이 되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주님은 도전하시는 것 입니다. 중요한 것은 외적 신분이 아니라, 실제적 삶의 방식이 좋은 이웃이 되는 것 입니다.

둘째, ‘나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순종하는지 점검해야 한다는 것: 사실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었던 율법학자의 질문은 매우 중요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사랑해야할 대상을 분명히 인식하지 못할때 그를 사랑할수 없기 때문 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이웃에 대한 잘못된 관점이 있었음을 역사적 사실에서 발견할수 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이웃을 같은 동족 유대인들에게만 제한되 있었습니다. 다시말해 유대인 서로에게서는 사랑해야하는 이웃이었지만, 이방인들은 그들의 이웃이 아니었습니다. 이방인들은 단지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인 대상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자기들의 이웃인 한 강도만난 유대인을 못본채 버려두고 지나갔지만, 이웃이라고 간주하지도 않던 한 사마리아인이 그 버려진 유대인을 불쌍히 여겨서 목숨을 구했다는 것 입니다. 우리 모두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만을 본능적으로 좋아하는 존재가 아닌지요?그당시 제사장과 레위인과 대부분의 유대인들의 문제는 그들의 이웃이 누군지에 대한 영적 깨닫음이 부족하다는 것도 있겠지만,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하심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온 힘을 다해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가 부족한 때문은 아니었을까요?그 이웃사랑의 명하심에 대한 순종이 부족한 때문이 아닐까요? 그리고 그 문제는 오늘날 우리 성도들의 정확한 문제는 아닌가요?

그 다음 질문은 이것 입니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하는 것 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주님의 답변대로 표현한다면 ‘누가 강도 만난 자인가?’하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나의 이웃인 강도만난 자일까요?” (Who is my neighbor, fell into the hands of robbers?) 하는 것 입니다.

첫째, 내가 질문을 바꿀때만 보이는 자 입니다: 이것은 곧 나의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는 말 입니다. 율법학자의 질문과 같이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도 첫 출발로서는 의미가 있겠으나, 우리의 질문은 궁극적으로 ‘나는 강도만난 자 (=도움이 필요한 자)의 이웃인가?’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 입니다. 이것은 질문의 중심이 나에게서 출발하지 말고, 상대방에게서 출발해야 함을 뜻하는 것 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이웃이 누구인지를 내 중심적으로 살펴볼때 잘못 판단하게 된다는 사실 입니다. ‘나의 이웃은 누구인가?’가 아니라, ‘나는 강도만난 자의 이웃인가?’라고 질문해 보아야 한다는 것 입니다. 사실 우리는 ‘내 이웃이 누군지?’에 대해 관심은 가질지언정 ‘강도만난 자가 누군지?’에 대해선 대부분 관심이 없기 때문 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진지하게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자 원한다면, 먼저 나의 질문을 바꾸라고 도전 하시는 것 입니다. ‘나는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인가?’라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은 ‘강도만난 자’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해 보아야 할 것 입니다.

둘째, 상처받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 입니다: 주께서 복음서에서 여러번 강조해서 말씀하신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은 믿는 성도들 상호간의 사랑임을 알수 있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요.13:34,35) 라고. 그러나 동시에 주님은 “ ~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마.5:44) 는 도전적인 말씀을 통해 우리의 이웃은 ‘원수’까지 확장되어져야 함을 밝히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크리스챤의 이웃은 믿음의 성도들일 뿐 아니라, 원수에서 상징하듯 신자 혹은 불신자들 중에서 나를 힘들게 하고 고통을 주는 자들까지 모두 사랑해야 한다는 것 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오늘 비유말씀을 통해서 우리 크리스챤이 사랑해야 할 이웃은 무엇보다도 ‘강도만난 자’라고 정의하십니다. 그렇다면 누가 강도만난 자일까요?그가 외적으로 얼마나 건강하고, 돈이 많고, 지적이고,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많은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을 것 입니다. 강도만난 자는 지금 <상처와 고통을 받고 있고, 그로인해 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존재>라는 것이다. 내의 도움과 관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라는 것이다. 얼핏 겉으로 보기에 내가 생각하드시 ‘그/그녀는 도움이 필요치 않을꺼야!?’라는 선입관을 없애야 그의 상처와 고통을 볼수 있는 자인 것 입니다. 여러분은 매우 가까이 있는 강도 만난 자를 발견하셨습니까?

셋째,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자 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누가 주님께서 사랑으로 섬기라고 말씀하신 강도만난 자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그는 상처받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일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아직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자> 일것 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자일까요?당연히 아직까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지 못하고 영접하지 못한 자 입니다. 거듭나지 못하고, 영생을 소유하지 못한 불신자 입니다. 그러나 저는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자 중에는 오랫동안 교회생활해 왔음에도, 심지어 주님을 영접하고 구원은 받았음에도 아직까지 구원의 확신과 감격이 없는 자라고 감히 말씀 드리기 원합니다. 이들은 구원받은 성도이지만, 안타깝게도 영적으로 자라나지 못하고 만년 ‘영적 아기’로 살아가는 성도들 입니다. 이들을 사도바울은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 불렀는데 (고전.3:1~3), 이들이 아직까지 우리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자라는 것 입니다.

주석가 매튜헨리는 오늘 본문말씀을 이렇게 재해석 합니다. “만일 사마리아인이 곤경에 빠진 유대인을 도와준 것이 잘한 일이라면, 유대인이 곤경에 빠진 사마리아인을 그와 같이 구해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그러므로 가서 어떤 일이 있을 때마다 사마리아인처럼 행동하라. 너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라. 그들이 비록 너희 민족이 아니라 해도 관심과 동정심을 가지고 아낌없이 사랑을 베풀어라.”라고 주님이 도전 하신다는 것 입니다. 주님은 그를 믿는 우리 성도들이 착한 사마리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곤경과 고통 가운데서 강도만나 자와 같이 도움을 필요라 하는 이웃을 섬길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도움은 그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섬김으로 예수님을 믿어 영접케 할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 성령의 다스림 가운데 충만한 기쁨과 열매의 삶을 살수 있도록 도와주는 영적 영향력일것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바울은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롬.1:14)고 고백 합니다. 그가 무슨 빚을 졌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자신을 찾아오심으로 구원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빚을 졌다는 것 입니다. 그로인해 아직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한 헬라인과 야만인과 모두자에게 있어서 자신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그들에게 돌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자라는 것 입니다. 누가 우리의 이웃 입니까? 아니 여러분은 강도 만난자의 이웃으로 살아 가십니까?바라기는 성도 여러분 모두 사도바울과 같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빚진자 되어 우리 주위에 고통당하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수많은 강도만난 자의 이웃으로 살아가시길 소원 합니다. 그 사랑에 포로가 되어 또 한명의 착한 사마리아인으로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