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ruary 19, 2023

“목마르지 않는 생수” (Living Water, Never Thirst Again)

Preacher:
Series:
Passage: 요한복음 (John) 4:14~15
Service Type:

“목마르지 않는 생수”

(Living Water, Never Thirst Again)

2-19-23

본문말씀: 요한복음 (John) 4:14~15

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But whoever drinks the water I give them will never thirst. Indeed, the water I give them will become in them a spring of water welling up to eternal life.”)

15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The woman said to Him, “Sir, give me this water so that I won’t get thirsty and have to keep coming here to draw water.”)

[설교 요약]

            복음서에서 보면 예수께서 한 사마리아여인을 만나신 아름다운 사건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녀가 처음부터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것은 아닙니다. 도리어 주님을 의심의 눈으로 보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그 대략은 이렇습니다.

  1. 예수께서 우물가에서 만나 “물을 좀 달라” 말씀하실 때 ==> 그녀는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v.9)라고 경계를 늦추지 않습니다
  2. 또한 예수께서 “네가 만일 ~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v.10)고 말씀하실 때도 ==> “물 길을 그릇도 이 우물도 깊은데 어디서 생수를 얻겠습니까” (v.11)라고 부정적 반응을 보입니다
  3. 그리고 주께서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v.14) 하셨을 때 ==> 그녀는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v.15)라고 답합니다

<15절>은 ‘정말 그렇다면, 나로 목마르지도 않고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한번 해보세요!?’라는 식의 의심에 찬 반응인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내 남편을 불러오라”하시고, 그녀가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했을 때,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 되도다” (v.17a-18)라고 주님은 엄청난 말씀을 하십니다. 그녀의 과거와 현재를 꿰뚫어 보시는 주님인 것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그녀는 자기 앞에 서신 분이 “메시야 곧 그리스도”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제 그렇다면, 무엇이 예수께서 여인에게 약속하신 생수인지?를 살펴봅시다. 그것은,

  • 예수님 자신”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전날밤 제자들과 성만찬을 행하시며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느니라)” (요. 6:53-54)고 선언하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영생하시는 생수 되심을 말씀하십니다.
  • 성령”입니다: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신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시니” (사. 44:3)라고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목마른 영혼을 성령으로 만족케 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 성령충만”입니다: 주께서 약속하신 목마르지 않는 생수는 단순히 성령 받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요. 7:37-38)고 주님은 성령의 충만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음시간에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임한 성령충만의 역사를 통해 “어떻게 주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충만을 받을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설교 전문]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만나신 여러명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이런 저런 육신의 질병과 귀신들려 고통받는 자들을 주께서 안수하여 치유하셔서 그 육신과 영의 고통에서 자유케 하신 것입니다. 이들 중에서도 한 사마리아 여인,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마리아의 ‘수가성’이라는 곳에서 주께서 만나신 한 여인은 제가 이 말씀을 읽을때 마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성경인물입니다. 비록 육신의 질병은 없었지만, 추측건대 그녀의 그 파란만장한 삶의 굴곡으로 인하여 깊은 마음의 상처와 고통 그리고 이웃으로부터의 온갖 멸시를 받으며 살아가야 했던 그녀의 삶은 그 누구보다도 힘겨운 삶임에 틀림없었던 것입니다. 그 어그러진 삶의 한 가운데서 벗어나길 그녀가 간절히 원했을 것임을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이런 그녀에게 어느날 문득 한 유대인 남자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주님은 그녀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v.14)라고. 저는 이번 시간과 다음 시간, 두번에 걸쳐 ‘성령충만’이란 주제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그 첫째주로서 주께서 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약속하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가 무엇인가를 중심으로, 그리고 다음 시간에는 “신약에 기록된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을 중심으로 성령충만은 무엇이며, 우리가 어떻게 이 충만을 받아 누려 나갈 것인지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요한복음 4장>이 시작하면서 나오는데, 어느 날 주께서 유대지역을 떠나서 다시 갈릴리 지역으로 가시는 길이었습니다. 지형적으로 볼 때, 주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지역에서 주께서 사셨던 갈릴리지역으로 가기 위해선 반드시 사마리아지역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v.4). 그런데 만약 사마리아를 거치지 않고 갈릴리로 가고자 한다면, 유일하게 한가지 가능한 방법은 우측의 요르단지역으로 상당히 우회하여 빙돌아서 가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우회하는 길을 택하지 않고, 곧바로 사마리아지역을 통과하는 길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 당시의 상황에서 본다면,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여러분 가운데서도 아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의 오래된 갈등과 대립으로 인하여 결코 상종치 않는 대상으로 그들을 낙인 찍은 것입니다. 그 중심되는 이유로는 첫째 북 이스라엘의 수도에 해당했던 사마리아 백성들은 BC 722년에 앗시리아로 부터 지배당했을 때 ‘인종혼혈정책’을 통해 유대인의 순수성이 상실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이 더 이상 예루살렘의 하나님 성전에서 제사 드리지 않고, 사마리아 땅의 그리심 산에서 자기들 임의로 성전을 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이것이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께 대한 지극히 잘못된 제사요 배교행위라고 판단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마치 개처럼 취급하여 여행할 때도 사마리아 땅을 밟지 않고자 멀리 요르단지역으로 돌아가는 수고를 감수 하고라도 그들과 상종치 않고자 하는 강한 적개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두 민족의 여전한 갈등상황 속에서, 어느 날 주님은 제자들과 갈릴리 땅으로 가는 길을 놀랍게도 사마리아 땅으로 정하신 것입니다. 소위 유대인들의 금기시된 ‘통로’를 택하신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주님은 사마리아성의 ‘수가’라고 하는 동네에 이르렀습니다. 이 수가성은 창세기에서 야곱이 형 에서를 다시 만난 후 머물렀던 곳, ‘숙곳’이라고 성경학자들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수가성은 옛적부터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에 또 <야곱의 우물>이라 불리는 우물이 있었던 곳’입니다 (v.5-6). 그리고 오늘 메세지의 중심이 되는 사건은 이 우물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완전하신 하나님이자, 완전하신 인간이기에 길을 가시다가 지치고 목마르셔서 바로 ‘야곱의 우물’이라 불리는 우물 곁에 앉아 잠시 쉬셨습니다.

그때가 <제 육시> 곧, 중동지역에서는 해가 한창 뜨거운 시간 (물론, 어떤 신학자는 다른 시간으로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인 정오인 것입니다. 이런 태양 볕이 작렬하는 팔레스타인의 대낮에는 사람들이 아무도 물 길러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대부분 이른 아침이나, 해가 질 무렵 저녁시간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뜨거운 대낮에 ‘야곱의 우물’에 물 길러 나온 것입니다. 사람의 시선을 피해 물 길러 나온 것입니다. 어찌되었건 그녀가 우물에 와서 물을 길으려는 그때, 예수님과 마주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말씀하십니다. “물을 좀 달라” (Give me to drink) (v.7)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그녀와 만나 ‘물 좀 달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그녀와의 만남은 우연한 만남일까요? 물론 결코 ‘우연’한 만남이 아닙니다. 이 만남은 예수께서 그녀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분의 신적 능력으로 예정하신 만남인 것입니다. 이것을 영어로는 ‘divine appointment’ 라고 합니다. ‘신적 약속’ (=신령한 약속)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장면은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의 하나임에 틀림없습니다. 주님은 그녀에게 “물 좀 달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녀와의 놀랍고 아름다운 만남은 이어집니다.

그녀는 주께 ‘물을 주겠다 혹은 말겠다’는 말대신에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v.9)라고 반문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유대인들은 그 당시 집밖에서는 가족이라 할찌라도 남녀지간에 대화를 나누지 않는 것이 하나의 상식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제가 앞서 설명 드린 것처럼 유대인들은 불행한 역사적 사건들로 인해 사마리아인들과는 상종도 하지 않는 상황에서 더욱이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고자 하는 유대인남자는 가히 상상하기 힘든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여인이 경계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고 ‘유대인 남자인 당신이 어떤 일로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말을 거는 겁니까?!’라고 반문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인의 자신을 대하는 태도와 심적 상태를 모르실리 없는 주님은 이렇게 그녀에게 대답하십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v.10)고 말입니다. 이런 주님의 말씀은 묘한 말씀이 아닐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물 좀 달라’고 구하는 사람은 예수님이지만, 만약 ‘그녀가 예수님이 누구신줄 깨닫는다면, 도리어 주께 구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생수’ 곧 ‘살아있는 물’>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예상하듯이, 이런 주님의 답변에 대해 그녀는 잘 이해도 안될 뿐더러 더욱 구체적으로 주님께 반박합니다. 그것이 <11-12절>에 나와 있는 내용인데, 쉽게 말하면 ‘여기 물길을 두레박도 없는데 당신이 어떻게 생수를 퍼서 내게 주겠다는 겁니까? 그리고 당신이 이 우물을 판 우리 조상 야곱보다 더 큽니까?!’라고 반발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호락호락하지 않은 여인입니다.

그 말에 대해 주께서 이렇게 응답하십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v.13-14)라고. 이런 주님의 말씀에 대한 그녀의 대답이 오늘 본문의 <15절>말씀인 것입니다. 그녀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v.15)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여인이 하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줄 이해하시겠습니까? 저는 여러 해 전에는 이 말의 의미를 그녀가 주님의 말씀을 믿고 감격해서 “오 주님, 그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저에게도 주소서”라는 식으로 그녀가 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말씀을 계속해서 묵상해 가면서 깨닫게 된 것은 <15절>에서 그녀의 반응은 주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통한 간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녀는 더욱 주님에 대한 불신과 냉소적인 태도로 가득찬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을 저는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지금 그녀는 사실상 이렇게 강한 어조로 응답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요, 당신이 내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줄수 있다고요? 그럼 말만 하지 말고, 한번 줘 보세요!? 그래서 내가 이제 더 이상 그 지긋지긋한 남의 눈총을 받으며 이 우물에 나오지 않아도 되고, 두번 다시 목마르지도 않게 한번 해보세요!?”라고 매우 부정적이요 도전적으로 주께 반응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주님은 불연듯 이렇게 한마디 툭 던지십니다. “내 남편을 불러오라” (v.16)고 말입니다. 그녀는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 (v.17a)라고 대소롭지 않다는 듯이 답했고, 주님은 그녀의 말에 대해서 이렇게 답하십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 되도다” (v.17a-18)라고. 이 주님의 한마디는 그녀의 영혼을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한문장으로 정리한 그녀의 과거와 현재의 깊은 삶의 고통과 문제의 중심에는 ‘남편 다섯이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현재 함께 사는 자도 남편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가 원했건 원치 않았건 관계없이 그동안 다섯명의 남편과 갈라서야 했고, 지금 같이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쉽게 말해, 혼인하지 않고 동거하는 ‘간음죄’에 해당하는 부정한 관계의 삶을 현재도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자신의 지난 날의 모든 부끄러운 과거를, 아니 현재까지의 숨기고 싶은 모습을 모두 거울 들여다보듯 하는 자기 앞에 선 한 사람 (주님)에 대해 그녀는 얼마나 큰 충격과 놀라움에 사로잡혔을까요?! 이런 주님의 말씀은 결코 사람이 할 수 없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주님을 비로소 진지하게 바라보며 이렇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합니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v.19)라고.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그녀가 태어나서 단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그분, 자신의 삶 전체를 손바닥 들여보듯이 꿰뚫어 보는 그분은 결코 평범한 인간이 아님을 그녀는 직감적으로 깨닫았던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그녀의 예수님에 대한 인식이 순식간에 변화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처음엔 유대인의 ‘선생’ (Sir) (v.11,15)정도라고 생각했던 것이, 이제 ‘선지자’ (prophet) (v.19)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지자와 같이 하나님의 신적 능력을 덧입지 않고는 결코 자신의 전인생을 꿰뚫어 보는 초인적인 예지의 능력을 행할 수 없음을 그녀는 직감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그녀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충만한 능력을 덧입은 선지자로 인식하고 나서는 대화의 태도와 내용이 180° 바뀌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v.20)라고. 왜 이 여인의 태도와 대화의 내용이 이토록 바뀐 것일까요? 마치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기 전에는 학생들이 친구들끼리 낄낄거리고 큰소리치며 장난치다고, 선생님이 들어오니까 갑자기 정숙해지고 점잖은 학생으로 돌변하듯이, 지금 이 여인도 예수님을 선지자로 인식하고서는 좀 잘 보이려고 연기하는 것일까요? 물론 그것이 아닐 것입니다. 아마도 그녀는 비록 평생 처음일수도 있겠지만 그녀의 마음 깊숙히 묻어둔 깊은 갈망을 토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 돌아 가는 것’이요 ‘하나님께 구원받기 원한다는 것’인데, 이것을 다르게 말한다면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부지불식 중에 크리스챤의 가장 중요한 문제를 질문한 것입니다. 바로 “무엇이 진정한 예배인가?”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v.21,23)라고. 주님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된 예배는 장소의 문제도 아니요, 형식의 문제도 아니요, 거짓없는 진실한 영과 마음 중심으로 드리는 진리의 예배임을 그녀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나서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v.25)라고 그녀가 말했습니다. 이런 그녀의 말에 주님은 무엇이라고 답하시는 줄 아십니까?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v.26) 무슨 말씀입니까? 주님은 이제 그녀에게 “네가 방금 말한 메시야 곧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알려줄 그리스도가 바로 네 앞에 있는 나다”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사실은 그녀가 이제 더 이상 주님의 말에 의심의 눈초리나 부정적인 대꾸를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제 그녀가 또 한번 더 주님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순간입니다. 곧 하나님의 ‘선지자’에서 ‘그리스도’ (Christ)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과 대화 나누시는 이분이 바로 그녀 자신과 자신의 동족 사마리아인들이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메시야 곧 그리스도임을 깨닫고 즉시 동네로 달려가서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 들고 있던 물동이를 던져두고, 동네사람들에게 뛰어가서 이렇게 외치는 것입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v.29)하고 말입니다. 여기까지가 예수께서 사마리아의 한 여인을 만나주시고 그녀에게 자신이 그리스도 되심을 나타내 보이신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주께서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에서 행하신 것은 무엇일까요? 주님은 과연 그녀에게 무엇을 행한 것일까요? 그것은 주께서 그녀와의 대화에서 말씀하셨듯이 ‘하나님의 선물’ 곧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v.10~14). 이제 저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무엇이 예수께서 여인에게 약속하신 생수인지?”에 대해 살펴보기 원합니다. 그것은

첫째, “예수님 자신”입니다: 주님은 그녀와의 대화를 시작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v.10) 그렇다면, 여기에서 주께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선물’은 무엇을 뜻할까요? 그 선물은 ‘하나님의 예비하신 구원’ 혹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의 선물중의 선물은 그분의 독생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습니다. 그 독생하신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음으로 우리를 살리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그 외아들을 내어주신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너무도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 독생자를 죽음에 내어 주시기까지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는 주님의 복음중의 복음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선물이요, 영원한 생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인 것입니다. 지난번 주께서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고 선언하셨을 때 살펴본데로, 주님은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요. 6:53-54)라고 선언하심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자신이 약속하신 영원한 생수가 되시는 것입니다.

둘째, “성령”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우리가 구원받은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그리스도의 사람’ (=그리스도께 속한 자)이라는 개념으로 정의합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 8:9)라고. ‘그리스도의 사람’ 즉 ‘그리스도인’ (=크리스챤)은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이 그 존재 안에 거하시며 사람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신학적으로 규정할 때,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 곧 ‘거듭난 성도’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핵심점은 ‘성령이 그 사람안에 거하시는 가?’하는 점입니다. 이것이 주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날 밤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인 것입니다 (요. 14-16장).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을 통해 우리 성도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주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임을 주님은 약속하신 것입니다 (요. 14:26). 구약에서도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이렇게 우리 목마른 영혼을 성령으로 만족케 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신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시니” (사. 44:3)라고 우리 영혼의 생수되신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셋째, “성령충만”입니다: 주께서 명절 끝날 서서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요. 7:37-38) 그리고 나서 저자 요한은 이렇게 주석을 달았습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 7:39)라고 말입니다. 여기 <요한복음 7장>에서 주님이 명절 끝날 선언하신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는 말씀과 오늘 본문의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 하리니”라는 말씀은 상당히 의미가 통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 주께서 오늘 말씀에서 약속하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나 <요. 7장>의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는 상태’는 결국 ‘성령충만’한 성도의 상태임을 알수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성령께서 내 안에 거하시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충만하여 넘치시도록 나를 다스려 나가시는 상태입니다.

오늘 주님의 사마리아 여인을 향해 약속하신 ‘목마르지 않는 생수’은 결론적으로 ‘성령의 충만’을 통해 그녀가 누리게 될 영적 기쁨과 만족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음 시간에 좀더 깊이 주께서 여인에게 약속하신 성령충만은 어떤 영적 상태이며, 어떻게 이런 성령충만을 받아 누릴 수 있을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를 믿고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뿐 아니라, 약속하신 성령님의 충만을 누려 나가고 있습니까?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거역함으로 그분을 근심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충만하게 다스려 나가실 수 있도록 그분의 통치 안으로 들어가는 있습니까? 바라기는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 세상이 줄수도 빼앗을 수도 없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날마다 마시게 되며,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는 은혜의 역사를 경험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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