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ruary 24, 2019

“사랑으로 종노릇하라” (Serve one another in love)

Preacher:
Series:
Passage: 갈라디아서 (Galatians) 5:13~15
Service Type:

“사랑으로 종노릇하라”

(Serve one another in love)

2-24-19

본문말씀: 갈라디아서 (Galatians) 5:13~15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설교 요약]

저는 오늘 영적훈련, 세번째 마지막 메세지를 성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주님은 ‘사랑함’을 통해 그의 제자들을 훈련 하십니다.

갈라디아서는 거짓교사로 말미암아 변질된 복음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을 향해 사도바울이 엄중하게 질책하며, 거짓된 복음에서 돌아설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사도바울은 우리가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할때,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게 된다는 것 입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주님은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을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게 하심으로 강한 그의 제자로 훈련케 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 어떻게 우리는 서로 사랑할수 있을까요?” (How are we able to love one another?):

첫째,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만큼’ 사랑할수 있습니다 (We may love one another as much as our experiments of God’s love): 사도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 (요일. 4:16)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사랑은 사랑받은자만 사랑을 줄수있다’는 사랑의 법칙과 같이, 사랑의 실천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될때 비로소 시작됨을 저는 믿습니다. 성도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를 통해 그분의 사랑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둘째, ‘비교하지 않는 만큼’ 사랑할수 있습니다 (We may love one another as much as not compare ourselves with others): 우리주님은 간음했다 잡힌 한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요. 8:11) 고. 주님이 정죄하지 않는다는 말씀의 의미는 ‘그녀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뜻과 함께 그녀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겠다는 뜻’임을 저는 믿습니다. 우리주님은 그의 제자된 우리 성도들 또한 서로 비교하지 않기를 원하시리라 믿습니다.

셋째, ‘자아 를 십자가에 목박은 만큼’ 사랑할수 있습니다 (We may love one another as much as ‘crucifixions of our egos’):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 12:24) 참된 사랑은 <죽을때 비로소 다시살아나게> 됩니다. 주께서 십자가위에서 죽으심으로 수없이 많은 생명의 열매를 맺은것과 동일하게 우리 주님의 제자들도 한알의 땅에 떨어지는 밀알이 되어 죽을때 비로소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고 주님은 우리에게 도전 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은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v.13) 고 사도바울을 통해 우리에게 도전하심을 믿습니다. 서로의 짐을 나눠지며, 우리주님께서 명하신 ‘사랑의 법’을 성취해나가라고 말입니다.

 

[설교 전문]

저는 오늘 영적훈련, 세번째 마지막 메세지를 성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주님은 ‘사랑함’을 통해 그의 제자들을 훈련 하십니다. 저는 2주에 걸쳐 ‘배움’과 ‘꿈꾸게 하심’을 통해 주님은 그의 제자된 우리를 훈련하심을 살펴 보았습니다. 오늘은 영적훈련 마지막시간으로서, ‘서로 사랑함’을 통해 훈련하시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살펴보고 은혜 나누기를 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안다’ (요일. 4:7) 고 했던 사도요한과 같이 주님을 만나는 날까지 더욱 더 사랑의 사람으로 성숙되어가는 성도여러분의 축복된 삶 살아가기를 간절히 기대 합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된 갈라디아서는 사도바울이 제 3차 전도여행을 하던 중인 AD 57년 경에 에베소에서 기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로마서와 함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이신칭의’ 교리를 그 핵심사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여러 서신서중에서 갈라디아서는 다른 서신서들과는 상당히 다른 필체로 쓰여졌음을 볼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잘아는데로 갈라디아서에서는 거짓교사로 말미암아 변질된 복음의 가르침을 따르는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을 향해 복음으로 그들을 낳았던 사도바울이 그들을 엄중히 질책하며, 거짓된 복음에서 돌아설것을 촉구하고 있기 때문 입니다.

여기서 거짓교사들은 유대교 배경을 가진자들로서 ‘예수님도 믿고, 율법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 고 주장했습니다. 특별히 ‘율법의 할례를 지켜야만 한다’고 가르쳤던 것 입니다. 사도바울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해 구체적으로 ‘믿음과 율법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우리 성도가 어떻게 의롭다함을 얻을수 있는지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실때까지, 우리에게 개인교사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게 하시려고 한것 입니다” (갈. 3:24) 라고.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그를 믿는 제자들에게 자유를 주셨으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서는 않된다 (갈. 5:1)고 바울은 갈라디아성도들에게 강하게 도전합니다. 여기서 사도바울이 강조하는 바는 ‘율법폐지론’(antinomianism)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율법이 어떻게 이제 온전히 이루워지게 되었는가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않지켜도 좋다’가 아니라, ‘그 율법이 온전히 이루어졌다’는 것 입니다. 어떻게요? 그것은 바로 오늘 본문에서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갈. 5:15) 라는것 입니다. ‘네 이웃을 네몸처럼 사랑함으로서’ 입니다. 그리고나서, 바울은 바로 “성령을 좇아 행하라” (v.16) 고 도전합니다. 그것이 오직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고, 성령의 열매를 거둘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기 때문이요,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길’ (갈. 6:2)이 되기 때문 입니다. 우리가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할때,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게 된다는 것 입니다. 우리주님은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을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게 하심으로 강한 그의 제자로 훈련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구체적으로 살펴볼것은 이것 입니다.

  • 어떻게 우리는 서로 사랑할수 있을까요?” (How are we able to love one another?):

첫째,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만큼’ 사랑할수 있습니다 (We may love one another as much as our experiments of God’s love): 사실 사랑이라는 말만큼 우리를 설레게 하고, 사랑이라는 말만큼 우리 인간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단어는 없을것 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사랑이라는 말만큼 그 정의와 적용이 다양하고 주관적으로 사용되는 단어도 또 없을것 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크리스챤들 뿐 아니라, 신앙에 관계없이 모든 인간이 살아가는 곳에서 ‘사랑’은 언제나 인간삶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고 말해도 조금도 과장이 아닐것 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부터 <사랑의 실천>에 대해 시작할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시작해야만 할것 입니다. 마치 산 아래로 흘러내려오는 시냇물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알기 원한다면, 그 시냇물을 그슬러 올라가서 그 근원지를 확인해보면 알수 있드시, ‘사랑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를 살펴봄에 있어서도 ‘그 사랑이 어디에서 시작되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되는 과제가 될것 입니다.

사도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안에 거하시느니라” (요일. 4:16)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요한은 선언합니다. 바로 사랑이라는 샘물의 근원지가 하나님이라는 것 입니다. 모든 사랑은 그로부터 시작되고, 그로말미암지 않은 어떤 사랑도 존재할수 없다는 뜻입니다. 신약성경뿐 아니라, 구약성경도 한결같이 강조한 점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 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요약해서 이렇게 한마디로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 22:37~40)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나 자신뿐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는 기초가 되기 때문 입니다. 우리 주님의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고, 이웃들을 내몸과 같이 사랑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해야만 할것 입니다. 그로말미암아 그분의 사랑을 경험해야할 것 입니다. 이것만이 우리가 행하는 모든 사랑의 근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사랑받은자만 사랑을 줄수있다’는 유명한 법칙과 같이, 사랑의 실천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될때 비로소 시작됨을 저는 믿습니다. 성도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분의 사랑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둘째, ‘비교하지 않는 만큼’ 사랑할수 있습니다 (We may love one another as much as not compare ourselves with others): 우리는 서로 비교함으로서 상대를 참되게 사랑할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 경우가 수없이 많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어떤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으시고 ‘있는모습 그대로 받아주시고 사랑하심’을 우리는 믿습니다. 만약, 나를 세상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으시고 있는모습 그대로 받아주시는 하나님을 선하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으로 우리가 믿는다면, 그분을 믿는 우리 또한 서로를 비교해서는 않될것 입니다. 서로를 있는모습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것 입니다. 물론, 우리는 끊임없이 시행착오하고 실수할찌라도 말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이렇게 그의 자녀에게 분명히 명령하십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레. 11:45) 라고.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완전한 거룩을 결코 다 행할수 없다할찌라도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그 ‘거룩을 향해 살아라’고 명령하시는 것 입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의 수준과 형편을 몰라서, 거룩하라고 명하신것이 아닙니다. 이 거룩으로 나아가는 삶이 죄와 죽음가운데에서 우리를 거져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로 살아가는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보면,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올무에 빠트리기 위해 <간음한 여인>을 잡아와서 어떻게 할것인지?를 따져 묻습니다. 유대인들은 만약 예수님이 그녀를 놓아주라고 한다면 ‘그가 모세의 율법을 어겼다’고 고소하고, 만약 주께서 그녀를 돌로 치라하면 ‘그는 용서와 자비가 없다’고 판단하려는 계략이었습니다. 주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요. 8:7) 고 말씀하셨고,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 둘 모두 그 자리를 떠나고 난뒤에 주님은 그녀에게 물으셨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요. 8:10)고. 그녀가 아무도 없다고 대답했을때 주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요. 8:11) 고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그녀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녀가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녀가 죄가 없다면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하실수 없는 것 입니다. 주님이 정죄하지 않는다는 말씀의 의미는 ‘그녀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뜻과 함께 그녀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겠다는 뜻’임을 믿습니다. 그녀를 그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고, 그녀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고, 용서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주님은 그의 제자된 우리 성도들 또한 서로 비교하지 않기를 원하시리라 믿습니다. 서로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길 기뻐하심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사랑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13장>에서 사도바울은 왜 “사랑은 오래참고 ~ 성내지 아니하며 ~ 모든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4~7)고 선언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단순히 ‘참는자에게 복이 있다’는 말을 바울이 하고싶은 것이 아니라,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디는 것이 사랑의 가장 적극적인 외적 행위’요 ‘이웃을 내몸과 같이 사랑함으로 온 율법을 이루는 거룩한 삶의 핵심이 되기 때문일 것 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지체를 남과 비교하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합니까?

셋째, ‘자아 를 십자가에 목박은 만큼’ 사랑할수 있습니다 (We may love one another as much as ‘crucifixions of our egos’): 주님께서 하신 말씀중 ‘어떻게 그의 진정한 제자로서 열매맺는 삶을 살수 있는가?’에 대해서 ‘한알의 땅에 떨어진 밀알’에 대한 말씀만큼 감동적으면서도 도전적인 말씀도 드물것 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요. 12:24,25) 고. 이 한알의 밀은 일차적으로 주님자신이 될것 입니다. 그분 자신이 십자가에서 그 보배로운 피를 흘려 죽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데로 그를 믿는 모든 자를 구원할수 없는 것입니다. 영생의 수없이 많은 열매를 맺을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한알의 밀은 또한 주님을 믿고 따르는 그분의 제자 한사람 한사람임을 주님은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도전하십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v.25) 더나아가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v.26) 무슨 뜻입니까? 참된 ‘사랑의 원리’는 <죽을때 비로소 살아나게 된다>는 것 입니다. 주께서 십자가위에서 죽으심으로 수없이 많은 생명의 열매를 맺은것과 동일하게 우리 주님의 제자들도 한알의 땅에 떨어지는 밀알이 되어 죽을때 비로소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고 주님은 사랑의 영적원리를 깨우쳐주고 있는 것 입니다. 물론 우리는 주님과 같은 십자가의 죽음을 감당할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그분이 보여주신 모범을 따라 그 십자가의 삶을 실천하라는 것 입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v.26a)는 것 입니다. 어떻게 따를까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 16:24) 주님을 따르기 원한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라고 도전 하십니다. 왜 우리는 이토록 사랑하기 힘들까요?  왜냐하면, 내 자아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여전히 죽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말의 의미를 우리가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사도바울은 “형제들아 ~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 15:31) 고 했던 고백의 의미를 이해할것 입니다. 죽어야만 다시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을 거스리는 육신의 소욕과 자아의 고집이 죽을때, 주께서 성령님을 통해 약속하신 아름다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입니다. 수없이 많은 성령의 열매를 통하여 주님의 사랑의 제자로 살게 될것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그의 제자들을 ‘배움과 꿈꾸게 함’뿐 아니라,‘서로 사랑하게 함’으로 강하게 훈련함을 믿습니다. 주님은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v.13) 고 사도바울을 통해 우리에게 도전하심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서로 섬기고, 서로의 짐을 나눠질때,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게 되기 때문’ (갈. 6:2) 입니다. 날마다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만큼, 지체를 비교하지 않고 있는모습 그대로 받아들인 만큼, 그리고 내 자아를 십자가에 목박은 만큼 우리는 서로 사랑할수 있을 것입니다. 서로의 짐을 나눠지며, 우리주님께서 명하신 ‘사랑의 법’을 성취해나갈 것 입니다. 이런 사랑의 공동체, 사랑의 가정, 사랑의 직장, 사랑의 컴퍼스를 일구어갈수 있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