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e 13, 2021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I) (Live By Faith)

Preacher:
Series:
Passage: 로마서 (Romans) 1:17
Service Type: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I)

(Live By Faith)

6-13-21

본문말씀: 로마서 (Romans) 1:17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For in the gospel a righteousness from God is revealed, a righteousness that is by faith from first to last, just as it is written: “The righteous will live by faith.”)

[설교 요약]

            하나님은 언제나 그의 택한 자녀들에게 한가지를 분명하게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올바른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올바른 믿음이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일까요?

<믿음장>이라 불리는 <히브리서 11:1>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 (히. 11:1)고 믿음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믿음이라는 것은 현재 보고 소유한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을 통하여 미래에 보게 되고 실현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믿음은 본질적으로 그것을 통해 눈으로 보고 증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언제나 성도에게 있어서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사전’에서는 ‘믿음’ (faith)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볼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순종을 뜻함. 그것은 ‘구원’ (엡. 2:8) 혹은 ‘영생’ (요. 6:40)을 의미함. 그리고 믿음은 그 성도의 지성 (intellect) 감정 (emotion) 그리고 의지 (will) 이와 같은 모든 면에서 영향을 미침]이라고.

오늘 본문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고 그로 말미암아 살게 되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게 되기 때문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는 “~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v.17b)고 믿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무엇이 그 믿음을 통하여 살게 되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일까요? 우리가 무엇이 올바른 믿음인지를 확인해 나가는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로써, 무엇이 믿음이 아닌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믿음이 아닐까요?” 그것은

첫째, 믿음은 ‘맹신’이 아닙니다: <국립국어 대사전>에서 찾아보면 “‘맹신’ (盲信/ blind faith)은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덮어놓고 믿는 일”이라고 정의합니다. 우리가 모두 인정하듯이, 맹신은 인간의 건전한 상식과 판단을 마비시킴으로 올바른 믿음의 심각한 걸림돌이 되는 잘못된 믿음인 것입니다.

둘째, 믿음은 ‘희망사항’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나의 소원성취를 위해 그것을 간절히 추구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셋째, 믿음은 ‘추진력’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내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끝까지 실천해 나가는 능력이 믿음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는 식의 추진력이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무엇이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인지?’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 되시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저는 성경을 묵상하면 할수록 하나님께서 언제나 그를 믿는 그의 자녀들에게 분명하게 요구하는 것이 한가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하나님을 향한 삶의 동기와 중심이 되어 아름다운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가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올바른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안따깝게도 자기 자신은 믿음생활을 잘한다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비뚫어지고 왜곡된 믿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문제를 일으키며 살아가는 크리스챤들도 적지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으로 만약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는 성도로 살아간다면, 구원받는 그 자체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나는 과연 올바른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점검하고 스스로 고민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진정한 믿음으로 영적 성장을 계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성도 여러분과 말씀을 통하여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보면서 우리가 한가지 분명히 구분해야 할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믿음’과 ‘인정’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말씀드리는 ‘인정’ (acception)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말하자면, 수학의 기본개념에서 ‘2 더하기 2는 4’라는 명제라든지, 혹은 과학에서 어떠한 현상을 증명하는 방식입니다. 과학의 한 예로써 ‘물’ 이 ‘수소’ 와 ‘산소’의 분자의 결합을 통해 생성되었음을 증명할 때, 물 (H20)에서 수소분자 (H)와 산소분자 (0)를 분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수학적 증명이나, 과학적 증명을 통해서 그것이 올바른 증명이라고 판단될 때 우리는 그것을 ‘인정’ (accept)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이렇게 증명된 사실을 ‘인정한다’는 말대신 ‘믿는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정’하는 개념이지 ‘믿음’의 개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 여러분과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면서 한가지 분명히 하기 원하는 것은 ‘믿음은 어떤 증명된 어떤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 점이 믿음의 결코 쉽지 않은 점임을 저도 잘 압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궁극적인 대상인 하나님을 그 누구도 결코 증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수학적이든, 과학적이든, 인문학적이든 철학적이든 인간이 증명할 수 있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믿음입니까? 성경에서 보면 <믿음장>이라고 불리는 <히. 11:1>에서 믿음을 이렇게 선언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 (히. 11:1)고. 이러한 믿음에 대한 정의는 현재 보고 소유한 것이 아니라 미래에 보고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믿음은 본질적으로 눈으로 보고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믿음’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겠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성구사전’에서는 ‘믿음’ (faith)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볼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순종을 뜻함. 그것은 ‘구원’ (엡. 2:8) 혹은 ‘영생’ (요. 6:40)을 의미함. 그리고 믿음은 그 성도의 지성 (intellect) 감정 (emotion) 그리고 의지 (will) 이와 같은 모든 면에서 영향을 미침]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웨스트민스터 사전’에서는 하나님 아버지에 향한 성도의 신뢰와 순종이 믿음이고, 이 믿음은 ‘인격적인 모든 면’ 즉 ‘지.정.의’ 모두에 영향을 미친다고 정의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한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분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 인하여 순종함으로 나아가는 삶 > 의미하는 것인데, 그럼으로 이 믿음은 그 사람의 전인격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어떻게 우리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고 그로 말미암아 살게 되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이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v.17) 그리고 이 말씀은 구약의 하박국 선지자가 선포한 말씀, <합. 2:4>을 인용한 것입니다. 제가 오늘 말씀 가운데 성도 여러분과 함께 묵상하고 고민해 보고자 하는 주제는 ‘무엇이 참된 믿음인가?’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한다면, ‘무엇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믿음인가?’ 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일까요?

이 주제를 시작함에 있어서 제가 취하는 방법의 하나는 그렇다면 ‘무엇이 믿음이 아닌가?’를 먼저 살펴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엇이 믿음이 아닌지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 무엇이 참된 믿음인지를 이해하는 효과적인 방법’이 될 것을 저는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믿음이 아닐까요? (설교참조) 제가 이것에 대해 언젠가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그것은 첫째) 믿음은 ‘맹신’이 아닙니다. 둘째) 믿음은 ‘희망사항’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나의 소원성취를 위해 그것을 간절히 추구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 믿음은 ‘실천력’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내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끝까지 실천해 나가는 능력이 믿음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는 식의 추진력이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3가지>가 마치 믿음인 것처럼 성도들이 오해하는 대표적인 <잘못된 믿음>입니다. 저는 이 3가지 잘못된 믿음 가운데서 잘못된 믿음의 대표적인 ‘맹신’에 대해 좀더 깊이 살펴봄으로 우리 각자의 믿음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고자 합니다.

먼저, 이러한 잘못된 믿음의 가장 눈에 띄는 ‘맹신’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국어사전에 보면 ‘맹신’ (盲信/ blind faith)은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덮어놓고 믿는 일”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과연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가리지도 확인해 보지도 않고 덮어놓고 믿는 것’이 <맹신>이라는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앞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지 못하는 믿음’ (blind faith)이 맹신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가지 중요한 질문은 ‘왜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잘못된 믿음, 맹신에 빠지게 될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맹신에 빠지게 되는 상황은 매우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기질적으로 남의 말을 덮어 놓고 잘 믿는 스타일이라든지, 또 어떤 지식을 접했을 때 그것을 분석하거나 객관적으로 판단할 지적 능력이 부족하다든지, 혹은 그와 같은 건전한 판단을 개발하고 훈련할 교육의 기회를 가지지 못함으로 인해 맹신이라는 매우 잘못된 형태의 믿음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유가 어떠하든지 이러한 ‘맹신’에 빠지게 되는 그 과정에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될 한가지 단계가 있음을 저는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세뇌작업’입니다. 무엇이 ‘세뇌’ (洗腦)입니까? <세뇌>는 영어로는 “brainwash” 입니다. 말 그대로 ‘뇌를 씻는다’는 뜻입니다. ‘얼굴에 묻은 먼지를 씻어 내듯이, 우리의 뇌 속에 있는 기존의 지식과 판단능력을 물로 씻어 내듯이 다 씻어내고, 그 어떤 누군가가 의도하고자 하는 방법과 방향대로 어떤 정보와 지식을 뇌에 다시 집어넣는다’는 것입니다. 결론은 그 누군가가 자신의 의도데로 상대방을 조정하고 컨트롤하기 위하여 자신의 일방적인 지식과 가치를 주입한다는 것입니다. 매우 위험하고 잘못된 상태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세뇌’과정에 관련된 한가지 구체적인 예로서, 우리 기독교 교리에 대해서 살펴보기 원합니다. 우리 프로테스탄스 기독교 교리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교리의 하나는 ‘삼위일체’ (Trinity) 교리입니다. 즉 ‘성부, 성자, 성령은 본질상 한 하나님이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 하나님은 각자 고유한 ‘위격’을 가지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한 하나님 (in one Godhead)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증인’ 과 일부 기독교 교파 가운데서는 자신들이 주장하는 성경구절을 근거로 ‘삼위일체’의 교리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요. 14:28)는 구절을 그 근거로 재시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것은 성자 하나님 되신 예수님이 스스로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말씀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분과 본질상 하나가 아님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이들은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자신을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낮추셨고, 그 분의 뜻에 언제나 복종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분의 태도가 자신이 성부 하나님과 동일하신 하나님이 아니다는 뜻일까요? 그렇치 않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 자신과 여러 성경 저자들에 의해 이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직접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요. 10:30)고 선언하셨고,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시작하면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1)라고 요한 복음을 시작하면서 영원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은 ‘곧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눈에 가시처럼 여겼던 유대 종교지도자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결국 예수님을 빌라도에 고소하여 사형에 처하게 했던 법적 근거로 든것이 바로 <신성모독> (blasphemy) 이었던 것입니다. ‘신성모독’이라는 죄는 ‘하나님을 모독’한 죄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했다는 것입니까? 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죄에 대한 용서’를 행했다는 점 (마. 9:2~3)과,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다는 점 (요. 10:22~36; 19:7) 그리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하늘의 구름을 타고 심판의 주로 오실 것을 주장한 점 (마. 26:64~65) 등을 들고 있습니다. 이 주장은 역설적으로 볼 때, 만약의 이들이 예수님을 고소하는 점이 모두 사실이라면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거듭난 성도들이 믿듯이, 예수님은 죄를 용서하실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이시요, 장차 마지막날 산자와 죽은 자의 의로운 심판자로 다시 오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신성을 결코 믿으려고도 하지 않고, 깨닫지도 못했기에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성경에서 일관된 베드로와 여러 주님의 제자들의 주장이 아닙니까?

제가 ‘삼위일체’ 교리의 관련되어 한가지 잘못된 성경이해에 대해 여러분과 확인해 나가고자 하는 것은 ‘잘못된 가르침을 통해 형성된 성경말씀에 대한 지식이 얼마나 믿음의 근거를 훼손하고 왜곡된 믿음으로 변질될 수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만약 이렇게 내 판단이 ‘예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아니다’라는 잘못된 결론이 내려지면 그 이후의 이어지는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가르침’에 대해서는 별 의심없이 비판 없이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판단기준에서 이런 잘못된 가르침은 어떤 의심이나 문제의식없이 진리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와 같은 성경지식이 없을 때 분별하기 힘든 그런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단순하고 엉터리 없는 가르침임에도 불구하고 앞서 설명 드린대로 그 사람의 교육수준과 판단능력의 미약함으로 인해 거짓된 주장에 쉽게 넘어가는 경우도 적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무엇이 믿음인가?’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정의와 함께 무엇이 믿음이 아닌 것인가를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까지가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씀하는 믿음의 전부라면 여러분과 저는 여전히 믿음에 대한 여전히 풀리지 않는 많은 궁금증과 막연함으로 인해 그 믿음을 바로 깨닫고 적용함에 있어서 많은 어려움을 겪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분명하게 ‘과연 무엇이 믿음인지’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롬. 4장>에서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말씀인 <롬. 1:17>에서 선언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게 되는 의인’ 즉,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해주시는 그는 누구인지’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샘플로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다음시간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설교제목의 두번째 시간에 아브라함의 믿음을 살펴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우리 모든 성도들이 본받을 믿음으로 확증하신 아브라함의 믿음은 과연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확인해 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고 있습니까?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분을 영접함으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귀하고 소중한 만큼, 영생을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로써 계속해서 믿음으로 승리하고 열매맺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은 그것만큼이나 지극히 당연하고도 중대한 우리 크리스챤의 삶의 목적일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 입니다.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의 남은 평생의 삶이 이와 같이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며 그를 즐거워하는 축복된 삶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