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mber 6, 2022

“영광의 하나님” (The Glory of God)

Preacher:
Series:
Passage: 출애굽기 (Exodus) 34:6

“영광의 하나님”

(The Glory of God)

11-6-22

본문말씀: 출애굽기 (Exodus) 34:6

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자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며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다” (And the Lord passed by before him, and proclaimed, the Lord, the Lord God, merciful and gracious, longsuffering, and abundant in goodness and truth)

[셜교 요약]

            오늘 말씀의 주제가 되는 ‘영광의 하나님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라고 했을 때, 이것은 곧 ‘하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일문답’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의 첫번째 질문은 “사람의 근본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대답은 “사람의 근본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다” 라고 선언합니다. 만약 우리 인간의 근본목적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은 그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오늘 본문말씀은 “~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며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다” (v.6)라고 하나님의 영광스런 성품을 선언합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점점 더 알아 나갈수 있다면, 우리는 왜 그분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지를 이해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성도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야 할까요? 그것은

  •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 입니다
  •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 입니다
  •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 입니다

그런데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사함 받아 의롭게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복된 자녀가 되어 누리게 되는 넘치는 은혜의 복음을 설명하고 나서, 12장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롬. 12:1)라고. 여기서 ‘거룩한 산 제사’가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임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수 있을까요?” 그것은,

첫째,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파괴하는 적입니다. 이 죄를 회개하고 그분의 은혜와 생명으로 돌아오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롬. 4:20)라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할 때, 우리는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시. 50:23)라고 선언하십니다.

넷째, ‘하나님을 위한 고난’받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받는 고난은 값진 것입니다 (마. 5:11; 벧전. 5:14). 이런 성도의 값진 고난을 통해 하나님은 영광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런 성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저는 잘 압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논한다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고 힘든 작업인가 하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크리스챤은 “우리 인간이 어떻게 크시고 무한하신 하나님을 이해하고 알아갈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요, 불경한 것이다” 라고 하면서 처음부터 하나님을 알아가고자 하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우리 인간의 유한한 머리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만물을 그 뜻에 따라 운행케 하시는 하나님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기에 아예 처음부터 그분을 알고자 하는 노력은 어리석은 것이고, 그분을 추구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합니까?! 저는 결코 그렇게 생각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포함한 모든 자연만물을 창조하실 뿐 아니라,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구원의 하나님이시기에 그의 자녀된 우리 성도가 그분 자신을 더욱 더 추구하고 알아 나가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저는 믿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가 되는 ‘영광의 하나님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라고 했을 때, 이것은 곧 ‘하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을 한마디로 우리 크리스챤이 표현할 때, 우리는 ‘선하신 하나님’ 혹은 ‘영광의 하나님’이라고 그분을 일컫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제가 말씀 가운데 성도 여러분과 함께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이해해 나간다는 것’, 다시 말해 ‘하나님을 추구해 나간다는 것’이 왜 우리 크리스챤에겐 그토록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을 이해하고자 함입니다. 그리함으로 그 추구함은 어떻게 우리 크리스챤이 삶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일문답’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의 첫번째 질문과 대답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질문) “사람의 근본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인가?” (What is the chief end of man”) 대답) “사람의 근본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 (Man’s chief end is to glorify God, and to enjoy Him forever)이라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서는 우리 인간의 가장 중심되는 삶의 목적을 정의하면서 그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기서 볼 때, 인간 삶의 있어서 가장 중요한 목적 (=의미)는 첫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 과 둘째 ‘하나님을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으로 두가지로 나눠 설명하는 듯 보이나 사실 하나인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동전의 앞면과 뒷면의 관계와 같은 것입니다. 언제나 함께 가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감사와 기쁨’이 그리고 ‘만족과 평화’가 늘 함께 하듯,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과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삶”은 언제나 분리할 수 없는 원인과 결과와 같은 관계인 것입니다.

그러면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인간 삶의 목적에서 보듯이, 만약 우리 인간의 제일 되는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 맞다면, 우리는 먼저 그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알수도 없는 하나님을 즐거워 할수도, 영광을 돌릴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과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다윗은 <시편 19편>에서 이렇게 영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했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 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시. 19:1-4)라고. 또한 <시편 24편>에 보면,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시. 24:1,9-10)라고 영광의 왕되신 하나님의 권능과 영화로우심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오늘 본문말씀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셔서 십계명을 새길 두번째 돌판을 가져오게 하시고, 아침 일찍 그가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주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셔서 그의 앞을 지나며 자신의 이름을 선언하시는 놀랍고 영광스런 말씀인 것입니다. 분문에서 그분이 누구신지를 이렇게 잘 선언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며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다” (v.6)라고.

만약 성도 여러분이 존재하는 모든 천지만물이 모두 그 하나님의 손으로 지으심 받고, 세상의 열방 나라를 세우게도 하시고 패하게도 하시며, 저 거대한 우주의 수없이 많은 운하계를 운행 하실뿐 아니라, 하늘을 나는 작은 참새 한 마리도 버려두지 않고 돌보시고 입히시는 분이 하나님 이심을 인정한다면, 그분의 선하심과 영광스러우심을 우리의 입술로 고백하고 찬양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만약 여러분과 제가 이런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그의 선하심과 아름다우심을 조금이라도 깨닫았다면, 중요한 것은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을 조금이라도 깨닫았다면, 거기서 멈춰서는 안되며, 더욱 더 그분을 알아 나가고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선하신 하나님을 추구하고 그분을 아는 지식에서 점점 더 자라나가는 것’이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언제나 도전하시고 명령하시는 메시지 (뜻)이라고 저는 믿는 것입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시. 34:8)고 성경은 우리를 일깨우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우리는 하나님을 추구해야 할까요? 왜 하나님은 그의 자녀가 그분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 나가기를 원하고 기뻐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분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는 만큼, 필연적으로 생명과 진리되신 그분을 즐거워하며, 그분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게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성도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야 할까요? 그것은 첫째),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가 우리를 우리를 낳으시고 길러 주신 부모님을 공경하듯, 우리를 창조하시고 모든 환경을 통하여 이 땅에서의 삶을 허락하신 하나님께는 우리가 그에 합당한 영광을 그분께 돌려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둘째)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영원한 생명은 단순히 우리가 육신의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은혜요 축복임을 우리는 잘 압니다. 왜냐하면, 이 땅의 삶은 한 여름 밤의 꿈처럼 짧고 허무하지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생명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 구원의 은혜는 우리가 아무리 감사하고 찬양해도 부족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셋째)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영화롭게 하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우리를 그분의 <진정한 자녀>로 변화시키시는 선하신 아버지이십니다. 저는 특별히 이점을 중점적으로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여기서 ‘왜 저는 ‘진정한’ 이라는 수식어를 쓰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안타깝게도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아직까지 그 존귀한 자녀의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크리스챤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가장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대표적인 말씀의 하나가 바로 <로마서>라고 저는 믿습니다.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로우심으로서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고 선언합니다 (롬. 1:17). 그런데 그 복음의 의는 바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에게 미치는 의인 것입니다 (롬. 3:21-26). 바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 성령의 능력으로 죄와 사망에서 해방케 되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임을 증거해 주시는 성령의 인쳐 주시는 축복된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롬. 8장).

이런 하나님의 복된 자녀임을 우리가 영의 눈을 열고 조금씩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사도 바울의 이와 같은 소중한 충고와 도전을 외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라고. 여기서 사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말로 다 할수 없는 은혜요, 특권임을 우리가 이해해 나가고 있다면, <그럼으로> “(형제들아)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짧지 않은 신앙생활을 하며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분명한 한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내가 하나님을 사랑했을 때는 내 신앙생활은 너무 즐겁고,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닌다 할찌라도 전혀 두렵고 힘들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반면, ‘제가 하나님과 사이가 소원해지고 점점 더 멀어지게 되었을 때, 내 신앙생활은 무엇을 해도 재미가 없고 빨리 벗어나고 싶고 세상에서 뭔가 재미를 찾고 싶어지는 충동을 벗어날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가 저의 삶을 결정했던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다면, 우리는 자원 (=즐거운)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고자 열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산 제사’가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임을 여러분은 충분히 이해할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인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먼저 무엇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는 최대의 적인지를 생각했을 때, 그것은 ‘죄’라고 말할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와 같이 심각하게 하나님이 지으신 천지만물과 창조질서를 파괴하고 훼손하는 것은 더 없기 때문입니다. 이 죄는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이요, 그분을 반역하는 것이기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철저하게 갈라놓는 원수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런 죄를 뉘우치고 회개함으로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돌아오는 것은 실로 그분의 영광을 온 우주에 다시 선포하는 놀라운 순간입니다. 하나님은 한 생명을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기심으로 영으로 죽었던 자가 회개함으로 구원을 얻는 순간을 그 어떤 것보다도 그분의 영광 거두신 것으로 기뻐하심을 믿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을 우리의 본으로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롬. 4:20-22)라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가슴 벅찬 명예를 주셨으며, 동시에 그 믿음을 통해 하나님은 영광 받으시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아삽이 지은 시로 부제가 붙은 <시편 50편>을 마감하면서 기자는 선언합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시. 50:23)라고. 여기서 ‘감사’라는 단어는 영어로 ‘praise’, ‘찬양’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히브리 원어의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감사와 찬양으로 나아오는 그분의 자녀를 향해 ‘내가 너로 인해 영화롭게 되었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이것 이상 성도들에게 더 큰 영광스러움과 명예스러움이 더 있을까요?

넷째, ‘하나님을 위한 고난’받는 것입니다. 내가 잘못해서라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받는 고난은 값진 것입니다. 이런 고난 받는 삶은 더욱 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경험한 성도들의 확고한 믿음의 증거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벧전. 5:14)라고 사도 베드로는 고난의 가치를 밝히는 것입니다. 이 고난의 풀무불을 지나 하나님께서 주실 정금보다 더 귀한 믿음을 확신했기에 앞서간 우리의 신실한 믿음의 선진들은 죄와 고난과 악한 영과 싸워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고난을 통해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순금과 같은 제물이 되어 드려지는 것임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하나님은 창조주시요, 권능의 주이시지만, 혹시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하나님으로 여러분은 인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바라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은혜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되신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 안으로 들어가고, 또한 그분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는 복된 성도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충만한 삶을 누려 나가는 성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