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율법 외에” (But Now Apart From The Law)
“이제는 율법 외에”
(But Now Apart From The Law)
4-19-26
본문말씀: 로마서 (Romans) 3:21~22
21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But now apart from the law the righteousness of God has been made known, to which the Law and the Prophets testify.)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This righteousness is given through faith in Jesus Christ to all who believe. There is no difference between Jew and Gentile,)
[설교 요약]
만약 누군가가 로마서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반전을 가져오는 문맥 하나를 꼽으라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로마서 3장21절>말씀을 꼽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을 기준해서 로마서 전후의 양상이 완전히 뒤바뀌게 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사도가 <1장18절>에서 시작하여 <3장18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진노’을 가져온 ‘모든 인간의 불경건과 불의’ 즉 ‘인간의 총체적 죄악성’을 고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3장20절>의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음이니라” (롬. 3:20) ‘율법의 역할’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이어지는 말씀이 <3장21절>입니다.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절망적인 ‘죄악의 실존’을 남김없이 토로하고 나서, “그러나 이제는”(But now)이라고 사도는 극적인 반전을 선포합니다. 바로 ‘복음 안에 감추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남 (롬. 1:17)으로 모든 상황이 바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믿는 자를 살리는 ‘하나님의 의’일까요?” 그것은
첫째, “율법 외에 인간에게 구원으로 제시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v.21a)라고 사도는 선언합니다. 여기서 ‘율법 외에 ~ 나타났다’는 것은 율법과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구원>을 제시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 명령하시지만, <그분의 의>를 통해 ‘자신이 행동’하심으로 구원을 주십니다.
둘째,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입니다: 한편 사도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의>는 이미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v.21b)고 밝힙니다. 이미 구약에서 ‘유월절 어린양’ (출. 12장)과 ‘희생제사’ (레위기서)를 통해, 그리고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장차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증거하셨습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v. 22a) '의' 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될 때, 그분이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신 ‘의로움’이 우리에게 전가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가 작동하는 방식이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롬. 1:17)는 뜻입니다.
만약 사도가 선포하는 “그러나 이제는”이라는 반전의 역사가 없다면, 우리에겐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고, 의롭다고 불러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의로우심과 구원의 은혜를 이 시간 찬양과 경배 드립니다.
[설교 전문]
만약 누군가가 로마서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적인) 반전을 가져오는 문맥 하나를 꼽으라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로마서 3장21절>말씀을 꼽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3장21절>을 기준으로해서 로마서 말씀의 전후의 양상이 완전히 뒤바뀌게 되기 때문입니다. 지난주 살펴본 것처럼 <로마서1장 18절>에서 시작하여 <3장20절>에 이르기까지 우리 인간의 실존은 실로 참담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오게 한 우리 인간의 모든 불경건과 불의한 모습으로써, ‘인간의 총체적 죄악된 모습’이고, 사도는 결론적으로 이런 우리 모든 인간의 전적 타락을 선언하면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도다)” (v.10~11)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절망적이고, 구제불능인 모든 인간의 죄악된 상황 가운데, 갑자기 하늘이 열리고 소망의 빛처럼 비취는 말씀이 오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v.21)라고 사도는 놀라운 복음의 반전을 선포합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우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시며 깊고 넓은 구원의 비밀과 권능을 복음의 진리 안에서 더욱 온전히 깨닫고 누려 나가는 복된 성도 여러분 되시기 소망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말씀을 묵상하기 전에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무엇을 진정으로 강조하고 주장하기 원하는지를 먼저 잠깐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그동안 살펴본 것처럼, 사도는 이미 <1장18절>에서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복음’이 어떻게 출발 (시작)하는지를 선언했습니다. 어떻게 출발한다고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진노하심’으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진노하십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을 알고도 마치 하나님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우리 인간의 태도, 즉 ‘불경건’과 그런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에서 비롯된 모든 삶의 결과물인 ‘불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인간의 죄>인 것입니다.
사도는 이렇게 <하나님께서 왜 진노하게 되셨는지?>에 대해 <1장18절>에서 <2장>을 거쳐 지난주 살펴본 <3장20절>까지 한편의 긴 서사시처럼, 혹은 막대한 양의 죄를 범한 피고인의 죄목을 판사 앞에서 읽어나가는 검사의 고소장처럼 신랄하면서도 논리정연하게 인간의 죄목들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롬.3:10)는 의미입니다. 단 한명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불리어질 인간존재가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3:23)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가 우리 인간존재에 대한 마지막 결론인 <3:20절>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음이니라” (롬. 3:20)
그동안 살펴보았듯이, 하나님께서 <율법>을 우리 인간에게 주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 목적은 <우리 인간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자 함>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절대적으로 선하신 율법의 요구를 모두 지킴으로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첫 조상 아담과 하와’의 <원죄>를 물려 받은 우리 모든 인류는 그 누구도 죄라는 그 막강한 힘과 싸워 이길 존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이 율법을 주셔서 율법이 하나님의 편에서는 정확히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의 근거>임을 밝혀 주심과 동시에, 우리 인간 편에서는 <스스로 이 ‘선한 하나님의 명령인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죄된 존재임을 철저하게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율법을 주신 목적이 ‘그 율법을 스스로 행함으로 구원받게 하고자’ 주신 것이 아니라, ‘죄를 깨닫게 하고자’ 주셨다면, 현재까지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그 누구 한사람도 율법으로 구원받을 수 없고, 영생을 소망할 사람도 없다는 것이요, 우리는 모두 ‘죄와 사망’에 갇힌 절망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로마서’에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이유’요, 그러나 역설적으로 여기에서 ‘우리 인간이 복음의 권능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는 첫 출발’임을 사도는 주장하고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제 말의 의미는 지난 시간 말씀을 마무리하며 함께 나누었듯이 복음이 역사하는 그 출발은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와 긍휼이 아니라, 그의 진노에서 우리 인간 자신의 ‘전적 부패’와 ‘죄 앞에서 철저한 영적 무능’에 대한 처절한 인식에서 우리는 비로소 전적인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만을 갈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비로소 눈을 들어 겸손과 진실로 하나님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나 자신에 대해 스스로 자랑스러워하고, 높아진 마음이 아니라, 이제 내 죄에 대한 부인할 수 없는 인식과 절망에서 비로소 복음의 강력한 역사가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이 지점이 정확히 사도 바울이 우리 각자를 데리고 가는 지점이라고 믿습니다. 이 지점은 나의 전적 무능과 부패한 죄악된 자신을 목격하는 자리요, 스스로의 행위로 구원을 이룰수 없음을 처절하게 깨닫고 절망하는 자리입니다. 사방이 막히고, 도저히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오직 진실과 겸손으로 눈을 들어 하나님의 은혜만을, 그리고 그분께서 행하실 구원만을 사모하는 지점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지점’에서 놀라운 반전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v. 21a)라고 사도는 선언합니다. 제가 사용하는 <개역한글>성경은 그냥 “이제는”라고 시작되지만, <NIV>나 <KJV>와 같은 ‘영문성경’에서는 모두 “But now”라고 번역되어 있는 것입니다. 가장 헬라어 원문에 가깝다고 인정되는 한글 <흠정역본>에도 “그러나 이제는” (But now)라고 번역되어 있다는 점에 우리는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가 <롬. 3:21>을 시작하면서 “그러나”라는 상황의 변화를 의미하는 접속사를 사용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것이 제가 앞서 사도가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면서, <1장18절>에서 <3장18절>에 이르는 긴 <인간의 총체적 죄성>에 대한 고발과 그를 인한 우리 인간의 ‘선을 행할 수 없는 전적 무능’으로 인한 절망적 상황에서 ‘그러나’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이라고 사도는 ‘희망의 새벽(여명)’이 밝아 옴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입니까?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v.21)라고. 이와 같은 ‘인간의 죄’로 인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고 사도는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이미 증거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의 이와 같은 진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좀 더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가지 로마서의 주제가 되는 ‘무엇이 복음인지?’에 대해 잠시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는 <1장16절>에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1:16)고 선언함으로써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복음>이라고, 복음을 정의했습니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어떻게 복음은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가?’ 입니다. 거기에 대한 대답이 이어지는 <1장17절>인 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리라” (1:17)라고 말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복음이 모든 믿는 자를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이유는 바로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계시되어서/역사하셔서)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믿음으로 이르게 함으로써 믿는 자를 살리기 (구원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복음이 우리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우리 성도를 오직 믿음으로써 구원에 이르도록 역사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저와 <1장>말씀을 묵상하며, <로마서의 주제절>인 <17절>에 진술된 ‘하나님의 의’라는 말에 별로 주목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사도는 ‘하나님의 의’가 믿는 자에게 나타남으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된다는 ‘로마서의 핵심사상’을 이미 선언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하나님의 의가 도데체 무엇이기에 우리 믿는 모든 성도들을 살리는 구원으로 이끄는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과연 무엇이 믿는 자를 살리는 ‘하나님의 의’일까요?” 그것은
첫째, “율법 외에 인간에게 구원으로 제시된 것”입니다: 사도는 이제 완전히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었음을 영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v.21a)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이해할 것은 사도가 말하기를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는데, 이것은 ‘율법 외에’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율법 외에’는 영어로 <apart from the law/without the law>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직역하면, ‘율법과 관계(상관)없이’ 혹은 ‘율법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라고 번역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서 ‘율법’과는 전혀 방식으로> 우리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율법과 전혀 다른 방식’의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구원을 제시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첫째 성도 여러분도 잘 이해하시듯이, <율법>이라는 것은 ‘<십계명>과 같이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선한 법인데, 여기서 하나님은 다만 명령하시고, 우리는 오직 그것을 지킴으로써 의롭다고 인정받고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이 율법을 통해 요구하시는 방식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율법을 명령하셨고, 우리는 어떤 예외도 없이 그것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 어떤 옵션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제 그런 율법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인간이 구원받을 길을 열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그것은 둘째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내심으로써’ 그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는데, 저는 그것을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행동하셨다’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다시 말해, 첫번째 ‘율법은 단지 하나님은 명령하시고, 그것을 행할 존재는 우리 인간’이라면, 두번째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직접 행동하신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행동하느냐구요? 그것은 ‘하나님의 선한 율법을 완전히 만족케 할 의로움을 하나님 자신이 직접 행동하신다’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왜냐하면 그 이유는, 이미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안타깝게도 우리 인간은 그 누구도 하나님의 선한 율법을 온전히 실천할 (행할) 능력을 가진 존재가 그 누구도 없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 (3:10-11)는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은 단지 우리 인간이 얼마나 가망 없는 죄인인가를 깨닫게 할 뿐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그분의 의로우심으로 ‘이제 새로운 구원의 길을 우리 인간에게 열어 놓으셨다’고 사도는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명령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제 그분 자신이 그 구원의 근거와 자격을 친히 마련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는 뜻이요, ‘하나님의 의’가 의미하는 것입니다.
둘째,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입니다: 사도는 <하나님의 의>가 율법 외에 (율법과 다른 방법으로) 나타났을 뿐 아니라, 이미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v.21b)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복음 안에서 새롭게 드러난 <하나님의 의>는 과연 무엇인가를 사도는 이제 본격적으로 진술해 나가면서, 그는 ‘사실 이 <하나님의 의>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의해서 행해지고 증거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성경 어느 곳에 율법과 어느 선지자들에게 이런 ‘하나님의 의’는 증거되어 있는 것일까요? 여기서 먼저 놓치지 않아야 할 구약의 대표적인 모세 5경의 율법 가운데, <레위기서>가 있습니다. 이 <레위기서>를 통해 하나님께서 명하신 ‘소와 양과 염소’등의 짐승을 희생제물로 드림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도록 명하신 뜻을 우리는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레위기에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죄의 종류와 상황에 따라서 다양한 짐승과 제사방법을 통한 희생제사를 명하셨는데, 그 모든 짐승의 제사를 통해 그 이면에 흐르는 핵심은 ‘그 짐승이 나 때문에 대신 피를 흘려 희생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안타까운 것은 그 어떤 희생제물도 그 효력이 오래가지 못하고, 시간이 지나면 나의 또 새로운 죄로 인하여 끊임없이 죄 없는 짐승이 나를 대신해서 피를 흘려 희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구체적인 방법으로 어떤 짐승을 제사하느냐는 형식적인 것과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한 <레위서>의 영적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짐승의 희생제물은 무엇을 뜻할까요? 그것은 장자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아들을 통해 행하실 완전한 희생제사를 예표 (예언)하는 것입니다. 그는 바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아버지의 선한 뜻을 따라 우리의 죄를 위해 ‘희생제물’로 자신을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이것이 정확히 예수님을 향한 침례자 요한의 외침이 아닐까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29)라고 말입니다. 비록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그것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지만,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정통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지키는 유대교의 대표적인 명절인 ‘유월절’ (The Passover)는 또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잘 아시는데로, 하나님은 애굽의 바로 왕의 압제 아래에서 400여년간 종살이하던 이스라엘백성을 건져 내시기 바로 전에 중요한 의식을 행하게 하셨는데, 그것이 ‘유월절’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강퍅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명령, 곧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내어주라는 명령을 거역하는 바로왕에게 열가지 재앙을 내리시는데, 그 마지막 열번째 재앙이 바로와 그에 속한 모든 애굽 백성의 장자들을 모두 죽게 하는 재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민족에게는 그들의 집 문지방과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름으로써 그것을 본 죽음의 천사가 그 집을 넘어가게 (pass-over)하심으로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이런 ‘유월절’을 기념하여 영원토록 지키라고 하나님은 명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유월절은 어떻게 그 참된 의미가 드러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날 마지막 유월절 성만찬을 그의 제자들과 행하시며 하신 말씀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주님은 유월절 무교병 떡을 제자들에게 나눠 주시며 “받아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마. 26:26)하시고, 또 포도주잔을 주시며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 26:27~28)고 밝히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1,400년 전에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명하셔서 영원토록 지키라고 명하신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통해 장차 ‘하나님의 죽음의 저주’가 건너가고 ‘죄 용서와 구원’의 진정한 역사가 바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성취됨을 이제 주님 자신의 최후의 유월절 만찬을 통해 밝혀 주시는 것입니다. 이 유월절 의식을 통해 하나님은 이미 오래전부터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를 행해 오셨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리고 세상 민족은 깨닫지 못할찌라도 말입니다.
한편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말씀들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지난번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에 대해 선지자들을 통해 미리 약속하셨음’ (롬.1:2)을 사도가 밝혔을 때 우리가 여러 구약의 말씀을 살펴보았지만, 다윗이 기록한 여러 <시편>말씀에서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예시되어 있습니다. 고난 받는 메시아가 <시편 22편>에, ‘영원한 왕과 대제사장’으로서가 <시편 11편>, ‘배척받는 모퉁잇돌’로써 <시. 118편>, 그리고 ‘부활과 승리의 왕’으로써 메시아가 <시. 16편>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는 <사. 7장>에서 메시아의 ‘동정녀 탄생’, <사. 9,11, 40장>에 오실 메시아를, 또한 <사.53장>에서 ‘고난의 종’으로써의 메시아가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한편, 다니엘은 <단.9장>에서 ‘언제 메시아가 오실지를 정확히 그 기한을 예시’하였습니다. 그 밖에도 예레미야, 미가, 스가랴등 여러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언했고, 증거하였음을 우리는 그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것”입니다: 이제 사도는 이렇게 ‘최종적으로 무엇이 하나님의 의인지’를 핵심적으로 밝힙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v. 22) 그렇습니다. 사도는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의로우심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앞서 확인한 것처럼, ‘왜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인지?’ (1:16)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기 때문’ (1:17)인데, 여기서 이 <믿음>은 그 무엇보다도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 (메시아)시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것이 하나님의 의’ (v. 22)라고 사도는 복음이 역사(작동)하는 핵심적 근거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를 ‘의롭다’고 불러 주시는 근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그분의 의로우심이 우리의 것이 되도록 <옮겨 받았음/전가>’을 의미하며,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을 믿음을 통해, 의롭지 못한 우리가 그 의로움을 거져 받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또한 <하나님의 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격 없는 우리를 믿음을 통해 의롭게 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도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시기 때문입니다 (3:26). 이것을 좀더 교리적으로 풀어 설명하면,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역사하는 하나님의 의는?’ 바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을 통해 주님의 ‘대속의 피’ (대속의 생명)가 작용하여 나의 죄를 씻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해 주심 (=불러 주심)>이 ‘하나님의 의’가 역사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의>는 ‘율법의 요구를 모두 충족함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작동’하는 것인데, 이미 아브라함에게서 부터 그것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셋 수 있나 보라 ~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창. 15:5)고 말씀하셨고, 그 말씀에 대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 15:6)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행위가 아니라 믿음인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다윗’은 구약시대를 살았던 대표적인 인물이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 불렸던 사람이지만, 그가 진실로 깨닫고 고백한 것은 ‘자신이 율법을 온전히 지킴으로 하나님께서 죄용서 하시고 의롭다고 불러 주시는 것’이 아니라, ‘행한 것이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일방적이요 조건없는 자비와 은혜의 결과’임을 그는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롬. 4:7~8/시. 32:1~2)라고 말입니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요.8:56)는 예수님의 의미심장한 말씀과 같이, 하나님은 이미 구약에서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다윗과 신실한 성도들의 삶 가운데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 의롭게 되는 ‘하나님의 의’를 경험케 하심으로 장차 이 땅에 오실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모든 자에게 미칠 의로움을 이미 구약 여러 곳에서 예표하신 것입니다.
만약 ‘로마서’에서 “그러나 이제는”이라는 반전의 역사가 없다면 우리에겐 소망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 아버지께서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를 그 아들을 통해 허락하시지 않았다면, 여러분과 저는 막강한 죄의 힘 아래 갇혀 절망하며 죽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의’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으로 죄 용서하시고, 의롭다고 불러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이 시간 찬양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는 ‘의로와진 존재’가 아니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영적 신분이 변한 것이지, 삶 자체가 모두 변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가 <로마서12장>을 시작하면서 우리를 권면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라고 말입니다.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 그의 아들을 믿는 믿음을 통해 우리를 의롭다 불러 주시고 자녀의 무한한 권세와 특권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아버지께, ‘그럼으로 산제사를 날마다 기쁨과 자원함으로 올려드리는 철든 자녀 모두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날마다 더욱 더 분별하고 그 뜻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축복된 인생 되시길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