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e 16, 2019

“너 자신을 사랑하라” (Love yourself!)

Preacher:
Series:
Passage: 에베소서 (Ephesians) 2:10
Service Type:

“너 자신을 사랑하라”

(Love yourself!)

6-16-19

본문말씀: 에베소서 (Ephesians) 2:10

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For we are Gods workmanship, created in Christ Jesus to do good works, which God prepared in advance for us to do)

 

[설교 요약]

오늘 말씀을 통해 이기심이나 자기연민과 같은 육신적인 자기사랑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신의 삶으로 가르쳐 주신 진정한 사랑을 통해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가시길 기대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정한 자기 사랑인가요?” (What is the true self-love?)

첫째,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 (It is to do not deceive myself) 입니다: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는 말은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본다’는 뜻 입니다.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자신을 속이는 2가지 거짓된 자기발견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을 과대포장하는 ‘교만함’ 즉 ‘우월감’이고, 둘째는 자신을 과소포장하는 ‘자기비하’ 즉‘열등감’ 입니다. 우월감과 열등감 모두 거짓된 자기 발견이고, 진정한 자신에 대한 사랑을 가로막는 심각한 장애물 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It is to love God) 입니다: 잠언서 기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 하느니라” (잠. 1:7) 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곧 ‘그분을 사랑한다’는 뜻 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하나님을 먼저 사랑해야 하는 것일요? 사도 요한은 이렇게 선언 합니다. “~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 4:8). 하나님은 사랑이신 것 입니다. 그 사랑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할때, 우리는 사랑을 알수 없는 것 입니다.

셋째, ‘자기를 부인하는 것’ (It is to deny myself) 입니다: 우리 주님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이렇게 도전 하십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눅. 9:23) 라고. 여기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는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한다’는 뜻 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생명을 미워한다’는 뜻이요, ‘이기적인 자아을 죽인다’는 뜻 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역설 입니다.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 (요.12:24)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참사랑을 먼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은혜로 경험함을 통해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그의 자녀되길 소망 합니다.

 

[설교 전문]

주님은 우리가 그분을 믿음으로 진정한 제자로 살아가길 기대하심을 믿습니다. 주님의 제자는 주님의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실천하는 자들 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과 저는 주님의 이 사랑의 명령을 어떻게 실천할수 있을까요? 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선 오직 ‘사랑의 원리’를 따를때 가능하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 사랑의 원리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께서 한 율법학자에게 ‘무엇이 성경에서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인지?’에 대해 대답 하셨던 말씀, 곧 <마태복음 22:35~40> 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바로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 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연결 시키는 것은 ‘나 자신의 사랑’인 것 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이기심이나 자기연민과 같은 육신적인 자기사랑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신의 삶으로 가르쳐 주신 진정한 사랑을 통해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가시길 기대 합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어떻게 우리 성도들이 구원을 얻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오늘 본문이 포함된 <엡. 2장>을 시작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살리셨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바로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엡. 2:1) 는 것 입니다. 우리 모두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마음에 원하는 것을 행하며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지만 (v.3),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 (v.5) 는 것 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함이라는 것 입니다. 그 누구도 행위로 구원받지 못한 것 입니다. 따라서, 이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 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이루게 되었는가?를 사도바울이 설명하는 방식 입니다. 그 누구도 자신의 행위로 구원받은 자는 단 한명도 없다는 것 입니다. 심지어 우리의 믿음까지도 그 믿음으로 인해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 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선물’인 것 입니다. 우리는 지난주 <고린도전서 12장>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 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말씀, 에베소서도 그 주제가 교회, 즉 그리스도의 몸 입니다. 따라서 사도바울은 ‘교회는 언제 그 기초가 놓었고, 교회의 구성원은 누구며, 교회는 어떤 특성들이 있는지’를 잘 설명해 주는 것이 <에베소서> 인것 입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만약 인간이 방황하고 깊은 좌절과 절망 가운데 헤메는 삶을 살게 되었다면, 대부분의 경우 그런 삶의 중심에는 ‘내가 누군가?’에 대한 옳바른 답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물론, 집이 가난해서나, 몸에 어떤 병이 있거나, 인간관계가 잘못되어서도 삶이 힘들고 고통스러울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것은 상황에 따라 변화되는 것 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누군가?’에 대한 물음에 대해 바른 답을 얻지 못할때 청년들은 말할것도 없고, 나이든 사람들도 끊임없는 방황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입니다. 여러분중에 ‘나이 많은 분들이 무슨 방황을 하냐구요?’라고 궁금해 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청년의 시기에 옳바로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더 큰 방황을 하는 것 입니다. 그 방황의 증거가 무엇인지 압니까? 그것이 바로 ‘돈에 대한 집착, 권력에 대한 추구, 육체적 쾌락의 종’으로 전락된 삶이 바로 그 증거인 것 입니다. 우리는 이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수없이 보고 있지 않습니까? 옳바른 자기발견에 실패했기 때문 입니다.

청년의 시기에 자신에 대한 참된 정체성을 발견하지 못할때, 나이가 든다고 자동으로 바른 정체성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닐것 입니다. 오히려 더 나빠질 뿐 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나를 발견하는 것 일까요?” 물론 저는 잘 압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그 사람의 종교, 철학, 지적 상태에 따라 참으로 다양한 대답이 주어질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내가 누구인지?’를 발견할수 있는 첫걸음이자 가장 중요한 관건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당연히 우리 기독교에서도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된 우리에게 명령하신 사랑을 실천하는 기초가 됨을 믿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이어주는 중요한 고리가 바로 ‘자신에 대한 사랑’인 것 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제가 성도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이것 입니다. 무엇이 진정한 자기 사랑인가요?” (What is the true self-love?) 하는 것 입니다. 그것은

첫째,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 (It is to do not deceive myself) 입니다: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는 말은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는다’ 혹은 ‘자기 착각에 빠지지 않는다’는 말이 될것 입니다. 이 말은 곧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본다’는 뜻 입니다. 사실 ‘나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본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사람은 없겠지만, 그 말처럼 살아가는 사람은 매우 적지 않을까하고 저는 생각 합니다.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볼수 있다는 것은 말처럼 결코 쉽지 않기 때문 입니다. 왜냐면, 우리 인간은 우리의 육신 가운데 속한 죄의 유전으로 인하여 비록 예수믿고 거듭난 성도라 할찌라도 끊임없이 스스로를 속이고 거짓에 유혹받는 죄성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 입니다.

지혜의 책이라 일컬어지는 ‘잠언서’에서 어리석은 자, 교만한 자, 그리고 악한 자들의 특징은 자기를 속이고 거짓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자임을 볼수 있는 것 입니다.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잠.1:22) 고 잠언기자는 우리 인간의 어리석고 거만하고 미련한 속임과 자기 착각을 질타하고 있는 것 입니다.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자신을 속이는 2가지 거짓된 자기발견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을 과대포장하는 ‘교만함’ 즉 ‘우월감’이고, 둘쨰는 자신을 과소포장하는 ‘자기비하’ 즉‘열등감’ 입니다. 우월감과 열등감 모두 거짓된 자기 발견이고, 진정한 자신에 대한 사랑을 가로막는 심각한 장애물 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자신을 속이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의 자신을 발견할수 있을까요? 그것은

둘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It is to love God) 입니다: 지혜서, 잠언서에서는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나뉘게 되는 분명한 기준을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 하느니라” (잠. 1:7) 고. 세상의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는 많은 자들은 이런 말씀을 무시하고 가볍게 넘기겠지만, 성경은 분명히 ‘여호와를 경외하는것이 지식의 근본이다’ (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knowledge)라고 선언하는 것 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곧 ‘그분을 사랑한다’는 뜻 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하나님을 먼저 사랑해야 하는 것일요? <사랑의 사도>로 불리는 사도 요한은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선언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 4:7,8) 하나님은 사랑이신 것 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 입니다. 그 사랑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할때, 우리는 사랑을 알수 없는 것 입니다. 그 사랑이신 하나님을 알때, 나는 비로소 사랑을 하게 되는 것 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할수 있는 것은, 그리고 더 나아가 이웃을 사랑할수 있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 입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일. 4:19)

따라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을 진실로 사랑하는 시작’ (The love of God is the beginning of the true love of myself) 이 되는 것 입니다. 사랑은 원리가 매우 중요합니다. 다시말해, 사랑은 순서가 중요한 것 입니다. 내가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해선 먼저 나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한결같은 주장 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자는 자신을 사랑할수 없고, 내가 나를 온전히 사랑할수 없는 자가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할수 없다는 것 입니다. 바로 나를 지으시고 구원하신 그 창조주 하나님을 이해하고 그분을 사랑한 만큼, 내가 누구인지를 더욱 밝히 알아가고 그런 나를 사랑하게 되는 것 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자신을 점점더 사랑해 가고 있습니까?

셋째, ‘자기를 부인하는 것’ (It is to deny myself) 입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과 ‘무엇이 우리 자신을 참사랑 할수 있을것인가?’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자기사랑’은 ‘이기적 자기사랑’도 ‘감상적인 자기연민’도 아님을 우리는 압니다. 매우 역설적이지만, 내가 먼저 내 자신을 이기적으로 사랑하고자 하는 ‘육신적 속한 자아’의 유혹을 거부하지 못할때, 우리는 결코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수 없다는 것 입니다. 이것은 굳이 기독교 뿐만 아니라, 세상 가운데서도 인정되는 진리일 것 입니다. 이기심을 버리고, 타인을 향한 순고한 사랑을 실천한 사람들을 세상사람들도 인정하고 존경하는 이유가 거기 있을 것 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도전하신 핵심일 것 입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눅. 9:23) 라고. 주님의 제자는 ‘주님을 따르는 자’요,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른다는 뜻 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뜻일까요?’ 여러분과 저의 십자가가 어디에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는 그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일까요?

여기서 이 십자가를 이해하는 중요한 ‘key’가 바로 주께서 언급하신 ‘자기를 부인하고’ (deny himself) 라는 것 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다’는 것을 주님은 ‘자기를 미워하다’는 말로 쓰시기도 했고,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 15:31) 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자기를 미워하는 것이, 자신을 죽이는 것이 ‘자기부인’이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지막 질문은, 왜 우리는 자기를 부인해야 하는 것 일까요? 왜냐하면, 우리의 주님은 죽어야 다시 산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 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진리는 얼마나 역설적인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가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 하리라” (요.12:24,25)고 주님은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죽어야 다시 산다는 것 입니다. 자기생명을 미워하면 영생하도록 보존 한다는 것 입니다. 그 이유는 참된 자기 사랑은 거짓된 육신의 사랑을 죽임으로서 시작되기 때문이라는 것 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자기를 부인함으로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자기생명을 미워함으로 진정한 자기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수없이 많은 청년들, 아니 성별과 나이를 초월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겪는 방황과 좌절의 삶을 봅니까? 아니 여러분 자신 안에서 이런 방황과 좌절은 없습니까? 특별히 우리 교회가 관심 가지고 섬기기 원하는 청년들의 끊없는 방황은 어디에서 시작되며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게임과 인터넷중독, 육체적 쾌락에 사로잡힌 인생, 물질적 성공이 곧 행복의 척도라고 믿는 착각등 이런 모든 극단적인 삶의 중심에는 아직까지 자신이 누구인지를 발견하지 못한 때문은 아닐까요? 내가 나를 옳바르게 사랑하지 못하는데서 비롯된 온갖 영혼의 방황이자 절망의 몸부림이 아닐까요?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 모두 어떤 인간과의 비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크신 눈 앞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여러분 될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마음과 성품을 다해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할수 있는 은혜를 누리기 원합니다. 그러할때, 우리 모두는 서로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주님의 몸된 공동체가 될것 입니다. 이런 사랑의 사람들이 모두 될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