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12, 2020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 (Timothy and Epaphroditus)

Preacher:
Passage: 빌립보서 (Phillipians) 2:22~25
Service Type: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

(Timothy and Epaphroditus)

1-12-20

본문말씀: 빌립보서 (Phillipians) 2:22~25

22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23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 것을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24 나도 속히 가기를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25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

 

[설교 요약]

계속되는 빌립보 강해말씀으로 <빌립보 2장> 후반절을 함께 묵상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 를 소개합니다. 말씀을 통해 사도가 이 두 동역자와 가졌던 이 아름다운 모습, 더 나아가서 빌립보 교회와 여러 초대교회 성도들과 가졌던 귀한 사랑의 관계는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를 함께 이해할 수 있기 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도 바울과 동역자들이 맺은 관계일까요?” (What kind of relationship is between Apostle Paul and his coworkers?) 그것은,

첫째, ‘영적 가족의 관계’ 입니다 (It is a relationship of a spiritual family): 디모데 뿐 아니라 수 없이 많은 영적 자녀를 그가 낳았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고전. 4:15) 고. 그리고 에바브로디도에 대해서는 “나의 형제” (v.25)라고 불렀습니다. 요즘 크리스챤들 간에 말로만 하는 그런 형식적인 ‘영적 가족 관계’가 아닌 것입니다.

둘째, ‘복음을 위해 맺어진 관계’ 입니다 (It is a relationship for the Gospel of Christ): 사도는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 하였느니라” (v.22) 고 디모데를 칭찬하고 있습니다. 사도가 동역자와 맺은 관계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맺어진 관계입니다. 복음을 위해 함께 수고하고 함께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동역함으로서 가져오게 된 결과입니다.

셋째,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관계’ 입니다 (It is a relationship as <My grace is sufficient for you>): 고린도후서에 보면, ‘육체의 가시’를 없애 주시기를 바울 사도가 3번씩 간절히 주께 기도했지만, 주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고후. 12:9)라고 답변하심을 봅니다. 이 가시같이 찌르고 고통을 주는 것까지도 주님의 은혜 가운데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 형제와의 이 아름다운 동역의 관계 속에는 풍족하게 날마다 부어 주시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음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설교 전문]

            제가 사는 지역의 한 지역교회 앞에서 ‘초대교회를 추구하는 교회’라는 팜프렛을 볼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 교회 뿐 아니라 모든 크리스챤들이 소망하고 추구하고자 하는 바도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이 아닐까 하고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이런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잘 밝히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 말씀임을 알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2명의 동역자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 입니다.

사실 이들 두명의 동역자들은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지역에 증거하는 일에 있어서 함께 동역하고 귀하게 쓰임 받았던 수없이 많은 지체 (=동역자)들 가운데 몇명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이들 2명의 동역자들은 말로만 하는 동역자의 관계가 아닌 것입니다. 그 관계는 영적 부모와 자녀 관계로서, 그리고 서로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목숨까지도 아까워하지 않는 사랑의 관계인 것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은 오늘날은 불가능한 것일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사도가 이 두 사람,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와 가졌던 이 아름다운 모습, 더 나아가서 빌립보 교회와 여러 교회 성도들과 가졌던 귀한 사랑의 관계는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를 함께 이해할 수 있기 원합니다. 그럼으로 우리 신앙 공동체 안에서도 이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가 열매 맺기를 소망합니다.

적지 않은 경우, 성도들은 ‘좋은 교회 찾기가 힘들다’, ‘본받을 만한 목회자 만나기가 어렵다’고 하는가 하면, 목회자들은 ‘믿음에 열심을 내고 충성되게 교회를 세워 나갈 성도들이 많지 않다’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물론 양쪽 모두 한편에서는 수긍이 가는 면도 있을 것입니다. 모두가 자신의 입장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이 보여준 모습과는 사뭇 다른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사도는 앞 절 <빌. 2:12>에서 빌립보 성도들을 향해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도전하고 나서, 그런 <구원을 이루어가는 하나님에 합당한 자녀답게 살아가라>고 그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v.14~18>인 것입니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며) ~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나라>” (v.14~15) 고 성도들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그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날마다 구원을 이루어가는 그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할 때, 지금까지 복음을 위해 달려온 사도 바울 자신의 모든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이요, 또한 빌립보 성도들이 드리는 믿음의 제사 위에 자기 자신을 피를 흘려 드리는 희생제물로 드려질지라도 기뻐하고 또 기뻐할 것임 (v.16~18) 을 그는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온전한 ‘산 제사’ 즉 ‘영적 예배’ (롬.12:1)로 자신을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 드릴수만 있다면, 자신은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기뻐하고 만족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고백을 하고 나서, 사도는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v.19~30). 이것은 먼저 사도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것’ (v.12~18)을 당부하고 나서, 두명의 동역자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두사람은 몇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첫째) 빌립보 성도들이 익히 아는 형제들 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바로 빌립보 교회에서 그 당시 감옥에 갇힌 바울을 돕고자 파송한 형제이기에 그들이 누구보다 잘 알 뿐 아니라, 그의 갑작스런 병으로 인해 모든 성도들이 매우 근심하고 슬퍼할 만큼 서로 깊은 영적 관계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의 경우도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 (v.22)라는 바울의 진술을 볼때, 그들이 이미 디모데의 인품과 믿음에 대해서도 상당부분 잘 알고 있다는 점입니다. 둘째) 빌립보 교회에 파송 하고자 하는 형제들 입니다. 디모데의 경우는,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 자신을 대신하여 빌립보 성도들을 방문하여 그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며, 그가 돌아와서 사도에게 그들의 형편을 나눔으로서 그를 통해 성도들의 삶을 듣고 자신도 위로를 받고 또한 그들의 필요를 따라서 위해 기도하고자 함인 것입니다. 그리고, 에바브로디도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이, 그가 속해 있던 모교회로 그를 돌려보내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앞에서 설명 했드시 그의 갑작스런 중병으로 인해 그를 파송한 빌립보 성도들이 크게 근심하게 되었기 때문 입니다. 그를 가능한 속히 모교회로 돌려 보내어 그들의 근심을 들고 함께 기뻐하기를 원한 것입니다. 셋째) 바울과 빌립보 성도 모두에게 기쁨과 자랑이 되는 형제들 입니다. 사도는 이 두사람이 보여준 섬김과 헌신과 사랑으로 인해 매우 큰 기쁨을 누리고 그들을 자랑스러워 하고 있는 것 입니다.

그럼으로 <v.19~30>에서 사도가 그의 두 동역자를 언급하는 주된 이유는 또 하나의 신학적 논쟁이나 기독교의 주요 교리에 대해 설명하고자 함이 아니라, 현재 자신의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실제 삶에서 그가 누렸던 <섬김과 사랑>의 경험을 고백하고 성도들과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이 깨닫고 가르치는 하나의 신학이나 교리의 차원이 아니라, 성도들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앙의 실천적인 차원에서 오늘 본문은 빌립보서 전체에서 대표적인 본문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2명의 헌신된 그의 동역자와 누리는 복된 관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도 바울과 동역자들이 맺은 관계일까요?” (What kind of relationship is between Apostle Paul and his coworkers?) 그것은,

첫째, ‘영적 가족의 관계’ 입니다 (It is a relationship of a spiritual family): 신약성경에서 보면, <사도행전>과 <디모데후서>에서 청년 디모데의 신앙적 뿌리가 어디에서 출발했는지를 잘 밝혀 주고 있습니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 하노라” (딤후. 1:5) 바로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 속에서 시작된 청결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이 이제 청년 디모데에게서 뿌리 내려졌고 아름답게 열매 맺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사도에게 있어서 디모데는 자타가 공인하는 사도의 대표적인 <영적 아들>인 것입니다. 사도는 디모데를 부를 때 늘 “아들 디모데” (딤전.1:2, 딤후. 1:2) 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그를 주의 말씀과 사랑으로 훈련시킴으로 그를 영적으로 낳았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바울과 디모데>에게서 보게 되는 <영적 아비와 자식>의 관계는 복음의 진보를 통해서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 뿐 아니라 수 없이 많은 영적 자녀를 그가 낳았기 때문 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선언했던 놀라운 고백에서도 이런 ‘아비와 자식’ 즉 ‘영적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관계가 어떤 공동체인지를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고전. 4:15) 고.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등장하는 에바브로디도에 대해서는 “나의 형제” (v.25)라고 불렀습니다. 그 관계가 ‘아비와 자식’의 관계 든 아니면 ‘형제나 자매’의 관계 든 모두 가족이라는 가장 친밀한 관계로 맺어졌음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요즘 크리스챤들 간에 말로만 하는 그런 형식적인 ‘영적 가족 관계’가 아닌 것입니다. 초대교회 공동체 안에는 서로를 향해 자발적인 섬김을 통해 자기 자신이 희생 될찌라도 도리어 기뻐하는 진정한 영적 가족의 사랑이 그들 가운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공동체는 과연 이런 영적 가족 관계로써 맺어져 가고 있습니까?

둘째, ‘복음을 위해 맺어진 관계’ 입니다 (It is a relationship for the Gospel of Christ): 오래전에 제가 신앙생활 하던 교회에서 새로 부임한 목사님이 설교 가운데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이 기억 납니다. “성도 여러분, 저에게 인간적인 기대는 말아 주십시요. 너무 인간적으로 친해지고자 노력하지 마시고, 우리 함께 예수님을 바라보며 나아 갑시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함께 걸어 갈 것이며 더 아름다운 관계로 맺어질 것입니다” 라고. 처음에 목사님의 그런 말씀을 들었을 때는 그것이 ‘무슨 의미일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말의 의미를 더욱 이해하게 됩니다. 물론 우리 크리스챤 공동체는 서로 사이 좋고, 서로 마음이 통하는 관계가 될수 있도록 다양하게 노력해야 할 것 입니다. 요즘, 교단을 초월해서 개교회에서 힘을 쓰는 ‘셀모임/ 순모임’의 주된 목적 가운데 하나도 성도 상호간에 가로막힌 장벽을 없애고 서로의 삶을 더 깊이 나누고자 하는 것임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노력에는 한계가 있음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잘 압니다. 특별히 신앙공동체에서 단순히 인간적으로 친해지고 서로 잘 도와준다고 진정한 공동체로 자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 하였느니라” (v.22) 고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칭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바울이 디모데를 칭찬하고 인정한 포인트는 그가 자식과 같이 영적 아비인 자신의 말에 잘 순종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함께 동참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평가는 에바브로디도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됨을 봅니다. “~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 (v.25) 라고 말입니다. 이 말은 에바브로디도가 단지 자신을 도와준 것을 감사하고 기뻐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함께 수고하고 함께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동역 함으로서 가져오게 된 결과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가 이 두명의 동역자들과 맺은 그 사랑의 관계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빼 버린다면 과연 무엇이 남을까? 하고 저는 생각해 봅니다. 그것이 이들 관계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복음을 위해 함께 맺어진 관계는 다만 초대교회나, 혹은 오늘날 특별히 선교를 위해 헌신하는 선교사님들 만의 관계일까요? 아닙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제자로 부름 받은 모든 거듭난 성도들의 관계임을 저는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아포슬 공동체는 주의 복음을 위해 함께 세워져 나가고 더욱 하나로 맺어져 가는 공동체인가요?

셋째,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관계’ 입니다 (It is a relationship as <My grace is sufficient for you>): 저는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과 두 동역자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가 보여준 관계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한 관계’ 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My grace is sufficient for you) 는 뜻일까요? 이것은 성도 여러분 중에서도 기억하시는 분이 많겠지만,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나눈 내용 (고후. 12:7~10) 입니다. 이 말씀을 주께서 그에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도 바울에게는 그것이 분명히 무엇이었는지는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육신의 가시’가 있다고 했습니다. ‘육신의 가시’는 아마도 바울이 평생동안 고통받았던 간질병, 나쁜 안질, 혹은 그의 외모 등으로 성경학자는 추측합니다. 그것이 실제로 무엇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육신의 가시는 평생동안 그 신실한 주님의 충성된 제자를 아프게 찔러 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는 3번씩이나 간절하게 그 가시를 거두어 가시도록 주께 간구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대답은 의외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고후. 12:9)고 그에게 응답하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비록 짧은 내용이지만,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와의 아름다운 동역의 관계를 묵상하는 가운데 ‘가시 같은 상황 속에서 주시는 주님의 은혜’로 맺어진 관계가 이들의 관계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먼저, 디모데의 경우에 있어서는 ‘모두 자기 일에만 관심 가짐으로 복음을 행하는 사도 바울의 사역에 무관심하고 등을 돌렸을 때, 오직 디모데만 그와 동참하여 함께 수고하였다는 것입니다 (v.21-22). 사실 초대교회라고 이상적인 공동체만은 아닌 것입니다. 이 짧은 문장 안에서 사도 바울이 겪었을 외로움과 실망이 얼마나 컸을까요? 그러나 디모데가 그와 함께 연합함으로 서 사도가 누렸을 위로와 용기가 얼마나 컸을까 생각해 봅니다. 마치 천군만마를 얻은 듯하지 않았을까요?! 그뿐 아니라, 에바브로디도가 자신을 도우러 왔다가 도리어 사경을 오르내리는 심각한 병에 걸렸을 때, 또 그가 얼마나 놀라고 근심하며 더욱이 그를 보낸 빌립보 성도들이 했을 근심으로 인해 힘들어 했을지를 생각해 봅니다. 사도에게는 실로 그를 찌르는 아픈 가시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하나님의 에바브로디도와 바울을 향한 긍휼하신 은혜로 그를 극적으로 회복시키신 것을 사도는 기쁨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우리 자신에게 자문해 보기를 도전하는 것은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스러운 가시같은 상황이 주님의 은혜임을 깨닫는가?’하는 것입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는 주님의 말씀을 바울과 같이 신뢰하며, 깨닫으며 누리고 있는가 하는 것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이 누릴 귀한 동역의 관계는 바로 이것입니다. 영적 가족의 관계를 넘어서서, 복음을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관계, 그리고 끊임없이 찾아오는 고통과 고난 속에서 반드시 함께 하시는 주님의 족한 은혜로 채워 주시는 관계인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 이런 복되 공동체의 관계가 주님의 족하신 은혜로 넘쳐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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