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ruary 25, 2024

“속되다 하지 말라” (Do Not Call Anything Impure)

Preacher:
Passage: 사도행전 (Acts) 10:14~16
Service Type:

“속되다 하지 말라”

(Do Not Call Anything Impure)

2-25-24

본문말씀: 사도행전 (Acts) 10:14~16

14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대 (“Surely not, Lord!” Peter replied. “I have never eaten anything impure or unclean.”)

15 또 두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The voice spoke to him a second time. “Do not call anything impure that God has made clean.”)

16 이런 일이 세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리워 가니라 (This happened three times, and immediately the sheet was taken back to heaven.)

[설교 요약]

            오늘 본문말씀이 포함된 <사도행전 10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인의 율법주의’와 본질적인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잘 밝혀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은 ‘고넬료’라는 이방인을 소개함으로 시작합니다. 그는 로마 군대 백부장이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항상 기도하는 사람(v.1~2)입니다. 하루는 그가 기도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 ‘욥바의 피장이 집에 있는 베드로를 청하라’고 지시합니다. 이 사건이 중요한 것은 신약에 기록된 첫 이방인의 구원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고넬료가 하인 몇 명을 베드로가 있는 욥바로 보냈는데, 그 시각쯤에 하나님은 또한 베드로에게 2가지로 계시하십니다. 첫째는 ‘하늘에서 내려온 큰 그릇 안의 부정한 짐승들’의 환상을 보여주시며 ‘잡아 먹으라’ 하셨고, 둘째는 성령께서 그에게 ‘의심하지 말고,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을 따라가라’고 명하십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베드로가 본 환상의 의미일까요? 그것은

첫째, ‘음식이 더럽게 하는 것 아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마. 15:19~20)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지, 어떤 음식이나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이 더럽게 하지 않음을 밝혀 주십니다.

둘째, ‘하나님의 구원엔 차별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 환상을 통하여 이방인을 “하나님께서 꺠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v. 15)고 말씀하십니다. 그럼으로 그들에게도 차별없이 구원의 복음을 전하라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셋째, ‘편견과 선입관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또한 이 환상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에게도 ‘편견과 선입관을 버리라’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우리의 좁은 마음과 기준으로 서로를 판단하고 정죄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롬. 14:3~6).

바라기는 나의 기준과 지식으로 이웃을 판단하지 않고, 우리를 십자가로 하나되게 하신 그리스도 사랑으로 서로를 용납하고 함께 지어져 가는 우리 믿음의 공동체 되기를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이제 <사도행전 10장>을 시작하면서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인의 율법주의’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무엇인지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금식에 대해 변론하시면서 “새 포도주는 새부대에 넣어야 할 것 이니라” (눅. 5:36~38)고 말씀하셨는데, 오늘 본문말씀이 주께서 말씀하신 ‘새 술’과 ‘새 부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닫게 해 주는 것이 본문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무엇이 ‘그리스도 복음의 새 포도주’인지, 반대로 ‘유대인의 율법주의’라는 ‘낡은 부대’는 무엇이고, 또한 기독교회가 생겨난지 2천년이 가까워오는 오늘날에도 우리 안에 존재하는 이런 해묵은 율법주의의 낡은 부대는 무엇인지를 돌아보고, 진정한 ‘복음의 새 술’을 담을 수 있는 ‘새 부대’의 성도 여러분의 믿음, 그리고 우리 공동체의 믿음 되길 기대합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된 <사도행전 10장>의 말씀은 가이사랴 지방에서 살아가던 ‘고넬료’라는 로마제국의 군대 백부장이었던 사람에 대한 소개로 시작됩니다. <2절>에 보면,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v.2)라고 그가 하나님을 경건하게 믿는 자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하루는 그가 제 구시, 곧 <오후 3시>쯤 되었을 때 환상을 보게 됩니다. 미루어 짐작컨데, 그가 하나님을 경건하게 믿는 자로서 ‘제 9시’는 성전에서 저녁 희생제사를 드리는 시간임으로 거기에 맞춰서 날마다 기도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경건한 습관을 따라 기도드리고 있을 때, 어느 날 하나님의 천사가 환상 가운데 나타나 그에게 말합니다.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v.4~5)라고 말입니다.

저는 여기서 천사가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다)”는 말을 통해 <고넬료>가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진리를 깨닫고, 그의 기뻐하시는 백성이 되기를 간절히 구한 것’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하자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구원받는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께서 베푸실 구원의 은혜 받기를 고넬료가 간절히 구했을 때,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기억하시고, 천사를 보내 신실하게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기억하건데, 신.구약 성경 전체에서 이렇게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매우 구체적이고 즉각적인 기도의 응답 사례는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의 나이 많은 충성된 종이었던 ‘엘리에셀’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주인의 아들, 이삭의 아내가 될 소녀를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셔서 순적히 만나게 해 주실 것을 기도하자 마자 이삭의 아내가 될 리브가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창. 24:12). 이것이 제가 오늘 본문의 <고넬료>의 기도와 함께, 하나님께서 매우 구체적으로 그리고 드라마틱하게 기도에 응답하신 유사한 사례로 저는 기억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천사는 고넬료에게 매우 구체적으로 지시합니다. 지금 욥바의 피장이 (=피혁공) 시몬의 집에 거하고 있는 베드로라는 시몬을 청하여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 집의 경건한 하인 몇을 택하여 그들을 욥바로 보냈습니다. 한편, 하나님은 먼저 베드로에게 꿈의 환상과 그리고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이방인들을 향한 구원의 구체적인 첫 사건을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먼저 베드로가 제 육시 (곧 정오)에 기도하러 지붕에 올라 갔을 때 환상을 보게 됩니다. <10절>에 보면 “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v.10)라고 기록한 것으로 볼 때, 아마도 베드로가 직전까지 금식을 행했음으로 그가 시장했던 것으로 성경학자들은 추측합니다.

그래서 그 집안 사람들이 음식을 준비하는 차에 비몽사몽간에 그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v.11~12)라고. 베드로가 본 각종 생물은 한마디로 ‘부정한 것들’이었습니다. ‘부정하다’는 것은 유대인의 율법 규례에서 볼 때 <먹어서는 안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먹는 음식에 대한 규정을 <레위기11장>등과 같은 모세오경에서 말씀하셨는데, 베드로가 지금 본 것은 벌레와 여러 날짐승과 같이 하나님께서 부정하다고 정하신 것들입니다.

이 음식에 관련한 구약에서 하나님의 규례의 의미에 대해서는 한번 구체적으로 나눠 보는 시간 갖기를 원합니다. 아무튼 여기에서 문제는 이 그릇이 내려오고나서 “일어나 잡아먹어라” (v.13)는 음성이 하늘에서 베드로에게 들렸다는 것입니다. 그는 너무 놀라고 황급하여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v.14)라고 먹기를 거부했지만,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v.15)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런 일이 3번 반복해서 일어났고, 그 후에 그릇이 하늘로 도로 올리어 갔던 것입니다.

이런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되었을 때, 베드로는 도대체 자신이 본 그 환상의 의미는 무엇인지 무척 궁금해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상황 속에서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그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이것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도착하기 바로 직전에 성령께서 그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의심치 말고 그들과 함께 갈 것을 명하십니다 (v.17~20). 이로서 베드로는 자신이 본 환상의 의미를 깨닫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베드로가 본 환상의 의미일까요? 즉, 무엇이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시는 메시지일까요? 그것은

첫째, ‘음식이 더럽게 하는 것 아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더불어 <장로들의 전통>에 대해 변론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마. 15:19~20)라고.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 주께서 특별히 유대의 율법전통을 잘 지킨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들과 같은 종교지도자들에게 도전하시는 핵심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인간을 더럽히고 죄짓게 하는 것은 ‘무슨 음식을 먹느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을 진정으로 더럽히는 것은 인간속에 있는 ‘육신에 속한 악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주신 율법은 선한 것이지만, 문제는 오랜 시간을 통해 율법준수를 행해오는 과정속에서 유대인들은 안따깝게도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정신>은 잊어버리고, 단지 외적으로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행위 (형식)에 목숨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 속에서 품어져 나오는 나쁜 생각과 거짓과 죄악은 별 것 아닌 것처럼 여기면서도, 단지 씻지 않는 손으로 음식 먹는 것과 먹는 음식의 종류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온 신경을 집중시킨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이렇게 음식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한 영적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이런 자들은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딤전. 4:3~4)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베드로가 선한 율법의 정신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율법준수를 통해 의롭게 되고자 하는 ‘율법주의’의 허구를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그 어떤 음식도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구원엔 차별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수제자이자, 초대교회의 대표적 지도자인 사도 베드로에게 오늘 이런 환상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에게 환상을 통해 부정한 짐승을 보이시고, “잡아 먹으라” (v.13)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뜻은 이것이 단순히 음식의 문제이전에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으심>을 밝히신 것입니다. 이것이 정확히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말라” (행. 10:15)고 그에게 말씀하신 이유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부정한 짐승들을 잡아먹으라’는 명하심은 ‘이방인에게도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차별하지 말고 전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평상시 유대인들은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을 상종하지 못할 부정한 자들로 취급했는데, 그 중심에는 하나님의 구원이 이방인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것으로 그들은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유대인들의 잘못된 고정관념을 잘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천사와 성령의 지시를 통해 베드로가 고넬료 집에 가서 그들에게 복음 전했을 때, 그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었음과 그로 인해 그들에게 침례 베풀었음을 베드로가 예루살렘교회 리더들에게 알렸는데, 이런 말을 듣은 유대인 출신의 리더들이 이렇게 놀라워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행. 11:18)라고. 이러한 놀람은 최초의 초대교회, 즉 예루살렘교회가 막 출발한 그 당시까지 유대인 성도들은 이방인에게는 하나님의 영생의 구원이 허락되지 않았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 성령을 통해 점점 더 밝혀지면서, 하나님의 구원은 결코 차별이 없음을 우리 모두는 확신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구원받은 성도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 몸을 이룬 그분의 교회 공동체를 언제나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고 모든 계층과 성별을 초월하여 하나되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 3:28)라고. 이런 인종과 성별과 계층을 초월하여 만방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부르심으로 구원하시고 하나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복음의 진리가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겐 조금도 이상하지 않지만, 오랫동안 율법의 시각에서 자라온 유대인 성도들에게는 이런 하나님의 차별함이 없는 구원하심은 매우 놀랍고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은 가장 먼저 초대교회 리더인 베드로의 고정관념을 깨트리셔서 하나님의 차별이 없는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셋째, ‘편견과 선입관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베드로에게 주신 이런 환상의 교훈은 단순히 2천년전에 베드로와 같은 유대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주는 가르침이 아님을 확신합니다. 이 말씀의 교훈은 오늘날도 여전히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유효하다고 믿습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에도 여전히 ‘편견’과 ‘선입관’ ‘자기기준과 자기확신’ 그리고 ‘자기철학’에 매몰되어 상대를 비판하고 멸시하며 정죄하는 <21세기의 바리새인들>에게 ‘율법주의’의 낡은 부대를 벗으라고 성령님은 도전하심을 믿습니다. 우리는 서로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구원받고 함께 한 몸으로 자라가는 지체라고 하면서도, 상대의 <먹는 문제> <입는 문제> <생각과 가치관의 문제>의 작은 차이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서로를 배척하고 용납하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이점에 대해 사도 바울은 <로마서14장>에서 성도들을 지혜롭게 지도합니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롬. 14:3,6)라고. 그렇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와 십자가의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는 단 한사람도 구원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아끼지 않고 십자가에 내어 주셔서 그 아들의 보혈의 능력으로 여러분과 저는 구원받을 수 있었고, 우리의 편견과 고집과 이기적인 삶으로 갈라진 우리 사이의 장벽을 허무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엡. 2:16,22)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의 고넬료와 그 가정이 성령충만을 통해 구원받은 사건은 성경에서 기록된 <첫번째 이방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이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곧 모든 민족과 나라가 하나로 연결되는 첫번째 사건>인 것입니다. 이런 차별 없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로 인하여, 이방인에 속한 여러분과 저도 구원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 아버지의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되었는데, 혹시 우리 가운데 여전히 ‘율법주의’ (legalism)이라는 낡은 부대를 버리지 않고, 계속 붙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문제는 구원의 생명력 넘치는 복음이라는 새 술을 담기에 ‘율법주의’라는 가죽부대는 너무도 낡고 빈약하다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나의 좁고 편협한 기준’으로 서로를 정죄하고 ‘부정하다’고 형제 자매를 판단하지 않고,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의 용납하심의 은혜와 택하여 주신 사랑을 힘입어 서로를 용납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우리 믿음의 공동체 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