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21, 2024

“스데반의 순교” (The Martyrdom Of Stephen)

Preacher:
Passage: 사도행전 (Acts) 7:59~60
Service Type:

“스데반의 순교”

(The Martyrdom Of Stephen)

1-21-24

본문말씀: 사도행전 (Acts) 7:59-60

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While they were stoning him, Stephen prayed, “Lord Jesus, receive my spirit.”)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되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서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Then he fell on his knees and cried out. “Lord, do not hold this sin against them. When he had said this, he fell asleep.)

<설교 요약>

예루살렘교회에서 구제문제로 인하여 원망과 불평이 생겨 났을 때,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일곱을 택하여 구제의 일을 맡기게 됩니다.

이렇게 선출된 예루살렘교회의 일곱집사들 중에 스데반집사가 있습니다. 스데반은 사도들과 함께 성령의 충만함으로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하고 복음의 권능을 힘있게 전했습니다 (행. 6:6~10).

비록 그의 사역기간은 짧았지만, 성령의 충만을 받아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증거하다가 순교한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요? 과연 무엇이 스데반집사가 우리에게 주는 도전일까요? 그것은,

첫째, “말씀의 능력”입니다: 사도행전 6장에서보면, “각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으로 더불어 변론할 새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 (행. 6:9~10)라고 스데반이 행한 말씀의 능력을 밝힙니다. 더 나아가 그는 7장 전체에서 구약을 관통하며 이스라엘의 죄악과 영적 교만이 무엇인지를 탁월하게 고발합니다.

둘째, “그리스도 증거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의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의 죄악을 책망하는 목적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v.37)는 <신명기 18장>을 인용하며 ‘나사렛 예수님’이 모세가 예언한 “나와 같은 선지자”요, 메시야 그리스도임을 능력으로 증거했습니다.

셋째, “순교의 능력”입니다: 스데반은 성령의 능력으로 순교함으로써 사단의 권세를 이기고 승리했습니다.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유대인들을 죄를 책망했고, 이것에 분개한 유대인들의 돌에 맞아 숨을 거두었습니다 (v. 51~60).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요. 12:24).

바라기는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의 아름다운 믿음의 발자취를 따라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고, 주와 함께 죽을 때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비밀을 삶으로 경험하는 복된 성도 모두 되시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듯이 예루살렘교회에서 구제문제로 인하여 원망과 불평이 생겨 났을 때, 사도들은 지혜로운 결정을 합니다. 성도들을 통해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일곱성도를 택하여 구제의 일을 맡기고, 사도들은 ‘말씀 전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에 온전히 집중한 것입니다. 이렇게 선출된 예루살렘교회의 일곱집사들은 기독교회 역사에서 볼 때, 최초의 집사들이었습니다. 그 집사들 중에서 스데반집사의 사역은 사도행전 6장8절에서 오늘 본문말씀인 7장 끝절에 이르기까지 기록되고 있는데 성령의 강력한 권능을 입은 충만한 복음증거의 삶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강력하게 성령께 쓰임 받았던 성경의 인물의 하나인 스데반의 삶을 함께 묵상하고, 우리 각자에게 귀한 영적 깨우침과 적용이 있는 시간되길 기대합니다.

먼저 <행. 6장>에 보면 성도들이 함께 합심으로 기도 가운데 선출한 믿음과 성령의 충만한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행. 6:5-6)라고. 이렇게 믿음과 성령에 충만한 일곱집사를 세웠을 때, 어떤 결과가 생기게 되었을까요? 그 점에 대해 성경은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행. 6:7)라고. 하나님의 말씀은 이처럼 점점 더 왕성하게 퍼져 나갔고, 제자의 수는 급속히 증가했던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이어지는 <6장8절>부터 시작하여 <7장>끝까지 이어지는 말씀이 바로 ‘스데반 집사의 구체적인 행적’인 것입니다. 먼저, ‘큰 그림’에서 생각해볼 때, 예수님의 열두사도를 대표하는 사도 베드로와 그리고 이방민족을 위해서 주께서 특별히 택하신 그릇, 곧 사도 바울을 제외하고는 신약성경에서 스데반집사와 같이 이렇게 그 행적을 집중적으로 자세히 성경에 기록된 사역자는 없음을 보게 됩니다. 그가 비록 짧은 기간을 사역했지만, 스데반이 하나님나라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남긴 영향력은 지대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스데반 집사가 초대교회 공동체 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 교회 공동체에 주는 도전은 무엇인지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과연 무엇이 스데반집사가 우리에게 주는 도전일까요? 그것은,

첫째, “말씀의 능력”입니다: 스데반은 성령의 충만을 통하여 지혜와 권능을 입고 복음증거를 가로막는 유대인들과 변론했습니다. 그런데, 이들 대부분은 유대종교 지도자들로서 대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과 장로들이었을 것임을 미루어 짐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스데반집사는 성령의 권능과 은혜로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을 뿐 아니라, 회당에서 유대인들과 변론했을 때 성령이 주시는 지혜로 말미암아 아무도 그를 능히 당해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 각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으로 더불어 변론할 새.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 (행. 6:8~10)라고. 물론 스데반집사가 구체적으로 유대인들과 변론한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사도행전 7장 1절에서 60절 끝 절에 이르는 한편의 긴 설교를 통해 스데반이 주장한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때 그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 중심에는 “선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밝히고자 했다는 것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다시 말해,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민족을 택하셨으며, 왜 그들을 그의 자녀된 백성으로 삼으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을 이스라엘에 베푸시고자 함>입니다. 우리가 새해가 되어 함께 보는 <매일성경> 큐티 말씀인 <신명기서>에서 말씀하듯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는 그들이 다른 민족들보다 숫자가 더 많거나, 더 강한 민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도리어 그들은 숫자가 작고, 더 연약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일까요?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조건 없이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 사랑받을만한 조건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조건도 없이 이스라엘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들을 택하여 자녀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스데반의 설교전체에서 깨닫게 되는 요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조건없는 사랑과 선하신 은혜로 택하심을 받은 이스라엘이 구약의 수천년의 기간을 이어오면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실망시키고 그분을 진노케 했음을 스데반은 분명히 밝혀 고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분의 선한 율법을 순종한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을 어기고 가증한 우상숭배와 육신에 속한 죄악을 행함으로 수없이 많은 징계와 고통의 삶을 이스라엘민족은 반복하게 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의 역사는 ‘의인이 당하는 고난의 역사’가 아니라, ‘악인이 당하는 고통과 징계(심판)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죄악 때문인 것입니다. 이들은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 받은 그 은혜의 영광스러움은 깨닫지 못하고, 늘 할례받지 못한 주위의 이방민족의 죄악된 삶에 마음이 빼앗겨 악을 저지르며 하나님을 거역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스데반이 7장의 말씀을 시작하면서 1절에서 53절까지 길게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죄악상에 대한 그의 고발인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민족이 언제나 그들의 조상으로 자부하던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신 장면에서 출발하여 그의 자손, 이삭, 야곱, 요셉에 이어 4백년 애굽의 종살이에서 모세를 통해 그들을 이끌어 내시고, 다윗과 솔로몬에게 나타나시고, 그들과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약속을 믿지 않는 목이 곧고 믿음이 없는 이스라엘민족의 죄악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스데반은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구약성경 전체를 관통하며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택하심과 구원의 은혜를 거부하고 죄의 구덩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스라엘의 어리석음과 죄악성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스데반은 성령이 주시는 말씀의 능력을 통해 자신의 민족인 이스라엘민족이 그들의 영적 완악함과 교만을 깨닫고, 뉘우쳐 회개함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나오기를 촉구하는 것입니다.

둘째, “그리스도 증거의 능력”입니다: 물론 구약에 기록된 율법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의 죄악을 깨닫고 그들에게 도전하는 것은 엄청난 능력이요, 이 말씀의 능력은 주의 영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임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율법의 말씀을 통해서 결론적으로 <복음증거>자라면 반드시 빠져서는 안되는 능력이 있는데, 그것이 ‘그리스도 증거의 능력’인 것입니다. 바로 스데반의 강력한 복음의 메시지에서 그 핵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메시지입니다. 그는 특별히 모세를 통해 하나님께서 애굽의 종살이하던 이스라엘민족을 어떻게 이끌어 내셨는지 하는 것과 그들의 불순종을 상세히 설명하는 가운데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v.37)고 말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정확히 이점을 사도 베드로는 <사도행전 3장>에서 나사렛 예수께서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언하는 메시지를 솔로몬의 행각에서 선언할 때에 언급했던 것입니다.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의 모든 말을 들을 것이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 (행. 3:22-23)

그렇다면, 누가 모세가 말하는 <나와 같은 선지자>일까요? 그렇습니다. 그 선지자는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중요한 것은 스데반의 긴 메시지는 ‘중구난방’식으로 이것 저것 문제점만 지적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의 메시지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스데반은 이스라엘백성들이 존중하고 인정하는 민족의 대표적인 지도자 모세가 <신명기 18장>에서 ‘장차 하나님께서 자기와 같은 선지자를 보내실 것을 예언’하셨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들 모두가 거부할 수 없고 인정하는 방식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스데반의 진술하는 방식은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지도자로 인정했던 모세에게조차 이스라엘백성들은 그에게 복종치 아니하고 그를 거절하며 그 마음이 애굽으로 향했다는 것입니다 (v.39). 광야 40년간 아론을 시켜 금송아지를 만들게 하는가 하면,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고 하나님께서 가증이 여기는 우상숭배를 행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스데반은 이런 ‘우상숭배’하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고발하면서, ‘할례’라는 율법의 매우 중요한 개념을 사용하여 그들을 책망합니다. 이점을 저는 매우 유의해서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할례의 행위는 여러분도 잘 알듯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셔서 율법으로 ‘이스라엘민족’이 이방인과 구별되는 분명한 표시일 뿐 아니라, 구약에서 이 할례를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스라엘 가운데서 끊어버리겠다고 선언하실 만큼 반드시 행해야 하는 율법의 준수사항인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유대인들은 이런 할례의 명령을 모두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v.51)라고 스데반은 유대인들을 이 할례의 문제를 가지고 질책(고발)하는 것입니다.

이 말이 중요한 것은 그가 유대인들을 향해 ‘할례받지 못한 자’라고 도전한다는 것입니다. ‘할례받지 못한 자’는 그야말로 구원에서 끊어진 자라는 뜻인데, 어쩌면 유대인들에게 가장 저주스럽고 끔찍한 상태라고 그들은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스데반은 유대인들이 이와 같은 할례받지 못한 저주스런 상태라고 선언함으로써 그들을 격노시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엇이 ‘참된 할례받은 자’인지에 대해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분명히 영적으로 밝힙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빌. 3:3)라고. 바울의 말대로 성령으로 섬기지 않고 도리어 성령을 거스리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분을 자랑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육체의 할례만을 자랑하는 자가 할례받지 못한 자라고 스데반은 강하게 도전하는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지 않을 때, 참된 할례에서 제외되고 그럼으로 구원에서 끊어지게 된다고 그는 강력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스데반이 우리 성도들에게 주는 강력한 도전은

셋째, “순교의 능력”입니다: 스데반은 자신이 받게 될 어떤 신변의 불이익이나 고난은 전혀 개의치 않고 기탄없이 성령의 능력으로 유대인들을 강력하게 책망합니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v.52~53)라고. 이런 책망을 들었을 때 유대인들은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해 이를 갈고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끌고 나가 돌로 쳐서 죽게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복음의 주인공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들이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그의 강한 도전이 마음에 찔림이 되어 이를 갈며 광기에 가깝게 그에게 달려들어 돌로 쳐 죽인 것입니다. 그리고 스데반의 그 순교의 자리에 훗날 다메섹 언덕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만나 극적으로 주님의 사도가 된 사도 바울, 즉 그 당시 <청년 사울>도 있었습니다. 그는 스데반이 죽을 때, 그 앞에 서서 증인의 역할을 했었습니다 (v.58). 그런데 과연 그 당시, 스데반의 죽음을 목격하며 청년 사울이 무엇을 느꼈을지가 저는 궁금합니다. 성경에 보면, 스데반이 7장의 말씀을 시작했을 때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6장 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6:15).

그리고 그는 성령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진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다가 복음을 증오하는 유대인들의 돌에 맞아 마지막 죽어가면서도 이렇게 돌을 던지는 자를 위해 기도했던 것입니다.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행. 7:59~60)라고. 바로 죄인을 위한 ‘용서의 기도’인 것입니다. 여러 신학자들은 하나님을 향한 유대교의 잘못된 열심에 사로잡혀 있던 청년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이와 같이 스데반의 순교사건을 목격하면서, 그의 영혼은 영적으로 강력한 대지진의 충격을 받았고, 그리스도의 복음에 눈을 뜨게 되는 개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저는 생각해봅니다. 과연 스데반은 이런 그의 강력한 도전의 메시지가 강팍한 유대인들을 자극시켜 자신을 죽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가 몰랐을까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가 분명히 알았다고 믿습니다. 스데반은 이런 성령의 강력한 메시지가 결국 자신을 순교하게 할 수 있음을 분명히 알았지만, 그는 결코 그것이 두려워서 입을 다물거나 적당히 수위를 조정해서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직 그는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 그분께 순종함으로 남김없이 복음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진리와 책망의 메시지를 선언한 것입니다. 어느 신학자의 말과 같이 스데반은 “자신이 믿는 바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았을 뿐 아니라, 그 믿음을 변호할 줄 알았고, 그 믿는 바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 12:24) 그렇다면 무엇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다’는 뜻일까요? 주님은 그 의미를 이렇게 영적으로 밝혀 주십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요. 12:25)라고. 그렇습니다. 스데반은 죽어지는 한알의 밀알이 됨으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었고, 육신에 속한 자아와 이기심을 미워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기에, 주께서 약속하신 영생하는 구원과 그리스도의 충성된 제자로서 칭찬과 그분과 함께 영광을 영원토록 누리게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함께 스데반의 귀한 믿음의 발자취를 따라 죽을 때 다시 사는 부활의 생명과 승리를 경험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