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ober 30, 2022

“비젼” (Vision)

Preacher:
Series:
Passage: 잠언 (Proverbs) 29:18
Service Type:

“비젼”

(Vision)

10-28-22

본문말씀: 잠언 (Proverbs) 29:18

18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Where there is no vision, the people perish: but he that keeps the law, happy is he)

[설교 요약]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비젼이라는 말은 세상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는 그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비젼’을 ‘삶의 원대한 계획과 포부’로 정의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뜻하는 비젼은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성도의 비젼일까요?” (What is the vision of believers?) 그것은

  • 하나님의 뜻을 이해해 가는 것” (The vision is to understand of God’s will) 입니다: 잠언서 기자는 “묵시가 없으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잠. 29:18)라고 선언하는데, 여기서 ‘묵시’ (默示)는 ‘침묵 속에서 본다’는 뜻이고, <현대인의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비젼’ (vision)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원대한 계획과 꿈이 비젼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셔서 침묵가운데 보여주시는 것이 비젼의 시작입니다.
  • 성령충만을 받는 것” (The vision is to be filled with the Holy Spirit) 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을 요엘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합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욜. 2:28)라고. 여기서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your young men will see visions)라는 말씀에서 “이상”에 해당하는 영어성경, <KJV>과 <NIV>에서는 단어가 ‘비젼’ (vision)입니다. 바로 성령의 충만을 받을 때, 우리는 비젼을 보게 됩니다.
  • 하나님이 주신 꿈을 꾸는 것” (The vision is to dream dreams of God) 입니다: ‘인도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캐리> (William Carey)선교사는 이렇게 우리를 도전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것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들을 시도하라” (Expect great things from God, attempt great things for God)라고. 성경에서 아브라함을 위시한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신 꿈을 꾸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중의 한 명이 60여년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I have a dream)라고 외쳤던 마르틴 루터 킹목사의 꿈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비젼을 소유하셨습니까? ‘왜 적지 않은 크리스챤들이 예수 믿어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이런 약속하신 비젼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 말씀과 무관하게 살기 때문이요 (율법을 지키지 않음으로, 묵시(=비젼)이 없음/ 잠. 29:18)
  • 성령의 충만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요 (성령의 충만한 부어주심을 받지 못함으로 이상을 보지 못함/ 행. 2:28)
  • 믿음의 눈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약속의 실상을 보지 못함으로 세상의 헛된 가치에 마음이 빼앗김/ 히. 11:1)

성도 여러분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사랑함으로 성령충만한 가운데 비젼의 자녀되시기를 기대합니다. 그리하여 믿음의 눈으로 약속하신 실상을 바라봄으로 거짓된 세상의 가치와 싸워 승리하고 아름다운 열매맺는 삶 사시길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 한국사람이 쓰는 말 가운데는 “빵”이나 “케잌”같은 <외래어>가 적지 않습니다. 원래는 우리 말이 아니었지만, 언제부터 인가 우리말처럼 쓰인 단어들입니다. 아니 그 단어가 아니면, 그 어떤 다른 말로도 정확한 어휘전달이 힘든 단어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의 주제가 되는 “비젼”이 그런 단어가 아닌가 여겨집니다. 그런데 ‘한글사전’에는 “내다 보이는 장래의 상황”이라고. 그리고 영어사전에서 보면 “1) 볼 수 있는 힘이나 행위, 2) 색깔이나 모양과 같이 사물의 질에 따라서 규정되는 특별한 감각, 3) 꿈이나 황홀경 가운데 보여지는 것” 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도 예상하시듯이 우리가 함께 살펴보고자 하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비젼’은 그런 사전적 의미와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사전적 의미에서 언급된 ‘꿈이나 황홀경 가운데 보여지는 환상’으로 일컫어지는 비젼은 실제로 신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계시와 영광을 나타내는 방법으로 적지 않게 등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비젼은 그것과는 사뭇 다른 것입니다. 단순히 어떤 초자연적인 환상을 보는 자체를 우리가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논하고자 하는 비젼은 하나님께서 계시한 것이 되었건, 혹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성경의 감동을 통해서 가지게 된 것이건 관계없이 우리 성도가 가지게 된 ‘꿈’이나 ‘원대한 목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오늘 우리가 나누고자 하는 이 비젼이 무엇인지 정의함에 있어서, ‘하나님으로 부터 온 꿈’이라고 먼저 간략히 정의해 보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함께 무엇이 성경에서 말하는 ‘비젼’ 인지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성도의 비젼일까요?” (What is the vision of believers?)

그것은 첫째, “하나님의 뜻을 이해해 가는 것” (The vision is to understand of God’s will) 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보면, 잠언서 기자는 <개역한글>에는 “묵시가 없으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Where there is no vision, the people perish: but he that keeps the law, happy is he/ KJV)라고 선언하고 있고, <현대인의 성경>에는 “하나님의 계시가 없으면 백성이 무질서하겠지만,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복이 있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개혁한글>의 ‘묵시’ (默示)는 직역하면 ‘침묵 속에서 보임’이라는 말이고, 이것은 특별히 기독교에 있어서는 조금 전 <현대인의 성경>에서 표현하듯이 ‘하나님이 계시를 내려 그분의 뜻이나 진리를 알게 해 주시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비젼의 의미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는 비젼을 “하나님께서 계시하셨다”라고 표현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 보여주지 않으시면 우리 인간은 그 누구도 하나님을 알수 없고, 그분의 뜻을 깨닫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성경에서 말하는 비젼은 ‘인간의 꿈이나 큰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그분의 성령을 통하여 계시하여 주심으로 꿈꾸게 하시는 삶’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성령을 통해 비젼을 받게 되는 것일까요?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둘째, “성령충만을 받는 것” (The vision is to be filled with the Holy Spirit) 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에 ‘안식일’에 관한 의미에 대해 살펴보면서 <요엘서 2장 28절>말씀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에 대해 사도 베드로가 이 놀라운 현상은 무엇이고,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영적으로 밝혀준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구약의 요엘 선지자를 통해 장차 임하게 될 ‘성령의 충만한 임재’에 대한 약속이 성취된 사건이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요엘은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욜. 2:28)라고. 여기서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your young men will see visions)라는 말씀에서 “이상”에 해당하는 영어성경, <KJV>과 <NIV>에서의 단어가 ‘비젼’ (vision)이라고 번역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한가지는 하나님께서 그의 영, 성령을 만민에게 물 붓듯이 충만하게 부어 주실 때, 젊은이들은 ‘이상’ 곧 ‘비젼’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즘과 같은 교회에서조차 비젼을 사모하지 않고, 추구하지 않는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에 말씀의 빛으로 밝히고, 약속의 성령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진리의 빛으로 인도하는 비젼의 사람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 것은 심히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전에도 성령충만의 역사는 있었지만 그것은 제한적이요, 일시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순절 사건이후에는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에게 성령을 물 붓듯이 부어 주시는 은혜가 주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신뢰하고 성령충만을 사모하는 모든 그분의 자녀에게 하나님은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성령충만 받은 자에게 이 비젼을 어떻게 구체화되어 가는 것일까요? 그것은

세번째, “하나님이 주신 꿈을 꾸는 것” (The vision is to dream dreams of God) 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 그것을 꿈꾸는 것이 비젼인 것입니다. 이런 비젼을 ‘인도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최초의 근대 선교사인 <윌리엄 캐리> (William Carey)는 이렇게 잘 표현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것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들을 시도하라” (Expect great things from God, attempt great things for God)라고 말입니다. 이 <윌리엄 캐리>선교사의 평생의 좌우명은 과연 무엇이 성경이 말하는 비젼인지를 가장 웅대하고 가슴 벅차게 선언하는 비젼에 대한 구체적인 예의 하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놀라운 것들을 기대하고, 또한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들을 시도하고자 하는 열망’이 비젼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캐리선교사의 관점에서 비젼을 이해하고자 할 때 저는 지금으로부터 대략 60여년 전인 1963년 4월의 워싱턴 DC 광장에서 ‘마르틴 루터 킹’목사의 “I have a dream”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이라는 명연설에서 우리는 비젼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연설은 단순히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심각한 인종차별에 대항한 시민운동이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하나님께로부터 놀라운 것을 받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도모하는 킹목사의 꿈과 열정을 이 연설에서 분명히 확인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우리는 만족하지 않습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의로움이 힘차고 도도한 물결이 될 때까지 우리는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이 꿈은 아메리칸 드림에 깊이 뿌리내린 꿈 입니다. ~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조지아의 붉은 언덕 위에 옛 노예의 후손들과 옛 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애의 식탁에 함께 둘러 앉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의 네명의 아이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받는 그런 나라에 살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라고 그는 외쳤고 꿈꾸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킹목사 한사람의 꿈이나 미국의 흑백인종 갈등의 해소라는 차원을 넘어선 하나님께서 주신 비젼임을 저는 믿습니다. 왜냐하면 킹목사의 연설에서 보듯이 하나님은 그를 통해 아모스 선지자가 외쳤던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암. 5:24)사회를 꿈꾸게 하셨고,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모든 언덕과 산은 낮아지고 ~ 굽은 곳은 곧게 펴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 모든 사람들이 함께 그 광경을 바라보는” (사. 40:4-5) 나라를 믿음의 눈으로 꿈꾸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에서 언급하는 믿음의 사람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확인한 정의에서 볼 때, 모두 ‘비젼의 사람들’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에 기록된 대표적인 <믿음의 조상들,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의 삶>을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의 비젼’으로 부르셨던 것을 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 12:2)고 말입니다. 그 이후의 그의 남은 일생은 그 약속을 바라보며 끝까지 달려갔던 삶이었습니다. 다음으로 이삭은 뭐랄까요?! 신앙의 가정에서 태어나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신뢰하면서 온유하게 풍성한 믿음의 열매를 거둔 삶을 살았던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게 되는 사건이 <창. 26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삭이 거랄에 거했을 때,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 양과 소 떼와 종들까지 심히 많이 소유하게 되자 그곳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시기하여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 때 팠던 우물을 모두 흙으로 매워버립니다. 그러나 이삭은 그들과 다투지 않고 다른 곳에서 우물을 팠고 그들은 심통을 부리며 또 그곳을 매웠습니다. 이것을 3번씩이나 반복하고 나서 평화가 찾아옵니다. 평화가 올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블레셋 왕 아비멜렉과 그의 장군이 찾아와서 이삭과 화친을 맺자고 합니다. 왠줄 아십니까? 그 이유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창. 26:28)라고 말합니다. 비젼의 사람은 이삭처럼 온유할 수 있고, 기다림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의 입에서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는 것을 보았다’고 하는 평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약속하신 비젼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의 아들 야곱은 어떻습니까? 저는 야곱만큼 철저하게 자신의 야망과 꿈으로 뭉쳐서 태어난 사람을 잘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비젼의 사람으로 바뀌게 되었을까요? 그는 형 에서의 뒷발꿈치를 움켜잡고 태어날 만큼 집념과 야망으로 똘똘 뭉친 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보다 한수위인 외삼촌 라반을 사용하셔서 야곱을 훈련하셨습니다. 아니 하나님은 그와 싸우심으로 한가지 한가지 그의 육신적이고 세속적인 본성을 벗겨 나가셨습니다. 그것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창. 32장>에 기록된 ‘얍복 강가에서 어떤 사람과의 씨름’하는 장면입니다. 어떤 사람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이곳에서 ‘움켜잡는 야곱’에서 ‘하나님의 황태자 이스라엘’로 바꿔주신 것입니다. 바로 아집과 야망의 사람을 비젼의 사람으로 바꾸신 것입니다.

요셉은 어떨까요? 그렇습니다. 요셉은 말 그대로 ‘꿈의 사람’이였습니다. 어려서부터 여러번의 하나님이 주신 꿈을 꾸었고, 애굽의 종으로 있을 때 바로의 꿈을 해석함으로 죄수의 몸에서 일약 대제국 애굽의 총리가 되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요셉은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감으로 원한과 쓴뿌리의 한 많은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비젼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는 나중에 형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창. 45:5,8) 요셉이 어린 나이에서 부터 겪었던 그 고난과 아픔의 쓴 뿌리로 인해 좌절하거나 복수의 칼을 갈지 않고, 자기 가족과 세상을 구원하는 놀라운 비젼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심으로 그분의 뜻을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비록 굴욕적인 보디발 집의 종살이나, 비참하고 억울한 감옥살이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성령의 충만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뜻 곧 비젼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형들에 대한 복수와 마음의 상처 그리고 쓴뿌리를 모두 떠나 보낼수 있었던 이유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요셉은 실로 비젼의 사람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비젼을 소유하셨습니까? 물론 이 비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아직까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그분의 영, 성령께 순종치 않는 자에게는 이 비젼의 은혜는 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기 원하는 것은 ‘왜 예수님을 영접했음에도, 이런 약속하신 비젼의 삶을 살지 못하는 크리스챤들이 많은가?’ 하는 점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과 무관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분문말씀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고 성경은 선언합니다. 이 말씀에서 강력하게 도전하는 바는 ‘묵시가 없는 백성’ 곧 ‘하나님의 계시를, 그분의 비젼을 받지 못한 백성’은 ‘하나님의 율법인 말씀을 지키지 않는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챤과 말씀은 ‘물고기와 물’과 같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떠난 인생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찌라도, 결코 온전한 비젼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비젼은 비젼이 아닌, 단지 우리 인간의 야망이요 희망사항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크리스챤임에도 불구하고 비전의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좇는 것을 비현실적이라고 치부’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뜻은 좋을 수 있으나, 비현실적이다’고 여기는 크리스챤들이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데로 사는 것은 좋기는 하겠지만, 세상에서는 손해보고, 이용당하고, 실패하게 된다”고. 그러니까 세상사람들이 관심가지고 추구하는 가치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 더 현실적이고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룰수 있다고 말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히브리서기자는 무엇이 믿음인지를 이렇게 선언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Now faith is the substance of things hoped for, the evidence of things not seen) (히. 11:1)라고. 그렇습니다. 믿음의 눈을 가진 자만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들의 실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확신하는 증거를 붙드는 영적 능력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믿음의 눈을 열어 주셔서 세상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비젼을 소유할 수 있는 복된 여러분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그 말씀을 즐거워함으로써 성령의 충만한 은혜로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그리하여 믿음의 눈으로 약속하신 실상을 바라보고, 그 증거를 붙듦으로 이 거짓되고 헛된 세상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비젼의 사람으로 승리하며 풍성한 열매 맺는 성도 여러분 되시릴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