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mber 29, 2020

“영원한 즐거움” (The Eternal Pleasures)

Preacher:
Passage: 시편 (Psalms) 16:11
Service Type:

“영원한 즐거움”

(The Eternal Pleasures)

11-29-20

본문말씀: 시편 (Psalms) 16:11

11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You have made known to me the path of life; You will fill me with joy in You presence, with eternal pleasures at Your right hand.)

[설교 요약]

            존 파이퍼목사는 그의 책 <하나님을 기뻐하라>에서 <크리스챤 희락주의> (Christian Hedonism)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이 <크리스챤 희락주의>를 정의하면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가장 만족할 때 하나님은 최고로 영광 받으시며, 인간이 그 분을 즐거움으로 추구할 때 인간의 가장 깊고 영구적인 행복이 함께 온다”는 사상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요, 이것을 통해 하나님은 가장 영광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신앙 생활하면서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넘치는 기쁨과 즐거움을 누려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삶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How are we able to enjoy the Lord?) 그것은

첫째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에 대한 이해>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성도는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죄와 죽음에서 해방된 자라고 선언했습니다 (롬. 8:2). 여기서 ‘죄에서 해방되었다’는 뜻은 죄를 결코 짓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죄의 세력과 맞서서 이길수 있으며 죄가 통치하는 영역에서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의와 은혜의 영역으로 옮겨졌음을 뜻합니다 (롬. 5~6장). 또한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고, 성령의 증거하심으로 내가 하나님의 복된 자녀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롬. 8:14~16). 이렇듯 성도의 영광된 신분을 알수록 우리는 더욱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말씀을 통한 깨닫음>입니다. 느헤미야와 백성들이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고 난 다음 행한 <말씀운동>은 우리에게 영적 부흥이 무엇인지를 잘 설명합니다. 백성들이 수문 앞에 모인 나가운데 새벽부터 정오까지 에스라가 율법의 말씀을 읽었고, 여러 성경학자들이 백성들 가운데서 그 말씀의 의미를 풀어 해석했을 때 놀라운 영적 각성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느. 8:8~9) 말씀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은혜로 이끌어 주신 하나님을 감격하며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세번째로는, <그리스도의 기쁨>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의 <시편 16편 10절>에서 다윗은 고백합니다.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 임이니이다” (v.10) 라고.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주님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셔서 십자가의 쓴 잔을 남김없이 마시셨지만, 그의 영혼은 음부에 버려지지 않고 죽은 자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영원한 기쁨과 즐거움의 누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 성도가 누리는 하나님께 대한 기쁨과 즐거움은 그 원천이 바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기쁨인 것입니다. 그 아들 안에서 누리는 기쁨인 것입니다.

날마다 말씀을 더 깊이 깨닫아가며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기쁨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허락하신 자녀의 영광된 신분을 감사와 즐거움으로 누려가시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저는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열심을 다해 신앙생활 하고자 하는 마음자세는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크리스챤이 누구인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예수 믿고 거듭났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예수 믿고 구원받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에 대해 보다 큰 그림에서 나의 영적 신분을 더욱 이해해 나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높은 산 정상을 등정하기 위해선 눈 앞에 있는 우거진 수풀과 빽빽한 나뭇가지를 열심히 헤치고 전진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할 것은 그 산의 지형상태를 파악하고, 어느 방향 어느 길로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효율적인 방법이 될 것인지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큰 그림에서 상황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 크리스챤의 영적 신분과 존재를 이해하는 것은 그 어떤 신앙생활의 구체적인 적용보다 앞서는 본질적인 것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올해 크리스마스를 맞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에 대한 성탄절 특집 메세지를 나누면서, 그 때 구체적으로 ‘우리 크리스챤은 누구인지’에 대해 함께 살펴볼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간을 통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 성도가 누릴 가장 큰 특권이자 특징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것은 ‘기쁨과 즐거움’ 입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성도 여러분 모두 주께서 주시는 기쁨과 즐거움을 회복하고 누려 나가시길 소망합니다.

제가 언젠가 성도 여러분과 <크리스챤 희락주의> (Christian Hedonism)에 대해 함께 나눈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복음주의의 대표적인 목회자이자 신학자의 한사람인 ‘존 파이퍼’목사가 그의 책, <하나님을 기뻐하라> (Desiring God)에서 이전에 ‘베르나드 엘러’ (Vernard Eller)가 주창한 용어를 본격적으로 사용함으로서 오늘날 우리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용어입니다. 이 <크리스챤 희락주의>는 간단히 정의하면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가장 만족할 때 하나님은 최고로 영광 받으시며, 인간이 그 분을 즐거움으로 추구할 때 인간의 가장 깊고 영구적인 행복이 함께 온다”는 사상입니다.

또한 다윗은 이렇게 우리 성도들에게 권면합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시. 37:4) 우리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하나님을 기뻐함으로 내 마음의 즐거움이 충만한 이러한 삶이 얼마나 복된 성도의 삶인가 하는 것을 부인할 신도는 없다 할찌라도, 우리가 과연 이런 삶을 살고 있는지 우리 각자가 질문해 본다면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저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우리 각자는 어떻게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삶을 살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과연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삶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How are we able to enjoy the Lord?) 그것은

첫째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에 대한 이해>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당하는 현재의 고난이 아무리 심하다 할찌라도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게 될 영광스러운 미래와는 족히 비교할 수 없음을 확신 가운데서 선포했습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롬. 8:18)라고. 물론 이렇게 미래에 성도들이 누리게 될 영광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정확하게 말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더욱 확신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영적 신분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깨우쳐 주시는 확신입니다. 성령께 순종하고 그의 충만한 다스림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온전하게 깨닫게 되는 확신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의 영적 신분은 어느 정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저는 우리 크리스챤의 영적 신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정도가 얼마나 큰 것인가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성도들은 흔히 신약성경에는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의 심판과 엄격하심이 주를 이룬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구약의 스바냐 선지자는 하나님의 우리 성도들을 향한 그 사랑이 얼마나 크고 강한 것인지를 그 어떤 신약성경보다도 더욱 강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 하시리라 하리라” (습. 3:17) 하나님은 그의 자녀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고, 깊이 잠잠히 사랑하심으로 그들을 즐거워하며 심히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의 신분입니다. 이것이 또한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게 될 성도의 신분인 것입니다. 이런 나의 영적 신분을 이해하면 할수록, 나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여 주실 뿐 아니라, 말할 수 없이 존귀와 성령의 풍성함으로 나를 채워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와 영광을 올려 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둘째로, <말씀을 통한 깨닫음>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이스라엘백성들이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바벨론에게 멸망되어 70여년동안 포로생활이라는 절망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이 다시 본국으로 되돌아오게 되고 지도자 느헤미야와 함께 이스라엘백성들은 여러 악한 자들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합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를 비롯한 지도자들이 성벽을 완공하고 나서 첫번째 한 일은 모든 백성들을 수문 앞 광장에 모으고 학사 에스라에게 청하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읽게 했습니다. 새벽부터 오정까지 남녀노소 무릇 말을 알아 들을만한 회중 앞에서 에스라가 율법책을 읽었고, 예수아와 바니, 세레뱌 외에 말씀에 능한 자들을 통해 낭독하는 율법의 뜻이 무엇인지를 백성들이 깨닫도록 도왔습니다.

이 때 일어난 상황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느. 8:8~9) 라고. 왜 백성들이 다 울었을까요? 무엇보다도 자신의 죄를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감격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격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과 조상들은 모두 범죄하여 악을 행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났었는데, 하나님은 이런 그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살리시고자 징계하심으로 마침내 되돌아오게 하셨음을 말씀을 통해 깨닫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율법의 말씀 가운데 하나님의 이런 신실하신 약속이 구체적으로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살아 계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 인간을 참되게 변화시킬 수 있음을 다시한번 유대민족의 영적 부흥이라는 대사건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오직 살아 있고 유일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만이 이런 고집불통의 육신에 속한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고백하는 데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히. 4:12) 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살았고 전능한 능력으로 어떤 날센 검보다도 날까롭고 예리하게 사람의 깊은 죄악과 육신의 정욕을 찔러 쪼개고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백성이 보여준 회개와 영적 부흥의 모습은 성도 개인의 삶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교훈과 가치관에 따라 마음이 빼앗겨 죄악된 삶을 살던 주의 자녀가 말씀을 가까이하고 그 말씀을 묵상하면 할수록 그 말씀의 능력이 그의 육신에 속한 것을 찔러 쪼개고 회개와 영적 부흥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어리석고 철없던 지난 날을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 볼 때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우리는 개인이 되었건 교회 공동체가 되었건 회개와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이 놀라운 은혜를 허락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더욱 사랑하고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번째로는, <그리스도의 기쁨>입니다. [다윗의 믹담]이라는 머리말이 붙은 오늘 본문이 포함된 <시편 16편>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순금의 시’ 라고 불리어 집니다. 그 내용이 순금처럼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이 시편은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 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v.1)라고 간구함으로 다윗이 고난을 당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으나, 그가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를 통하여 기쁨의 충만과 영원한 즐거움을 누리게 됨을 고백하면서 이 노래를 마무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 시는 지난 주 <시편 69편>에서 언급했듯이, 메시야에 대한 예언의 시로도 유명합니다.

<시편 16편 10절>에 보면,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 임이니이다” (v.10)는 말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예언한 것임을 신약성경의 저자 베드로와 바울을 통해 인용하고 있습니다 (행. 2:25~33, 행. 13:34~3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심으로 십자가의 쓴 잔을 남김없이 마시는 고난의 길을 가셨지만, 그의 영혼은 음부에 버려지지 아니하고, 썩임을 당치 아니하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영원토록 영광과 즐거움으로 함께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 성도가 누리는 기쁨의 궁극적인 근거는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요, 더 정확히 말하면 그리스도의 기쁨입니다. 주께서 먼저 죄와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잠자는 자의 첫 열매가 되시고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영원토록 영광 가운데 누리시는 그분의 기쁨이 바로 성도가 누리는 영원한 기쁨의 원천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이미 잡히시기 전날 밤, 이런 충만한 자신의 기쁨을 약속하시고 그를 믿는 제자들이 받아 누릴 것을 명하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요. 15:11) 바로 주님의 새 계명, “서로 사랑”을 실천하게 됨으로 누리게 되는 기쁨인 것입니다. 이 사랑의 명령을 통해 주께서 약속하신 주님 자신의 충만한 기쁨을 우리 안에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기쁨과 즐거움의 조건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계획하고 희망하는 일들이 아무런 어려움없이 술술 잘 풀리는 것입니까? 하는 공부에 좋은 학점을 받고 탁월한 논문을 쓰는 것입니까? 더 좋은 보수를 보장받는 직장에 취업하고, 마음에 맞는 친구를 사귀고, 믿음의 동반자를 만나는 것입니까? 이 모두는 그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우리 각자의 인생에 있어서 기쁨과 즐거움으로 나아가는 징금 다리와 같이 소중한 요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이전에 우리 성도가 결코 놓쳐서는 안되는 우선적이고 본질적인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 대한 확신과 즐거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의 충만하신 은혜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여 주심을 통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를 더욱 더 만족하고 즐거움으로 추구함으로써 허락하신 영원한 즐거움을 누리고 아버지를 진실로 영화롭게 하는 복된 성도 여러분의 삶 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