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14, 2024

“사역의 우선순위” (The Priorities Of Ministry)

Preacher:
Passage: 사도행전 (Acts) 6:2~4
Service Type:

“사역의 우선순위”

(The Priorities Of Ministry)

1-14-2024

본문말씀: 사도행전 (Acts) 6:2~4

2 열두 사도가 모두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4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설교 요약]

오순절날 불의 혀같이 임하신 성령충만의 역사를 통해 시작된 예루살렘교회는 점점 더 부흥하게 되었지만, 이런 성도의 외적 증가로 인한 문제점도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행. 6:1)라고.

그것은 예루살렘교회 성도들 중에 헬라파 (헬라 지역에 살았던)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 구제’ (음식구제)에서 제외된 것으로 인해 히브리파 (본토에 살던)유대인들을 원망하게 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공동체가 불어나게 될 때, 파당이 생겨나고 원망과 시비가 발생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이 문제점을 매우 지혜롭게 영적으로 해결해 나감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도들이 깨닫은 사역의 우선순위일까요? 그것은

첫째, “사역의 핵심은 <말씀과 기도>”라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깨닫은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v.2,4)는 점입니다. 사도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것은 ‘말씀과 기도’인 것입니다.

둘째, “사역은 <동역>으로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사도들은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v. 3)라고 지혜로운 결정을 합니다. 복음의 사역은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라, 공동체 모두가 함께 동역하는 사역입니다.

셋째, “사역자는 <성령과 지혜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런데 복음의 동역자로서 합당한 자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성도입니다. 그리하여 사람에게도 칭찬 듣는 성도입니다. 자기 스스로의 지혜와 능력이 아니라,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 그분이 주시는 충만을 받은 성도입니다.

바라기는 ‘말씀과 기도’를 중심에 붙들고, 성령의 지혜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함께 동역해 가는 우리 공동체되기를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사도행전 강해설교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오순절날 불의 혀같이 임하신 성령충만의 역사를 통해 첫번째 초대교회인 예루살렘교회가 출발하게 된 것과 사도 베드로를 위시한 12사도들의 능력의 사역을 통해 계속해서 제자의 수가 날마다 더하게 됨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복음의 흥왕하는 역사를 시기하여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제자들을 핍박하면 할수록 그들은 더욱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했고, 표적과 기사와 함께 이토록 힘있게 전파되는 복음의 역사를 유대인들은 막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믿음의 공동체가 부흥하고, 많은 성도들이 불어나게 될 때 그 공동체 안에서 문제점도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첫번째 사건이 지난번 살펴본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비극적 사건이라 할 수 있고, 오늘 본문에서 보게 되는 불거진 문제점은 ‘아나니아 부부’의 사건처럼 심각한 죄악의 문제는 아니지만, 점점 더 커져가는 교회조직을 섬겨 나감에 있어서 교회리더인 사도들이 겪게 되는 시행착오와 우선순위의 문제인 것입니다. 무엇이 교회의 가장 우선적인 사역이요, 지혜로운 사역의 핵심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제자들을 불러 모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니라” (v. 2~4)라고. 이런 사도들의 지혜로운 결정과 같이 우리 개인과 공동체의 믿음과 사역의 우선순위를 분별하여 실천해 나가는 지혜롭고 영에 충만한 성도 여러분 되길 기대합니다.

앞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성령충만의 역사로 출발한 예루살렘교회는 불과 얼마되지 않는 짧은 기간에 엄청난 부흥을 경험합니다. 영적인 능력은 말할 것도 없고, 외적인 교회성도들의 숫자도 놀라운 부흥을 이룬 것입니다. 이것을 한번 살펴본다면, 약속의 성령이 충만하게 임재하신 날, 바로 그날 베드로의 설교로 3천명이 주께로 돌아오는가 하면, 얼마 있지 않아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되었던 자를 낫게 했고 이를 목격한 사람들에게 그들이 복음을 전했을 때 5천명이 주님을 영접했던 것입니다 (행. 4:4). 그 외에도 여러 번 ‘남녀의 큰 무리가 믿고 주께로 나아왔다’ (행. 5장)고 저자 누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볼 때,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합심으로 기도하던 120명의 주의 제자에 대해서 오순절날 3,000명, 그리고 나면서 앉은뱅이가 낫게 된 사건과 관련해서 복음을 영접한 5,000명이 더해져서 <사도행전 5장>까지 분명히 밝힌 예루살렘교인들의 숫자만 8,120명이요, 그 밖에도 남녀의 큰 무리가 믿었다는 것으로 볼 때 족히 2만명 이상의 교인의 부흥을 했을 것이라고 성경학자들은 추측합니다. 이와 같이 단기간에 엄청난 교회의 부흥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기쁜 일이지만, 거기에 따르는 문제점도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예가 바로 오늘 본문을 포함한 <사도행전 6장 1-4절>에 언급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6장>은 시작하면서 이렇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행. 6:1)라고.

그 당시 크게 유대인들은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민족이 강대국의 침략으로 인해서 그들이 전쟁포로로 끌려 갔거나, 살 곳을 찾아 주위 이방지역에 흩어져 살았던 유대인들을 ‘디아스포라’유대인이라 불렀는데, 이들을 총칭해서 <헬라파> 유대인이라 불렸고, 그와 반대로 ‘유대땅’을 떠나지 않고 머무러 있었던 사람들을 <히브리파> 유대인이라 불렀습니다. 여기서 ‘히브리’란 유대 땅, 곧 ‘가나안 땅’을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인 ‘히브리파 유대인’은 원래부터 히브리 땅을 떠나지 않고 살아가던 유대인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교회는 가난한 사람들, 그 중에서도 특히 남편을 사별한 과부들의 생계를 돕는 구제사역을 하였는데, 그 구제하는 와중에 헬라파 과부들이 다소 구제에서 제외된 문제점이 발생한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런 사소하겠지만 단 한사람이라 할찌라도 이런 구제에서 불공평한 대우를 받아서는 안될 것이고, 충성되고 영적인 사도들이 고의적으로 그렇게 했을리는 만무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가 커지고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다 보면 그 안에서 보이지 않는 알력이 생기고, 오늘 보듯이 헬라파와 히브리파라 하며, 자연스럽게 파당을 짓고, 자기쪽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덜 혜택을 받으면 섭섭해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들은 이 교회의 주류 멤버인 ‘히브리파’유대인이 아니고 소수인 ‘헬라파’유대인이기 때문에 이런 불공평한 대우를 받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히브리파 성도들에게 원망이 가득하게 된 것을 교회의 지도자들인 사도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분명히 바로잡아야 할 문제점인 것을 깨닫은 사도들은 모든 제자들을 불러 모으고, 이렇게 자신들의 결의사항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v. 2~4)라고 말입니다.

이런 사도들의 결정은 매우 지혜롭고 영적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사도들의 결정이 왜 우선순위에 따른 지혜롭고도 영적인 것인지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도들이 깨닫은 사역의 우선순위일까요? 그것은

첫째, “사역의 핵심은 <말씀과 기도>”라는 것입니다: 이런 구제사역의 시행착오를 통해서 그 무엇보다도 사도들이 깨닫은 것은 ‘말씀과 기도’는 그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사역의 핵심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사도들이 깊이 뉘우치고 깨닫게 된 사실은 단순히 그들이 얼마나 공평하게, 얼마나 모든 사람들이 불평불만 없이 구제사역을 잘 처리하느냐가 아니라, 성도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영적 양식을 충분히 주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말씀과 기도’인 것입니다. <말씀>으로 살아 계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복음의 진리를 선포하고, <기도>로서 성도들이 오직 하나님만 따르며 주의 성령 안에서 든든히 설 수 있도록 날마다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는 참된 성도의 영적으로 기름지고 풍성한 양식입니다. 교회 안에서 그 어떤 것도 이 말씀과 기도를 대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v.2,4)라고 사도는 정직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자신들이 그러하지 못했음을 깨닫은 것입니다. 성도들이 점점 더 많아 짐에 따라 사도들은 어느새 말씀과 기도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사람들에게 언제 어떻게 먹을 것을 주고, 입을 것을 나눠 줄 것인가를 신경 쓰다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것입니다. 물론 교회가 주위의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을 구제하고 섬기는 것이 중요한 사역임을 저도 믿습니다. 그러나 말씀과 기도가 빠진 구제는 교회를 세속화시키고, 교회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는 것임을 우리는 깨닫아야 합니다. 이것이 사도가 깨닫은 중요한 영적 진리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드러난 교회의 문제에 대한 사도의 결정(조치)에 대해 제가 매우 올바른 영적 깨닫음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사도는 단지 밖으로 드러난 하나의 현상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주시는 지혜를 통해 그 이면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사도 바울이 그의 영적 아들이었던 디모데에게 보내는 첫번째 편지에서 그에게 도전했던 내용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짐이니라.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군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은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딤전. 4:5-7).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리고, 그분의 몸된 지체로 함께 영적으로 성장해 나가는데 있어서 ‘말씀과 기도’보다 더 중요하거나, 이것을 대신할 그 어떤 것도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밝히고 있듯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만이 성도를 거룩으로 인도하며,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일군으로 훈련하고 성장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들이었던 12사도들은 바로 그 영적 진리를 깨닫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를 증거하고,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참된 일군 (=군사/제자)으로 세움에 있어서 ‘말씀과 기도’는 초대교회 뿐만 아니라,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에도 그 어떤 다른 것으로 대체 불가능한 교회 사역의 가장 우선적으로 행해야 할 핵심인 것입니다.

둘째, “사역은 <동역>으로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이 1장에서 출발하여 오늘 본문의 6장에 이르기까지 사도 베드로를 위시한 예수님의 제자들의 표적과 기사로 병자를 치유하고 복음의 진리를 선포하는 말씀의 능력은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갑자기 불거진 헬라파 과부들의 구제에 대한 불만을 이해해 가는 가운데 자신들이 그동안 복음사역을 감당함에 있어서 얼마나 옆에 있는 신실하고 믿음으로 준비된 지체들을 세워주지 못했고, 그들을 동역자로 인식하지 못했던가 하고 반성하고 있다는 것이 매우 깊은 영성의 결과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럼으로 사도들은 이제 일곱 (집사)를 세워서 그 일을 함께 동역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v. 3~4)라고 사도들은 말합니다. 흔히 말하듯이, ‘교회의 사역은 1명의 스타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멤버들의 멋진 팀 플레이가 필요한 것’입니다. 마치 팀윀을 중요시하는 축구경기와 같이 11명의 선수가 서로의 장점과 재능은 선용하고, 단점과 부족함은 감싸주고 포용해 가며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함께 동역자로 세워주는 것입니다. 사실 이점이 제가 많이 반성하고 시행착오를 겪은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교회에 함께 동역할 일군이 많지 않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보다도 저 자신이 우리 청년 학생들을 한편에서는 배려한다는 이유로, 또 한편에서는 아직 믿음직스럽지 않다는 이유로, 저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하듯 해 온 것이 많았다는 점입니다. 교회가 작고, 크고를 떠나서, 목회자 한사람이나 혹은 소수의 리더들에게 사역이 집중된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함을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 “사역자는 <성령과 지혜로 충만>”해야 합니다: 이제 그렇다면, 사도들은 어떤 성도들을 그들의 동역자로 세우고자 원했던 것일까요?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v. 3)라고. 지금 사도들에게서 배울 수 있는 영적 지혜를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첫째,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사역을 감당할 사역자의 조건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성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 중에 ‘저는 아직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지 않으니, 자격이 없는 것 같아요!?’라고 말하고 싶은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번 더 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은 ‘우리 스스로는 이런 지혜와 충만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얼마나 영적 지혜가 부족한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만약 성도 여러분이 자신의 지혜와 명철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 성령의 지혜를 구하고 그분의 충만을 사모하신다면, 여러분은 사역자의 자격이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지난 시간 명 설교자 챨스 스탠리의 평생의 좌우명되는 <잠언서>말씀에서 우리는 그 점을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잠. 3:5~6) 이와 같이 겸손하게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지혜와 도우심을 구하는 그의 자녀에게 하나님은 그의 영, 성령의 충만한 은혜로 우리를 지키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약속과 같이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눅. 11:13)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동역자를 지혜롭게 선출함에 있어서 배울 점으로 두번째는, 이런 <충성된 동역자를 성도들을 통해 뽑도록 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들이 일방적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누가 우리 공동체를 믿음으로 섬겨 나가기에 합당한 사람인가?’를 놓고 성도들이 함께 논의하고 기도함으로써 결정하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의 공동체는, 그리고 이 아름다운 주의 몸된 공동체를 섬길 일꾼들은 이와 같이 사도들 만이, 혹은 소수의 리더만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함께 기도 가운데서 결정하고 세워 나갔던 것입니다. 이것이 초대교회를 통해 배울 수 있는 동역자를 세우는 아름다운 원리요, 공동체 부흥의 원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성도들이 합심하여 세운 동역자들이 스데반을 포함한 예루살렘교회의 충성되고 지혜로운 일곱집사가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이들 일곱 집사는 성령의 충만으로 지혜를 받았을 때 더욱 겸손하게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귀한 동역을 통해 사도들은 ‘말씀과 기도’에 전념함으로 세상을 복음으로 부흥케 되는 역사를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아포슬 공동체는 목사뿐 아니라, 모든 성도가 함께 ‘말씀과 기도’를 신앙의 중심으로 붙들고 나아가며, 함께 성령의 은혜를 사모함으로 믿음의 공동체를 지혜롭고 충성스럽게 섬겨 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