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 5, 2020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Being crucified with Him)

Preacher:
Passage: 로마서 (Romans) 6:6~7
Service Type: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Being crucified with Him)

4-5-20

본문말씀: 로마서 (Romans) 6:6~7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For we know that our old self was crucified with Him so that the body of sin might be done away with, that we should no longer be slaves to sin -)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because anyone who has died has been freed from sin.)

 

[설교 요약]

            저는 2주에 걸쳐 ‘부활절 메시지’를 나누기 원합니다. 이번 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에 대해, 그리고 다음 주는 주님의 부활에 대해 그 의미를 생각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이 포함된 <로마서 6장>에서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산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게 될 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함께 죽고 그분의 부활과 함께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것’ 입니다. 이것이 영적 실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단순히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게 하고자’ (v.6) 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사도의 영적 논리는 단순히 ‘우리 크리스챤의 신분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고 말하지 않고, 우리가 신분에 걸맞게 ‘죄에서 벗어난 의로운 삶을 누리게 되었다’ (v.7) 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6장을 마감하며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롬.6:22) 고 사도가 주장하는 이유입니다.

주님은 “~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16:24) 라고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도전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의 십자가를 날마다 깨닫아가는 중요한 삶으로 인도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것일까요?” (How can we follow Christ with taking up our crosses?) 그것은,

첫째, ‘십자가를 묵상해야’ 합니다 (We should meditate the Cross): 십자가를 묵상한다는 것은 어쩌다 한번 떠오르면 얼핏 생각해 본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 2:2)고 고백하는 바울의 결심 가운데 어떻게 십자가를 묵상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둘째, ‘십자가가 말하게 해야’ 합니다 (We should let the Cross speak to me): 히브리서 기자는 “새 언약의 중보 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히. 12:24) 라고 십자가의 피가 말한다고 증언합니다. 그 피는 죄가 얼마나 사악한지, 그 죄가 하나님을 거역했음을,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죽으셨음을 말씀하고, 내가 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날마다 좇고 있는지 묻고 있습니다.

셋째, ‘십자가에서 만나야’ 합니다 (We should meet somethings on the Cross): 먼저는 <내 죄와 허물>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만나야 합니다. 또한 <나의 이웃>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 속에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가운데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음으로 주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최근 들어 코로나 사태로 인해 미국 뿐 아니라 온 세계가 비상 정국으로 빠져 있는 사이에 어느덧 봄의 향기가 무르익은 계절에 다다랐습니다. 그리고 1주일 후면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신 ‘부활절’ (Easter) 입니다. 저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이번 주와 다음 주 2주에 걸쳐 ‘부활절 메시지’를 나누기 원합니다. 이번 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에 대해, 그리고 다음 주는 주님의 부활에 대해 그 의미를 생각하고자 합니다. 우리 기독교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참된 크리스챤의 믿음과 능력의 삶을 누리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오늘의 주제는 ‘십자가’ 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십자가입니까? 십자가는 고대 페르시아와 로마제국 시대에 주로 국가에 심각한 반역행위나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사형수를 처형하는 틀 이였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더욱이 이 ‘십자가’라는 사형 틀은 사형수의 손과 발목에 못을 박아 오랜시간 동안 피를 흘리며 서서히 죽게 할 뿐 아니라, 십자가 형틀에서 못박힌 몸이 그 무게로 인하여 아래로 쳐지게 될때 사형수는 심한 고통으로 인한 근육경련과 질식현상을 일으키며 죽어감으로서 인류가 만든 가장 잔인하고 저주스러운 사형틀이라고 역사학자들은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단도직입적으로 ‘왜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셨는가?’하고 질문해 봄으로서 오늘 말씀을 시작하기 원합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 크리스챤이 주께서 탄생하신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 주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이렇게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 “~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10:10b) 그를 믿고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생명을 주실 뿐 아니라, 더 풍성한 삶을 주시고자 오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주님의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서 어떻게 그의 양들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 10:11) 라고. 삯군과 같이 늑대나 악한 짐승이 나타나면 양들을 버려 두고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선한 목자로서 주님은 그의 양들에게 생명을 주고자 목숨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예수님은 선한 목자와 같이 자기 목숨을 버려 그를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고자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살리시고자’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십자가로 모아지는 삶의 목적에 대해 침례 요한은 이렇게 짧고 간명하게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29)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 그 성삼위의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어린 양’ (The Lamb of God)이 되어 우리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 위에서 화목제물 (the propitiation) 되어 살을 찢으시고 피를 흘려 죽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이 포함된 <로마서 6장>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산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논리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먼저 <로마서 1장>에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7) 라고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로마서의 주제에 대해서 선언한 다음, <롬. 2~3장>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음)~” (롬.3:10) 이라고 시편 말씀을 인용하여 우리 모든 인간의 죄악된 영적 상태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롬. 4장>에서 일한 것이 없음에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함 받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믿음의 본보기>로 소개하고서, <롬. 5장>에서 아브라함과 같이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은 사람의 행복을 소개하면서, 이 의인의 삶은 아담에서 그리스도로 우리 인간의 대표성이 바뀜을 통해 가능함을 후반부에서 설명합니다.

그리고 나서, <롬. 6장>에서 아담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간의 대표성이 바뀐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영적으로 상세하게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흔히 ‘내가 아담의 원죄를 유전 받았다’고 말할 때,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아담의 원죄가 육신의 부모로부터 나에게 유전되어질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아담의 대표성>에서 비롯되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아담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첫 인간일 뿐 아니라 완전한 인간으로서 그를 통해 태어날 모든 후손을 대표하고 그들에게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그럼으로 아담의 범죄는 아담 한사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형질을 이어받은 모든 후손에게 죄를 유전 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내가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게 되었다’는 뜻은 ‘나는 더 이상 아담이 나를 대표하는 존재가 아니다는 뜻이요, 아담으로부터 이어진 죄의 유전에서 자유롭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자유하게 된 것일까요? 그것은 그리스도가 나를 대표하시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접함으로 그분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고, 그분의 의를 유전 받게 된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대해서 좀더 본질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롬. 6장>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예수 믿어 의롭게 되었다’는 교리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를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사건과의 관계를 통해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더 이상 아담에 속하지 않은 새로운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v.6) 때문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담에 속하는 나의 옛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 위에서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생명으로 말입니다. 그러므로 <v.8>에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을 통해 우리 또한 그와 함께 살게 됨을 우리는 믿어 압니다. 그리고 저는 그동안 여러 번의 설교를 통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그분과 함께 살아난다는 바울의 진술은 하나의 비유나 상징이 아니요, 매우 분명한 진실이요 우리 모든 크리스챤이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의 영적 존재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시 한번 확인하기 원하는 ‘왜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오늘 본문은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주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것은 그를 믿는 자들 또한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힘으로 죄의 몸이 멸하여 죄에게 종노릇하는 데서 해방되려 함이라는 것입니다. 죄에게서 해방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v.7). 내가 언제든지 죽으면 천국으로 갈수 있는 ‘천국티켓’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주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자신을 십자가 위에서 유월절 어린 양과 같이 하나님께 대속물로 드려 우리를 살리려 하심인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살게 되었다는 것은 ‘더 이상 죄에 종으로 끌려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죄에게서 해방되어 풍성하게 살아가는 삶’을 주시고자 자신을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나를 구원하심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옛사람의 본성을 따라 죄를 사랑한다면 죄에 이끌려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 자신을 심각하게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주님의 십자가를 이해하고 있습니까? 주께서 왜 십자가에 죽으셨는지를 이해하고 있습니까? 주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승리와 영광을 이해합니까? 만약 여러분과 제가 참된 승리와 영광된 주님의 십자가의 비밀을 날마다 깨닫아 나가고 누리기 원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이 도전의 말씀에 분명히 반응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16:24) 라고.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것일까요?” (How can we follow Christ with taking up our crosses?) 그것은,

첫째, ‘십자가를 묵상해야’ 합니다 (We should meditate the Cross): 십자가를 묵상한다는 것은 어쩌다 한번 떠오르면 얼핏 생각해 본다는 뜻이 아닙니다. 의식적으로 매우 의도적으로 나의 온 정신과 마음을 집중시켜 그 십자가를 기억하고 마음에 새긴다는 뜻입니다. 이런 삶의 자세를 가장 잘 표현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 6:14) 라고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있지 않습니까? 더 나아가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 2:2)고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바울의 고백에서 이해하게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내가 그분을 영접할 때 나를 구원받게 하는 천국티켓 역할로 끝나는 것도 아니고, 어쩌다 생각나면 한번쯤 생각하는 걸로 만족될 그런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한사람 뿐 아니라, 우리 성도의 유일한 자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이고, 이 십자가는 나의 평생을 통해 더욱 더 알아 나가기를 추구하고 깨닫고자 작정해야 할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십자가가 말하게 해야’ 합니다 (We should let the Cross speak to me): 십자가가 무슨 말을 할까요?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새 언약의 중보 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히. 12:24) 여기서 기자는 십자가의 피가 말한다고 증언합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피가 선언하고, 십자가의 보혈이 설교한다는 말입니다. 이 십자가를 바라보면 볼수록, 그것을 묵상하면 할수록 십자가는 내가 전에 결코 깨닫지 못했던 복음의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끝임없이 말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라 말씀합니까? 죄가 얼마나 악한 것인지, 이 죄가 하나님을 불신하고 거역했는지를 말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 하시는지, 그로 말미암아 그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독생자를 이 땅에 화목제목로 보내셨음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의 십자가는 우리 각자에게 도전가운데 말씀하심을 믿습니다. “너는 날마다 너 자신을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좇고 있느냐?”고 말입니다.

셋째, ‘십자가에서 만나야’ 합니다 (We should meet somethings on the Cross): 끝으로 우리가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의 십자가 위에서 만나는 것을 뜻할 것입니다. 무엇을 만날까요? 무엇보다도 먼저, <내 죄와 허물>을 만나야 합니다. 내가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 것은 영원토록 감사할 찬양의 조건이지만, 영적으로 태어났다면 계속해서 성장하는 것은 언제나 그의 자녀된 자들에게 기대하시고 명령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임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나의 영적 성장을 가로막는 것은 육신에 속한 죄입니다. 날마다 육신 가운데 거하는 죄를 부인하고 하나님께 죄를 회개함으로 죄와 싸워 나가야 합니다. 이 치열한 영적 싸움이 벌어지는 현장이 십자가입니다. 그 다음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만나야 합니다. “자기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내어 주신 하나님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다른 모든 것도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시지 않겠습니까?” (롬. 8:32/ 현대인의 성경) 라고 바울은 우리에게 반문합니다. 십자가는 그의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의 바다로 인도하는 곳 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을 만나십니까? 그리고 <나의 이웃>을 만나야 합니다. 한 율법학자가 주님께 “누가 내 이웃입니까?” (눅. 10:29)라고 질문했을 때 주님은 ‘강도당한 자를 도와주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스토리로 대답하셨습니다. 누가 여러분의 이웃입니까? 과연 누가 강도당한 자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한주후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와 사망을 이기시고 다시 사신 부활절입니다. 이 기쁘고 승리에 찬 부활절을 맞이하면서 우리 가운데 한명도 죄의 권세에 종노릇하고, 실패의식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이 없기를 소망합니다. 이것은 나의 의지와 능력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통하여 가능합니다. 내 속에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가운데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날마다 십자가를 묵상하며, 주의 십자가가 말하게 하고, 십자가에서 내 죄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만나고 나의 이웃을 발견해 나감으로서 가능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남은 평생동안 오직 십자가를 자랑하며,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으로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