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ober 6, 2019

“예정과 자유의지” (Predestination and Free Will)

Preacher:
Series:
Passage: 에베소서 (Ephesians) 1:4,5
Service Type:

“예정과 자유의지”

(Predestination and Free Wil)

10-6-19

본문말씀: 에베소서 (Ephesians) 1:4,5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For He chose us in Him before the creation of the world to be holy and blameless in His sight. In love)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He predestined us to be adopted as His sons through Jesus Christ, in accordance with His pleasure and will -)

 

[설교 요약]

            오늘 저의 메세지에서 주제는 성경에서 밝히고 있는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어떻게 조화 시킬것인가? 하는 것 입니다. 특별히 우리 인간의 구원을 어떻게 이해 할것인가? 하는 것을 칼빈과 알미니우스는 신학적으로 설명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예정’과 ‘자유의지’를 살펴봄에 있어서 양쪽 모두에서 마주치게 되는 주요쟁점의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악의 문제’ 입니다. 이런 죄의 문제는 20세기에 C.S. 루이스에 의해 다시한번 진지하게 고민되어졌습니다. 그의 책 <순전한 기독교>에서 C.S 루이스는 자유의지를 ‘하나님께서 가장 고등한 피조물, 바로 인간에게 주셔서 사랑과 즐거움 가운데 자발적으로 자신과 연합하고, 더 나아가서 이웃과 연합 할수 있는 선택의 능력’ 이라고 설득력있게 정의 했습니다.

여기서 또한가지 자유의지에 따른 이슈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첫인간 부부가 자유의지를 잘못사용할줄 모르셨는가? 입니다. 물론 전지하신 하나님은 그것을 아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할줄 아시면서도 그것을 허락하신것 일까요?

왜냐하면, 이 자유의지를 소유한 그의 피조물이 아니고서는 하나님과 진정한 영적 교제는 불가능하기 때문일 것 입니다. 이것을 아셨기에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시기도 전에, 아니 천지가 창조되기도 전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자녀를 택하여 예정하셨다고 사도바울은 구원의 예정하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존 웨슬리>는 “구원은 100% 하나님의 예정하심이요, 100% 인간의 행위”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구원이 나의 자유의지로 선택되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 (엡.2:8)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통해 허락하신 구원을 열매 맺어야 하는 것 입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빌립보성도들을 향해 “ ~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2:12)고 격려하고 도전한 뜻일 것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자발적 결단을 통해 드림으로서 철든 자녀의 풍성한 열매맺는 삶을 사시는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 합니다.

 

[설교 전문]

            오늘 설교를 통해 성도들의 믿음에 있어서 중요한 구원에 관한 성경적 가르침을 더 깊이 이해하는 개기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뿐 아니라 그의 선하신 뜻데로 우리를 그의 자녀 삼으시는 구원의 은혜와 비밀을 우리 인간의 머리로 온전히 다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 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구원 받은 자가 그 믿음 위에 견고히 서도록 필요한 만큼 하나님은 그 구원의 뜻과 비밀을 밝혀 드러내보여 주심을 보게 됩니다. 바로 성도를 구원의 확신 가운데 죄와 싸워 이겨 나도록 성장시키고자 하심 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깨닫게 되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통해 더욱 더 죄와 악한 영을 이기고 승리하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날마다 성숙 되어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기대 합니다.

오늘 말씀을 시작함에 있어서 먼저 한가지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사실은 이것 입니다. 그것은 오늘 메세지의 주제가 되는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인간의 자유의지’ 사이의 떨어진 간격을 완전히 연결 (=조화) 시킨 어떠한 신학과 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입니다. 다시말해, 신구약 성경 전체를 통해 분명히 드러난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그리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완전히 조화 시킬 교리가 없다는 것은 바로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구원의 역사를 우리의 머리로 다 이해할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 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 인간의 구원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의 신비’나 ‘우주의 원리’를 이해할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 일것 입니다. 이것들은 우리 인간의 지혜와 이해력을 초월하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통한 그분의 생명의 창조와 구원역사이기에 우리 인간의 완전한 이해가 불가능한 것 입니다.

성도 여러분들도 인정하시겠지만, 인간구원의 핵심사상인 ‘예정’과 ‘자유의지’사상을 전체적으로 어느 정도만 제대로 파악하는데도 몇주 안에 끝내기에는 시간이 부족할 것 입니다. 특히 기독교 2천년의 역사를 두고 끝임없이 이어 내려온 인간구원에 대한 이 두사상은 다양하고 방대하게 변화 발전되어 왔던 것을 볼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오늘 한번의 설교로 모두 전할수 없기에 저는 그중에서 핵심적인 요소를 추려서 살펴 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언젠가 기회가 주어지는데로 전체적인 그림에서 다시 살펴 볼수 있으리라 기대해 봅니다.

무엇보다도 예정론과 자유의지로 정의되는 대표적인 신학사상에는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가 있습니다. 그것은 종교개혁가 존 칼빈에 의해 구체화된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있다는 것이고, 거기에 반해 알미니우스에 의해 주장된 인간의 구원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근거한다는 것 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주장이 성경적이냐는 것이 아닐것 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앞에서 잠깐 언급 했드시 신구약 성경 곳곳에서 한편에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적 예정하심>을 밝히고 있는가 하면, 또 한편에서는  <우리 인간에게 부여된 자유의지를 사용함>을 통한 구원을 이루라고 권면하고 도전하심을 우리는 발견할수 있기 때문 입니다.

먼저 구원에 관한 우리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인격적인 결단을 요구한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특별히 우리 주님은 우리의 결단을 통해 이 구원을 받아들일것을 도전하시는 것 입니다. 우리가 잘 기억하듯이 ‘부자청년 스토리’ (막. 10:21~22)에서 주님은 청년에게 그가 소유한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모두 나눠주고 자신을 따르라고 도전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마태복음 (5:29~30)에서 ‘네 눈이 범죄 하거든’ 혹은 ‘네 손이 범죄 하거든 그것을 찍어내 버리라’고 말씀 하십니다. 그것은 두눈과 두팔 다 가지고 지옥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한쪽눈 혹은 한쪽 팔 가지고 구원을 얻는 것이 낫기 때문 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7장>에서는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아주 적극적인 말씀 (v.7,8)을 통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구원의 은혜를 누리길 촉구하심을 볼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하심의 말씀으로 그 대표적인 것이 오늘 본문의 에베소서 말씀일 것 입니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v.4,5)라고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의 예정하심을 선포하고 있는 것 입니다. 그리고 예레미야는 자신을 어머니의 모태에서 부터 택정하여 주신 은혜를 하나님의 계시하신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되었습니다 (렘.1:4,5) 또한 사도바울은 로마서 (롬.9:10~13)에서 쌍둥이 ‘야곱과 에서’가 그 어머니 리브가의 배에서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택하심을 받았다는 것 입니다. 큰자가 작은 자를 섬길것이라고 예정 하셨다는 것 입니다. 이와같은 말씀은 단지 몇가지에 불과 합니다. 이 밖에도 구원에 관련한 두관점의 말씀은 수없이 많은 것 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둘을 어떻게 조화시켜 가고, 성경에서 밝혀주신 만큼 균형잡힌 성경적 관점으로 나의 구원을 이해하고 믿음으로 성장해 갈수 있을까?하는것 입니다.

이제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인간구원을 이루는 중요한 교리 ‘예정’과 ‘자유의지’를 살펴봄에 있어서 양쪽 모두에서 마주치게 되는 주요쟁점의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죄의 문제’ 혹은 ‘악의 문제’ 입니다. 존 칼빈에 의해 구원론의 대표적 신학으로 발전된 ‘예정론’은 이미 훨씬 이전에 시작 되었는데, 기독교회역사의 위대한 교부로 일컬어지는 성 어거스틴 (4세기경)이 그 대표적인 사람 입니다. 특별히 어거스틴은 <신정론/ theodicy>에서 “하나님은 완전한 선이고, 그는 무에서 온 세계를 창조하였는데 악은 오로지 인간의 원죄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악이 세계로 들어오게 된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타락 때문에 생긴 결과물이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악이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는 생각을 거부하고 그 대신에 인간이 자유의지를 남용하여 선함을 잃고 (=선의 결핍) 타락했기 때문에 악이 존재하게 되었다’고 보았던 것 입니다. 이런 죄의 문제는 그 이후 20세기에 들어와서 영국의 영문학자이자 크리스챤 사상가로서 특별히 수많은 청년들과 지성인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C.S. 루이스에 의해 다시한번 진지하게 고민되어졌습니다.

C.S. 루이스는 그의 책, <순전한 기독교> 에서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고등한 피조물들에게 주고자 하시는 행복은 사랑과 즐거움의 절정에서 자유로우면서도 자발적으로 하나님과 연합하며 이웃과 연합하는 데서 생기나는 행복으로서, 거기에 비하면 지상에서 남녀가 나누는 가장 황홀한 사랑조차 물탄 우유처럼 싱거울 것 입니다. 바로 이런 행복을 누리기 위해 인간은 자유로워야 하는 것 입니다” 라고 말 입니다.

신앙의 기본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선하심’을 믿고 ‘그분께서 창조하시고 택하신 자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심’을 우리가 믿는다면, 왜 하나님은 이 세상에 ‘악(=죄)의 문제’를 허락하시는 것 일까요? 앞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첫인간이 악을 저지르게 되고 그 원인을 분석해 보자면, 가장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일 것 입니다. 다시말해, 만약 하나님께서 첫 인간부부, 아담과 하와에게 자유의지를 주시지 않고 에덴동산에 선악을 알게하는 실과를 두지 않으셨다면 그들은 당연히 어떠한 죄를 범할 가능성도 없음을 쉽게 추론할수 있을 것 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속성에서 충분하게 이해할수 있드시, 하나님은 첫 인간부부가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여 악을 저지르게 되는 미래의 상황을 아시면서도 자유의지를 부여하셨다는 사실 입니다.

왜일까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 지구상에는 수없이 많은 생명체가 살고 있지만, 오직 우리 ‘인간과 천상의 천사’만이 영적으로 하나님을 인식하고 인격적으로 그분과 하나되는 사랑의 관계를 가진다고 성경은 밝히고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을 옳바로 인식할수 있고 인격적 관계를 긴밀하게 맺어갈수 있는 영적 존재인, 인간과 천사들 모두에게 있어서 필수적인 갖추어야 할 한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유의지’라고 저는 믿습니다. 이 자유의지가 있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도베드로가 표현한 데로 말한다면 “ ~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는)” (=하나님의 본성을 나누어 가지는 자가 되는/ 공동번역)(벧후.1:4) 것 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첫 인간 아담을 창조하실때 “ ~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 (창.1:26) 라고 하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 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저는 이해하게 되는 것 입니다.

그럼으로 조금전에 소개해 드렸드시 C.S 루이스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 이렇게 놀랍게 정의하고 있는 것 입니다. 즉 ‘하나님의 가장 고등한 피조물, 바로 인간에게 주셔서 사랑과 즐거움 가운데 자발적으로 하나님과 연합하고, 더 나아가서 이웃과 연합 할수 있는 선택의 능력’이 자유의지라고요.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할줄 몰라서 자유의지를 주신것이 아니라는 것 입니다. 도리어 그 위험성을 충분히 아실뿐 아니라, 그 타락의 결과까지도 온전히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는 것 입니다. 왜일까요? 그 이유는 우리를 로봇과 같은 존재로 만들지 않으셨기 때문 입니다. 반대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셔서 모든 위험과 댓가지불을 하고서라도 하나님 당신의 형상을 닮은 존재, 즉 ‘하나님 짜리’로 만드시기를 기뻐하셨기 때문 입니다. 하나님 자신과 영원한 교제 나눌수 있는 창조물을 기뻐하셨기 때문 입니다. 여러분은 이 자유의지 안에 포함된 이 엄청난 하나님의 속성과 영광을 발견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우려했던데로 그 복된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여 악을 저지르고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유의지를 허락하셨다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역사가 불완전하다거나 인간에게 허락한 자유의지는 좋은 결정이 아니였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도리어 놀라운 그분의 완전한 구원의 예정하심 안에서만 이해되고 도리어 감사할수 있게 되었음을 뜻 합니다. 무슨 말 입니까? 놀랍게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성령의 충만한 계시하심을 통해 사도바울에게 자신의 택한 자녀에 대한 구원의 계획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v.4,5) 무슨 뜻 입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을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택하셨다는 것 입니다. 그 때가 언제 입니까? 그때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때가 아니요, 아담과 하와를 처음 지으실때조차도 아니요, ‘창세 전’ 곧 온 우주 가운데 그 무엇도 존재하기 전인 태초 전에 여러분과 저를 구원하실것을 결정 하셨다는 것 입니다.

이제 제가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예정하심과 우리 인간의 자유의지와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하는 점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존 웨슬리>는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했습니다. “구원은 100% 하나님의 예정하심이요, 100% 인간의 행위”라고. 여기서 우리가 결코 혼돈해서는 않되는 것은, ‘하나님의 예정’은 말 그대로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권능과 지혜를 따라 정하신 구원의 계획이라는 뜻이지, ‘하나님이 예정 하셨으니 이미 운명적으로 정해졌다, 우리인간은 그 운명을 피할수 없다’는 뜻이 아닌 것 입니다. 그럼으로 우리 인간이 해야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댓가로 성령님의 은혜 가운데 값없이 거져주신 구원을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겸손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 입니다.

내가 비록 나의 자유의지 때문에 구원 얻은 것은 아니지만, 그 은혜로 복음을 깨닫았다면 나의 자유의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영접함으로서 선물로 주신 구원을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것 입니다. 또한 내가 주님을 이미 영접 했다면, 더 이상 잘못된 예정론에 사로잡혀 ‘한번 받은 구원은 취소되지 않아!’라고 당당해 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근심시키며 죄를 가볍게 범하는 악을 범해서는 안될것이요, 잘못된 자유의지론에 포로가 되어 ‘내가 큰죄를 범하면 언제든지 구원이 취소될꺼야!’라고 불안해 하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자녀에게 주신 구원의 확신과 기쁨을 상실하고 살아가는 불행한 삶을 살아서도 안될것 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결코 구원의 조건이 아니요, 도리어 이 자유의지를 날마다 순간마다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구원의 은혜에 감사함과 순종으로 나아감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이루는데 사용해야 할것 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성품을 따라 여러분과 저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뜻이요, 축복이요 은혜임을 저는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첫 인간부부가 범죄하기도 전에, 아니 천지가 존재하기도 전에 이미 그의 독생하신 아들 안에서 여러분과 저를 택하셔서 구원의 은혜를 계획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하며 그분께 영광 올려 드릴수 있기를 소망 합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그의 자녀에게 허락된 특권과 영광을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 그날까지 언제나 감사드리며, 허락하신 자유의지를 통해 순종과 충성 가운데 자녀에 합당한 삶을 누려 나가는 여러분 되시길 기대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12:1)라고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격려 하드시, 우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하나님께 드리고자 하는 인격적 결단을 우리 모두 행해야 하는 것 입니다. 이것이 바로 각자의 자유의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나아가는 삶임을 믿습니다. 이런 철든 자녀의 풍성한 열매맺는 삶을 사시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