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ober 2, 2022

“내 안에 거하라” (Abide In Me)

Preacher:
Passage: 요한복음 (John) 15:4-5
Service Type:

“내 안에 거하라”

(Abide in Me)

10-2-22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Abide in Me, and I will abide in you. No branch can bear fruit by itself; it must abide in the vine. Neither can you bear fruit unless you abide in me.)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I am the vine; you are the branches. If a man abides in Me and I in him, he will bear much fruit; apart from Me you can do nothing.)

[설교 요약]

우리는 지난 시간에 ‘참 포도나무’라는 주님의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번시간에는, 계속해서 <요한복음 15>을 “내 안에 거하라” (v.4)고 말씀을 중심으로 묵상하고자 합니다.

먼저 주님은 <요한복음 13장> 이후 밤에 예수님을 유대종교 지도자에게 팔고자 나간 가룟 유다를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유다처럼 떨어져 나가 말라버리는 가지가 아니라, 참 포도나무된 자신에 거함 (=붙어있음)으로 많은 과실을 맺는 가지가 되라고 남아 있는 11명의 제자들에게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 있는 것일까요?” (How are we able to abide in Christ?) 이점에 대해 주님은 감사하게도 분명하게 우리들에게 밝혀 주십니다. 그것은,

첫째,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함”으로서 (We may abide in Christ by loving Him) 입니다: 기독교의 중요한 특징은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 (요일. 4:16)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v.9)고 제자들에게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 그 어떤 것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 바로 ‘그분 안에 거하는 것’임을 주님은 밝혀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킴”으로서 (We may abide in Christ by keeping His commandments) 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인지?’ 를 주님은 그 영적 논리를 따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v.10)라고. 이 말씀은 모든 크리스챤에게 도전과 확신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어떤 것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바로 <그분의 계명되는 말씀을 사랑하고 지켜 나가는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셋째, “서로 사랑함” 으로서 (We may abide in Christ by loving one another) 입니다: 그 어떤 것보다도 주님을 믿는 제자된 우리 성도 상호간에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임을 주님은 밝혀 주셨음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v.12) 이것이 주님의 결론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께 거하는 가지입니까? 아니면 떨어진 가지입니까? 바라기는 주님 안에 거함으로 생명과 아름다운 의의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는 지난 시간에 ‘참 포도나무’라는 제목으로 함께 주님의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나는 참 포도나무요”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신 주님의 말씀을 통해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함께 나눴습니다. 그것은 예수님만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대하시는 생명과 의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진정한 포도나무>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분만이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생명과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는 참된 구원자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참 포도나무 되신 주님과 그분의 제자된 우리 성도와의 관계는 어떠한 것인지를 또한 살펴보았습니다. 바로 주님의 “내 안에 거하라” (Abide in Me)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신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그것을 확인했습니다. 다시 말해, ‘무엇이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의미인지?’를 <포도나무와 가지>와의 관계를 통해서 살펴본 것입니다. 그 핵심적 의미는 ‘주님 안에서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요,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그분 안에 거한다는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그렇다면 ‘여러분과 저는 어떻게 그분 안에 거할 수 있는지?’에 대해 함께 묵상해 보겠습니다. 감사하게도 우리 주님은 “내 안에 거하라”고 한마디 도전만을 던져 놓고는 끝내시지 않고, 매우 구체적인 가르침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그분 안에 거할 수 있을 것인지를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잠깐 언급했지만, <요한복음 15장>의 오늘 본문말씀의 배경에 대해 우리는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께서 잡히시기 전날밤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성만찬을 나누시고 난 다음, 가룟 유다가 밤에 나가는 장면을 <요. 13장>에서 보게 됩니다. 그럼으로 주께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v.5) 라는 이 말씀에는 주님의 12명의 제자들 가운데 <참 포도나무>된 자신에게 붙어 있지않고 떨어져 나간 가지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밤에 예수님을 유대종교 지도자에게 팔아 넘기고자 나간 ‘가룟 유다’가 바로 떨어져 나간 가지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크리스챤 안에서도 ‘두 종류의 가지’가 존재함을 이해하게 됩니다. 하나는 <풍성한 열매를 맺는 가지>인데, 바로 주께 붙어 있었던 11명의 사도와 같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가지는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인데, 가룟 유다와 같이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자들이 그들인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자신과 함께 있는 나머지 11한명의 제자들에게 유다처럼 떨어져 나간 가지가 되지 말고, 내 안에 머물러 있는 가지, 즉 ‘포도 원둥치에 붙어 있는 가지’가 되라고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가룟 유다’와 같이 떨어져 나간 가지가 되지 말라고 강력하게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예수님은 지금 우리에게 그분께 붙어 있는 가지가 됨으로써 이 풍성한 열매를 거두기 원하느냐? 고 묻고 계심을 믿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그 열매를 거둘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 15장>의 핵심내용인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 있는 것일까요?” (How are we able to abide in Christ?)를 주님은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점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이요,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 삶임을 주님은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 주님의 제자들이 그분 안에 거할 수 있을 것인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그것은,

첫째,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함”으로서 (We may abide in Christ by loving Him) 입니다: 제가 이해하는 바로써 우리 기독교와 타종교의 가장 본질적 차이는 사랑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세계의 여러 종교들에게서 볼수 있는 다채로운 계율과 신학사상들이 있는 것입니다. 각자가 믿는 종교의 신들에 대한 순종과 믿음, 그리고 투철한 종교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처럼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최우선시 하는 종교는 또 없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저는 우리 크리스챤의 본질적인 특성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것은 <크리스챤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라는 것인데, 그것은 ‘사랑’을 통해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 그분 안에 있을 때, 성자와 영원토록 하나이신 성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에서 구원 (=영생)을 얻었다는 핵심입니다. 바로 ‘하나님 안에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요. 15장>말씀에서 주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v.9)고 11명의 제자들에게 도전하시는 것이 바로 그 이유입니다.

문맥의 흐름상 주님은 앞에서 “내 안에 거하라”고 <4절>에서부터 시작하여 <7절>에 이르기까지 거듭해서 말씀하시고 나서, 이번에는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도전함을 보게 됩니다. 이 말씀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그분 안에 거한다>는 뜻으로 연결됨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무엇이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의미인지?’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는데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주되심을 실천하기 위해 여러분에게 가장 요구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그것은 ‘주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떤 나의 강인한 종교적 의무감이나 신앙양심 보다도 주님을 향한 사랑이 그분을 향한 주 되심을 실천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은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그분의 제자입니까?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을 진정 사랑하는 것일까요? 감사하게도 주님은 분명하게이것을 밝혀주셨습니다. 그것은

둘째,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킴”으로서 (We may abide in Christ by keeping His commandments) 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주님께서 밝혀주시는 영적 논리를 따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에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진실로 사랑함으로 그분의 주되심을 삶에서 실천하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제가 말씀 드렸는데, 그처럼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10절>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v.10)라고. ‘계명을 지키는 것’과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을 주님은 동일한 가치로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할 때 비로소 그 계명을 지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무엇이 그의 제자된 우리 성도가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길인지를 설명하시면서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v.10b)고 분명히 밝히신 것입니다.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주님은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추상적이고, 감상적인 것’으로 말씀하시지 않고,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If you obey my commands, you shall abide in my love)라고 구체적으로 명확하게 밝히신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에서 제가 한가지 깨닫은 점은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분의 계명, 곧 말씀을 가지고 지키는 것을 그 어떤 것보다도 그분을 사랑하는 것으로 인정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신명기 6장>에서 이스라엘민족에게 “들으라 이스라엘아 ~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4-5)고 모세를 통해 명령하시고 나서, 이어지는 문장에서 어떻게 하나님 사랑을 실천할지를 이렇게 분명히 말씀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신. 6:6-7)라고 말입니다. 이 하나님의 명령은 ‘그 분의 말씀을 목숨을 걸고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결코 적당하게, 하는 시늉만 내면서 사랑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과 뜻과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라는 명령인 것입니다.

제가 성경에서 가장 좋아하는 말씀의 하나인 <시편 1편>의 말씀과 같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시. 1:1-2)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지켜 나가는 것이 곧 ‘하나님 사랑’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신구약을 통틀어 이것만큼 강조되는 것은 없다고 믿습니다. ‘말씀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같은 관점에서 ‘예수님의 말씀’ 바로 ‘주님의 계명’을 가지고 지켜 나가는 것이 ‘그분에 대한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질문은, 주님의 계명은 무엇일까요?

셋째, “서로 사랑함” 으로서 (We may abide in Christ by loving one another) 입니다: 그 어떤 것보다도 주님을 믿는 제자된 우리 성도 상호간에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임을 주님은 밝혀 주셨음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v.12) 여기서 보듯이, 주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면, 그 주님의 계명은 무엇인지를 이해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매우 간결하고도 심각한 한문장을 던지셨습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결론인 것입니다.

이 명령은 간결하지만, 결코 간단하지 않음을 우리는 압니다. 왜일까요? 왜냐하면, 주님은 ‘너희가 열심을 다해, 소신컷 할 수 있는 만큼 서로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12)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2가지 (=이중적인) 부담이 있는데, 첫째는 그 ‘사랑의 질’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정도라는 것이고, 둘째는 그 ‘사랑의 실천’은 ‘격려나 도전’ 정도가 아니라 <주님 자신의 명령>으로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 제자들을 서로 서로 이렇게 죽기까지 사랑하라고 도전하십니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사랑해야만 한다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 주님의 명령은 결코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이중적인 의미가 동시에 이중의 축복과 은혜로 우리에게 임함을 깨닫습니다.

왜냐하면, 주의 제자된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 주님의 참된 사랑이 우리 안에서 실천되어지는 축복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개인뿐 아니라, 주님의 몸된 공동체가 더불어 누리는 풍성한 열매의 삶인 것입니다. 바로 우리에게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을 통해서 누리는 열매인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이렇게 도전합니다. “저를 아노나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요일. 2:4-5)고. 그렇습니다. 우리는 말로 만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사랑의 섬김을 통해 주께 대한 사랑을 증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가 과연 진정한 주님의 제자일까요? 주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그의 제자는 먼저 자신을 뜨겁게 사랑하는 자요, 그로 말미암아 그분의 말씀을 목숨을 걸고 사랑함으로 그의 명령인 ‘서로 사랑하기’를 실천하는 자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결국 “그리스도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그분을 머리로 해서 하나로 연결된 신앙공동체, 즉 그분의 몸된 교회 성도 서로 서로가 사랑을 힘쓸 때 우리는 주님 안에서 머무르게 됨을 깨닫게 됩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요일. 4:12) 우리 각자가 주님을 진실로 사랑함으로 그의 말씀을 더욱 가까이하고, 그로 말미암아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주께서 약속하신 아름다고 풍성한 열매를 거두어 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