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ober 9, 2022

“선한 싸움” (The Good Fight)

Preacher:
Passage: 디모데후서 (2 Timothy) 4:7-8
Service Type:

“선한 싸움”

(The Good Fight)

10-9-22

본문말씀: 디모데후서 (2 Timothy) 4:7-8

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 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설교 요약]

            오늘 본문말씀의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의 로마감옥에서 그의 영적 아들인 디모데에게 보내는 마지막 서신서입니다. 그는 4장의 마지막 글을 쓰면서, 전쟁에서 돌아오는 개선장군의 승리에 찬 함성과 같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 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그렇다면, 사도가 ‘선한 싸움을 싸웠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믿음의 싸움’을 뜻할 것입니다. 그가 젊은 날,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달려온 믿음의 여정이요, 그리스도를 위한 믿음의 싸움인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저는 오늘 특별히 우리 청년들과 함께 무엇이 ‘믿음의 싸움’이라는 의미인지?” (What means to fight by the faith?) 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첫째, “염려와의 싸움” (It means to fight against the anxiety)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마. 6:26,34)라고.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의 믿음을 통해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일. 4:18).

둘째, “비교의식과의 싸움” (It means to fight against the comparative consciousness) 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의 한명은 사울 왕일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과 평가보다도 사람과의 평가에 기초한 비교의식 속에서 때로 교만해지고, 때로 열등감에 사로잡혔던 것입니다. 특별히 다윗에 대한 열등감에서 비롯된 시기심과 질투심이 그를 파멸로 몰아 갔음을 성경은 고발합니다 (삼상. 18-31장). 성도 여러분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교만함도 열등함도 아니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당당함과 겸손함으로 믿음의 삶을 살아갑니까?

셋째, “하나님을 향한 불신과의 싸움” (It means to fight against the unbelief to God) 입니다: 시편기자는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소리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 42:5)라고. 우리 성도의 가장 치열한 싸움은 하나님을 불신코자 하는 헛된 유혹과의 싸움입니다. 그럼으로 낙심과 영적 침체에 빠진 자신을 그대로 내버려 둘것이 아니라,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고 우리는 스스로에게 외쳐야 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 모두, 끊임없는 염려와 비교의식의 유혹을 물리치고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완수해 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설교 본문]

저는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있어서 가장 치열하고 힘든 싸움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아마도 이 싸움은 세상을 상대하여 믿음을 지키고자 하는 싸움이요, 이니 좀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의 믿음’을 사용하여 우리를 유혹하고 넘어 뜨리고자 하는 육신의 정욕과 세상이 죄악된 유혹과 맞서 싸우는 영적 싸움이라고 믿습니다. 바로 이 믿음의 싸움이 사도가 오늘 말씀에서 선언하는 “선한 싸움을 (싸운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싸움이 결코 쉽지 않은 이유는 우리가 비록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할찌라도 우리의 몸은 여전히 죄에 유혹에 쉽사리 넘어가는 연약한 존재들이요, 우리의 대적 사단 마귀는 눈에 불을 켜고 두로 돌아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는 이런 치열한 영적 전투현장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까, 어떤 유혹도 하나님께서 알아서 무리쳐 주시고 죄에서 보호해 주시는 것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이런 영적 상황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칫 혼란에 빠지기도 하고, 영적 침체에 빠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특별히 우리 믿는 자들이 매일 매일 삶의 현장에서 맞서 싸워 나가야 하고, 싸워 승리해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를 영적으로 분명히 분별해 나감으로 주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이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세월을 아끼며 선한 싸움을 싸워 이김으로 귀한 열매를 맺어가는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의 마지막 서신서로서 그의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두번째 보내는 옥중 편지입니다. 사도는 대략 <주후 67년경> 그가 순교당하기 직전에 로마의 감옥에서 디모데에게 보낸 두번째 편지인 디모데후서를 써 보낸 것입니다. 그는 그 당시 젊은 목회자였던 디모데가 성도들을 섬김에 있어서 필요한 가르침을 사랑과 진정을 담아 전하고 있는 것이었기에 <디모데 전.후서>는 <디도서>와 함께 ‘목회서신’이라고도 불립니다. 그리고 아마도 사도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임박한 그의 죽음을 직시함으로서 이 서신서를 써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다메섹 도상에서 만남으로 그의 제자가 된 이후 그가 달아왔던 긴 믿음의 여정을 되돌아보며, 특별히 오늘 본문말씀을 마치 유언처럼 디모데에게 토로했기에 많은 성경학자들은 오늘 본문말씀을 사도 바울의 ‘승리의 비문’아라고도 일컫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 그의 지난 날을 되돌아보며, 지금까지 자신의 푯대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달려왔던 나날들을 되새기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 앞에서 사도는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v.6)고 선언함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그가 “전제와 같이 자신을 부어 드린다”는 표현은 무엇을 뜻할까요? 그것은 사도가 구약 <민수기 15장>에 나오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방법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민. 15:1-10).

이 ‘전제’ (a drink offering)은 ‘제물 위에 마지막으로 포도주나 감람유 등을 부어 드리는 제사’를 말합니다. 그럼으로 바울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부어 드리는 전제 제사로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그의 삶에 대한 비유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면서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빌. 2:18)라고 선언했던 것입니다. 이 말은 빌립보 성도에게 편지를 보낼 때는 자신을 앞으로 일어날 미래의 일이었지만, 오늘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그것이 바로 현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로 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의 남은 삶의 마지막까지도 하나님께 부어드리는 거룩한 전제물이 되어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기쁨과 감사로 드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말씀의 초점은 사도 바울의 달려온 삶을 함께 살펴보는 시간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그 신실하고 충성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은 제에게 언제나 롤모델이 됨은 두말할 필요조차도 없습니다. 저는 시간이 허락되는 데로 좀더 자세히 바울의 믿음과 그 놀라운 사역의 열매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보는 시간 갖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사도가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라고 오늘 본문을 통해 선언했을 때, 과연 무엇이 선한 싸움인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우리 각자의 삶에 적용코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이 선한 싸움은 그 무엇보다도 ‘믿음의 싸움’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믿음의 싸움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싸우는 싸움이요, 예수그리스도를 따름으로 고난받고, 그분을 바라보고 힘껏 달려가는 치열한 싸움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이 믿음의 싸움이라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장가운데에서 어떻게 영적으로 이해하고 또한 적용할 수 있을 것인지 하는 것이 제가 성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하는 주제인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저는 오늘 특별히 우리 청년들과 함께 무엇이 ‘믿음의 싸움’이라는 의미일까요?” (What means to fight by the faith?) 에 대해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첫째, “염려와의 싸움” (It means to fight against the anxiety)입니다: 저는 지난 시간, 우리 기독교의 대표적인 특징의 하나가 바로 ‘사랑’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이 사랑과 염려하지 않는 (안정감과 평화는) 것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 4:6-7>에서 이렇게 성도를 향해 도전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사실 ‘염려하지 말라’, 아니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사도의 말은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잘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처럼 복잡 다난하고, 끊임없이 밀려오는 처리해야 할 일들 속에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들에게는 자칫 이런 말씀은 비현실적으로 들리는 것도 사실입니다. “맞아요, 저도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살고 싶어요!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은 걸 어떡합니까?!”라고 오늘 여기 앉아 있는 성도 여러분은 항변하고 싶지는 않습니까? 아직 절반도 끝나지 않은 ‘숙제’ (assignments)와 ‘학위논문’, 졸업이후의 진로, 그리고 현직장에서 또 어떤 발전적인 변화를 결정해야 하는 것과 인간관계의 문제들이 계속해서 우리를 흔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와 같은 것들이 우리를 결코 혼자 편안히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내 의지와 관계없이 내 속에서 염려와 불안을 재생산해 낼 수밖에 없다고 여러분은 주장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2천년전 초대교회 성도들뿐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도전함을 저는 믿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바울이 그의 삶으로 성령의 힘과 능력으로 실천한 것일 뿐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우리들에게 도전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마. 6:26,34)라고. 우리 주님은 단순한 듯한 예화를 통해 매우 핵심적인 진리를 설파하십니다. 그것은 그 누구도 염려함으로 키를 한자라도 자라게 할 수가 없다는 것 (마. 6:27)이요, 염려는 도리어 우리의 신앙을 좀먹고 병들게 하는 암적인 존재라고 주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염려는 우리의 신앙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기에 베드로는 우리 성도들은 각자 모든 염려를 조금도 남김없이 몽땅 주님에 모두 맡겨야 한다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벧전. 5:7)고.

그러나, ‘염려하지 말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아무 노력도 하지말라’라고 잘못 오해하지 마십시요. 성경은 결코 게으르고 나태한 자를 좌시하지 않고 죄악시함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마. 6:34)고 가르칠 따름입니다. 우리가 꿈에 시험치는 꿈을 꾸게 될 때, 십중팔구는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고 불안한 마음에서 잘 때 그런 꿈을 꾸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된 제자로서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학생이면 온 힘을 다해 공부해야 하고, 직장인이면 일을 할 때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주께 하듯 최선을 다해서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론은 ‘염려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왜 입니까? 염려는 결코 우리를 믿음으로 승리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난 시간에 우리 기독교가 타 종교와의 구별되는 특징의 하나가 사랑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결정하는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이 사랑이 곧 우리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어 질수 있는 이유요, 영원한 생명을 가지게 되었다는 근거입니다. 하나님과 사랑으로 하나되는 관계를 통해서 말입니다.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일. 4:18)라고. 무엇보다 우리가 염려하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사랑은 두려움을 극복하고, 염려를 떨쳐버릴 수 있는 강력한 힘이라고 요한은 우리 성도를 격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염려와의 싸움’은 그 어떤 것보다도 믿음의 싸움의 시작이요, 가장 많이 경험하게 되는 전투현장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왜 염려하십니까?

둘째, “비교의식과의 싸움” (It means to fight against the comparative consciousness) 입니다: 성경의 스토리 중에서 저의 마음을 매우 안타깝게 하는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사울 왕의 몰락’입니다. 사무엘 상을 읽어가다 보면, 어느 시점에서부터 그의 충성된 병사 다윗을 시기하고 점점 더 그를 미워함으로 죽이고자 하는 극단의 상황으로 치닫게 됨을 봅니다. 그 결정적 상황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인들이 뛰놀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가로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 밖에 무엇이냐 하고” (삼상. 18:7-8) 여기서 사울의 이런 다윗을 향한 심경의 변화, 즉 ‘심히 불쾌하여 분노하는 사울 왕의 마음 중심엔 ‘열등감’이 뿌리깊게 깔려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첫번째로 말씀드렸듯이, 믿음과 정반대에 위치한 ‘염려하는 생각’이 왜 잘못된 것인가는 그 염려의 열매가 무엇인가에서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염려의 열매는 결국 ‘열등감’과 ‘우월감’입니다. 이것은 결국 <인간 상호간의 비교의식>을 통해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비교의식’이 이토록 큰 문제인 것일까요? 그것이 방금 말씀드린 <사울 왕>의 경우에서 적나라하게 확인할 수 있듯이 인간의 비교의식은 필연적으로 내가 상대방보다 뭔가 잘났다고 생각되면 ‘우월(교만)감’으로, 혹은 그와 반대로 내가 상대보다 못하다고 여겨지면 ‘열등감’으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우월의식이나 열등의식은 마치 ‘양날 선 칼’처럼 나와 상대방을 모두 찌르고 상처를 주게 된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이점을 묵상하면 할수록 치명적인 이런 비교의식이 얼마나 우리 인간을 강력하게 구속하고 있는지를 깨닫고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크리스챤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주시는 ‘건전한 자아상’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누구에게도 주눅들지 않고 당당해야 하며, 자신을 향한 진정한 사랑과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부심이 분명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인간과의 비교를 통한 우월감도 열등감도 아닌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그립바 왕에게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행.26:29)고 외쳤습니다. 이 바울의 분명한 자아상은 왕 앞에서 자신처럼 쇠사슬에 묶인 것 말고는 모두 자신과 같아지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처럼 당당한 자기확신이 더 있을까요? 이것은 어떤 사람과의 비교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을 통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분명한 깨닫음과 확증으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성령의 확신을 통해 끊임없이 몰려오는 사람과의 비교에 의한 우월감과 열등감의 유혹을 이겨나가고 있습니까?

셋째, “하나님을 향한 불신과의 싸움” (It means to fight against the unbelief to God) 입니다: ‘지혜의 말씀’으로 불리는 <잠언>서는 1장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 1:7)는 말씀으로 지혜의 말씀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마도 여러분들이 예수님 믿음으로 크리스챤으로 거듭났다면, 적어도 ‘하나님 아버지를 경외하고 그분을 공경하는 삶이 우리 믿는 자의 삶의 시작이요, 근본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믿음의 싸움’이라는 주제의 말씀을 나누며 여러분에게 도전하는 것은 ‘과연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 말을 좀더 쉽게 표현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어떤 여러가지 기대하지 않고 원치 않은 상황이 닥쳤을 때, 여러분은 여러분을 구원하실 뿐 아니라, 함께 동행하시겠다고 성경을 통해 약속하신 하나님을 신뢰하십니까?

‘고라 자손의 시편’이라는 부제가 붙은 <시편 42편>에 보면 이렇게 시인을 자신을 향해 선포함을 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 42:5)라고. 이 말씀이 특이한 것은 다른 누군가에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에게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에게 현재 자신의 마음이 낙심되어 있고, 속에서 불안해하며, 염려와 근심으로 가득찬 그 모습을 직시하면서 ‘내 영혼아, 왜 이렇게 힘이 없고 침체에 빠져 있느냐!!’고 스스로를 흔들어 깨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침체된 원인을 시인은 정확히 지적합니다.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라고. 우리 성도들이 염려와 근심에 빠지고, 사람과의 비교의식에 사로잡히는 원인은 바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과도 동일한 것입니다.

우리 성도의 싸움은 믿음의 싸움이요, 그 믿음의 싸움의 가장 밑바닥에는 바로 ‘하나님을 신뢰하느냐?’의 싸움임을 저는 믿습니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 15:6)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그의 나이 이미 80세가 넘어서 더욱이 그의 아내가 이미 젊어서도 불임으로 아이를 가지지 못한 데다가 70세가 넘은 상황 속에서 아이를 낳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창. 15:5)는 그분의 약속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수없이 많은 자손을 그의 아내 사라로부터 허락하시는 아들을 통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불가능한 약속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성경에 있는 약속은 그렇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이 내게 대한 약속은 믿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뿐만 아니라, 그를 통한 모든 믿음의 후손들 가운데 이루실 약속으로 우리는 믿습니까? 저는 이 싸움이 우리의 마지막 싸움임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불신과의 싸움입니다.

저는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과연 나에게는 이런 기적과 같은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일까 하고. 그것은 저의 일가친척 모두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시기를 원하는 기도제목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하나님의 신실한 믿음의 자녀로 쓰임 받을 뿐만 아니라, 친가와 처가의 형제 자매를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실 저희 친가의 경우는 형제 중에 아직 절반 가량만이 믿는 자들이고, 더욱이 처가는 집사람이 거의 유일한 크리스챤 입니다. 이런 가족들의 구원이 있고, 더 나아가서 우리 아포슬 교회가 이곳 아틀란타 미드타운 & 다운타운 지역에서 학생청년 사역을 위한 전초기지가 되어 놀라운 부흥을 꿈꾸는 비젼입니다. 구름 떼처럼 주의 청년들이 이 곳으로 몰려와 함께 신앙 안에서 훈련받고, 비젼을 새롭게 하고, 그들을 파송하는 꿈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약속이라면 제가 어떻게 할까요? 믿고 의지하고 간절히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소망은 무엇이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약속은 무엇입니까? 아직까지 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지 못했다면, 구하십시요! 하나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그 약속을 받으셨습니까?! 의심치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심으로 믿음으로 간구하십시요! 하나님께서 그의 신실하심으로 그분의 때에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 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리라)”고 승리의 고백을 했던 사도 바울의 그 고백이 바로 성도 여러분 모두의 고백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