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mber 22, 2020

“고난 속의 감사” (Thanksgiving through suffering)

Preacher:
Series:
Passage: 시편 (Psalms) 69:30~31
Service Type:

“고난 속의 감사”

(Thanksgiving through suffering)

11-22-20

본문 말씀: 시편 (Psalms) 69:30~31

30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I will praise Gods name in song and glorify Him with thanksgiving.)

31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This will please the Lord more than an ox, more than a bull with its horns and hoofs.)

[설교 요약]

오늘은 ‘추수감사 예배’로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올려 드리는 날입니다. 우리 모두 다윗이 고백하듯이, 수많은 고난 가운데서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그의 광대하심을 감사함으로 선포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저는 오늘 설교제목을 “고난 속의 감사”라고 잡았습니다. 왜냐하면, 고난을 통한 감사가 크리스챤의 본질적인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시. 50:23) 라고 하나님은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것보다도 우리 성도의 감사를 통해 기뻐하시고 영광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크리스챤들이 여전히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첫째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출애굽을 통해 하나님의 전능하신 기적을 수없이 경험한 이스라엘민족이 몇일이 지나지 않아 배가 고프다고 목이 마르다고 하나님을 의심하고 원망했던 것입니다. 의심하는 자는 감사할수 없습니다. 두번째로는,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 마음이 빼앗길 때 하나님께 감사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 (롬. 12:2)고 도전한 것이 바로 ‘세상의 풍조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하나님께 온 마음을 집중하라는 뜻입니다. 세번째로, ‘기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크리스챤의 심각한 문제점의 하나가 ‘영적 건망증’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그 수없이 많은 은혜를 헤아려보지 않고, 기억하지 않기에 감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왜 성도는 고난 속에서 감사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첫째,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성으로 가서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라는 명하심을 불순종하다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고통과 고난의 시간을 경험합니다. 그때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 하였삽더니 ~” (욘. 2:7a)라고. 요나는 고난의 한 가운데서 그의 심령이 낙심되고 피곤할 때에 하나님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둘째는, <고난을 통해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돌아온 탕자’ (눅. 15장)에서 교훈 하듯이, 고난은 때로 하나님의 자녀를 영적으로 철들게 하는 도구가 됩니다. 그럼으로, 고난당 하기 전에는 그릇된 죄 가운데 행하였지만, 그 고난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깨닫고 자신의 죄와 허물을 자복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번째로,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4:13) 고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이 고난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지지 않을 순금과 같은 믿음으로 우리를 성숙케 할 뿐 아니라,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바라보며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충성된 주의 제자로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의 삶 가운데 기쁘고 즐거운 순간 뿐 아니라,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순간까지도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감사의 제사를 평생을 통해 향기롭게 올려드리는 삶을 사시길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오늘은 ‘추수감사 예배’로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올려 드리는 날입니다. 일년 중 이번 주만 감사하는 날은 아니겠지만, 이 추수감사절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여 주실 뿐 아니라, 만물이 무러 익어가는 결실의 계절을 맞아 올 한해동안 우리의 실제적 삶에서도 풍성한 열매 맺게 하여 주심을 감사하는 소중한 우리 크리스챤의 절기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살아가면서 잘 의식하지 못하고 자칫 놓쳐 버리기 쉬운 수없이 많은, 그리고 깊은 하나님의 지켜 주심과 함께 하시는 은혜에 우리는 그동안 제대로 감사드렸는지를 우리 각자는 되돌아보는 시간되기 원합니다. 그리고 이런 묵상을 통해 오늘 다윗이 고백하듯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그의 광대하심을 선포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특별히 올 한 해 나의 모든 순간 순간, 기쁘고 즐거었던 순간 뿐 아니라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고난의 순간에서도 그것을 통해 나를 더욱 다듬으시고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와 영광을 올려 드리는 시간되기 원합니다.

<시편 69편>은 다윗의 시편입니다. 특별히 이 시편은 다윗이 극심한 고난 가운데 탄식함으로 지은 시임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 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까지 흘러 들어 왔나이다. 내가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 (v. 1~2)라고 다윗은 깊은 탄식 가운데 이 시를 시작합니다. <총 36절>로 구성된 <시편 69편>에서 다윗은 오늘 본문 <30절> 바로 앞인 <29절>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겪는 고난을 숨김없이 하나님께 아뢰고, 그 가운데서 건져 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의 시편69편에서 놓쳐서는 안될 중요한 특징은 이 시편이 <메시야>를 예언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메시야에 대한 여언은 시편에서만 살펴보더라도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으신 왕으로서 모든 원수를 물리치시는 영광의 메시야를 여러 시편에서 예언할 뿐 아니라, 또한 오늘 본문을 포함한 여러 시편에서 그 구원자가 받으실 ‘고난의 쓴잔’을 너무도 구체적으로, 그리고 ‘역설적’으로 잘 묘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방금 ‘역설적’이라고 말한 것은 사실 다윗이 이 시편을 지었을 당시에는 자신이 하나님께 아뢴 이 시가 천년이 지난 먼 훗날 오실 메시야에 대한 가장 구체적이고 적나라한 예언의 말씀이 될 것이라고는 그 자신조차도 전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다만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함으로 자신이 현재 당하는 심한 고난을 없이해 주시고, 그 악한 원수들로부터 구원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구할 따름인 것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가 개인적으로 겪고 있는 이 고난의 고통 한가운데서 그의 후손 가운데서 이 땅에 오실 기름부음 받은 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성도는 동일하게 우리 각자가 겪는 고난을 통하여 풍성한 열매를 그리스도와 함께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 도리어 ‘새 노래로 찬송하고 하나님을 광대하시다’라고 감사를 올려 드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제목을 “고난 속의 감사”라고 잡았습니다. 왜냐하면, 고난을 통한 진정한 감사가 우리 크리스챤의 본질적인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있어서 풍성한 감사의 열매로 하나님께 드리는 날이 바로 ‘추수감사절’ 입니다. 저는 그동안 몇번의 설교를 통해 그 어떤 값진 제물이나 희생의 제물보다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사는 바로 ‘감사로 드리는 제사’임을 강조 드린 바 있습니다. <시편 50편>에서 ‘아삽’은 이렇게 성령의 충만함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중심의 제사가 과연 어떤 것인지를 잘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시. 50:23)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감사는 그 어떤 것보다도 크리스챤의 내적 상태, 즉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기준이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고, 교회를 섬기고, 선교와 봉사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은 중심으로 드리는 감사의 예배를 기뻐하심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감사는 그 어떤 것 보다도 하나님을 향한 나의 믿음의 상태를 밖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묵상하고 고민해 보아야 하는 것은 그렇다면 <고난과 감사>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과연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있어서 ‘고난’ 과 ‘감사’는 어떤 관계가 있다고 생각됩니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고난은 크리스챤들에게 있어서는 “진정한 영적 성숙과 하늘의 유업을 누려 나가게 하는 토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저는 잘 압니다. 우리 모두는 육신의 몸을 입고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구원받은 크리스챤이 되었다고 해서 본능적으로 고난과 핍박을 즐거워할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고난에 대한 우리 크리스챤의 무의식적이고 본능적인 반응은 불평일 수 있고, 그것을 회피하고 싶은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 크리스챤이 고난을 대하는 태도의 전부가 아님을 저는 감사드립니다. 고난을 대하는 더 성숙되고 소중한 태도가 있는 것입니다. 그 복된 태도의 핵심은 ‘감사’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우리의 감사로 가로 막는지?> 하는 것과 <어떻게 이 고난이 진정한 감사로 이어지는지?>에 대해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먼저 성도 여러분과 함께 무엇이 하나님을 향한 감사를 가로막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그것은, 첫째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을 의심하기 때문에 감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즘 집사람과 저는 함께 차를 타고 가는 시간을 활용하여 아침에 <드라마 바이블>이라는 ‘오디오 성경’을 듣고 있는데 매우 유익한 성경듣기 프로그램이라고 생각됩니다. 얼마전에 벌써 3번째로 창세기 듣기를 다시 시작했는데, ‘출애굽기’말씀을 집사람과 같이 듣다가 다시한번 이스라엘민족의 그 불평 불만하고 감사하지 못하는 뻔뻔스러움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스라엘민족은 몇 년 전도 아니고, 몇 십년 전은 더더욱 아니고, 불과 1달 전에 성경의 수많은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애굽의 바로 왕에게 행하신 10가지 재앙과 홍해를 가르쳐서 100만이 넘는 모든 이스라엘민족이 한사람도 빠짐없이 홍해 바닥을 마른 땅으로 건너게 하시고, 그들을 바짝 뒷 따르던 바로의 정예 마차부대는 물 속에 수장시킨 사건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신 광야에서 배가 고프니까 또 다시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먹던 고기와 떡이 먹고 싶다고 모세를 원망했고 (출. 16장), 또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마실 물이 없어지자 또 다시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출. 17장). 모세를 원망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원망했다는 뜻입니다. 이 불평과 원망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그것은 이 백성들이 출애굽을 통하여 놀라운 하나님의 선하심과 권능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조그만 어려움과 고난이 찾아오면 또 다시 하나님을 의심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굶겨 죽이시겠습니까? 목말라 죽게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의 자녀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의심하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말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물결 같으니” (약. 1:6)라고. 의심하는 자는 흔들리는 바다물결과 같고, 이런 자는 ‘두마음을 품은 자’ (약. 1:8) 입니다.

그리고 성도가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가로막는 두번째로는,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세상에 마음이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감사에 대해 살펴보고 있는 점은 바로 우리 ‘크리스챤’에 대한 것입니다.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 대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사실 자체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향기로운 제사가 아님을 우리는 로마서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롬. 12:1)고 성도들에게 도전하고 나서 바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 (롬. 12:2)라고 그들을 교훈하는 것을 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 산제사로 드리는 삶입니다. 여기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말은 ‘이 시대의 풍조’ 혹은 ‘이 시대의 가치관’을 따르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곧 이 세상에 마음이 빼앗기지 않는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세상에 마음이 빼앗긴 자들은 결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으로 인해 그들의 영적 눈이 어두워졌고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정욕의 눈만 밝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번째로, ‘기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라는 찬송가를 불렀는데, 그 가사 후렴에서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고 부른 의미가 무엇일까요? “받은 복을 세어 본다”는 것은 ‘받은 복을 기억한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저를 포함한 오늘날 우리 크리스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받고 싶은 복을 구하기는 잘 하는데 이미 받은 복을 세어보고 기억하고 그것을 감사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이미 받은 복은 당연한 것이고, 이미 받았으니까 관심도 없는 것입니까? 우리 성도가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감사할 은혜를 받지 못한 것이 아니라, 기억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동안 받은 그 수많은 복들을 세어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에게 더욱 감사할 은혜를 넘치게 부어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저는 믿습니다.

이제 그렇다면, 왜 성도는 고난 속에서 감사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것은 첫째,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요나는 하나님께서 큰 성 니느웨로 가서 심판과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라는 명하심을 불순종하고, 반대방향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가다가 결국 큰 물고기 뱃속에서 고통과 고난의 시간을 경험합니다. 그 가운데 요나는 이렇게 하나님께 고백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 (욘. 2:7a)라고.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요나의 고백은, ‘여호와를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언제요? 그것은 그가 ‘속에서 피곤할 때’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깊은 바다에 던져지고 큰 물이 그를 삼키는 고난과 고통으로 인하여 그의 마음이 심히 두려워하고 마음이 녹아 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그의 자녀를 고난을 통해 다루시는 핵심적인 방법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삶 가운데 때로 어려움과 고난의 순간이 찾아올 때 무엇을 생각합니까? 이 때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 분을 신뢰하고 그 분께로 나아가는 기회로 삼으십니까?

둘째는, <고난을 통해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됩니다. 성경에서 가장 감동적인 스토리의 하나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돌아온 탕자’ 이야기일 것입니다 (눅. 15장). 이 스토리의 핵심은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집 나가서 허랑방탕하게 다 쓰고 알거지가 된 둘째 아들이 가장 힘든 인생의 밑바닥에서 심한 고생 가운데 비로소 아버지의 돌보심과 사랑이 얼마나 크고 축복된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 고난을 통하여 철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비로소 아버지가 누구신지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 119:67,71) 라고. 거듭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에게 있어서, 고난은 자신의 죄와 허물을 깨닫고 하나님의 선하신 율례의 말씀을 더욱 배워 나가게 되는 통로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 고난은 우리 성도에게 있어서 진실로 유익한 것입니다.

마지막 세번째로,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흩어져 있는 소아시아의 여러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그들이 겪는 불과 같은 시련에 대해 이상한 일 당하는 것처럼 여기지 말라고 조언하고 나서 (벧전. 4:12), 이렇게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4:13) 이 말은 만약 우리 성도가 받는 고난이 단순히 자신의 죄와 허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겪는 의로운 고난이라면, 이 고난을 통해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영광을 누리게 됨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 고난 때문에 슬퍼하거나 좌절할 것이 아니라, 도리어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왜냐하면, 이 고난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지지 않을 순금과 같은 믿음으로 우리를 성숙케 할 뿐 아니라,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바라보며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충성된 주의 제자로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고 안타까운 사람은 ‘고생은 고생데로 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다’라는 것입니다. 과연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만약 고난이라는 고통의 골짜기를 지나며 그가 하나님의 사랑과 법을 깨닫고 그 분께로 되돌아 갈 수만 있다면 그 고난은 재앙도 불행도 아니요 도리어 진정한 영적 축복의 통로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은 자신에게 닥친 극심한 고난, 곧 깊은 수렁에 빠져 자신의 영혼까지 깊이 탄식하는 큰 고통을 토로했지만, 놀랍게도 그 고난 가운데서 새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고 감사의 제사를 올려 드리며 찬양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그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생각하고 자신의 허물을 깨닫고 그의 선하신 은혜를 더욱 구하며 감사함으로 기름진 황소의 제사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더욱 기뻐하실 산제사의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이런 입술과 영혼의 감사의 제사를 추수감사절기 한번 뿐 아니라, 여러분들의 평생을 통해 올려 드리는 주의 자녀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