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28, 2024

“교회의 핍박” (Persecution Of The Church)

Preacher:
Passage: 사도행전 (Acts) 8:1~4
Service Type:

“교회의 핍박”

(Persecution Of The Church)

1-28-24

본문말씀: 사도행전 (Acts) 8:1~4

1 사울이 그의 죽음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 새

[설교 요약]

            지난주 <사도행전 7장>에서 살펴본데로, 스데반집사의 순교를 신호탄으로 하여 초대교회에 핍박의 역사가 시작됨을 보게 됩니다. 첫 신호탄입니다.

이제 사도행전 8장의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 그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행. 8:1)라고.

2천년 기독교회사에서 볼 때, 초대교회에 임한 유대종교지도자들과 로마제국 위정자들의 극렬한 핍박은 AD313년에 로마의 콘스탄티누스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정할 때까지 이어집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8장>을 읽어가다 보면, 핍박이 가져오는 놀라운 영적 반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초대교회의 핍박이 가져오는 영적 반전일까요? 그것은,

첫째, <핍박은 성도를 흩어지게> 했습니다: 갑자기 불어 닥친 핍박은 교회를 풍비박산 나게 만듭니다.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v.1) 그러나, 이로 인한 성도의 흩어짐은 ‘땅끝까지 이르러 주의 증인되게’ 하는 복된 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행. 1:8).

둘째, <핍박은 성도를 굳세게> 만듭니다: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 (롬. 5:3~4)라고. 정말 우리가 환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었기)” (롬. 5:5) 때문입니다. 이것은 핍박을 통하여 도리어 성도를 굳세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셋째, <핍박은 성도를 승리하게> 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이 비극이 아니라, 진정한 성도의 승리인 이유는 ‘그의 순교가 한 알의 죽는 밀알이 되어 많은 생명의 열매를 맺었기’ (요. 12:24) 때문입니다.

비록 풀무불과 같은 핍박의 순간이 몰려온다 할찌라도 성령을 통하여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넉넉히 이기고, 정금과 같은 믿음으로 주와 함께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도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 인간의 삶을 곰곰히 생각해 볼 때 한가지 매우 역설적인 진실이 있는데, 그것은 ‘고난’이 가져오는 삶의 결과입니다. 고난은 사실 고통스럽고 우리 모든 인간이 본능적으로 원치 않고 피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한가지 사실은 그 고난의 순간을 잘 극복하고, 역경을 슬기롭게 이겨나게 될 때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놀라운 역전의 삶을 가져오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모두는 육신적으로 아픔도 고난도 없는 무사태평의 무풍지대의 삶을 추구하지만, 설령 그런 삶을 산다 손치더라도 그 삶은 도리어 우리를 점점 더 메너리즘과 깊은 영적 권태로 빠트려 삶의 의미를 상실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우리는 직시해야 합니다.

그러나 ‘고난과 역경’은 만약 우리가 지레 겁을 먹고 자포자기를 하지만 않는다면, 그 세찬 바람과 고통의 눈보라가 우리를 깨어 있게 하고, 아니 더 나아가 그 위기를 극복하는 촉매제가 되어 그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넉넉히 이겨 나갈 수 있도록 우리를 강인하게 빗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난이 가져오는 인생의 역설 (아이러니)입니다. 그런데 이런 역설은 일반적인 삶의 원리 뿐 만 아니라, 신앙에서도 정확히 적용됨을 봅니다.

오순절날 약속하신 성령님의 충만한 임재하심으로 시작된 예루살렘교회는 시간이 지날수록 복음의 강력한 증거로 인하여 부흥의 역사를 더해 갔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부흥하는 만큼 유대종교지도자들의 복음전파를 방해하고 교회를 핍박하는 강도도 더욱 커져 갔습니다. 지난주 살펴본, 스데반집사의 순교가 그 대표적으로 초대교회에 닥친 핍박의 첫 신호탄입니다. 그리고 교회에 임한 핍박은 때로 눈물과 고통의 긴 터널을 지나기도 하지만, 그 결국은 교회를 주의 영 성령의 능력으로 세상 끝까지 복음을 편만하게 전파하며, 주와 함께 승리하여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함을 우리는 기독교 2천년 역사를 통해 수없이 확인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행. 7장>에서 스데반의 순교로 시작된 ‘교회에 닥친 핍박’의 역사는 그 핍박이 핍박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도리어 어떻게 아름다운 영적 축복의 열매로 꽃피울수 있는지 하는 복음의 역설적 비밀을 오늘 말씀에서 그 단서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울이 그의 죽음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행. 8:1)라고. 바로 지난 시간 함께 살펴 본 것처럼 스데반집사가 성령의 충만을 받아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목 박아 죽인 유대인들의 죄악을 책망했을 때, 그들은 목이 곧고 영적 교만함으로 인하여 이를 갈고 분개해 그를 돌로 쳐 죽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목격한 증인들은 그들의 옷을 벗어 청년 사울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된 청년 사울에 대해서는 다음시간에 좀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청년 사울, 곧 예수님을 다메섹 언덕에서 만난 후에 그분을 위한 이방인의 사도가 된 사도 바울의 청년시절의 이름, 사울은 안따갑게도 그 당시 스데반의 죽음 당하는 것을 마땅히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바리새인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잘못된 열심으로 말미암아 더욱 하나님의 진리를 가로막았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라 오늘 본문은 초대교회에 임한 핍박이 본격적으로 교회를 강타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교회의 핍박은 2천년 기독교 역사라는 큰 그림에서 볼 때, 첫 단계에 해당합니다. 다시 말해, 초대교회가 막 생겨난 시기에 유대종교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이뤄진 교회를 향한 핍박입니다. 그리고 이런 세상의 핍박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확대되고 더욱 잔인하게 행해졌음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두번째 단계의 핍박인데, 로마제국의 황제를 중심으로 한 핍박이었습니다. 특히 AD 60년경부터 시작된 로마제국으로부터의 박해는 AD 64년의 대박해를 시작으로 AD 313년에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내려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삼을 때까지 수세기를 걸쳐 혹독하게 계속된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네로 황제때 로마시의 대화재를 기독교인을 희생양 삼아 방화범인 것으로 몰아 ‘인간 횃불’로 화형에 처하는 잔인한 탄압이라든가, 그리고 가장 기독교를 심하게 탄압한 것으로 알려진 디오크레티아누스 황제 때는 기독교인들을 로마제국 전역에서 말살코자 하는 명령을 내렸고, 교회를 파괴하고, 성도들을 성경과 함께 불태워 죽게 하는 끔찍한 탄압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이 긴 기독교 탄압의 기간동안 로마제국 위정자들은 기독교인들의 모든 신분적 권리를 박탈하고, 우상숭배의 배교행위를 강요하여 지키지 않으면 가차없이 죽이는 탄압을 서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기독교의 긴 역사를 통해 이어지게 되는 초대교회 당시의 탄압 사건은 앞서 말씀 드린데로, 콘스탄티누스황제에 의한 기독교의 국교화로 일단락 내려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탄압의 끝이 결코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아니 이 세상은 그리고 이 세상을 조정하는 공중 권세 잡은 자, 사단 마귀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기에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돌아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것’입니다 (벧전. 5:8~9). 물론 이런 악한 영 사단 마귀의 공격과 탄압은 초대교회나 오늘날의 공산권과 회교권과 같은 일부 나라처럼 공권력을 이용하여 탄압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사는 이곳 미국이나 한국, 유럽등과 같이 상대적으로 종교적 자유가 잘 보장된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어쩌면 더욱 교묘하고 교활한 방식으로 사단은 우리 성도를 미혹하고 탄압함을 저는 이해합니다. 이런 사단의 목표는 하나입니다. 그것은 우리 성도를 미혹하고 낙심케 하여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 개인과 교회공동체를 향한 세상과 사단 마귀의 최종 목표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포함한 <행. 8장>을 읽어가다 보면, 핍박이 가져오는 놀라운 영적 반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편 말씀의 표현과 같이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시. 30:11)는 반전의 신비한 변화를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이제 무엇이 초대교회의 핍박이 가져오는 영적 반전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핍박은 성도를 흩어지게> 했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몇 주에 걸쳐 살펴본데로, 성령의 충만한 임재로 시작된 최초의 교회, 예루살렘교회는 말 그대로 성령충만과 사랑으로 하나된 교회였습니다. 이런 예루살렘교회는 앞서 <행. 2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필요를 따라 가진 것을 서로 나눠 가지고, 순전한 마음으로 떡을 떼고, 말씀과 기도 가운데 하나님을 찬미하는 아름다운 믿음의 공동체였습니다 (행. 2:42~47). 제가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로서 이런 막 시작된 예루살렘교회, 성령충만을 통해 말씀과 기도와 뜨거운 사랑으로 하나되어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하고, 날마다 믿는 자가 더해지는 이런 예루살렘교회 그 이상의 교회를 솔직히 기대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마치 베드로가 주와 함께 변화산에 올라 갔다가 주님의 몸이 변하여 빛과 같이 광채가 나고, 모세와 엘리야가 주와 함께 대화하는 장면을 보고 정신이 황홀해지고 혼미해져서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눅. 9:33)고 말했듯이, 저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런 예루살렘교회의 상태를 계속 유지만 하면 좋사오니’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 인간의 계획과 다름을 봅니다. 스데반의 죽음으로 예루살렘교회에 갑자기 불어 닥친 핍박은 교회를 통제 불가능한 위기상태로 몰고 갑니다. 이 핍박은 평화롭고 기쁨 충만했던 교회를 풍비박산 나게 만듭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사도를 제외한 성도들이 모두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모든 땅으로 흩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v.1)라고. 그런데 이 순간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한가지 사실은 우리 주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무엇을 약속하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것이 사도행전이 시작되는 1장에서의 주님의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가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8)라고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물론 강력한 외부의 핍박과 갑작스런 교회의 흩어짐은 매우 당황스럽고도 고통스러운 현실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교회의 핍박이 한편에서 본다면 주께서 신실한 복음전파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점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말씀과 사랑으로 층만한 성도들이 이렇게 교회에 닥친 핍박으로 인해 바람에 흩날리는 씨앗처럼 <복음의 디아스포라>가 되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첫 발을 내디뎠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복음 안에 감쳐진 구원의 비밀이요, 핍박이 도리어 가져오는 강력한 복음진보의 반전인 것입니다.

둘째, <핍박은 성도를 굳세게> 만듭니다: 추운 겨울에 피는 ‘인동초’가 있습니다. ‘인동초’는 ‘추운 겨울을 참아내고 피어난 풀’이라는 뜻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모진 겨울을 얇은 잎 몇개로 견디는 인동초에서 피어나는 인동 꽃은 ‘금은화’라 불리는 불리는데, 티 없이 깨끗하고 향기가 좋은 꽃으로서 처음에는 흰색으로 피었다가 며칠 지나면 노란색으로 변하기에 금빛과 은빛의 꽃이 사이좋게 섞여 핀다고 하여 ‘금은화’라는 예쁜 꽃이름이 붙여진 것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의 참된 믿음을 꽃으로 비유하자면 겨울에 피는 ‘인동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가로막고 공격하는 모진 겨울과 같은 죄악의 유혹을 이겨내고 피는 믿음의 꽃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인내함으로써 맺히는 아름다운 믿음의 열매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 5:3~4)라고. 사도가 이렇게 선언하는 근거로서 그는 먼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그분을 믿는 자들을 죄 용서하여 주심으로 의롭다고 불러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롬. 5:1)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과의 평화되는 관계는 그리스도의 의로우신 옷을 입고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하신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게 함으로 그분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충만한 은혜를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롬. 5:2). 이런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 받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로운 옷을 입고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 그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자녀의 유익과 특권을 누리게 되기 때문에, 우리 성도들은 비록 환난의 먹구름이 몰려오고 핍박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게 된다고 할지라도 결코 좌절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 (롬. 5:5)이기 때문이요, 성령의 도우심으로 환난은 우리 성도를 실패가 아니라 인내함으로, 인내는 끈기를, 그리고 끈기는 소망으로 인도함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도 바울이 이런 변화를 이론의 차원이 아니라, 경험의 차원에서 설명한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는 지금 환난이 가져오는 소망과 즐거움의 삶을 신학적인 개념이 아니라, ‘우리가 삶 가운데 누리고 있느냐?’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교회의 핍박’이라는 제목의 말씀을 준비하면서 과연 오늘 이 시간 성도 여러분과 제가 겪고 있는 핍박과 환난의 실체는 무엇일까? 성도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어떤 핍박을 받았는가? 하는 점을 질문해 봅니다. 과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따르는 제자가 됨으로 어떤 대가지불을 하고 있습니까? 제가 그동안 몇 번 말씀드렸지만, 오늘날 한국이나 우리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이곳 미국과 같은 자유민주주의사회에서 여러분이 크리스챤이 되었다고 해서 적어도 오늘 사도행전 본문의 초대교회나 오늘날 공산주의 혹은 이슬람국가의 지하교회의 성도들처럼 엄청난 종교적 탄압과 심각한 신변의 위협은 겪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만약 성도 여러분이 주님을 순전히 믿음으로 인해서 치뤄야 하는 그 어떤 믿음의 대가지불도 하고 있지 않다면 여러분은 심각하게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점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영적으로 잘 설명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딤후. 3:12)고. 사단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두루 돌아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나 공산국가나 이슬람국가 뿐 아니라 한국과 미국 유럽 할 것없이 시간과 장소에 관계없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믿음으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모든 자를 공격의 대상으로 삼고 세상과 악한 영은 핍박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핍박을 받지 못했다면, 아직도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지 못한 때문은 아닐까요?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주님을 향한 경건한 삶으로 인하여 고난과 핍박을 받고 있습니까? 두려워하지 마십시요. 우리의 주님은 결코 여러분을 홀로 내버려 두시지 않을 것입니다. 주의 영, 성령께서 그 환난 가운데서도 도리어 즐거워하게 하시는 기쁨의 능력을 주시고, 소망가운데 세상의 그 어떤 공격도 여러분을 꺼꾸러트리지 못하게 맞서 싸울수 있도록 굳세게 힘주시는 것입니다. 모진 추위를 뚫고 순결하고 아름답게 꽃피는 인동초 꽃과 같이 말입니다.

셋째, <핍박은 성도를 승리하게> 했습니다: 근대 기독교 선교역사에 있어서 1956년은 비극적인 해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1956년 1월 8일에 다섯명의 선교사들이 니콰라과의 아마존 정글 속 ‘아우카’인디언들에 의해 참혹하게 순교하게 되는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과 그 이후의 상황을 다룬 영화가 <End of the Spear(2005)>, 우리말로는 ‘창 끝’이라는 제목으로 상연된 바가 있습니다. 아마존 정글의 아우카 인디언들은 매우 잔인한 부족으로서 자기 부족을 죽인 자는 끝까지 쫓아가 받드시 살해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휘튼 칼리지를 졸업한 다섯명의 젊고 총망받는 선교사들이 아내들을 집에 남겨둔 채, 경비행기를 타고 니콰라과 아우카 인디언마을에 도착합니다. 그들은 음식과 의약품 등을 정성껏 바구니에 담아 가져갔고, 그곳 부족들을 만나게 될 때 ‘나는 당신의 친구입니다’라는 말도 준비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래사장에 도착했을 때, 곤경에 처한 한 인디언이 “이방인들이 부족여자 한명을 납치하고 살해했다’고 거짓말을 했고, 이로 인해 다섯명의 선교사들은 해변에서 무참하게 창에 찔려 죽습니다. 그당시 그들을 죽인 인디언들이 한가지 이해할 수 없었던 점은 젊은 선교사들에게는 총이 있었으나, 자신들을 공격하거나 도망가지도 않고 저항하지도 않고 죽음을 택했다는 것이었습니다.

1956년 1월 8일, 일행 중 한명인 피트선교사는 아내에게 긴급히 무전을 쳤는데, “흥분한 부족들이 몰려오고 있소. 기도해 줘요!”라는 말을 남기고 연락이 두절되었습니다. 다음날 수색대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다섯명의 선교사들은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때 20대의 선교사 부인들은 울부짖으며 다짐합니다. “남편들이 이루지 못한 사역을 우리가 계속하자!”라고. 그로부터 2년반이 지난 후 짐 엘리엇 선교사의 아내 엘리자베스와 그의 딸 발레리와 네이트 세인트선교사의 누이 레이첼이 아우카 부족을 찾아 갑니다. 어느날, 추장 민카야니가 엘리자베스를 찾아와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도데체 우리를 위해 왜 이토록 애쓰고 수고합니까?” 그녀는 말합니다. “나는 5년 전에 당신들이 죽인 남자의 아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여기에 왔습니다” 추장은 너무나 큰 충격을 받습니다. 추장은 그들의 마을에 함께 들어와 살자고 그녀들을 초청하고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그후 5명의 선교사가 순교한지 36년이 지난 1992년에 그 지역 봉헌예배에 참석한 사람 중에 그 선교사를 살해했던 다섯명의 인디언들이 참석했는데, 그들 중 4명은 목사가, 그리고 다른 한명은 장로가 되어 있었습니다. 1천명이 넘는 마을 주민 모두가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수백개의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 민카야니 추장은 순교한 세인트의 아들 스티브를 살해현장으로 데려가서, 속죄하는 마음으로 그의 아버지를 죽인 자신을 죽여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러나 스티브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무도 아버지의 목숨을 빼앗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자신이 내어준 것입니다. 우리의 목숨도 아버지처럼 늘 ‘창끝’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선교지는 꼭 배를 타고 또는 비행기에 몸을 실어 멀리 가야 하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내 주위에 누군가가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다면 그곳이 선교지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선교사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교회의 첫 순교자 스데반의 삶의 살펴보았습니다. 과연 무엇이 스데반을 그토록 담대하게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고 그리스도의 충성된 증인으로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참으로 값진 순교의 삶으로 주께 쓰임 받을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지난 시간에서도 살펴본 것처럼 스데반이 주님의 이 말씀을 순종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 12:24)라고. 스데반은 자기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리게 되지만,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끝내 세상과 악한 영과 싸워 승리함으로 영생하도록 주와 함께 구원의 은혜와 영광을 누리게 됨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죽는 한 알의 밀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마존의 다섯 선교사 또한 한 알의 밀알이 되었듯이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오늘 ‘교회의 핍박’이라는 제목의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한가지 영적 사실을 더욱 분명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성도에게 핍박은 단순히 불행도 저주도 아니요, 도리어 욥의 고백과 같이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자녀를 불과 같은 연단을 통해 ‘정금과 같은 믿음’으로 아름답게 빗어 주시는 필요 불가결한 그분의 도구라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형제들아 ~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 15:31)라고. 순교는 단지 육체적 순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우리가 믿음으로 세상을 향한 마음과 육신에 속한 죄의 본성을 날마다 죽일 수만 있다면, 이것 또한 주께서 도전하신 한 알의 죽어지는 밀알의 삶이요, 영적 순교라고 저는 믿습니다. 핍박과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주님을 향한 참사랑으로 핍박 가운데 즐거워하며, 고난의 풀무불 가운데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지지 않을 정금과 같은 순결한 믿음으로 변화 받아 주와 함께 승리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