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ruary 4, 2024

“사울의 회심” (The Conversion Of Saul)

Preacher:
Passage: 사도행전 (Acts) 9:3~5
Service Type:

“사울의 회심”

(The Conversion Of Saul)

2-4-24

본문말씀: 사도행전 (Acts) 9:3-5

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설교 요약]

스데반의 순교와 함께 예루살렘교회에 급속히 들어 닥친 핍박은 가히 가공할 만한 엄청난 환난의 신호탄이었음을 지난 시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을 핍박하던 유대종교지도자, 청년 사울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갑작스런 회심은 그 자신 뿐 아니라 기독교회 역사에서도 큰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바로 그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청년 사울의 회심을 가져오게 한 원인일까요?그것은

          첫째, ‘예수님의 영이 사울을 만나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잘못된 지식과 선입관으로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을 예수님은 만나 주셨습니다. 밝은 빛과 함께 주께서 그를 만나셨을 때 사울은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묻었고,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v.5b)고 주님은 대답하셨습니다. 이 주님과의 ‘다메섹의 만남’은 그의 참된 회심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둘째, ‘수많은 영적 고뇌를 행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주님께서 수없이 다양한 경험들을 통해 청년 사울의 마음 가운데 복음을 영접할 준비를 행하셨습니다. 그는 ‘죄의 막강한 힘에 사로잡힌 자신’을 영적 탄식으로 고백했고 (롬.7장), 천사와 같은 모습으로 돌로 치는 자들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드렸던 스데반의 순교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의 굳은 마음은 복음으로 녹혀 나갔던 것입니다 (행. 6-7장).

          셋째, ‘눈에서 비늘이 벗어졌기’ 때문입니다: 강력한 빛으로 말미암아 눈이 멀게 된 사울을 주님은 제자 아나나아를 통해 뜨게 하십니다. 그때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v.18a)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비늘이 벗어졌다’는 <육적 시력>과 더불어 <영적 시력>을 회복했다는 의미입니다. 사울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짐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빛나는 영광을 영의 눈을 열어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 성령의 능력으로 영생의 복을 누리고, 청년 사울과 같이 눈에 비늘이 벗어져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봄으로 충성되고 자족한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시기를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스데반의 순교와 함께 예루살렘교회에 급속히 들어 닥친 핍박은 가히 가공할 만한 엄청난 환난의 신호탄이었음을 지난 시간 살펴보았습니다. 성경의 충만함으로 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날마다 경험하던 예루살렘교회는 유대종교 지도자들이 중심된 살기등등한 핍박으로 인하여 삽시간에 사도들을 제외한 성도들 모두가 유다와 사마리아와 모든 땅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 혹독한 고난의 시간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핍박이 핍박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런 핍박이 어떻게 왕성한 복음의 진보를 이루고, 그 핍박이 도리어 주께서 약속하신 땅 끝까지 이르러 충성된 그분의 증인이 될수 있게 하는지 하는 놀라운 영적 반전을 지난 시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그 반전의 중심엔 핍박을 통해 주의 제자들이 흩어짐으로 땅 끝까지 이르는 개기가 되었고, 그 핍박은 성도를 좌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욱 굳세게 하여 복음으로 승리하게 했기 때문이라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런 반전의 삶을 이 혼돈과 핍박의 기간 동안 극적으로 경험하고, 기독교 2천년 역사를 통하여 오늘날까지도 그리스도의 복음 역사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한 인물을 우리는 오늘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의 이름은 오늘 본문의 ‘청년 사울’이고 이 사건을 통해 그는 ‘사도 바울’로 변화되게 되었습니다. 이 청년 사울의 회심을 통해 청년 여러분 모두에게 주께서 주시는 위로와 도전의 복된 역사가 있기를 기대합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 <사도행전8장>의 1~4절을 중심으로 한 예루살렘교회에 들어 닥친 핍박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행. 8장>의 5절에서 시작하여 끝 절, 40절에 이르기까지 흩어진 예루살렘성도들, 곧 주의 제자들에 의해 행해지는 구체적인 복음의 행진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5절 이하의 전도사역은 전도자 빌립의 사역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이 ‘빌립’은 앞의 6장에서 예루살렘교회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집사를 뽑았는데 그 중 한 명이 빌립 집사입니다.

그 빌립집사가 사마리아성으로 가서 복음의 말씀도 전하고 표적도 행했을 때 많은 무리들이 몰려왔고, 귀신이 쫓겨나고 앉은뱅이와 중풍병자가 나음을 입고, 그의 전도함을 통해 남녀가 다 침례를 입은 복음의 흥왕한 역사가 행해졌습니다 (v. 5~25). 이렇게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사역을 놀랍게 행하고나서, 주의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 “일어나서 ~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v. 26) 명했습니다. 그로인하여 그 가는 길에 에디오피아의 여왕 간다게의 내시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가 마차를 타고가며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었는데, 그 글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바로 그때 빌립을 만나게 되었고, 빌립은 그에게 이사야의 글에 예언한 그리스도가 나사렛 예수임을 깨닫게 해 줍니다. 그때 내시는 즉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표로서 침례 받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마차에서 내려 그 옆에 있는 물 (강물 혹은 호숫물)에 내려가 빌립이 그에게 침례를 베풀고 그들은 헤어져 다시 보지 못합니다. 이것이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짧은 사례이지만, 그 내시를 통해 에디오피아 뿐 아니라, 아프리카 전역으로 주의 복음이 퍼져나가는 중요한 개기가 되었음을 크리스챤 역사가들은 지적합니다. 한명에게 단 한번의 짧은 만남을 통해서 뿌려진 복음의 씨앗이라 할찌라도 얼마나 생명력 넘치게 싹을 띄우고 장성하게 자랄 수 있는지를 깨닫게 하는 사례입니다.

이와 같이 교회에 대한 탄압이 도리어 어떻게 복음의 편만한 전파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8장>에서 상세하게 설명하고 나서, <9장>의 오늘말씀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9장의 시작은 8장의 시작과 매우 유사합니다. “사울이 그의 죽임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행. 8:1)고 <8장>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9장>에서는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행. 9:1-2)고 사울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청년 사울이 살기등등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여 교회를 잔멸하고자 혈안이 된 상태를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유대교에 특심이었던 청년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바울로 바뀌는 마지막 순간이었음을 그 자신도 결코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8장이 시작되는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청년 사울은 스데반의 처형을 통해 이제 남은 교회를 잔멸하고자 안간힘을 다셨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9장>에서 이 날도 그는 위협과 살기가 가득하여 성도들을 색출하여 남녀 무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가고자 다메섹 언덕을 황급히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언덕에서 경험한 사건으로 인하여 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신약성경을 묵상하고 공부하면 할수록 더욱 분명히 이해할 수 있는 사실의 하나는 ‘사도 바울의 회심’ 곧 ‘청년 사울에서 사도 바울로의 회심’이 기독교회사에 가져오게 되는 놀라운 결과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런 한사람 사도 바울의 엄청난 영향력을 단순히 그의 영적 재능과 결단력으로만 이해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이해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2천년 기독교역사 가운데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되는 사도 바울의 회심사건의 진정한 의미일까요? 다시 말해서, 무엇이 청년 사울의 회심을 가져오게 한 원인일까요?그것은

          첫째, ‘예수님의 영이 사울을 만나 주셨기’ 때문입니다: 왜 청년 사울은 이 날도 그토록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예수 믿는 자들을 색출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가고자 혈안이 되어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히 말하면,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올바른 행위라고 사울이 확신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뜨겁게 사랑함으로써 비롯된 ‘정당하고 의로운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라고 그가 굳게 믿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로 인하여, 사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예수 믿는 자들을 잔멸하고자 앞장섰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사울은 스데반을 유대종교의 이름으로 돌로 쳐 죽게 하는데 앞장서서 집행했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 살펴본데로 온 유대와 심지어 다메섹 지역까지 기독교인들이 모여 있다는 정보가 수집되기만 하면’ 단 걸음에 달려가서 남녀를 막론하고 예루살렘으로 잡아와서 공회의 종교재판에 넘겨 처단했던 것입니다. 그만큼 사울은 몇 년 전에 십자가에서 처형된 <나사렛출신의 예수>라는 자는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라고 주장하는 사이비종교지도자라고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이비종교 교주에 해당하는 나사렛 예수는 이미 십자가에서 처단했으니, 이제 남은 그의 추종자만 잔멸하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잘 마무리될 것이라 그는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가 오늘도 다메섹 언덕을 급히 넘어가고 있을 때, 돌연 하늘에서 강렬한 빛이 그를 비취었고 그로 인해 그는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그리고 이런 소리를 듣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v.4) 그 강력한 빛으로 인하여 쓰러져 넘어진 사울은 지금 들리는 한 음성을 통해 그에게 말씀하는 존재는 결코 사람이 아님을 직감적으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같이 갔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였는데, 이것은 마치 예수께서 <요한복음 12장>에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요. 12:28)는 음성이 하늘로부터 들렸으나 곁에 있던 사람들은 그 음성을 깨닫지 못하고 ‘천둥이 울었다’고도 하고,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고도 했던 사건과 유사합니다.

사울은 초자연적인 존재가 자신을 부른다는 것을 직감하고 “주여 뉘시오니이까” (v.5a)라고 묻었고, 그분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v.5b)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이 청년 사울이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자신을 드러내셨다는 것입니다. 찬란한 영광의 존재로 그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이 한번의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은 사울의 남은 전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만큼 강력하고 결정적인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찬란히 빛나는 영광의 예수님과의 만남 그 자체가 그에게 무엇이 진실이며 무엇이 참인지를 깨닫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수많은 영적 고뇌를 행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은 첫 사람 아담의 원죄를 물려받은 우리 모든 인간존재가 경험하게 되는 ‘죄와의 관계’를 적나라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을 그는 <자기 자신과 죄와의 관계>로 묘사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15,20,24)라고. 이와 같이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이 스스로 고백하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는 이 절규는 그의 인생에서 언제를 뜻하는 것인가에 대해서 성경학자들은 중요한 이슈 (질문)로 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그것을 경험한 것을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이 고백은 사도 바울이 노년에 로마서를 쓸 당시의 영적 상태가 아니라, 그가 청년 사울 시절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영적 상태’라고 주장하는 로이드 존스 목사의 견해에 동의합니다.

그 이유를 여기서 자세히 다룰 수는 없지만, 무엇보다도 청년 사울은 유대종교에 열심이던 시절, 구약에 기록된 하나님의 율법을 통하여 <진리의 선한 빛>은 맛보았지만, 여전히 첫 사람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원죄’의 막강한 힘으로 말미암아 그가 그토록 ‘원했던 선은 행치 못하고, 도리어 원치 않는 죄를 행하는 자신을 날마다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고 절망적으로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이런 죄의 막강한 힘 앞에 끌려 다니는 존재는 결코 구원받은 성도의 존재가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결코 로마서를 쓸 당시의 복음의 진리로 충만한 복음의 백전노장 사도 바울의 상태도 아닐 뿐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구원받은 그 어떤 성도의 모습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는 이어지는 <로마서 8장>을 시작하면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1-2)고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법으로 구원받은 성도는 죄와 사망에서 해방된 존재인 것입니다. 결코 ‘누가 나를 건져내라’고 절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누가 자신을 건져내 주실 분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럼으로 <롬. 7장>의 고백은 청년 사울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이미 그가 경험했던 수많은 영적 고뇌 중의 한 실례입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 잠시 언급했듯이 ‘스데반 집사’가 순교될 당시 그의 죽음을 목격한 증인들이 사울의 발 앞에 자신들의 옷을 두었는데, 이것은 그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미 유대종교지도자의 한 명이 되어 스데반을 사형시키는데 유대공회의 권위를 대표하여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중요한 것은 스데반이 설교를 시작했을 때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음을 사울이 목격했다는 것이고, 또한 스데반이 돌이 맞아 마지막 숨을 거두는 그 순간에 무릎을 꿇고 도리어 하나님께 자신을 돌로 친 자들을 위해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행. 7:60)라고 부르짖고는 숨을 거두는 충격적인 장면을 사울은 생생하게 목격했다는 것입니다. 왜 이것이 충격적이었을까요? 그 이유는 만약 스데반이 사이비 신자라면, 결코 얼굴이 천사같이 순결하고 밝게 빛날 수 없었을 것이고, 심지어 마지막 돌에 맞아 숨지는 이런 처절한 순간에 자신을 죽이는 원수를 위해 결코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간절히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구하는 이런 기도를 할 수 없음을 사울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스데반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은 그날 하루만 충격을 주고 그친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청년 사울의 뇌리와 마음 깊숙히 박혀 떠나지 않았으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과연 스데반이 주장한 것처럼 나사렛 예수가 정말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닐까 하는 영적 혼돈과 번뇌가 어쩌면 다메섹 언덕에서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는 날까지 그를 따라다닌 것은 아닐까 하고 저는 상상해 봅니다.

          셋째, ‘눈에서 비늘이 벗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청년사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됨과 동시에 그분의 강력한 빛으로 말미암아 그의 눈은 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v.5b)고 밝히시고 나서,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v.6)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을 때, 아무것도 볼 수 없었고, 다른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사흘 밤 사흘 낮을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 ‘아나니아’에게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v.11)고 하신 말씀을 볼 때, 사울은 그 기간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오직 전심으로 간절히 기도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기도했을까요? 그것은 단순히 자신의 시력을 회복시켜 주시길 간구한 것이 전부가 아니라, 그가 다메섹에서 만난 나사렛 예수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지? 자신이 그토록 미워하고 핍박했던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자요 그리스도 메시야 되시는지를 자신의 어두운 영적 눈을 열어 볼 수 있고 깨닫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한 것이 아닐까 하고 저는 상상해 봅니다.

그런데 아나니아는 사울이 지금까지 예루살렘에서 성도들을 몹시 괴롭히고 또 잡아 가고자 이곳에 왔음을 주께 말했을 때, 주님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v.15)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아나니아가 주님의 명령을 따라 사울에게 와서 말합니다.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신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v.17)라고. 그리고 그가 이렇게 안수했을 때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v.18a)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졌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서는 성경학자들 간에 여러가지 주장이 많습니다. 말 그대로 눈에서 비늘 같은 막이 벗겨지게 된 것인지, 아니면 하나의 상징적인 의미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졌다’고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영적 깨닫음과 자각>을 표현한 것입니다. 마치 ‘새가 알을 깨고 나올 때, 새로운 세상을 비로소 볼 수 있듯이’ 영적인 깊은 각성을 통해 진리를 깨닫게 되는 상태를 ‘눈에 비늘 같은 것이 벗어졌다’ 라고 상징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중에 정확히 여기서는 어느 경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저는 아마도 그 둘 다가 해당하지 않는가 하고 추측해 봅니다.

앞서서 제가 사울의 기도에 대해 상상해 보았듯이, 사울이 사흘 밤낮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간절히 기도한 것은 육신의 시력 뿐 아니라 영적 시력도 밝혀 주시길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제 사울은 실제로 눈에서 껍질 같은 것이 벗겨짐으로 육신의 시력을 회복했음은 물론이요, 더 나아가 주께서 그의 어두운 영적 눈을 밝혀 주심으로 영적 시력을 회복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적 시력을 회복함으로 이제 비로소 나사렛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임을 분명히 영의 눈을 열어 바라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라고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시작하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밝혔듯이, 청년사울은 이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독생자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토록 유대율법주의에 젖어서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교회를 핍박하고 하나님을 향한 잘못된 열심에 사로잡혔던 청년 사울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믿음으로 회심할 수 있었는지 알 수 있는 핵심적인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청년 사울의 회심은 여러분에게는 어떤 의미로 다가옵니까? 하나님의 율법이라는 의로운 진리 안에서 평생 자라왔고, 그 진리의 빛을 어느 정도 맛보았지만, 예수님을 믿음으로 성령을 통한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는 중생을 경험하지 못했기에 여전히 자신 속에 있는 내면적 고뇌와 영적 좌절로 인하여 갈등 가운데 살아가던 유대종교 지도자 청년 사울을 만나 주신 예수 그리스도, 그로 말미암아 청년 사울은 비로소 주님의 충성되고 진정으로 행복한 주의 제자 바울로 거듭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까지 얼마나 오랫동안 교회생활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성도 여러분의 어두운 영적 눈을 주의 영, 성령의 은혜와 충만한 능력으로 밝혀 주셔서 여러분이 지금까지 한번도 깨닫지 못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독생자의 영광을 바라보고, 기쁨과 확신 가운데 사도 바울과 같이 그분의 충성되고 행복한 제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의 기쁨을 누리고,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