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ch 5, 2023

“누가 정죄하리요” (Who Is That Condemns?)

Preacher:
Passage: 로마서 (Romans) 8:33~34
Service Type:

“누가 정죄하리요”

(Who Is He That Condemns?)

3-5-23

본문말씀: 로마서 (Romans) 8:33-34

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Who shall lay any thing to the charge of God’s elect? It is God that justifies.)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가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Who is he that condemns? It is Christ that died, yea rather, that is risen again, who is even at the right hand of God, who also makes intercession for us.)

[설교 요약]

첫 사람 아담의 범죄 이후로 그 원죄를 물려 받은 우리 인간들에게 어쩌면 가장 고통스러운 것의 하나가 ‘죄의식’이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양심은 ‘하나님의 선한 율법을 더듬어 찾아가는 선한 도구’ (롬. 2:14~15)이지만, 때로는 무서운 정죄의 칼날이 되어 우리를 찌르기도 합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이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라고 강하게 반문하는 이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여러분은 이 정죄함에서 자유를 누리십니까?

500여년전 마르틴 루터는 젊은 날 카톨릭 수도사로써 말씀과 기도에 힘썼음에도 끊임없이 자신을 고발하는 정죄의식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로마서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롬. 1:17)는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비로소 정죄함에서 자유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와 죄용서의 관계는 무엇일까요?

  • ‘구원받은 성도도 실수하고 죄를 범한다’는 것 (요일. 1:8)
  • ‘죄는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는 것 (요일. 1:9)
  • ‘성도는 회개함으로 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죄로부터의 자유를 누린다’는 것 (요일. 1:9, 롬 8:1) 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질문하는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What means ‘who is he that condemns’?) 그것은

첫째, ‘그리스도께서 죄값을 모두 갚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값을 담당하셨고,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분이십니다 (롬. 8:34, 히. 4:14)

둘째, ‘하나님은 최고의 심판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자신의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고,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심으로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선물로 주셨고, 그 아들의 보혈로 우리를 의롭다고 선포’하시는 가장 높으신 심판자되신 하나님입니다 (롬. 8:32~33)

셋째, ‘성령이 우리를 죄의 법에서 해방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1-2)고 사도는 선언합니다. 성령의 충만한 은혜로 죄의 권세에서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갈. 5:16-26).

바라기는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죄로부터 해방되었음을 성령의 능력으로 확신함으로 사자같이 담대한 성도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첫 사람 아담의 범죄 이후로 그 원죄를 물려 받은 우리 인간들에게 있어서 어쩌면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은 ‘죄의식’이 아닐까 하고 저는 생각합니다. 끝없이 양심의 가책을 받고, 스스로를 고발하는 정죄함으로 인해 자신을 죄 있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런 ‘죄의식’ (=정죄의식)이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를 이해해 나가는 방법에 있어서는 그 사람의 자라온 환경과 사고방식에 따라 각자 다를 수 있습니다. 많은 세상 사람들은 이런 ‘양심의 가책’ (죄의식)을 인간사회가 만들어낸 <도덕률>에 기인한다고 주장합니다. 원래 인간 속에는 이런 것이 없는데, 인간사회가 만든 <도덕률>로 인하여 하나의 강박관념과 같은 윤리의식을 심어 넣음으로써 우리가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견해에 동의하십니까? 그러나 성경은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와는 달리,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심령 속에 양심 (=영성)을 주셨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로마서 2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서 인간의 본성 안에 ‘하나님의 율법을 행할 수 있는 양심을 주셨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롬. 2:14-15)고 말입니다.

양심은 이와 같이 하나님을 떠난 이방인들에게 조차도 그분의 선한 율법을 더듬어 찾아 나가는 강력한 <선악의 바이오메타>와 같은 도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양심은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선한 마음의 도구이지만, 이것이 때로는 무서운 정죄의 칼날이 되어 우리를 찌르기도 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는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도전하는 핵심이 바로 그것이라고 믿습니다.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라는 사도의 바울의 반문 속에는 ‘우리 각자는 끊임없는 우리를 정죄하는 그 누구로 인하여 양심의 가책과 죄의식 속에 시달리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각한 것은 특별히 예수 믿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런 정죄의식은 자신을 혼란과 영적 침체로 빠트리는 심각한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사도 바울의 메시지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양심은 선한 것이지만, 우리 크리스챤이 이 양심에 대한 바른 영적 분별력이 없을 때는, 도리어 혼란에 빠져 영적 침체를 가져오게 됨을 우리는 경계해야 함을 나누기 원합니다. 그럼으로 우리 성도들이 선한 양심에 대한 바른 이해와 그 양심과 우리 성도와의 올바른 관계를 맺음으로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리라’는 말씀과 같이 심령이 담대하고 흔들림 없는 삶을 누려 나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기대합니다.

저는 오늘 로마서 본문말씀을 묵상하게 될 때, 떠오르는 한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여러분도 잘 아는 <마르틴 루터>입니다. 그는 중세 유럽의 종교적 암흑기를 끝내고 종교개혁의 기치를 높이든 선구자입니다. 그는 로마 카톨릭교회의 신부로서 로마 교회의 비성경적인 가르침에 반기를 들었던 것입니다. 특히 그 당시 로마교회가 <면죄부>를 판매함으로써 성도들의 참된 회개 없는 하나님의 용서와 그분의 죄사함 없는 평화가 주어지는 것처럼 거짓되게 가르친 교회 지도자들을 통렬하게 비판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 가운데 1517년에 ‘비텐베르크 대학’의 정문에 그가 붙인 소위 ‘95개조 반박문’이란 글로 대표 (요약)되는 교회의 비신앙적이고, 비성경적 가르침을 고발한 사건이 발발하는데, 이것이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루터는 그의 평생을 통한 신앙의 모토 (슬로건)가 된 세가지의 ‘솔라’ (Sola/오직)로 시작되는 ‘오직 믿음’ (Sola Fide/ Faith Alone), ‘오직 은혜’ (Sola Gratia/ Grace Alone), ‘오직 성경’ (Sola Scriptura/ Scripture Alone)을 기초로 한 신앙의 삶을 실천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선구자로서의 삶을 살수 있는 동기를 제공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앞서도 제가 언급했듯이 루터는 그 당시 로마 카톨릭교회의 수도사로써 기도와 말씀 묵상을 전념하며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고자 온 힘을 썼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자 힘쓰면 힘쓸수록 더욱 더 자신의 죄에 대해 더 민감하게 되고, 그 죄를 없애고자 참회하면 할수록 그 속에서 끊임없이 생겨나는 죄의식으로 인하여 깊은 절망과 고통에 빠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 바틴칸의 ‘성 베드로성당’의 수십개의 돌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면서 참회했지만, 결코 죄사함의 확신과 평화를 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고행으로는 결코 그를 그 혹독한 정죄함에서 건져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런 영적 혼돈과 방황하던 어느 날 그가 로마서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고, <로마서 1장 17절>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는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놀라운 영적 각성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해주시는 사람의 ‘의’는 그 어떤 행위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을 통하여 얻게 되는 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분의 의로우심을 통하여 얻게 되는 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로마서 3장>에서 사도 바울이 밝히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 (롬. 3:22)인 것입니다. 어떤 인간의 노력과 행위로 얻을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게 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라는 것입니다. 이 의로움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불러 주시고, 죄 없다고 인정해 주시는 복음의 은혜임을 루터는 로마서를 통해 깊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미 500여년전에 우리 앞서 믿음으로 소중한 복음의 진리를 깨닫은 루터에게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로마서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복음의 진리와 은혜를 통해 그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양심을 찌르던 ‘정죄함’에서 비로소 자유함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 로마서 본문 말씀을 통해서 성도 여러분과 함께 깨닫고자 하는 핵심 이유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는 하나님이 주신 선한 양심이라는 도구를 통해 죄에서부터 깨끗함을 받되, 결코 정죄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복음을 통해 알수 있는 성도와 죄용서의 관계는 무엇일지를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그것은 첫째,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성도도 실수하고 죄를 범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으로 둘째, ‘죄는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성도들에게 이점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1:9)라고. 여기서 기독교 안에 존재하는 잘못된 양극단이 있는데, 한 극단은 소위 ‘구원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인데 그들은 ‘만약 예수 믿고 구원받았으면, 믿는 자는 더 이상 죄짓지 않는다’는 잘못된 가르침이요, 또 다른 극단은 앞서 루터의 경우에서 처럼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았으나, 여전히 악을 행하고 죄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육신이 연약하여 이 죄의 강력한 힘을 벗어 날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가지가 모두 비성경적 가르침임을 우리는 분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셋째, ‘성도는 회개함으로 죄 용서받아야 하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의롭다 불러 주시는 은혜를 누린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루터가 깨닫은 복음의 진리라고 믿습니다. 만약 참된 회개를 하나님께 드렸다면 나의 행위나 자격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시고 의롭게 해 주신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힘입어 죄 용서함 받고 깨끗하게 되었음을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 양심을 괴롭히는 정죄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로마서 8장>을 통해 이해하는 것은, 사도가 8장을 통하여 하나님의 택하신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와 사망에서 해방될 뿐 아니라,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된 우리 성도의 영광스러운 신분을 선포하면서, 이제 마무리하는 내용이 오늘 본문을 포함한 <롬. 8:31-39> 말씀이라고 이해합니다. 사도는 <31절>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소주제를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성도가 받게 될 위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위협은 크게 두가지로서, <외부로부터 오는 환란과 핍박>이 있고, 한편 <내면으로부터 오는 ‘정죄의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말씀은 그 중에서 특별히 <내면으로부터의 정죄의식>을 사도가 초점 맞추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라고 그가 반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정죄하는 세력은 물론 외부에서 어떤 인간일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훨씬 강력하게 우리를 정죄하는 세력은 사실 ‘우리 자신’이요, 실제로 ‘우리 자신을 참소함으로 정죄함’에 이르게 하는 악한 영 사단 마귀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단은 자신의 간교한 무기인 <율법에 근거한 참소>를 함으로써 성도의 신앙 양심을 공격하고 끊임없는 죄의식에 사로잡혀 주님이 주시는 죄로부터의 자유를 강탈하고, 또 다시 우리를 죄의 법 아래 가두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이렇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v.33-34a)라고 말입니다.

이제 저는 사도가 선언한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 (Who is he that condemns?)는 반문의 의미를 함께 묵상해보면서 ‘성도와 정죄함’의 관계를 이해함으로 주께서 주시는 자유를 깨닫게 되길 원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What means ‘who is he that condemns’?) 그것은

첫째,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값을 모두 갚으셨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누구도 우리 성도를 정죄할 수 없는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가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v. 34)고. 우리 주 예수께서 갈보리 언덕에서 그의 살을 찢으시고, 그의 보배로우신 피를 흘림으로서 그를 믿는 모든 자를 소극적으로는 죄사함 받게 하시고, 적극적으로는 의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그를 믿는 우리 모두를 구원하여 주실 뿐 아니라, 이제 하나님 아버지 보좌 우편에 계셔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께서 유월절 어린양이 되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을 뿐 아니라, 자신이 친히 대제사장 되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날마다 나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성도를 격려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히. 4: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실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사함 받기에 부족함이 조금도 없도록 주님은 우리의 죄값을 모두 당당하신 것입니다. 그럼으로 누구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의 최고의 심판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 주의해서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에 관한 개념>입니다. 그것은 곧 ‘심판자로서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v.33)라고. 여기서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는 표현은 그 무엇보다도 <법적인 용어>로서 <하나님의 심판자>되심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의롭다’ (justify)는 것은 ‘죄가 없다’ (not guilty)는 뜻의 적극적인 법적 용어로서 어떠한 인간이나 천상의 천사를 포함한 심판자 중에 최고의 심판자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자녀를 ‘죄 없다’하시고 그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법정에서의 선언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 날, 우리를 법정 앞에 세우셔서 최종적으로 심판할 가장 상위의 심판관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는 한가지 놀라운 진술을 오늘 본문 바로 앞절에서 하고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v.32)라고. 무슨 뜻일까요?! 한번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살리기 위해 그의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를 대신 죽도록 내어 주기를 아까워하지 않으셨다면, 이제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실 것을 의심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최종적인 재판관이 되어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데, 감히 누가 우리를 정죄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고 바울은 강하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성령이 우리를 죄의 법에서 해방하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루터가 진정한 정죄로부터의 자유와 의인로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누리게 된 것은 성령님의 도우시는 은혜임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된 <로마서 8장>을 시작하면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성도의 두가지 특권, ‘죄와 죽음’으로 부터의 자유를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1-2)고 말입니다. 사도는 우리 성도가 그 누구에게도 결코 정죄함을 받지 않는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을 통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가 자유 (해방)케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법’은 ‘힘/능력’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생명의 성령의 능력으로 인해 죄와 사망의 힘에서 우리가 자유케 되었다”라고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며 제가 성도 여러분에게 질문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어떻게 사도 바울은, 그리고 마르틴 루터는 자신이 예수의 피를 통하여 죄와 사망에서 해방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이 바로 성령님의 도우시는 능력이 아니었을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셨던 것처럼 ‘우리 성도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게 하고, 죄로부터 자유케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시간 살펴본 것처럼, 성령의 충만하신 은혜와 능력을 통해 그분의 통치하심을 받는 것은 우리 성도의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반드시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다른 모든 사역과 더불어 오늘 말씀의 주제가 되는 ‘성도가 정죄함을 받지 않고, 사자같이 담대한 의인의 삶’을 살 수 있는 열쇠도 결국 ‘성령의 은혜’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이 복음의 진리를 우리의 영혼 깊이 깨닫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스스로의 죄의식과 악한 영의 참소에서 지켜 주실때 우리는 담대한 의인의 삶을 누려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즘 한국에서 유행하는 말 중에 이런 영화 대사가 있습니다. “나 떨고 있니?!”라고. 무슨 뜻일까요? 속으론 두려움에 떨고 있지만, 겉으론 안 그런척 표정관리 하는데 그것이 마음처럼 잘 안된다는 것이겠죠?! 저는 성도 여러분과 표정관리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속으론 양심의 가책을 받고, 두려움에 떨면서, 겉으론 “내게 강같은 평화”라고 거짓된 웃음지으며 연기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믿는 것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의 복과 은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독생하신 아들을 통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비로소 죄의 권세에서 자유케 된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사람도, 사단 마귀도, 하늘의 천사까지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는 의인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자같이 담대한 의인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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