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e 20, 2021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Live By Faith)

Preacher:
Series:
Passage: 로마서 (Romans) 4:1~3
Service Type: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II)

(Live By Faith)

6-20-21

본문말씀: 로마서 (Romans) 4:1~3

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설교 요약]

저는 지난 시간 성도 여러분과 함께 ‘무엇이 믿음인지?’에 대해 믿음의 정의와 함께 ‘맹신, 지적 동의, 소원성취’와 같이 믿음이 아닌 것이 무엇인지를 역설적으로 살펴 봄으로서 무엇이 믿음인지를 이해해 나가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롬. 1장> 후반부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을 ~ 좇아 나타(났음)” (롬. 1:18)을 선포하고 나서, <로마서 3:20>에 이르기까지 왜 하나님이 진노가 임하시는 지를 영적으로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죄 때문이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두 죄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롬. 3:10).

그러나, 그는 <롬. 3:21>에서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한 것입니다” (롬. 3:21/ 표준새번역)라고 ‘하나님의 의’를 선언합니다. 이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 (롬. 3:22)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어지는 오늘 본문말씀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은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율법과는 상관없이 오직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으로 부터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롬. 4:1~3).

이제 우리가 함께 살펴볼 것은, 무엇이 아브라함의 믿음인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첫째,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 입니다: 사도 바울은 무엇을 믿었는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롬. 4:18~21)라고. 아브라함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것입니다.

둘째, “그 약속을 소망한 믿음”입니다: 우리가 또한 기억해야하는 것은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소망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에 대한 소망은 장차 수없이 많은 자손을 보는 것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 곧 천국소망 입니다 (히. 11:9~10).

셋째, “약속하신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순종을 통하여 그의 믿음을 증명했습니다 (창. 22장).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이삭을 바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순종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것을 부활의 믿음’ (히. 11:17~19)에 근거함을 우리는 결코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선하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그분의 약속을 믿고 순종함으로 약속의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저는 지난 시간 성도 여러분과 함께 ‘무엇이 믿음인지?’에 대해 개괄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먼저 기독교에서 있어서 믿음이란 무엇을 뜻하는지를 그 개념을 통하여 확인해 보았고, ‘무엇이 믿음이 아닌지?’를 역설적으로 살펴 봄으로서 무엇이 믿음인지를 이해해 나가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이 아닌 대표적인 것으로는 <맹신>, 나의 <희망사항> 그리고 <추진력>, 이와 같은 것은 믿음이 아님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7>에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선언하고 나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본문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의 예를 분명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성도 여러분과 함께 사도 바울이 믿음의 샘플로 선택한 아브라함의 삶을 묵상해 보기 원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믿음, 죄 없다 하시고 의롭다고 불러 주시는 믿음을 소유한 자의 삶은 어떤 것인지를 더욱 구체적으로 깨닫고 각자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복된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사도 바울은 <롬. 1장> 후반부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을 ~ 좇아 나타(났음)” (롬. 1:18)을 선포하고 나서, 그 이유를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속에 하나님을 알만 한 것이 보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해져서 그들의 지각없는 마음이 어둠으로 가득하게 되었기 (때문)’ 입니다 (롬. 1:19~21). 더욱 심각한 것은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창조주 하나님보다 더 섬기고 경배” (롬. 1:25)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심히 미워하시는 ‘우상숭배’를 행했다는 것입니다. 이방인 뿐 아니라, 유대인 조차 이런 가증한 행위를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 (롬. 3:9)고 그는 선언합니다. 바로 다윗의 글 (시. 53:3)을 인용하여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롬. 3:10)는 것입니다. 율법을 가진 ‘유대인’이나 율법없이 살아가는 ‘이방인’이나 누구 할것 없이 모두 치우쳐 악을 행하며, 한사람도 예외없이 죄에 속해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롬. 1장>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임하게 된 이유인 것입니다.

여기까지 우리 인간의 죄악성, 즉 스스로의 의로운 행위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 모든 인류의 절망적인 영적 현실을 바울은 적나라하게 <롬. 3:20>까지 드러내고 나서, 그는 <롬. 3:21>에서 놀라운 반전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한 것입니다” (롬. 3:21/ 표준새번역)라고.

여기서 바울이 묘사하는 ‘율법과는 상관없는 하나님의 의’는 무엇일까요? 그는 이어지는 <22절>에서 그것을 이렇게 밝힙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롬. 3:22)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에게 차별없이 주어지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 믿는 자에게 이런 ‘의로움’이 주어질 수 있을까요? 그것은 만약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될 때,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값을 대신 값주고 사심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v. 24-25).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과 저의 죄를 대신 담당하고자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어 ‘화목제목’로 십자가 위에서 그의 보배로운 피를 흘리심으로 그를 믿는 모든 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죄 씻음 받아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v. 28)고 바울은 결론적으로 <롬. 3장>을 마무리하며 말합니다.

따라서 인간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롬. 3:21> 이후의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게 된 놀라운 반전이 오늘 본문 <롬. 4장>의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해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사도 바울이 <롬. 4장>에서 선언하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는 본질적으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과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는 믿는 자에게 미치게 될 ‘의로움’의 은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후의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이 땅에 오기 2000여년 전에 이미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서 부터 출발된다고 그가 선언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보듯이 바울은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을수 있었는지?’를 이렇게 분명하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v. 2~3)라고.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말씀의 근거는 <창. 15장>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 15:6)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불러 주시는 그 근거는 그의 그 어떤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직 그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는 모든 자들은 모두 아브라함과 동일하게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된다고 사도 바울은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롬. 4장>의 핵심사상이요, 아브라함을 믿음의 샘플로 그가 소개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죤 맥아더>목사는 <로마서 4장>을 강해설교하면서 ‘어떻게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를 <롬. 4장>에 나타난 다음의 <3가지 핵심적인 복음의 진리>로 설명한 바 있습니다. 이것은 첫째) ‘믿음으로 의롭게’ (justified by faith/ 롬. 4:1-3), ‘은혜로 의롭게’ (justified by the grace of God/ 롬. 4:9-12),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을’ (salvation by divine power – not human effort/ 롬. 4:18-25)이라고 하는 설교제목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여 주신 아브라함은 그의 그 어떤 행위를 통해 인정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을 통해서라는 것이요, 한걸음 더 나아가 그가 이런 믿음을 가졌다는 사실 자체조차도 그가 구원받을 만한 훌륭한 믿음을 가져서가 아니라, 그 믿음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허락 하심이요, 그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하셨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다면, 동일하게 그의 믿음을 좇아 믿음으로 구원받은 모든 아브라함의 후손, 곧 구원받은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도가 믿음을 강조함과 동시에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 성도들에게 또한 도전하는 포인트인 것입니다.

저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제목의 시리즈 설교를 시작하면서 ‘무엇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는 믿음인가?!’라는 큰 주제를 던짐으로 말씀을 시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믿음은 <아브라함의 믿음>이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에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된 아브라함의 믿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함께 살펴보기 원하는 것은, 무엇이 아브라함의 믿음인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첫째,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 입니다: 사도 바울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본보기로 택한 중요한 성경본문이 되는 <창.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라는 말씀에서 아브람이 믿은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앞의 구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창. 15:5)라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약속이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도 잘 기억하듯이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땅에서 우상숭배하던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창. 12:1~2)고 놀라운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 12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처음 나타나셨을 때 그의 나이는 75세였습니다. 인간의 나이로 볼때 상당히 늙은 나이지만, 그를 통하여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그에게 복을 주어 그의 이름을 창대케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 약속이 이루어지기 위해선 아들을 낳아야 하는데 이 약속은 속히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 <창. 17장>에서 하나님은 99세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처음 부르시고 약속을 주신지 정확히 24년이 지난 뒤입니다.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난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 내 언약은 내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창. 17:19,21)고. 여기에 대한 그의 반응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잘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롬. 4:18~22) 이와 같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믿은 것이 바로 그를 의롭다고 여기신 이유임을 사도는 분명히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은 어떤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믿으십니까?

둘째, “그 약속을 소망한 믿음”입니다: 앞에서 본 것처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는데, 그 믿음은 ‘그 약속에 대한 아브라함의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음을 우리는 놓쳐서는 안됩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하나님께서 <창. 12장>에서 그에게 처음 나타나셔서 놀라운 약속을 하시고 나서 그는 곧장 하나님께 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창. 12:7~8)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 이후 <창. 13:14~18>, <창. 15:9~17>에서도 단을 쌓거나 짐승을 제사로 드렸던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것은 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는 과정을 통하여 그 무엇보다도 그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을 경배하고 감사하는 것이요, 또한 이런 감당하기 힘든 엄청난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그가 간절히 바라고 소망함이 이런 단을 쌓는 과정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과연 무엇을 믿었으며 무엇을 바랐는가에 대한 올바른 영적 해석을 함에 있어서 감사하게도 훌륭한 지침서가 되는 말씀이 <히브리서 11장>입니다.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히. 11:9~10)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이 무엇을 소망했는지를 보다 포괄적으로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것은 이 땅에서 이루어질 셀수 없이 많은 후손의 축복에 대한 소망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그가 누리게 될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를 소망했다는 뜻임을 알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곧 천국에 대한 이런 참된 소망이 궁극적으로 참된 성도들의 두드러진 믿음의 특성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천국 본향에 대한 이런 소망이 있습니까?

셋째, “약속하신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했다는 것은 그분을 믿었다는 것을 전제함) 우리가 ‘웨스트민스터사전’에서 믿음의 정의를 살펴보았듯이, 믿음은 그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을 단순히 신뢰하는 것 뿐 아니라 그분께 순종하는 것 까지를 의미함을 우리는 인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게 될 때, 그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 순종임을 성경은 또한 우리에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점입니다. <아브라함의 마지막 테스트>라고 불리어지는 <창. 2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가 백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바치라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 22:2)고 말입니다. 이어지는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그 아들을 드리고자 지시한 산으로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 22:3~4). 사실 이 본문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클라이막스 임과 동시에 여러가지 관점에서 논쟁의 여지를 남기기도 합니다. 어떤 성도들은 ‘아무리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도 좋지만 자식을 죽이라는 명령이 지키는 것이 맞는가?’ ‘하나님이 선한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자식을 죽여 바치라고 요구 하실수 있나?’는 등 여러가지 믿음과 윤리 가운데 상충되는 순종의 딜레마를 제시합니다. 그리고 인류역사에서 인간을, 더욱이 그 자식들을 신에게 바치게 하는 일부 이방신을 섬기는 종교의 종교의식도 있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결론은 하나님은 결코 이런 인신공양과 같은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를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오직 한번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케이스에서는 그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창. 22:1)라고 <창. 22장>은 시작하면서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하셨는지에 대한 이유를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명령과 그 당시 고대 종교에서 신들에게 자식들을 바쳤던 제사와 본질적으로 다른 점은 아브라함에게 명하신 하나님은 결코 자식을 바치는 제사를 기뻐하시지도 허락하지도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지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고자 함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수 있습니까? 첫째,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여 바치고자 했을때, 그가 믿은 그 핵심이 무엇인지를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선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히. 11:17~19)라고. 아브라함의 순종의 동기는 자신이 만약 이삭을 바쳤을때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다시 살리실 줄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하나님의 이러한 명령은 단지 그를 테스트함이라는 것임은 ‘아브라함이 그 명령을 좇아 손에 칼을 잡고 이삭을 잡고자 높이 들었을 때, 급히 그를 불러 제제하셨다는 것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창. 22:9~12). 그리고 나서, 하나님은 곧바로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바로 뒤에 수풀에 걸려있는 한 수양을 보여주시고 그 양을 이삭 대신에 바치게 하셨던 것입니다 (창. 22:13).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명하시는 경우와 같은 일은 없을 것임을 저는 확신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순종을 통해서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분명히 물어보아야 하는 것은 한가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영적으로 하나님께 바칠 나의 이삭은 무엇인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영적 이삭은 무엇입니까?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기 전에 한가지 언급하기 원하는 것은, ‘무엇이 믿음인가?’라는 이번 설교의 핵심이 되는 질문에 대한 정의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 신뢰와 순종”라면, 예수님이 오시기 2000여년 전에 살았던 아브라함과 예수님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에 대해선 성경에 자세히 나와있지는 않지만, 주께서 유대인들과 서로 변론하는 가운데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요. 8:53)는 그들의 도전적인 질문에 대해 이렇게 대답하신 것을 보게 됩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요. 8:56)고 말입니다. 과연 아브라함이 어떻게 주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했는지의 정확한 영적 상황을 우리는 알수 없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데로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바치면, 하나님께서 그를 도로 살리실 것을 믿음’으로서 그 부활신앙 가운데 그리스도의 영광과 권능에 참예하였으리라 추측해 봅니다. 그 누구도 정확히 아브라함이 경험한 그 영적 경험의 내용을 모두 알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과 우리 크리스챤의 믿음의 본질은 동일하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이 믿음입니까? 무엇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는 믿음일까요? 그것은 맹신도, 지적 긍정도, 소원성취도, 강한 추진력도 아닙니다. 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순종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삶에서 보게 되듯이, 그의 그 어떤 행위에서 비롯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은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 그 약속이 온전히 이뤄지기를 소망하는 믿음, 그리고 그 약속하신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믿음을 통해서 입니다. 이런 참된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