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mber 15, 2020

“진정한 전투” (The True Battle)

Preacher:
Series:
Passage: 고린도후서 (2 Corinthians) 4:6, 17~18
Service Type:

“진정한 전투”

(The true battle)

11-15-20

본문말씀: 고린도후서 (2 Corinthians) 4:6,17~18

6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For God, who said, “Let light shine out of darkness,” made His light shine in our hearts to give us the light of the knowledge of the glory of God in the face of Christ.)

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For our light and momentary troubles are achieving for us an eternal glory that far outweighs them all.)

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 이니라 (So we fix our eyes not on what is seen, but on what is unseen. For what is seen is temporary, but what is unseen is eternal.)

[설교 요약]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의 영원하신 영광을 바라보며 진정한 영적 싸움을 싸워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사도는 <고린도후서 4장>을 시작하면서, “이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v.1) 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이 직분’은 바로 <새 언약의 일군> (고후. 3:6)이라는 직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직분을 입은 자가 어떤 고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그의 마음에 비췰 때 (6절), 그는 그 영원한 영광을 점점 더 확신하고 소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어떤 역경도 그를 낙심 시킬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게 될 때 어떤 변화를 우리 성도들이 누리게 되는 것일까요? 과연 무엇이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게 된 성도의 변화된 삶일까요?” (What are the Christians lives to be changed through awaking the glory of God?)

첫째, “내가 질그릇임을 깨닫”는 삶입니다 (It is the life to be recognized myself as a jar of clay): 사도는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 (v.7)고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과 같은 존재임을 그 빛을 통해 깨닫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연약한 질그릇을 통해 강하게 역사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후. 12:9).

둘째, “고난의 유익을 경험”하는 삶입니다 (It is the life to enjoy the benefit of suffering): 계속해서 이어지는 <8~16절>까지 바울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복음의 일군의 삶이 무엇인지를 간증합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 (v. 8~10). 놀라운 것은 그 어떤 환난과 핍박이 그를 좌절시키지 못하고, 도리어 그 환경들이 그를 더욱 단련시키는 도구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셋째, “영원한 것을 소망”하는 삶입니다 (It is the life to hope for eternity): 로이드존스 목사는 진정한 크리스챤의 <시금석>(the acid test)은 ‘정통교리’ (orthodoxy), ‘도덕성’ (morality), ‘경험’ (experience)인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모두를 아우르는 ‘영광의 소망’ (the hope of glory)이라고 설교 했습니다. 우리 인생의 최악의 상황 가운데서도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 곧 천국을 향한 소망인 것입니다.

이 선하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으로 말미암아 성령과 함께 육신과 세상 악한 영들과 힘써 싸우며 달려갈 길을 온전히 달려나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가을 학기가 시작되었는가 싶더니 벌써 이번학기도 얼마를 남겨두고 있지 않습니다. 한해의 마무리를 알리는 추수감사절이 한주 앞으로 성큼 다가왔고, 그 말은 성탄절과 연말 연시도 머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제 우리 각자는 역사에 남을 코로나, 물론 앞으로도 당분간 지속되겠지만, 이 코로나 정국과 크고 작은 한 해의 다사다난 했던 삶을 마무리하면서 우리 자신을 점검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눈으로 얼마만큼 잘 살았느냐 못살았느냐가 아니라, ‘믿음으로 살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마치 달리기 선수가 열심히 빨리 달리는 것에만 정신을 쏟다가 달려야 할 트랙을 벗어나 위치를 이탈할 때, 아무리 잘 달렸더라도 실격처리 되듯이, 우리 신앙인의 삶은 결국 ‘믿음으로 살았느냐?’로 하나님 앞에서 평가될 것입니다. 저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말씀을 통해 올 한 해를 마무리해 가면서 현재까지의 우리의 달려온 삶을 점검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영광을 바라보며 진정한 영적 싸움을 싸워 승리하는 성도 되시길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이 포함된 <고린도후서>의 주제는 “사도의 직분”에 대한 자기 변호와 바울 자신의 개인의 간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 사도의 다른 서신서에 비해 신학적이고 조직적이라기 보다는 자기 자신의 보다 경험적이고 주관적인 내용이 가장 풍부히 다뤄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사도의 <변증적 신학>의 유감없이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러한 논증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영광스러움과 이 사역을 통해서 누리게 될 영원한 승리의 면류관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고후. 4장>을 통해서 사도 바울 한 사람 뿐 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어떻게 낙심하지 않고 소망 가운데 생명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지를 사도 바울은 잘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고후. 4장>을 시작하면서 “이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v.1) 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이 직분” (this ministry)는 무엇을 뜻할까요? 그것은 그 앞장 <고후. 3장>에서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 (고후. 3:6)라고 함으로, 주께서 사도를 포함한 우리 크리스챤을 <새 언약의 일군> (ministers of a new covenanat)으로 세우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그 분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다는 것은 그 분으로부터 새로운 직분, 즉 ‘새 언약의 일군’이라는 직분을 부여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제가 한가지 집고 넘어가기 원하는 것은 여러분과 제가 예수님을 믿어 그의 제자가 되고, ‘새 언약의 일군’이라는 복된 직분을 주께로 받았다고 해서 과연 그 직분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 믿어 거듭나게 된 성도의 신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하는 것과 그 성도가 현재 어느 만큼의 영적 성장 (=성화)을 이루고 있는가 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하는 점을 그동안 로마서 분문설교를 통해 제가 강조 드렸던 것과 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바울은 <고후. 4장>에서 자신과 충성된 그의 동역자들이 예수 믿고 신분만 하나님의 자녀요, 새 언약의 일군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들의 영적 성숙이 그 신분과 직분에 합당하게 자라나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도와 그의 동역자들의 이런 영적 성숙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밝혀 주는 의미있는 말씀이 <고후. 4:6>의 말씀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v.6) 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6절>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복음의 광채>에 의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와 생명의 광채가 우리 영혼 (=마음)에 비췰 때 우리는 비로소 그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깨닫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시작하면서 예수님에 대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 고 증거한 정확한 뜻입니다. 그리고 매튜헨리는 <6절>을 주석하면서 [눈이 하늘에 있는 태양을 보는 것은 기쁜 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이 마음에 비췰 때 그것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욱 기쁜 일이다]라고 복음의 빛에 비추임 바 된 자의 놀라운 변화를 토로합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진리의 성령님께서 우리의 어두운 눈을 밝혀 비춰 주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영적 성숙의 삶으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6절>의 깨닫음을 통해 사도는 <고후. 4장>의 끝 절, 곧 오늘 본문말씀에 이르기까지 자신 (그리고 동역자들)이 어떻게 그 심한 핍박과 고난 가운데서도 낙심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의의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온전히 다 달려가고 있는지를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음으로 말미암아 어떠한 고난도 그를 꺼꾸러 트릴 수 없고, 좌절 시킬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았기에 현재 당하는 격심한 환난도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 (=가벼는 것)’이라고 그는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좀더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아 알게 됨으로써 어떤 변화를 우리 성도들이 누리게 되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과연 무엇이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게 된 성도의 변화된 삶일까요?” (What are the Christians lives to be changed through awaking the glory of God?)

첫째, “내가 질그릇임을 깨닫”는 삶입니다 (It is the life to be recognized myself as a jar of clay): 한가지 주목할 사실은 사도가 <6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빛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게 되었음을 간증하고 나서, 갑자기 <7절>에서 이렇게 고백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v.7)고 말입니다. 복음의 사역자가 된 사도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우리가 잘 아는데로 결코 자신들을 자랑하거나 전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과 같은 존재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언젠가 죽고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임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오직 복음의 주인공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파했으며, 질그릇과 같은 자신 가운데 거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놀라운 복음의 역사를 감당할 수 있음을 경험으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또한 고린도 성도들에게 보낸 같은 편지,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우리가 잘 기억하는 주님께 3번씩 간절히 자신의 육신의 가시를 제하여 주시기를 기도했음을 회상합니다. 그리고 그때 주님께로 부터 받은 응답은 이것이었습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 (고후. 12:9a) 놀랍게도 주님은 바울의 질그릇과 같이 연약할 뿐 아니라 가시로 인하여 힘들어하는 육신을 통하여 도리어 온전하여 지는 역사하심을, 강하게 하여 주시는 능력을 베푸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때 바울이 깨닫은 것은 이것입니다.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고후. 12:9b). 바울이 깨닫은 것은 자신이 질그릇처럼 연약한 존재임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그의 속에서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를 더욱 신뢰하게 되고 이를 통해 강하게 역사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충만하게 깨닫고 경험했던 것입니다. 자신이 <약할 그때가 곧 강한 때> (고후. 12:10)임을 깨닫은 것입니다.

둘째, “고난의 유익을 경험”하는 삶입니다 (It is the life to enjoy the benefit of suffering): 사도 바울이 이와 같이 질그릇과 같은 자신과 동역자들의 삶 속에서 보배와 같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가 경험한 역설적인 삶을 그는 이어지는 <8~16절>까지 드라마틱하게 간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 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v. 8~10). 바울은 그의 독특한 <역설적 화법>을 통해 어떻게 복음의 사역자들이 사방으로부터 우겨쌈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싸이지 아니하고, 억울하고 답답한 일을 당했지만 낙심하지 아니하고, 극심한 핍박 가운데서도 좌절하지 아니할 수 있는지를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사도가 우리 성도들을 향해 진심으로 간증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고난과 핍박은 결코 우리를 좌절시킬 수도 없고 실패시킬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고난과 핍박은 나를 정금과 같이 단련시키는 용광로가 되어, 질그릇과 같은 연약한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의 심히 큰 것을 행하는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의 간증의 핵심인 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며 욥이 고백한 것과 같이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욥. 23:10)고 고백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길 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 “영원한 것을 소망”하는 삶입니다 (It is the life to hope for eternity): 영국의 명 설교자,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는 오늘 <고린도후서 4장>의 본문말씀을 설교하면서 우리 크리스챤의 <신앙고백의 시금석>이란 의미의 “the acid test”를 제시했습니다. 이 테스트는 첫째, ‘정통교리의 테스트’ (the test of orthodoxy)로서 올바른 성경교리에 입각한 신앙이 형성되는 것으로 바른 신앙에 매우 중요한 출발일 것입니다. 둘째는 ‘도덕적 테스트’ (the morality test)로서 바리새인에게서 볼 수 있듯이 교리적으로는 흠이 없는데 도덕적으로 겉과 속이 다른 문제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도덕적으로는 높은 수준에 다다른 불신자를 볼 때 이것이 전부는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 ‘경험적 테스트’ (the test of experience)인데, 지식적으로가 아니라 삶으로 경험되는 신앙이 될 때 진정한 크리스챤의 신앙으로 증명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로이드존스 목사는 ‘크리스챤 사이언스’라는 기독교 이단에 빠져든 한 여인의 경우를 설명하면서, 그녀는 자기 나름의 놀라운 신앙적 경험을 통해 자기의 전 생애가 바꿨다고 확신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경험이 가지는 잘못된 확신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정한 크리스챤의 신앙고백이 참됨을 가름하는 시금석일까요? 그는 앞에서 언급한 ‘정통교리’ ‘도덕성’ ‘경험’ 이 모두는 핵심적인 크리스챤 신앙의 요소 이지만, 이 모두를 아우르는 마지막 네번째로서 <영광의 소망> (the hope of glory>을 결론적으로 제시합니다. (예화/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군에 의해 융단폭격을 받던 런던시민/ 그 폭탄 중 하나가 내 머리에 떨어진다면 죽게 되는 최악의 상황) 그는 자신이 2차세계대전 당시 경험한 삶과 죽음의 절대절명의 순간을 회상하며, “참된 크리스챤의 시금석은 최악의 환경, 바로 죽음의 귀로 앞에서의  가운데서의 그 사람의 반응입니다”라고 지적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v.17~18)라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는 지금 공평한 저울을 가지고 와서 양쪽 끝에 각각 하나씩을 매어 달고 있습니다. 한쪽 끝에는 현재 그가 받고 있는 고난과 핍박입니다. 여러분은 사도가 받았던 그 환난이 어느 정도였다고 여겨집니까? 놀라운 것은 그가 “잠시 받는 가벼운 환난”이라고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그가 겪었던 고난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는 심한 고통을 겪었고, 심지어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으로 인해 “~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고후. 1:8,9a)라고 그는 고백했습니다.

이 믿음의 싸움은 결코 쉬운 싸움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난을 통해 그가 깨닫은 결론은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고후. 1:9b)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쪽 끝에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영광과 은혜>가 있습니다. 이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때, 현재 당하는 어떤 고난도 미래에 우리가 누리게 될 영원한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와 함께 할 영광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미래의 영광은 심히 무겁고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성도가 싸워야 할 싸움에서 반드시 놓치지 않고 붙들어야 하는 마지막 신앙고백이라는 것입니다. 이 치열한 영적 전투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며 성령과 함께 힘써 싸우며 달려갈 길을 온전히 달려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