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ember 13, 2020

“인간의 의” (The Righteousness of Man)

Preacher:
Series:
Passage: 이사야 (Isaiah) 64:6~7
Service Type:

“인간의 의”

(The Righteousness of Man)

12-13-20

본문말씀: 이사야 (Isaiah) 64:6~7

6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 (All of us have become like one who is unclean, and all our righteous acts are like filthy rags; we all shrivel up like a leaf, and like the wind our sins sweep us away.)

7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우리로 소멸되게 하였음이니이다 (No one calls on your name or strives to lay hold of you; for you have hidden your face from us and made us waste away because of our sins.)

[설교 요약]

저는 오늘부터 3주에 걸쳐 성탄절 특집 메시지를 성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이번 주, 첫번째 메시지로서 하나님의 아들 그 독생자가 없는 우리 인간의 ‘의로움’이 얼마나 허망하고 더러운 옷과 같이 무가치한 것임을 살펴보겠습니다.

인간의 역사를 살펴볼 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얼마나 인간 스스로의 자랑과 영광을 얻고자 노력했던 역사였던 가를 확인하게 됩니다. 이것이 심각한 것은 이와 같은 ‘인간의 의’를 추구하는 삶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 뿐 아니라, 그분의 자녀라고 하는 이스라엘민족에게도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가 고백한 것이 바로 그런 이스라엘의 허망한 영적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헛된 ‘스스로의 의’를 추구하는 것일까요?” (Why do people keep trying to their own righteousness vainly?) 그것은,

          첫째, “인간의 영광을 추구하는 본성” 때문입니다 (Because people pursue their own glory by nature): 성경은 일관되게 우리 인간에게는 의로움이 없으며, 오직 하나님 아버지에게만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단지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 (롬. 1:17). 그러나, 타락한 우리 인간 본성은 의로우신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경배를 스스로에게 가로채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죄의 속성은 끊임없이 이 헛된 영광을 추구하게 우리를 부추기기 때문입니다.

          둘째, “율법의 한계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Because people do not understand about the limitation of the law):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나님께로 부터 택함 받았다는 강한 ‘선민의식’을 가졌는데, 그 중심에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율법의 말씀을 맡았다’ (롬. 3:2)는 것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이해하지 못한 것은 율법의 기능은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깨닫게 함 (롬. 3:20)이라는 사실입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Because people do not recognize who Jesus Christ is): 사도 바울은 <로마서 13장>에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롬. 13:14)라고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도전합니다. 우리 모든 인간은 자신의 더러운 옷 같은 ‘의’를 벗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하는 한 우리는 끝없이 스스로의 의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탄절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일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뿐 아니라, 그의 의로우신 옷을 입혀서 풍성한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설교 전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탄생하신 성탄절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저는 오늘부터 3주에 걸쳐 성탄절 특집 메시지를 성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과 함께 우리에게 생명 주시고자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의 귀한 사랑이 우리 가운데 넘치는 복된 시간이 되기 소망합니다. 저는 이번 주, 첫번째 메시지로서 하나님의 아들 그 독생자가 없는 우리 인간의 ‘의로움’이 얼마나 허망하고 더러운 옷과 같이 무가치한 것임을 살펴볼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주에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 안에서 허락하신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를 믿는 모든 자를 살리시는 복음의 능력 안에서 빛나는 ‘하나님의 의’를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이신 예수님 안에서 발견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시간에는 ‘하나님의 의’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고 살아가게 된 성도의 ‘의의 열매’ 맺는 삶은 무엇인지에 대해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살펴볼 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은 수없이 많은 신들을 믿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 그 신들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종교가 인간과 함께 공존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인류학자는 아닐찌라도 왜 인간은 이토록 많은 신들을 믿어야만 했을까? 하는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을 우리는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그 중심에는 인간이 어떻게 창조되었는가에 그 해답이 있다고 믿습니다. 창세기에서 밝혀주는 데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그분의 모양대로 지음 받은 존재’ (창. 1:26)라는 데서 그 근원되는 이유가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인간은 원래 창조주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로 연결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인류는 첫 인간 부부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짐으로 죄와 사망의 지배를 받는 불행한 역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인류는 한사람도 예외 없이 죄의 통치아래 살아가는 죄의 종이 되었으며,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운명 하에 놓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의 존재 안에는 여전히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하는 존재 깊은 곳에서 부터의 목마름과 절규가 있다고 저는 믿는 것입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지만 말입니다. 인류가 절대자, 즉 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경외감과 깊은 갈구는 이와 같이 우리 인류가 원래 창조자 하나님과 가졌던 그 친밀한 관계성에서 기인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럼으로 하나님께 범죄한 인간에게 있어서 이런 종교성은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인 절대자 하나님을 향한 추구가 아닌가 생각해본다면, 그와 반대되는 경우가 더욱 많지 않은가 여겨집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은 첫 인간부부가 그러 했듯이, 스스로 높아져서 하나님과 같아지고자 교만해졌던 것입니다. 인류역사를 이어내려 오면서 단 한번도 예외 없이 스스로 교만해지고, 목이 곧아짐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확인하게 됩니다. 이들은 바벨탑을 높이 쌓아 올리고, 함께 모여서 흩어짐을 면하여 큰 도시를 건설함으로 힘을 키우고 자신들의 이름을 떨치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인간의 의’를 얻고자 함인 것입니다.

이것이 심각한 것은 교만하게 인간 스스로의 의로움을 추구하는 어리석은 노력은 단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구별된 자녀로 택하여 세우신 이스라엘민족에게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바로 구약의 이스라엘민족 조차도 동일하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민족 조차도 헛된 인간의 의를 여전히 추구하고 있다는데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것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고 어리석기 그지없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그나마 몰라서 그렇다 치더라도, 하나님의 율법을 믿고 진리의 빛을 맛본 구약의 성도들 조차도 여전히 헛된 인간의 의를 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이처럼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죄악 가운데 헤매는 자나 하나님으로부터 진리의 율법을 받은 자나 관계없이 하나같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추구하지 않고, 인간의 헛된 자랑과 영광을 추구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인간은 헛된 ‘스스로의 의’를 추구하는 것일까요?” (Why do people keep trying to their own righteousness vainly?) 저는 이점을 성도 여러분과 함께 집중적으로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그것은,

          첫째, “인간의 영광을 추구하는 본성” 때문입니다 (Because people pursue their own glory by nature): 저는 먼저 무엇이 오늘 설교제목인 “인간의 의”라는 뜻인지를 확인해보고자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사전>에는 “인간의 의”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나타나는 인간행동의 덕목 (=장점) 혹은 윤리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으로 부터는 어떠한 인정함이나 유익을 얻지못한다”. 여기서 강조하는 점은 ‘인간의 의’는 자신 스스로는 그것으로 인해 흡족해 할 수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 앞에서는 전혀 유익이 없다는 점입니다. 왜 그럴까요? 성경의 메시지 그 중심에는 오직 하나님 한 분 만이 의로우심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의 시편에서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 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 얼굴을 뵈오리로다” (시. 11:7)고 그분을 찬양했습니다. 성경에서 선언하는 중요한 사상은 우리 인간이 죄를 범했느냐 아니냐를 따지기 이전에 우리에게는 의로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의로우심은 우리 인간과 세상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 안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우리 인간 본성에는 의로우신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경배를 스스로에게 가로채고자 한다고 성경은 고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 3:9~12)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롭지 못한 인간을 의롭다고 불러 주심을 성경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의인> (righteous/just) 라고 불러 주시는 자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의롭게 행동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서가 아니라, 오직 한가지 이유 때문’ 입니다. 그것은 <믿음> 때문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합. 2:4/ 롬. 1:17)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행위로서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의 원죄로 말미암아 죄 아래 있는 인간은 스스로 의로와지고자 끝없이 노력하는 것입니다. 첫 인간 아담이 그러했듯이, 하나님을 떠나서 스스로 의로와져서 영광을 받고자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 아래 속한 인간의 속성입니다. 이 죄의 속성은 끊임없이 이 헛된 영광을 추구하게 우리를 부추기기 때문입니다.

          둘째, “율법의 한계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Because people do not understand about the limitation of the law): 로마서가 복음서 중의 복음서라고 수많은 신학자들과 신실한 성도들이 입을 모으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 한가지는 어떻게 우리 인간이 구원자가 필요한가를 가장 탁월하게 영적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이러한 구원자가 필요한 인간은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모든 인간은 구원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한사람도 예외 없이 말입니다. 앞서도 살펴봤듯이, 헬라인이나 야만인 뿐 아니라 유대인까지도 모두 마찬가지로 동일하게 구원자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두 죄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유대인들에게 선언 하셨듯이,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요. 8:34)는 것입니다. 의인은 한명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라는 <롬. 3:10>의 말씀은 바울이 시편 <14장 & 53장>에서 다윗이 고백한 말씀을 인용한 것인데, 그 당시 유대인들 (=아마도 오늘날의 유대인들 조차도)은 자신은 의롭다고 여긴다고 사도가 판단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나님께로 부터 택함 받았다는 강한 ‘선민의식’ (the chosen people)을 소유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매우 귀한 것입니다. 사도가 인정했듯이, 그들에게는 먼저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을 맡았다’ (롬. 3:2)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율법을 받게 되었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영적 은혜요 특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율법을 받았다’는 것이 곧 ‘의롭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는 것을 유대인들은 의식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사도는 같은 유대인으로서 이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당시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여러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한 율법을 맡았다는 그 사실만으로 자신들은 이미 선하고 의롭게 되었다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사도는 결코 그렇치 않다고 로마서를 통해 선언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이렇게 절규하듯이 고백하는 것을 잘 기억할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롬. 7:19,24) 여기서 저는 사도가 말하는 “내가”라는 주어가 누구를 의미하는 지에 대해서 지난 번에 나눈 바 있습니다. 이 말씀은 로마서에서 대표적인 난해하고 어려운 구절의 하나이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로이드 존스> 목사가 그의 책, <로마서 강해>에서 주석한 견해를 지지합니다. 이것은 바울 사도가 예수 믿고 구원받고 나서 자기자신의 영적 상태를 고백한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라고 1인칭 단수로 묘사된 인물을 통하여 그 당시 ‘유대인과 같이 비록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신 빛을 맛보았지만 여전히 죄의 강력한 힘 아래 종으로 살아가는 자’를 나타내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은 선한 것이지만, 율법 그 자체는 결코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선한 율법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악을 행할 수밖에 없었던 <청년 사울>, 바로 과거의 자신을 포함한 모든 율법에 신실한 유대인들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율법의 기능은 “죄를 깨닫게 함” (롬. 3:20)이지, 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것을 오해했기에 율법의 한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 율법을 맡았다는 이유로 의인인 채 스스로 높아졌던 것입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Because people do not recognize who Jesus Christ is): 오늘 본문말씀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 (v.6) 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이사야가 말하는 ‘우리’는 누구를 뜻할까요? 그렇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라는 1인칭복수의 주어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모든 이방민족 뿐 아니라, 자신을 포함한 모든 유대인을 뜻합니다. 바로 모든 인류를 뜻합니다. 살인하고 간음하고 도둑질한 매우 죄질이 나쁜 사람 몇몇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류가 한가지로 부정한 자이고, 모두가 그 의로움이 더러운 옷과 같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되었건,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가 되었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이 되었건 모두 한가지로 하나님 앞에서는 부정한 자요, 그 의가 부정한 옷과 같다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메시지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제가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해서 강조해서 말씀드리고자 한 것은 우리 인간의 그 어떤 노력도 스스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이요, 우리 스스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저는 강조하기 원했습니다. 이 사실이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야만 하는지를 역설적으로 잘 설명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로마서 13장>을 마무리하며 이렇게 성도들을 권면합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롬. 13:14)라고. 사도는 우리 인간의 더러운 옷 같은 ‘의’가 깨끗하고 선하게 될 수 있는 유일한 한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옷을 입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의’요,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능력되신 ‘복음 안에서 나타나는 ‘의’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대다수의 유대인들처럼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분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지 않는다면, 우리 또한 여전히 우리의 더러운 의로써 옷을 삼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인간자신의 의로움은 말라 떨어지는 잎사귀와 같고 더러운 옷과 같다는 이사야의 고백에 동의합니까? 태초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 거하셨던 독생자 하나님께서 2020년전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하시고자 함입니다.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의로운 옷’을 입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허물과 부끄러움을 감추어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불러 주시고, 그 아들을 통하여 의의 열매 맺어가게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를 이 시간 찬양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