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e 2, 2019

“순전한 믿음” (Mere Faith)

Preacher:
Series:
Passage: 빌립보서 (Phillippians) 4:6~7
Service Type:

“순전한 믿음”

(Mere Faith)

6-2-19

본문말씀: 빌립보서 (Phillippians) 4:6~7

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Do not be anxious about anything, but in everything, by prayer and petition, with thanksgiving, present your requests to God)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And the peace of God, which transcends all understanding, with guard your hearts and your minds in Christ Jesus)

 

[설교 요약]

            무엇이 순전한 믿음일까요? 무엇이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순전한 믿음일까요?    사실 믿음이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할때는 크게 2가지로 살펴보는 것이 유익 합니다.

첫째는 ‘믿음의 내용은 무엇인가?’를 살펴 보는 것 입니다. 이것은 바로 ‘무엇을 믿는 것이 믿는다는 것인가?’라고 표현할수도 있는 것 입니다.

<히.11:3>에서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나아가서 이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이라는 것 입니다.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롬. 4:23,24). 우리 거듭난 성도의 믿는 내용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우리 주를 죽은지 3일만에 다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것’ 입니다.

두번째로 ‘믿음의 자세는 무엇인가?’ 하는 것 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믿을 것인가?’라는 뜻 입니다. <히. 11:1>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믿음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주석가 매튜헨리는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가 되는 까닭은 믿음을 통해 육체의 눈으로 식별할수 없는 것들의 실체를 마음의 눈으로 보게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v.6) 고 빌립보성도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는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한 소망을 가진 사람들 입니다. 여러분은 성령의 충만함으로 육신의 눈으로 볼수 없는 약속의 실체를 믿음의 눈을 통해 바라보게 될것 입니다. 그러니 왜 염려하고 걱정합니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기도와 간구를 통해 구할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요’라고 도전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뜻은 아브라함에게 역사하셨던 하나님이 동일하게 나의 삶 가운데 역사 하심을 믿는 것 입니다. 아브라함이 도저히 믿을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도 믿음에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약속을 의심치 않고 하나님을 믿었드시, 나도 의심하거나 불신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 입니다. 이것이 순전한 믿음인 것 입니다. 의심하거나 불신하지 않고,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실것을 믿으십니까?

 

[설교 전문]

            성도의 삶은 언제나 믿음으로 우리를 인도 합니다. ‘나는 진정한 믿음이 있는가?’가 내 삶을 결정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결정하시는 방식임을 우리가 이해하기 때문 입니다. “~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롬. 1:17)고 성경은 선언하고 있기 때문 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대속하시는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것도 믿음으로  가능하며, 하나님의 의로우신 눈앞에서 죄없다고, 의롭다고 인정함 받는 것도 오직 믿음으로 가능한 것 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믿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을 의롭다고 불러 주시는 믿음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지지 않는 정금과 같은 믿음으로 귀한 열매 맺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기대 합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시기에, 그 말씀하신 하나님을 순전히 믿는 믿음으로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기대 합니다.

무엇이 순전한 믿음일까요? 무엇이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순전한 믿음일까요? 저는 믿음을 생각하다가 문득 ‘만약 아브라함이 21세기의 오늘날 살아간다면 그의 믿음은 어떻게 되었을까?’하고 질문해 보았습니다. 제가 내릴수 있는 결론은 아브라함은 지금으로부터 4000여년전이라는 까마득한 옛날에서만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순전한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은것이 아니라, 40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믿음으로 하나님께 인정함을 받는 삶을 살것임을 저는 의심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의 믿음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인종과 환경을 초월해서 언제나 동일하게 역사한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 입니다.

사실 믿음이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할때는 크게 2가지로 살펴보는 것이 유익 합니다. 첫째는 ‘믿음의 내용은 무엇인가?’를 살펴 보는 것 입니다. 이것은 바로 ‘무엇을 믿는 것이 믿는다는 것인가?’라고 표현할수도 있는 것 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세상 모든 종교는 믿음을 요구합니다. 우리 기독교 뿐 아니라, 세상 모든 종교도 그 종교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요구하는 것 입니다. 그 종교들은 각자 다른 믿음의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믿습니까? 우리 크리스챤들은 무엇을 믿고 있습니까? 무엇을 믿는 것이 옳바른 크리스챤의 믿음의 내용 입니까? (이것을 묵상하다가, 어릴때 자라던 교회에서 <사도신경/ Apostles’ Creed>을 예배때마다 암송했던 기억이 떠오름/ 사도신경은 우리 크리스챤이 무엇을 믿어야만 하는지를 신앙고백의 형태로 잘 요약한 글 입니다…)

우리 크리스챤이 가져야할 ‘믿음의 내용’에 대한 대표적인 성경말씀은 <히.11:3>일 것 입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 (By faith we understand that the universe was formed at Gods command ~) 우리 크리스챤이 무엇을 믿는 것인가를 가장 간추려 표현하자면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것>이라고 말할수 있는 것 입니다. 이 말씀은 성경의 첫 시작인 <창. 1:1>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는 말씀과 정확히 일치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세계’ 즉 ‘천지만물’, 하늘과 땅에 속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창조하셨음을 믿는 것 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존재하는 것 안에는 여러분과 저도 포함됨을 믿는 것 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의 손에서 벗어나서 우연하게 생겨난 것은 이 세상에 그 어떤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거대한 바다를 한문장으로 요약한 것 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모든 세계를 그의 말씀으로 창조하신 것을 믿으십니까? 그리고, 이 믿음의 내용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렇게 구체적으로 적용 됩니다.

그것은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음을 믿는다면, 성경은 여러분도 동일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졌다고 <로마서 4장>에서 선언 합니다. 바로 아브라함은 자기몸이 죽은것 같음과 아내 사래의 태가 죽은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고,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100세에 아들을 낳게 될것이라 약속하신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 입니다 (롬. 4:17~21).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인데,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도 동일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갖게 될는 것이라고 사도바울은 성령의 깊은 감동가운데 선언하는 것 입니다.

그리고 더나아가서 이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이라는 것 입니다.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롬. 4:23,24). 우리 거듭난 성도의 믿는 내용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우리 주를 죽은지 3일만에 다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것’ 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았던 아브라함의 믿음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믿음이라고 사도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내용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내용에 이어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하는것은, 두번째로 ‘믿음의 자세는 무엇인가?’ 하는 것 입니다. ‘믿음의 정의’라는 것은 ‘어떻게 믿는 것이 믿는것인가?’라는 뜻 입니다. 앞에서 우리 크리스챤이 믿는 믿음의 내용은 무엇인지를 설명했다면, 여기서는 우리가 그 믿음의 내용을 단순히 지식적으로 알고 있다거나 머리로 인정한다는 것이 믿음이 아님을 알아야한다는 것 입니다. <‘그 내용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에 대해 이해해야만 하는 것 입니다.

믿음의 자세로서 <히. 11:1>만큼 많은 크리스챤들에게 공감받는 말씀도 드물것 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Now faith is being sure of what we hope for and certain of what we do not see.)라고. 이 말씀은 무엇을 뜻할까요? 주석가 매튜헨리는 이 본문을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인데, 그 이유는 믿음과 바라는 소망은 함께 병행하며 우리의 믿음의 목표와 소망의 목표도 동일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게 될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시리라는 사실을 확신을 가지고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이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가 되는 까닭은 믿음을 통해 육체의 눈으로 식별할수 없는 것들의 실체를 마음의 눈으로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믿는자들에게는 영혼의 눈과 같은 역할을 하도록 주어지는 것이다”라고.

매튜헨리는 ‘믿음은 마치 영혼의 눈과 같아서 우리 육신의 눈으로는 볼수 없는 것을 볼수 있게 해준다’고 믿음을 정의하고 있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육신의 눈으로 볼수 없는 것, 그러나 마음의 눈을 통해서 볼수 있는 것은 무엇 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서 약속하신 실체요, 소망의 실체라는 것 입니다. 현재 우리에게 주어지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기에 <반드시 이루어질 실체요, 실상>이라는 것 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믿은 믿음이요, 동일하게 모든 크리스챤의 믿음의 방식 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이렇게 성도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습니까? 여러분은 예수 우리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이 하나님 아버지시기 때문에, 동일하게 나에게 약속하신 것이 지금 당장은 내 육신의 눈으로 볼수없지만, 영의 눈으로 그 실체를 바라볼수 있고, 반드시 이루어 주실것을 확신함으로 그분을 믿으십니까?

오늘 본문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도전합니까?사도바울은 빌립보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v.6) 고 그들을 격려하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한 소망을 가진 사람들 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 이 약속은 반드시 이뤄질것임을 성령의 충만함으로 깨우쳐 주실것 입니다. 육신의 눈으로 볼수 없는 약속의 실체를 믿음의 눈을 통해 바라볼수 있게 하고, 확신 가운데 소망하게 될것 입니다. 그러니 왜 염려하고 걱정 합니까? 이것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잘못된 태도 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을진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기도와 간구를 통해 여러분의 구할것을 확신 가운데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요’는 것 입니다. 이것이 마음의 눈, 믿음을 소유한 자들의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이 되기 때문 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50여년경에 프랑스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부모를 모두 여이고 청년시절, 방탕과 세상의 향락 가운데 방황하다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샤를르 푸코’는 그 이후 세상의 가장 낮은 자리로 가서 주님을 섬기기를 결심하고 사하라 원주민을 섬기다가 순교 하였습니다. 그는 ‘사하라의 불꽃’이란 책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푸코는 이런 매우 의미심장한 말을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남겼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천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The most difficult thing for Christians who believe in God is to believe in God)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다는 우리 크리스천이,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우리 크리스천이 가장 어려운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는 사실에 여러분은 동의 하십니까? 우리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가장 힘든것은 놀랍게도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날카롭게 우리의 영적 상태를 해부한 샤를르 푸코의 영적 진단에 여러분은 동의 하십니까?

저는 오늘 성도 여러분과 함께 ‘순전한 믿음’이라는 설교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이 순전한 믿음 입니까?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믿음은 먼저 그 내용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우리 크리스챤이 믿는 믿음의 내용은 <그의 말씀으로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 입니다.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만드신 그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위에서 죽게하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을 믿는 것이 우리 크리스챤의 믿음의 정확한 내용 입니다. 이러한 기독교의 믿음의 핵심을 의심하거나 부인하지 않고, 그 믿음의 내용을 여러분이 신뢰한다면 여러분은 복된 성도일것 입니다.

그러나, ‘순전한 믿음’은 ‘믿음의 내용’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자세’도 그만큼 중요하다는 점을 저는 다시한번 강조하지 않을수 없는 것 입니다. 다시말해,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안다는 뜻도 아니요, 단순히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뜻이 아닌 것 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뜻은 아브라함에게 역사하셨던 하나님이 동일하게 나의 삶 가운데 역사 하심을 믿는 것 입니다. 아브라함이 도저히 믿을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도 믿음에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약속을 의심치 않고 하나님을 믿었드시, 나도 의심하거나 불신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 입니다. 이것이 순전한 믿음인 것 입니다. 제가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며 도전하는 것은 여러분은 여러분이 믿는다고 하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으십니까? 의심하거나 불신하지 않고,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실것을 믿으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베드로는 소아시아에 흩어진 여러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이렇게 그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벧전. 1:8,9)라고. 초대교회 성도들도 대부분 우리와 같이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했다는 것 입니다. 그러나, 그를 믿고 말할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한다는 것 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이것이 오늘날 성도 여러분과 저의 진정한 질문이 아닐까요?감사하게도 사도요한은 중요한 믿음의 실천에 대해 우리에게 이렇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요일. 4:12,13) 하나님을 향한 참된 사랑과 믿음은 내 머리로나 성경지식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한몸이 된 우리가 서로 사랑할때 우리안에 거하시는 그분의 사랑을 통해 주어진다는 것 입니다. 성령님의 충만하신 은혜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그분이 약속하신 모든 것을 기쁨 가운데 확신하게 되는 것 입니다. 이시간 하나님을 순전히 믿을수 있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 성령의 충만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는 이런 신실한 그의 믿음의 자녀 모두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