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ruary 11, 2024

“사울이 바울로” (From Saul To Paul)

Preacher:
Passage: 사도행전 (Acts) 9:15, 18~20
Service Type:

“사울이 바울로”

(From Saul To Paul)

2-11-24

본문말씀: 사도행전 (Acts) 9:15, 18~20

15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침례를 받고

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 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 새

 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설교 요약]

            우리는 지난 시간 ‘청년사울의 회심’을 살펴보았습니다. 그토록 유대 율법주의에 사로잡혔던 그가 회심할 수 있었던 것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먼저 그를 찾아가 만나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사도 바울에 대한 두번째 시간으로 ‘사울이 변하여 주님을 충성되게 따르는 제자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다시 말해, 바울의 ‘영적 성숙’ (성화)의 핵심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과연 어떻게 사울은 주의 충성된 제자 바울로 변화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첫째, “주님과의 만남을 언제나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회심의 사건, 곧 다메섹에서 자신을 찾아오신 나사렛 예수님과의 만남의 사건을 남은 평생동안 늘 기억하고 간증했습니다 (행. 22 & 26장). 자신이 구원받은 순간을, 그리하여 그 주님과의 첫사랑의 은혜를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것은 핵심적인 믿음의 근거가 됩니다.

둘째, “즉시 주의 제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2번씩 “즉시” 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 (v.18) 그리고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v.20)라고.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이 벗어졌을 때, 그는 즉시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증거하였습니다. 참된 주의 제자가 되는 그 출발점은 주께서 ‘나를 따르라’ 부르실 때, ‘즉시’ 응답하는 것입니다.

셋째, “대가지불을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이 주의 제자가 됨으로 감당했던 ‘대가지불’ (paying the cost)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뻔 하였으니 ~” (고후. 11:23) 여기서 그가 강조하는 것은 자신이 많은 고난을 받았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엄청난 대가지불의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장차 그리스도와 누릴 영광 (롬. 8:18)이요, 예비된 의의 면류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딤후. 4:7~8).

자격 없는 우리를 그의 제자로 불러 주신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즉시’ 주를 따르며, 앞에 있는 영광을 바라보며 날마다 대가지불을 하는 충성된 그리스도의 제자 되시길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는 지난 시간 ‘청년사울의 회심’을 살펴보았습니다. 그토록 유대 율법주의 전통에 젖어 있던 그가 어떻게 하루 아침에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회심할 수 있었는지를 우리는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그의 영적 감수성이나 깨닫음이 뛰어나서나 그의 판단력이 탁월해서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그를 찾아가 만나 주셨기 때문이요, 주님께서 그에게 허락하신 영적 고뇌의 경험을 통해 그분의 복음을 영접할 준비를 시키셨으며, 그의 눈에서 비늘을 벗겨 주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수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제 개인적으로 평생을 통해 탐구하고 배워 나가기 원하는 성경의 대표적인 인물의 한 사람입니다. 그 중심되는 이유는 사도 바울의 여러가지 인간적 한계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 누구보다도 진실로 사랑했고, 그분의 십자가만을 자랑했고, 그분의 충성된 제자로 생을 마감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사도 바울에 대한 두번째 시간으로 <사울이 바울로>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바라기는 바울을 바울되게 하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그를 택하여 주신 은총이 오늘 말씀을 통해 동일하게 성도 여러분의 삶 속에서도 넘쳐나고 있음을 깨닫는 복된 시간 되시길 기대합니다.

먼저 우리가 알고 있는 이방인의 사도인 ‘사도 바울’의 원래이름이 그동안 살펴본 데로 ‘사울’이었습니다. 이 ‘사울’이라는 이름은 그의 히브리식 이름으로서 <구하다/ 요청하다>라는 뜻 입니다. 거기에 비해, ‘바울’이라는 이름은 헬라식 (=그리스식)으로 표기되는 이름입니다. 따라서 ‘사울’이나 ‘바울’이나 둘 다 그 이름의 의미는 동일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이 마치 ‘사울에서 바울로’전혀 다른 이름을 바꾼 것처럼 오해할 수 있는 다른 이름을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기에 대해서, 여러 성경학자들은 그의 <이방인 선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지적합니다. 그 한 예로서 튀빙겐대학의 ‘마틴 행겔’교수는 <바울>이라는 <사울>의 새 이름이 그가 회심한 그 시점 곧, 오늘 본문의 다메섹 사건에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십수년이 지나고 나서 주님의 말씀과 같이 그가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이방사역을 본격화하는 <사도행전 13장>의시점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가 그의 복음전파의 대상인 이방인과 동일한 입장에서 자신을 인식하고, 그렇게 자신을 불러 주기를 원하는 마음 때문에 ‘사울’에서 ‘바울’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사울과 바울이라는 두 이름은 일부 설교자들처럼 지나치게 확대해석해서 그 두개의 이름의 의미가 다른 것처럼 말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이나 사도 자신이 이름을 새로 지어 불렀다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되며, 이것은 성경의 사실과도 전혀 맞지 않는다는 점을 우리는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단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오늘 제목으로 ‘사울이 바울로’라고 묘사한 이유는 <사울>이라는 이름이 상징하는 과거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성도를 핍박하던 존재가, <바울>이라는 이름이 상징하는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충성된 주의 제자로 어떻게 그토록 놀랍게 변화할 수 있었던 것인지를 저는 대조적으로 강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저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이 점에 관해서 좀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과연 어떻게 사울은 주의 제자 바울로 변화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첫째, “주님과의 만남을 언제나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난시간, ‘어떻게 청년 사울의 회심이 가능했을 것인가?’를 말씀가운데서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그 회심의 중심에는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이 그를 만나 주셨기 때문에 가능했음을 우리는 살펴보았습니다. 유대전통과 울법주의에 철저하게 사로잡혀 예수 믿는 자를 남김없이 잡아 처단하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믿음이라고 굳게 믿었던 청년 사울은, 만약 예수께서 그 영광스런 광채의 모습으로 먼저 그를 만나 주시지 않았다면 가장 복음을 영접치 않을 대표적인 사람의 한명이라고 저는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주님은 사울을 먼저 찾아가셔서 그를 만나 주셨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고전. 15:10)는 그의 고백과 같이 주께서 먼저 그를 만나 주셨기 때문에 충성된 바울의 삶은 가능했던 것입니다.

만약 성도 여러분이 계속해서 사도행전을 읽어 가신다면, 사도 바울이 <사도행전 22장> 그리고 <사도행전 26장>에서 계속해서 그가 오늘 본문 <행. 9장>말씀에서 다메섹에서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기억하고,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 사건을 간증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제가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그의 권능과 사랑으로 구원하신 그의 자녀들에게 명령하시는 분명한 한가지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구약은 그의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고 신약은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기억하라’고 분명히 명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약의 출애굽기를 읽게 되면, 출애굽 1세대만큼 하나님의 크신 권능과 구원의 은혜를 수없이 경험한 사람들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광야생활 가운데 그 끊임없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에도 불구하고 되돌아서면 또다시 자신의 목마름과 작은 육신적 고통을 참지 못하고 하나님을 불평하고 불만에 사로잡혔던 것입니다. 왜 그들은 이런 하나님을 불신하고 불평하는 그릇된 삶을 산 것일까요? 그 중심에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행하신 놀라운 ‘출애굽사건’의 권능과 자비하심을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광야의 반석에서 샘물을 터트리시고, 아침마다 만나로 저녁마다 메추라기로 먹이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은혜를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로 ‘영적 기억상실증’인 것입니다. 금방 한 일도 되돌아서면 곧바로 잊어버리는 것이 ‘기억상실증’인데, 출애굽의 이스라엘민족은 깊은 ‘영적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입니다. 아침저녁으로 그들을 먹이시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시시각각 그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과 은총을 잊어버리는 그들은 실로 심각한 ‘영적 기억상실증’에 걸린 자들인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사도 바울은 단순히 다메섹의 사건이 현상적 (=현실적)으로 매우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그 사건을 늘 기억할 수 있었다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현상적으로 따진다면 방금 말씀드린 데로 출애굽 1세대만큼 하나님의 그 엄청난 초자연적인 권능과 은혜를 폭포수처럼 수없이 경험한 세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불행하게도 출애굽 1세대들은 하나님을, 그분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치 않음으로 그분을 불신했고 죄악가운데 하나님을 진노케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회심 (구원)의 사건을 기억하고 늘 되뇌었습니다. 매우 의도적으로 기쁨과 감사 가운데 그것을 기억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보여주신 주님의 살아 계심과 광채의 영광스러운 모습은 바울의 남은 평생을 그 어떤 위기의 상황 가운데서도 넉넉히 이겨 나갈 믿음의 근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그의 마음이 힘들고 어려울 적마다 바울은 언제나 다메섹의 주님을 기억하고 힘을 얻었고, 언제나 세상의 수 많은 높고 낮은 사람들 앞에서 ‘다메섹의 예수님’을 힘있게 증거하고 자랑했던 것입니다.

둘째, “즉시 주의 제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길지 않은 본문 가운데 보면 “즉시” 라는 단어가 두번씩 등장합니다. <18절>에서 “즉시 (immediately)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고 기록하고 있고, <20절>에서는 “즉시로 (straightway)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라고 말입니다. 먼저 <18절> 바로 앞 <17절>에서 사울은 주님의 제자 아나니아가 그에게 와서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v.17)고 하고 안수했을 때, 그의 눈에서 즉시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졌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종합해보면, 그 무엇보다도 청년 사울을 향한 주님의 긍휼하심이 육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어두운 암흑 가운데 있는 그의 눈을 지체하지 않고 밝혀 주셨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그의 능력으로 즉시 사울의 눈을 덮고 있던 비늘을 걷어 내시고 성령으로 충만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와 긍휼에 넘치는 그분의 사랑임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제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한가지는 이런 주님의 부르심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의 이런 구원의 은혜와 사랑은 청년 사울 한사람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를테면, 복음서에서 보면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그분의 12사도들을 사랑하셔서 제자로 부르셨고, 그들은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분을 3년반동안 따라다니며 제자로서의 훈련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그 외에도 70인의 제자들과 여러 명의 사람들도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그 중에는 한 ‘부자 청년’도 있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성경에 나온 사건 중 가장 저의 마음을 가장 안타깝게 하는 슬픈 이야기의 하나가 이 부자청년에 관한 스토리입니다. 어느 날, 한 부자 청년이 주께 나아와서 무릎을 꿇고 진지하게 묻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막. 10:17)라고. 주님은 십계명을 말씀하셨고, 그 청년은 자신 있게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막. 10:20)고 답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그를 사랑하심으로 말씀하십니다. “네게 오히려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막. 10:21) 라고. 그러나 그는 재물이 많았기 때문에 이런 주님의 말씀을 듣고 슬픈 얼굴을 하고 근심하며 돌아 갔던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 부자청년은 자신의 많은 재물을 포기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근심 가운데 주님으로부터 되돌아섰고, 두 번 다시 주님께 나아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청년 사울은 ‘즉시’ 주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즉시 주님을 따랐다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20절>말씀인 것입니다.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v.20) 사울은 유대교 율법수호에 목숨을 걸고 열심이었던 불과 며칠전의 사울에서, 이제 미련없이 과거의 맹목적이었던 율법주의와 하나님께 대한 잘못된 열심을 버리고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시요 구약의 여러 선지자들이 예언한 오실 메시야라는 복음의 증인 사도 바울로 즉시 변화된 것입니다. 왜 청년 사울은 이토록 지체하지 않고 즉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자신의 지난날의 모든 편견과 무지를 물리칠 진리에 대한 깨닫음 때문이 아닐까요? 나사렛 예수님의 영광의 광채를 목격했을 때, 과거의 자신이 그분과 그의 성도들에게 행한 모든 핍박이 얼마나 어리석고 죄악된 것임을 그가 직감적으로 통렬하게 깨닫게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즉시’ 그리고 ‘지금’ 행하는 것은 주님의 제자가 되는 첫걸음입니다. ‘나중에’ 그리고 ‘내일’이 아닙니다. 분명히 기억하십시요. 주님은 여러분을 ‘지금 즉시’ “나를 따르라” 고 부르십니다. 결코 내일이 아닙니다.

셋째, “대가지불을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지난시간에 살펴보았듯이, 예수께서 제자 아나니아에게 ‘사울을 찾아가서 안수하여 보게 하라’고 명하셨을 때, 아나니아는 사울이 그동안 성도들을 얼마나 해를 끼치고 핍박했던 자 인지를 주께 열거하며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그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v.15~16) 라고. 여기서 주님은 자신이 택한 사울의 미래를 한마디로 ‘넘치는 고난을 받게 되는 주의 제자’가 될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보는 것처럼, 주님은 먼저 그에게 ‘앞으로 사울이 겪게 될 고난의 깊이와 무게가 얼마나 깊고 무거운지를 분명히 보여 주시겠다’고 밝히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언제나 주께서 그의 제자를 부르실 때 우리에게 행하시는 방식입니다. 우리를 감언이설로 속여 따라오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분명이 우리 각자가 져야할 십자가와 주의 제자가 됨으로서 지불해야할 대가가 무엇인지를 말씀하시고, 그 대가를 지불할 준비가 되었는지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이와 같이 자신이 주님을 따름으로 그가 지불해야 할 대가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힌 적이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성도들에게 보내는 첫번째 편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떄문에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지만,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 우리는 바로 이 시각까지도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얻어맞고, 정처없이 떠돌아다닙니다 ~ 이제까지 만물의 찌꺼기처럼 되었습니다” (고전. 4:10~13) 그리고 두번째 편지에서도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 (고후. 11:23~27)라고 사도 바울은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의 고백과 같이 기독교 2천년 역사를 통틀어서 사도 바울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그처럼 수많은 고난을 겪고, 핍박의 용광로 같은 시간을 인내한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도가 이런 고백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그동안 힘들고 어렵게 살았는지를 자랑삼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주의 제자로서 지불해야 하는 분명한 ‘대가지불’이라면 자신은 결코 주저하지 않고 이와 같이 당당하게 대가지불을 했다고 밝히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성도들도 자신과 같이 주를 믿는 믿음 안에서 날마다 견고해지고, 성령과 함께 승리할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고난이 아무리 크고 힘들다고 할찌라도,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영광과 비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롬. 8:18). 이와 같이 최선을 위해 차선을 버릴 수 있고, 밭에 감추인 보화를 소유하고자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 줄 아는 결단력과 대가지불을 행할 수 있었던 바울이기에 그는 이제 자신의 이 땅에서의 삶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이렇게 놀라운 승리의 고백을 행했던 것입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딤후. 4:7~8)라고. 여러분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됨으로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 있습니까? 주님을 따르는 삶이 때로는 고난과 연단의 순간이지만, 이것은 주께서 약속하신 기쁨과 만족, 그리고 그 속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는 축복된 삶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임을 여러분은 이해하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청년 사울은 어느날 갑자기 자신을 만나 주신 나사렛 예수님께 순종하여 즉시 주를 따르는 충성된 그분의 제자 사도 바울이 되었습니다. 비록 세상의 많은 고난과 시련이 그의 앞을 가로막기도 했지만, 그러나 배고픔의 위협도 칼의 위협도 심지어 죽음의 위협도 결코 그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실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주님의 충성되고 용맹한 제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누구보다도 주께서 약속하신 기쁨과 만족과 주와 함께 날마다 승리하는 복된 제자였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전. 11:1)고 지금 사랑으로 도전합니다. 이제 여러분과 저의 차례입니다. 우리 함께 세상이 줄수도 빼앗을 수도 없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된 제자만이 누릴 수 있는 참된 능력과 생명과 승리의 삶을 성령님과 함께 누려 보시지 않겠습니까?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