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tember 25, 2022

“참 포도나무” (The True Vine)

Preacher:
Passage: 요한복음 (John) 15:1-2,4

“참 포도나무”

(The True Vine)

9-25-22

본문말씀: 요한복음 (John) 15:1-2,4

1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I am the true vine, and my Father is the gardener.)

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He cuts off every branch in me that bears no fruit, while every branch that does bear fruit He prunes so that it will be even more fruitful.)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Abide in Me, and I will abide in you. No branch can bear fruit by itself; it must abide in the vine. Neither can you bear fruit unless you abide in Me.)

[설교 요약]

            주께서 “내는 참 포도나무요”라고 말씀하실 때의 <참 포도나무> (The true vine)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사야서 5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말씀 하시되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혔도다” (사. 5:2)라고 이스라엘을 책망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시고, 풍성한 열매를 기대하며 약속의 땅에 극상품 포도나무로 심으셨는데, 이들은 도리어 먹을 수도 없는 악한 열매만을 거두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나는 참 포도나무”라는 주님의 말씀은 ‘자신만이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참된 생명과 의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포도나무’가 된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가지된 우리가 열매 맺기를 원한다면, 그 유일한 길은 포도나무 원 둥치에 붙어 있는 방법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내 안에 거하라”고 도전하신 뜻은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 (Abiding in Christ)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첫째로, 성도의 구원을 이룬다’는 뜻입니다: 물론 구원은 오직 인간의 행위와 관계없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엡. 2:8).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분명한 결단과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자신을 따르라고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 2:12)고 도전하듯이, 만약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리스도 안에 거함을 통해 가지가 포도나무에 연결되어 있음을 증명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실천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주되심’ (the lordship of Christ)이란 “예수님이 정말 여러분의 인생의 주인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돈이나 명예나 세상 향락이 아니라 정말 예수님이 여러분 인생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때 농부되신 하나님 아버지는 가지치기를 통하여 여러분의 삶이 더욱 풍성한 열매 맺도록 역사하실 것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무엇이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뜻인지?’를 살펴보았고, 다음 시간에는 ‘어떻게 그분 안에 거할지?’를 주님의 말씀을 통해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설교 전문]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고 시작되는 <요한복음 15장>의 오늘본문말씀은 우리 주님의 본질을 더 깊이 깨닫게 해주는 말씀입니다. 더욱이 만약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는 제자의 삶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질문하고 그분을 따르고자 한다면, 오늘 말씀은 그 어떤 말씀보다도 주의 참된 제자로 인도하는 말씀이 될 것임을 저는 의심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요. 15장>말씀에서 누가 참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인지를 분명하게 밝혀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주님 안에 속한 그분의 제자로써 약속하신 은혜를 누리고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저는 이번 시간에 <요한복음 15장>의 오늘말씀에서 ‘참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말씀을 살펴보고자 하며, 다음시간에는 이어지는 <요. 15장>의 주님의 말씀에서 ‘그렇게 포도나무 되신 주님과 우리 성도와의 관계’를 주께서 격려하신 “내 안에 거하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그런데 복음서에서 보면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신지를 분명히 밝히신 말씀이 여럿 있습니다. 이를테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라든가, “나는 선한 목자라” (요. 10:11)와 같이 자신이 누구신지를 간결하고도 핵심적으로 우리에게 밝혀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서 주께서 선언하시듯 “나는 참 포도나무요” (v.1)라는 말씀은 자신의 정체성을 그 어떤 말씀보다도 본질적으로 우리들에게 잘 설명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주께서 “내가 참 포도나무요”라고 말씀하실 때의 <참 포도나무> (The true vine)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시편>말씀에 보면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 (시. 80:8)라고 하였고, <이사야서 5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말씀 하시되 “~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혔도다” (사. 5:1-2)라고 이스라엘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극상품의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먹을 수 조차도 없는 불량한 들포도가 맺혔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시고, 애굽에서 건져 내셔서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풍성한 열매 맺기를 기대하며 그들을 극상품 포도나무로 심으셨는데, 이들은 도리어 먹을 수도 없는 악한 열매만을 거두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오늘 말씀에서 주께서 “나는 참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신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풍성한 열매를 맺음에 실패한 이스라엘민족’과 주님 자신을 극적으로 대비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은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대하시는 생명과 의로움의 풍성한 열매 맺는 ‘참된 포도나무’로써 이 땅에 오셨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곧 이스라엘백성들 뿐 아니라, 어떤 인간도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맺을 수 없는 생명과 진리의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나무, 바로 ‘참 포도나무’는 오직 주님 자신 뿐이라고 선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자신 만이 참된 생명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메시야 (=구원자)시요,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만 오직 생명과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께서 앞에 있는 <요한복음 10장>에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10:10)고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를 믿는 자들에게 생명 (=구원)을 주실 뿐 아니라, 더 풍성한 삶을 주시고자 함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풍성함’이란 물질적 풍요, 건강, 명예 등과 같은 인간 스스로 노력하여 얻을 수 있는 그런 풍성이 아니라, 오직 ‘참 포도나무’되신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풍성한 열매의 삶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바로 주님께서 그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을 향한 도전과 격려의 핵심적인 메세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너희는 참된 내 제자가 되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내 안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주님은 ‘포도나무의 속성’으로 설명하십니다. 영적으로 볼 때,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제자의 관계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만약 가지가 열매 맺기를 원한다면, 그 유일한 길은 오직 포도나무 원 둥치에 붙어 있는 방법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내 안에 거하라”고 도전하신 뜻은 바로 그것입니다. ‘참 포도나무된 나에게 붙어 있으라. 만약 너희들이 풍성한 열매맺기 원한다면!’ 말입니다. 왜냐하면,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은 가지마다 어떤 열매도 맺지 못할 뿐 아니라, 결국 말라 죽어 불에 던지어 살리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께서 <6절>에서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v.6)고 말씀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 (Abiding in Christ)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첫째로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뜻은 ‘성도의 구원을 이룬다’는 의미임을 뜻합니다. 물론 우리는 교리적으로 구원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임을 압니다. 그렇습니다. 그 궁극적이고 구원의 첫 출발점은 그 어떤 우리 인간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있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바로 ‘천지가 창조되기도 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신 예정하심’에서 구원은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제가 한가지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제시하는 방식’입니다. 말하자면, “네가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다면 구원받을 것이고, 아니면 아무리 노력해도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는 것입니다. 도리어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막. 9:47)고 도전하신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주님은 우리의 구체적인 결단과 행위를 통해 구원을 이루라고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나의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라면 구원받은 자의 증거 (=삶의 모습)을 보여라는 것입니다. 비록 한쪽 눈을 잃는 고통과 댓가지불의 아픔이 있다 할찌라도 구원받은 자는 반드시 그렇게 행동할 것이라는 도전을 주께서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내 안에 거하라”는 주님의 도전은 무엇보다도 ‘만약 네가 내 안에 거하지 않고, 너와 내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네의 속에 생명이 없다’라고 도전하심을 믿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함으로 영생을 소유한 상태가 주님안에 거하는 가장 본질적이요, 첫 출발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뜻은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실천한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주되심’ (the lordship of Christ)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간단하게 말하면, <만약 여러분이 ‘예수님을 구세주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영접’했다면, 여러분이 ‘나의 주님’ (my Lord)라고 고백한 예수 그리스도께 그 고백에 합당하게 모시고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말로만 주님이라고 하고, 찬양하고 기도할 때만 주님이고, 내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 가운데서는 주님은 온데 간데없다면, 예수님은 여러분의 참된 주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실제적인 주인은 아마도 여러분 자신이거나, 여러분이 추구하고 있는 재물과 야망과 인기와 쾌락 혹은 그 무엇일 것입니다. 그럼으로 주께서 “내 안에 거하라”고 주님의 제자된 우리들에게 도전하시는 핵심은 ‘너희가 진정한 나의 제자가 되기 원한다면, 말로 만이 아니라 너의 삶의 현장에서 나를 주님으로써 합당하게 섬겨야 한다’고 도전하심을 저는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삶에서 진정한 주님이 되실 때 여러분은 비로소 그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할 뿐 아니라, 어떤 영적 열매를, 진리와 생명의 풍성한 열매도 거둘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적극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뜻이 ‘그분의 주되심을 실천하는 것’임을 우리가 인정한다면, 이제 각자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영적 작업이 일어나는 가가 우리 성도가 깨닫고 주되심에 순종해야 하는 점입니다. 그것은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1절>에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v.1)고 주께서 말씀하실 때, ‘하나님 아버지’를 ‘농부’ (gardener) 이라고 묘사하십니다. 농부가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농부는 포도나무 가지에 달린 열매가 잘 자라도록 풍부한 영양분의 거름과 때를 따라 물을 주고, 또 가지치기를 하여 충실한 가지가 더 많은 열매 맺도록 다양하게 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으로 볼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령을 통하여 마치 농부가 포도나무에 행하듯이 일하시는 것입니다. 열매 맺지 않는 가지는 제거하는 ‘가지치기’ (pruning)를 행하시는 것입니다 (v.2-6).

<가지치기>는 마치 영적으로 볼 때 ‘징계’와 같습니다. 자녀들의 잘못된 행동을 바로잡고 훌륭한 자녀로 양육하고자 부모가 행하는 따끔한 벌과 같은 징계와 유사한 것이 가지치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지치기’가 징계가 차이가 있는 것은 징계는 ‘자녀의 실수와 잘못된 행위에 따른 교육적 처벌’이 그 이유라면, ‘가지치기’는 ‘징계’적인 성격도 있을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지난 시간에 살펴봤듯이 ‘고난’ 혹은 ‘환난’처럼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지불해야 하는 대가지불’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지혜롭고 노련한 농부되신 하나님 아버지는 성령을 통해 때에 따라 나의 허물과 잘못을 반복해서 행치 않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잘라 내시기도 하고, 믿음의 댓가로 받는 의의 고난을 통해 더욱 더 풍성한 성령의 열매를 거두게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지금 우리에게 이 풍성한 열매를 거두기 원하느냐? 고 묻고 계심을 믿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그 열매를 거둘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 15장>의 핵심내용인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 있을 것인지?”를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점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이요,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 삶임을 주님은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다음시간에 이점을 중점적으로 살펴볼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 주님의 제자들이 그분 안에 거할 수 있을 것인가?’를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참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과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여러분은 포도나무 원둥치 되신 예수님의 가지가 되어 그분 안에 거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계속해서 자라나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분과 떨어져 있습니까?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v.5)고 주님은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그렇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바라기는 주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님께 연결되어 충실한 열매를 거두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