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ruary 26, 2023

“성령의 충만함을” (Be Filled With The Spirit)

Preacher:
Series:
Passage: 에베소서 (Ephesians) 5:17~18
Service Type:

“성령의 충만함을”

(Be Filled With The Spirit)

2-26-23

본문말씀: 에베소서 (Ephesians) 5:17-18

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Therefore do not be foolish, but understand what the Lord’s will is.)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Do not get drunk on wine, which leads to debauchery. Instead, be filled with the Spirit.)

[설교 요약]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이어 ‘성령 충만’을 주제로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성도를 향한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도전합니다.

먼저 ‘성령은 누구십니까? 성령은 ‘삼위일체의 하나님’ (The Trinity God)이십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과 함께 성삼위 하나님의 세번째 위격에 해당하는 거룩한 성령 하나님입니다. 성령이 단순히 힘 혹은 능력과 같은 ‘비인격적인 하나님의 능력’이 아닌 것입니다.

한편 ‘성령의 사역은 무엇일까요?’ 그분의 사역은 성부하나님의 뜻을 따라 존재하는 모든 것을 지으신 ‘창조사역’ (창.1장)과 성도를 거듭나게 하는 ‘구원사역’ (요.3장),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세상을 책망’하시는 ‘보혜사’로서의 사역을 하십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에베소 성도를 향해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엡. 5:17)고 도전합니다. 그 이유는 사도가 <엡.5장>을 시작하면서 ‘너희는 사랑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임으로 빛된 자녀로서 합당하게 행하라’ (엡.5:1~8절)고 그들을 격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본문에서 합당한 자녀의 삶을 살기 위해선 “세월을 아껴야” (엡.5:16)하고, 세월을 아끼기 위해선 ‘오직 주의 뜻을 이해해야’함을 (엡.5:17) 사도는 영적 논리로 설명합니다. 이것이 “성령충만을 받아야 하는 이유임을 사도는 선언하는 것입니다. 성령충만 받을 때, 비로소 주의 뜻을 분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한편 ‘성령충만’이란 무엇일까요? <웨스트민스트사전>에는 “크리스챤 성도의 삶에서 성령의 통제와 인도 아래 있는 상태”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말씀에서 “무엇이 성령충만을 통한 변화인지?”를 사도는 설명합니다. 그것은

  • ‘찬양의 삶을 살게’ (v.19)
  • ‘감사로 제사를 드리게’ (v.20)
  • ‘자원함으로 복종하게’ (v.21)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성령충만을 받을수 있을까요?

첫째,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서 입니다 (신.6:4-5)

둘째, “죄를 회개함”으로서 입니다 (시. 51편)

셋째, “성령께 순종함”으로서 입니다 (갈. 5:16)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 모두 거룩하신 성령님을 아는 지식에서 더욱 더 자라감으로 성령님의 통치 아래 순종함으로, 날마다 그의 충만을 누려 나가는 복된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는 지난 시간 주께서 한 사마리아여인과의 대화 가운데 무엇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인 것인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주께서 그녀에게 약속하신 그 생수는 곧 ‘영생의 구원을 약속하시는 예수님 자신’이요, 동시에 ‘약속의 성령’이십니다. 다시 말해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문제제기하는 것은 주께서 목마르지 않은 생수를 약속하신 <사마리아 여인> 대신에 <우리> 각자를 대입하면 어떠냐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 그분의 제자를 살아간다면, 나 또한 그 생수를 마시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생수는 결론적으로 성령충만을 받는 것임을 저는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성령충만을 받으셨습니까? 오늘 저는 사도 바울의 에베소 성도를 향한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말씀을 통해 ‘무엇이 성령충만이고, 어떻게 그 충만을 받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성도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성령충만에 대해 본격적으로 살펴보기에 앞서 몇 가지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성령은 누구시고, 왜 우리는 성령충만을 받아야 하는가?’하는 점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우리 성도가 분명하게 이해해야 하는 것은 ‘성령은 누구신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성령에 대한 바른 인식이 매우 중요한 이유는 성령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출발하게 될 때, 그 이후에 이어지는 모든 성령에 관련된 현상 (=사역)을 우리는 그릇된 시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은 누구십니까?’ 성령은 ‘삼위일체의 하나님’ (The Trinity God)이십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과 함께 성삼위 하나님의 세번째 위격에 해당하는 하나님이 성령님 이십니다. 성령님은 흔히 생각하듯 어떤 ‘에너지’나 ‘힘’과 같은 비인격적인 하나님의 능력이 아닙니다. 그럼으로 이점을 생각할 때, 소위 성령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하는 식으로 ‘성령을 받으라’고 성령을 부리는 듯한 잘못된 태도는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성령님은 삼위일체의 거룩한 하나님임을 알았다면, 성경에 나타난 그분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먼저 성령님은 <창세기 1장>에서 나타나듯이 하나님께서 첫 천지창조의 역사를 시작하시는 순간에서부터 혼돈되고 공허한 우주 가운데 수면에 운행하시며 <창조 사역>을 담당하신 것입니다 (창. 1:1-2). 또한 예수께서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밝히셨듯이. 인간이 ‘거듭나게 되는 것’ 곧 ‘구원 얻게 되는 것’은 어떤 인간의 노력과 행위 이전에 성령의 <구원 사역>으로만 가능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 3:5)라고 말입니다. 성령님은 인간이 참된 회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분입니다. 이 뿐 아니라, 주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하시면서 그가 오셔서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자신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들이 생각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오셔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요. 16:8)고 주님은 성령님의 사역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성령의 사역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인가?”하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구원받기 이해 성령의 도우심이 반드시 있어야 함’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알겠는데, 그렇다고 구원받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성령은 성도에게 있어서 절대적으로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인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다’라고 분명히 선언함을 저는 믿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구원받은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힘주시면 좋겠지만, 않 도와주셔도 상관없는 존재’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점이 그 무엇보다도 “왜 우리 크리스챤이 성령충만을 받아야만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챤은 결코 성령의 도움없이 스스로 영적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육신의 소욕과 악한 영과 싸워 승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이해했다면, 성령충만을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말씀 <엡. 5:17-18>에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을 향해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v.17)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난해 <에베소서 강해>를 통해 자세히 살펴 보았지만, 오늘 본문말씀 이 포함된 <에베소서 5장>말씀에서 우리가 한가지 기억해야 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가 5장을 시작하면서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엡. 5:1)라고 에베소 성도들을 격려합니다. 그리고나서,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엡. 5:8)라고 그들을 사도는 도전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오늘 본문에 이르도록 사도가 계속해서 발전시켜 나가는 영적 논리는 ‘만약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빛된 자녀가 되었다면, 신분만이 아니라 그 신분에 걸맞은 하나님을 본받는 빛의 자녀로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빛의 자녀로서의 합당한 삶을 살아 갈 것인가?”가 이어지는 <엡. 5장 후반부> (15~33절)와 <6장 20절>까지의 주제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런 빛의 자녀의 삶을 살기 위해 사도는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 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15절). 그리고나서 이런 지혜로운 삶은 그 어떤 것보다도 이 악한 세상 가운데 ‘세월을 아낄 수 있는가!?’로서 결정되는 것임을 사도는 밝힙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v.16)라고 말입니다. 말로 만이 아니라, 이 악한 세상 가운데 세월을 아낄 수 있을 것인가가 진정한 영적 지혜를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된 특징이라면, 어떻게 세월을 아낄수 있을까요?

거기에 대한 대답이 오늘 본문의 <17절>입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허락하신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진정으로 세월을 아끼는 길이요, 그분의 빛된 자녀로 살아가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사도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v.18)고 이어지는 말씀에서 도전하는 이유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요, 또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의 충만하신 은혜와 도우심 없이는 그 누구도 ‘주의 뜻을 분별할 수 없고, 그럼으로 세월을 아낄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도 여러분이 기억하셔야 하는 것은 지금 사도가 믿지 않는 불신자를 대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에베소 성도들에게 이것을 도전한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하나님의 자녀도 성령충만을 받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빛된 자녀로서의 합당한 삶을 살수 없다고 말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무엇이 성령충만한 상태이며, 어떻게 성령충만을 받을수 있을까요?” 먼저 ‘성령충만’을 신학사전의 정의로 보면, “크리스챤 성도의 삶에서 성령의 통제와 인도 아래 있는 상태” (Christian believer’s life as under the direction and control of the Holy Spirit)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 자라” (행.11:24)라고 바나바를 소개하고 있으며, 또한 사도 바울의 경우는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행. 13:9)라고 하고, ‘이고니온’의 주님을 믿는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행. 13:52)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영적 지도자였던 바나바와 바울이나, 그리고 이고니온 교회의 주님의 제자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데, 이 말은 그들이 ‘성령의 통제와 인도 아래 살았음’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에서 기록된 성령충만의 예로서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19~21절> 말씀에서 그것을 잘 확인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성령충만을 통한 변화일까요? 그것은 첫째) ‘찬양의 삶을 살게’됩니다.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v.18)고 도전하고 난 다음,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v.19)라고 권면합니다. 저는 성령충만을 받게 된 개인이나 공동체에게서 첫번째로 발견하게 되는 변화는 그 무엇보다도 잃어버렸던 내 마음의 노래가 회복되고, 주를 향한 찬양이 넘쳐 흐르게 됨을 보게 됩니다. 이와 같이 성도의 심령 깊은 곳에서 흘러 넘치는 기쁨과 영혼의 노래가 성령충만의 역사인 것입니다. 바로 지난 시간 주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약속하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 (요. 4:14)요, 명절 끝날 외치신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요. 7:38)는 약속의 성취가 성령충만인 것임을 저는 믿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충만하게 통치하실 때, 우리는 기쁨으로 주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둘째) ‘감사로 제사를 드리게’됩니다. 성령충만 받은 성도의 삶의 열매는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감사로 넘쳐 흐르는 것임을 저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v.20)라고 바울은 성도들을 축원합니다. 시편에 보면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시. 50:23)고 하나님은 선언하십니다. 신.구약 성경 뿐만 아니라 제 주위를 통틀어 저는 성령의 충만을 받은 자가 하나님께 불평. 불만을 토로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께 넘치는 감사를 하는 것입니다. 입술로만 하는 립 서비스가 아니라, 진심으로 하나님을 향한 감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이런 넘치는 감사의 제사는 우리 인간의 자연적인 마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육신에 속한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령의 충만한 열매로 가능한 것입니다. 셋째) ‘자원함으로 복종하게’됩니다. 우리가 성령충만에 있어서 놓쳐서는 안되는 한가지가 ‘믿음의 공동체’를 통한 성령충만의 역사입니다. 2천년 교회역사를 통해서 수없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도 교회 공동체의 영적 부흥은 바로 ‘성령의 충만’하신 역사임을 알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충만의 진정한 역사는 그것이 처음엔 소수의 성도에게서 시작했을지라도, 급기야 교회 공동체로 놀랍게 확산되는 것입니다. 작게 붙은 불이 삽시간에 온 산으로 옮겨 붙듯이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v.21)는 명령형태의 사도의 권면 가운데 공동체에 임하는 성령충만의 열매가 무엇이 될 것인가를 사도는 에베소 성도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한 공동체는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언제나 경외함으로, 그분의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서로 섬기고 복종함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갈. 6:2).

이제 마지막으로 어떻게 성령충만을 받을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서 입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본데로, 사도가 에베소 성도들에게 ‘성령충만’ 받을 것을 도전하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 그 빛된 자녀에 합당하게 살아가기 원한다면,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성령충만을 받고자 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우리를 심히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로서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라면, 그 자녀의 합당한 삶은 어디서 출발해야 할까요?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해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 어떤 것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할 수 없도록 이것을 가로막는 영적 우상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백세에 얻은 이삭을 하나님께 드렸듯이, 우리는 늘 깨어서 온 마음과 목숨을 다해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이 성령충만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일 것입니다. 그 어떤 댓가를 지불해서라도 말입니다. 둘째, “죄를 회개함”으로서 입니다. 구약의 등장하는 성령충만 했던 여러명의 성도들 중에서도 다윗은 가장 풍성한 성령충만의 은혜를 입었던 대표적인 인물임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시편에 보면, 다윗왕이 충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하고서,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 그를 꾸짖으셨을 때, 그가 취한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시. 51:11)라고 울부짖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했을 때 성령께서 그 안에서 소멸되어 가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범죄함으로 인해 성령께서는 더 이상 충만하게 그에게 역사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이제 다윗은 자신의 죄를 숨김없이 고백함으로 다시 성령충만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시. 51:3,7)라고 말입니다. 나의 허물과 죄를 거짓 없이 회개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성령께 순종함”으로서 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사도 바울이 성도들에게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촉구하고 있는데, 이 성경 원문인 헬라어는 ‘플레루스테’입니다. 이 단어는 <현재/수동태/명령형>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현재>는 성령충만이 ‘현재진행 상태로 계속해서 충만하라’는 것이고, <수동태>는 우리 인간의 인위적인 체험이 아니라 성령이 주체가 되어서 우리를 다스려 나가심을 뜻하며, 그리고 <명령형>은 모든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하나의 선택사항이 아니라 반드시 받아야 함의 강조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성령의 지속적인 통치하심과 인도를 받는 것이 성령충만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여러 교회성도들에게 경고하듯이, 만약 우리가 ‘성령을 소멸’시켜 가거나 (살전. 5:19)나 ‘성령을 근심’시킨다면 (엡. 4:30) 결코 성령의 충만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거스리고 훼방함으로 그분을 근심케 하거나 소멸시키는 죄를 범치 않고, 도리어 성령으로 충만케 되기 위해선 성령께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께 순종해야 할 필요성’을 사도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설명하면서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 5:16)고 도전합니다. 비록 자아가 죽는 아픔과 십자가를 지는 고통이 있을지라도 성령을 좇아 행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직시해야 하는 한가지는 우리의 육에 속한 본성은 결코 성령을 기뻐하지 않고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후에도 말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분명한 결단을 통해 나의 모든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사로잡아 성령님께 가져와야 합니다. 성령께서 나를 다스려 주시기를 간구하며, 온 힘을 다해 성령을 사모하며 그를 좇아 가야하는 것입니다. 이런 성령을 향한 전적인 신뢰와 순종을 통해 성령님은 충만이 우리에게 임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성령충만을 받으셨습니까?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약속하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 곧 성령충만을 받으셨습니까?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 모두 거룩하신 성령님을 아는 지식에서 더욱 더 자라감으로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않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점점 더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함으로, 날마다 나의 허물과 죄를 겸손히 고백하고, 거룩하신 성령님의 통치 아래 순종함으로 약속하신 성령의 충만을 누려 나가는 복된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