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ember 20, 2020

“하나님의 의” (The Righteousness of God)

Preacher:
Series:
Passage: 로마서 (Romans) 3:21~24
Service Type:

“하나님의 의”

(The Righteousness of God)

12-20-20

본문말씀: 로마서 (Romans) 3:21~24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But now a righteousness from God, apart from law, has been made known, to which the Law and the Prophets testify.)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This righteousness from God comes through faith in Jesus Christ to all who believe. There is no difference,)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for all have sinned and fall short of the glory of God,)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and are justified freely by His grace through the redemption that came by Christ Jesus.)

[설교 요약]

            오늘은 성탄절 주일입니다. 우리 모두 이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기뻐하며 찬양하기 원합니다. 저는 지난 시간 ‘인간의 의’란 제목으로 그리스도 없는 인간의 의로움은 더러운 옷과 같이 가치 없는 것임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의’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독생자를 통하여 이루신 참된 의로움은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주님의 제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마. 16:16)라고 했고, 제자 도마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 20:28)라고 고백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누구라고 인식하고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은 그분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하는 핵심이 됩니다.

오늘의 주제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은 언제나 옳은 행동만을 하시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옳은 것의 기준이 된다는 의미이다” 라고 조직신학자 ‘웨인 그루뎀’은 정의합니다. 그럼으로 불의가 조금도 없으신 하나님께서는 그 피조물 가운데서 <죄를 못 본 척 넘어가실 수 없고, 반드시 그 죄를 심판 하셔야만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의’라는 교리에 포함된 핵심적 사상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이 어떻게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듯이 복음에서 나타남으로 모든 믿는 자를 살리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능력>이 되는 것일까요 (롬. 1:16~17)? 얼핏 생각해 볼 때,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그분의 자비하심은 정반대의 개념처럼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 의로움과 자비가 놀랍게 하나로 연결되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어떻게 죄를 심판하는 무서운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도리어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능력이 되었습니까? 오늘 본문 <21절>에서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v.21)고 사도는 선언합니다. 하나님께서 ‘오직 죄를 깨닫게 하는 율법’ (v.20) 외에 ‘하나님의 한 의’를 통하여 그 놀라운 일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여러분과 제가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받아야 하는 하나님의 진노를 모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쏟아 부으셔서 십자가 위에서 예수의 피로써 우리를 대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그를 믿는 자는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다)” (v.24)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어린 양 되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죽으심으로 그를 믿는 자를 의롭게 하시고자 함입니다.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 아버지의 이 넘치는 은혜를 찬양하고 엎드려 경배 드립니다.

 

[설교 전문]

            오늘은 성탄절 주일입니다. 이제 며칠 후면 우리를 살리시고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크리스마스입니다. 우리 모두 이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기뻐하며 찬양하기 원합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일 뿐 아니라, 여러분과 저를 살리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맞이하며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어떤 떠들썩한 크리스마스 행사나 발표회 보다도 우리 각자가 마음의 중심으로 주님의 오심을 기뻐하고, 그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더욱 감사하고 사랑으로 주님의 성탄절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시간 ‘인간의 의’란 제목으로 그리스도 없는 인간의 의로움은 더러운 옷과 같이 가치 없는 것임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의’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독생자를 통하여 이루신 참된 의로움은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를 더욱 깨닫고, 이 선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 드리는 이 시간 되길 소망합니다.

오래전에 제가 청년시절에 한편의 짧은 ‘복음전도’용 영상물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한 분이 두루마기 한복을 입고 나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결정의 한가지는 ‘나는 나사렛 예수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골자는 <우리 모든 인간 한사람 한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대한 결정의 순간>은 2천여년 전 나사렛에서 태어나셔서 33년의 짧은 인생을 살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고 3일만에 부활하셨다고 성경에 기록된 예수를 어떻게 인식하는가 하는 순간이라는 사실입니다.

유대 총독 빌라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재판하면서 이스라엘백성들을 향하여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마. 27:22)라고 질문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이스라엘백성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마. 27:22~23)라고 맹렬히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제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마. 16:16)라고 했고, 제자 도마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 20:28)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나사렛 예수는 누구신가?”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바로 이해하지 못할 때, 그는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유대인들의 믿지 못함을 책망하시면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 하셨느니라 ~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 (요. 5:37~38)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곧 크리스마스의 주인공 되신 예수님을 이해하는 만큼, 그는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바로 구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은 오실 메시야, 우리 주님의 오심을 예언한 것이요, 증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깨닫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주제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무엇이 ‘하나님의 의’라는 뜻일까요? ‘웨인 그루뎀’은 그의 책, <조직신학>에서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은 언제나 옳은 행동만을 하시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옳은 것의 기준이 된다는 의미이다” 라고 ‘하나님의 의’에 대해 정의했습니다. 우리가 잘 이해하듯이 하나님의 속성은 능력면에서는 ‘모든 것을 다 아시고, 모든 것을 다 행하실 수 있는 분’ 이시고, 성품적인 측면에서는 ‘선하시고 긍휼하시며 의로운 거룩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주제가 되는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할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신학자 구루뎀이 정의한 것과 같이 ‘하나님은 언제나 옳으시고, 하나님 자신이 그 옳음의 기준이 되신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렇게 의로우신 하나님은 조금도 그 속에 악이 존재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그 지으신 만물 가운데 존재하는 악을 못 본척 넘어가실 수 없는 하나님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 죄는 반듯이 심판하셔야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라는 말 속에 담겨 있는 중심사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와 악을 처벌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준엄한 공의로우심>이 어떻게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듯이 복음에서 나타남으로 모든 믿는 자를 살리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생명의 능력>이 되는 것일까요 (롬. 1:16~17)? 얼핏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그분의 자비하심은 정반대의 개념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의로움과 자비가 놀랍게 하나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장 잘 영적으로 설명해 주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말씀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모든 인간의 죄가 얼마나 크고 가증한 가를 <롬. 1:18>에서 시작하여 바로 오늘 본문 앞 절 <롬. 3:20>까지 이렇게 적나라하게 밝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20)라고. 이것이 정확하게 오늘 본문말씀 <23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사도가 죄의 막강한 힘 아래 신음하고 종이 되어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 인간의 저주스러운 영적 상태를 지적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오늘 <21절>말씀을 시작하면서 “이제는” 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KJV 흠정역>에는 “그러나 이제는” (but now)라고 보다 원어에 가깝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21절>에서 사도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v.21). 그렇다면, 무엇이 ‘그러나 이제는’이라는 의미일까요?

사도는 ‘율법은 선한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 율법을 통해서는 단지 죄를 깨닫게 되는 것’ 임으로 율법만이 아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한 의’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의는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v.21). 앞서 주께서 유대인들을 향해 그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셨듯이 구약의 모든 말씀이 예수님 자신을 예언하고 증언한 것임에도 영의 눈이 어두움으로 그들 가운데 오신 약속의 메시야를 그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거부하고 배척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한 의는 이제 나타났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한 의” (a righteousness from God) 는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의” (v.22) 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의’가 모든 믿는 자에게 어떤 놀라운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는가 하는 점을 <24절>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v.24)라고. 이것은 <21~22절>이 무엇이 ‘하나님의 의’인지를 정의했다면, <23~24절>에서 그 의를 통하여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는지를 <법적 논리>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셔서 그의 의로우신 피를 흘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단번에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갚으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은 주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대속하여 죽으신 역사적 사실과 그분을 믿음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씻어 졌음을 잘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어떤 영향을 우리 믿는 자에게 미쳤다는 뜻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은 거룩하고 의로우시기에 죄는 반드시 심판하셔야 하지만,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나서 여러분과 저를 대신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한 저주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제는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모든 죄와 불법에 대한 의로운 심판을 조금도 남김없이 행하셨습니다. 준엄한 심판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저에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무에 매달리사 모든 저주를 남김없이 우리를 대신하여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갈. 3:13). 그럼으로 예수님의 화목제물 되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는 이제 더 이상 우리를 저주와 심판으로 몰고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거져 주시는 은혜로 의롭다고 불러 주시는 생명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죄를 미워하고 심판하는 의로우심 앞에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와 여러분의 모든 죄를 남김없이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고 죽은 지 3일만에 부활하셔서 죄와 사망을 이기심으로 우리에게 새 생명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한 의’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의 의를 통하여 우리를 부끄럽거나 공포스럽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도리어 우리를 의롭게 세워주시는 것입니다.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v.26)는 것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의로우심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스스로 의로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할까요?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우리 스스로는 의롭게 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존재이기 때문이고, 그럼으로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 받음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구원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구원받은 자는 비로소 거룩하고 영광된 하나님과 자녀의 관계를 누리게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길만이 세상의 그 어떤 왕이나 귀인도 그 죄로 말미암아 결코 누릴 수 없는 의로우신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와의 하나되는 자녀의 관계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난 시간,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함께 나누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그 보배로운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를 대속해서 죽으심으로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의 옷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되는 의의 옷인 것입니다.

이제 저는 ‘우리 성도가 예수님의 의로우신 옷을 입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대해 살펴보고 오늘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언젠가 신앙서적을 읽다가 우리 성도가 어떻게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이루신 승리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유업을 그분과 함께 누릴 수 있는가에 대해서 그것을 <은행에서 발행하는 수표>로 저자가 설명했던 기억이 납니다. 내가 재정적으로 엄청난 파산상태에 있을 때, 나의 절친인 한 친구는 아무런 조건도 없이 수표한장을 주면서 그 빚을 다 갚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나의 재정적인 절대절명의 위기가 극복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친구의 수표 한장을 통해 그의 은행 account에서 필요한 모든 금액이 지불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 다는 것은 나의 연약한 영적 상태와는 관계없이 그리스도의 모든 영적 충만과 의로우심으로 나의 모든 부족을 대신 갚으시고 넘치도록 채워 주신다는 뜻입니다. 나 스스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내가 정리하지 못하고, 끊어버리지 못하는 어둠에 속한 일들을 주님의 옷을 입음으로서 성령의 능력으로 극복하고 이겨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방탕을 벗어버리고, 술 취하지 않으며, 육체의 정욕에 빠지지 않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는 모든 육신의 일을 그리스도를 옷 입음으로 싸워 넉넉히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롬. 13:11~1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며칠 후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크리스마스입니다. 주께서 탄생하시던 날, 천군 천사는 이렇게 소리 높여 찬양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눅. 2:14)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자신을 십자가 위에서 대속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자 오신 예수님을 사랑과 감사로 맞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주 안에서 하나된 성도들에게 이렇게 도전합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부르심을 함께 받은 거룩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사도요,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 하십시요” (히브리서/Hebrews 3:1) 우리 신앙의 사도요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자’고 성도들에게 격려합니다. 성도 여러분은 어떤 화려한 선물이나 우리의 행위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합니까? 바라기는 주님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의로우심을 영으로 더욱 깨닫고, 십자가의 화목제물로 우리를 살리신 예수님을 더욱 깊이 생각하고 사랑함으로 주께서 탄생하신 성탄절에 그분이 기뻐하시는 선물을 드리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기대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주님께 이런 최상의 선물을 드릴 준비가 되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