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mber 26, 2023

“증인의 조건” (The Condition Of Witnesses)

Preacher:
Passage: 사도행전 (Acts) 4:18-20
Service Type:

“증인의 조건”

(The Condition Of Witnesses)

11-26-23

본문말씀: 사도행전 (Acts) 4:18-20

18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Then they called them in again and commanded them not to speak or teach at all in the name of Jesus.)

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But Peter and John replied, “Judge for yourselves whether it is right in God’s sight to obey you rather than God.)

20 우리는 보고 듣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For we cannot help speaking about what we have seen and heard.”)

[설교 요약]

<사도행전 3장>에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되었던 자를 사도가 낫게 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몰려와서 이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를 알고자 했습니다.

이에 대해 베드로는 이런 권능은 자신들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목 박았으나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한 일이라고 증거했습니다 (행. 3:11-16).

그러나 이와 같은 강력한 복음의 메시지가 전파되는 것을 싫어하는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v.18)고 엄히 경고했던 것입니다.

그때 사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듣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v.19-20)고 담대히 대답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담대한 사도들처럼 어떻게 우리는 그리스도의 합당한 증인이 될 수 있을까요? (How are we able to be worthy as disciples of Christ?) 라고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첫째, “명령의 절대성을 깨닫음으로써” (Through recognizing the absoluteness of the Christ’s commandments) 입니다: 주님은 승천하시면서 사도들에게 명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 28:19-20) 라고. 주님은 증인된 우리들에게 선택사항이 아니라, 반드시 행해야 할 명령 (계명)으로 복음전파를 분부하셨습니다.

둘째, “승리에 대한 확신으로써” (Through assuring the victory of Him) 입니다: 우리도 사도들과 같이 주의 말씀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복음이 세상 끝날까지 전파되도록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승리의 확신으로 담대한 증인이 될 것입니다.

셋째, “성령충만의 능력으로써” (Through the power of the fulfilled Spirit) 입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슥. 4:6)는 하나님의 약속과 같이 오직 그분의 영,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는 주님의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께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8)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설교 전문]

            우리가 비록 크리스챤으로 살아가면서도 뭔가 행해야 할 바는 행치 못하고,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은 행하고 있는 것 같은 자신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낄 때가 종종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사도행전을 시작하며 몇 주에 걸쳐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그분의 증인>으로 살아갈 것을 명령하였음을 살펴보았는데, 여러분과 저의 삶 가운데서는 이런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의 모습이 있는가 하는 점에 있어서도 이런 문제의식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크리스챤 대부분은 예수님의 뜻을 좇아 충성스럽게 그분의 명령을 행하는 제자로 살기를 진실로 원하지만, 문제는 그 원하는데로 살아가지 못하는 원치 않는 자신을 날마다 경험한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우리는 이런 영적 무기력과 게으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일까요? 오늘 말씀 가운데 “우리는 보고 듣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v.20)고 선언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대히 전하는 사도의 모습을 통하여 진정한 주의 증인의 삶을 배워가고, 실천해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사도행전 3장>에서 벌어진 사건, 곧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되었던 자를 사도들이 낫게 한 사건으로 인하여 벌어지는 결과들을 함께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동안 살펴보았듯이 앉은뱅이가 낫게 된 것을 목격하거나 듣게 된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몰려왔고, 사도 베드로는 입을 열어 어떻게 이 사람에게 이런 놀라운 치유의 역사가 벌어진 것인지를 설명했던 것입니다. “이 사건에 대해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일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죽은 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권능으로 행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놀라운 복음의 메시지가 전파되는 것을 싫어하는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사도들을 감옥에 가두었고, 더 이상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그 어떤 것도 알리지 말라고 강하게 위협했던 것입니다. 저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사도들이 지금 전파하는 것이 진리인가? 아닌가? 하나님의 역사인가 아닌가? 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들은 단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자신들이 십자가에 못박았던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이런 표적들이 퍼져 나가는 것 자체를 싫어하고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이들은 “(제자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v. 18)고 위협했던 것입니다. 이들의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깨닫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종교집단의 이익을 추구하고, 기득권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 목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은 담대히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듣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v. 19-20)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왜 베드로와 요한은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할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는 ~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선언하는 것일까요? 물론 두 표현 모두 결론은 제자들이 ‘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최종결정권>이 누구에게 있는가?’하는 점입니다. 사도들은 이 결정권이 자신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부르시고 제자 삼으신 주님, 곧 ‘주의 증인으로 세우신 예수 그리스도’께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있다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자신들은 복음증거에 있어서 아무런 결정권이 없고,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신 <성삼위 하나님> (The Trinity God)께 결정권이 있음을 분명히 밝히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이런 질문을 해 보기 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그리스도의 합당한 증인이 될 수 있을까요? (How are we able to be worthy as disciples of Christ?) 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첫째, “명령의 절대성을 깨닫음으로써” (Through recognizing the absoluteness of the Christ’s commandments) 입니다: 앞에서도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주님의 사도들에게서 볼 수 있는 분명한 믿음의 자세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소위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이라고 부르는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대한 절대적 순종입니다. 마태복음의 마지막장 마지막절에 부활하신 주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명하신 말씀을 여러분은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 28:19-20)고 주님은 명하셨습니다. 이런 주님의 명령은 ‘나의 의견에 따라 지켜도 좋고, 안 지켜도 무방한 그런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명령은 이것은 마치 비유하자면, 군대에서 전쟁이 발발한 상황에서 총사령관이 명령했다면, 과연 그 명령을 자기 마음데로 어길 병사가 몇 명이나 될까요? 이 명령은 그만큼 절대적인 것입니다.

사실 ‘명령’이라고 했을 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이유로 인하여 우리들은 대체로 부담스럽게 간주되곤 합니다만, 그러나 그 명령이 ‘사랑’이라면 어떻습니까? 솔직히 신앙의 유무에 관계없이 ‘사랑’이라는 두 글자만큼 사람에게 깊고 강력한 영향력을 주는 단어가 또 있을까요? 사랑이라는 글자만큼 우리를 설레게 하고, 행해보고 싶은 것이 또 있을까요? 그런데 여러분도 잘 아시듯이 주님은 그 무엇보다도 사랑을 우리에게 행하라고 분명히 명령하셨음을 여러분도 잘 기억하실 것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4)라고 말입니다.

제가 오늘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주님은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그 생명의 말씀 가운데서도 특별히 두가지 점을 ‘명령’ (commandment)으로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한가지는 ‘사랑할 것’을 명령으로 주셨고, 다른 한가지는 ‘복음전파’를 명령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유독 주님은 이 두가지를 ‘명령’으로 그의 제자된 우리에게 주셨을까요? 저는 이 사랑만큼, 그리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만큼 우리 크리스챤의 삶에서 중요한 것이 없기에 주님은 이 명령을 통해 강조하고 계시다고 저는 믿습니다. 모든 주님의 말씀은 선하고 지켜 나가야 하겠지만, 그 중에서도 ‘이웃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삶은 결코 불순종하거나 연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주님은 명령을 통해 밝히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 어떤 형편이 될지라도 결코 미뤄서도 안되고 포기해서도 안되는 것이 바로 사랑과 복음에 대한 주님의 명령을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사도 바울이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를 마감해 나가면서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딤후 4:2)고 그를 강하게 격려하는 이유를 이해하게 됩니다. 이처럼 생명의 말씀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은 모든 주님의 제자들의 절대적 지상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주께서 명령하신 증인된 삶의 절대성을 깨닫았다면 우리는 이제 한걸음 더 사도가 보여준 모습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둘째, “승리에 대한 확신으로써” (Through assuring the victory of Him) 입니다: 제가 고등학생시절 즈음에, ‘이은상’시인의 <고지가 바로 저긴데>라는 제목의 시를 종종 읇조리곤 했는데, 오늘 말씀을 묵상하다가 그 시가 생각났습니다.

“고난의 운명을 지고 역사의 능선을 타고, 이 밤도 허위적 거리며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

넘어지고 깨어지고 라도 한 조각 심장만 남거들랑, 부둥켜 안고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새는 날 피 속에 웃는 모습 한 번 보고 싶다

시인은 이 시를 통해서 전투를 승리로 이끌 적군의 마지막 고지의 점령을 눈 앞에 두고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라는 전투의 상황을 비유하여 우리 민족의 통일에 대한 염원을 확신의 형태로 뭉클한 시 한편을 지었는데, 오늘 사도들이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v. 20)는 선언과 시인의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는 외치는 듯한 결연한 의지가 묘하게 오버렙 됨을 저는 느끼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말씀에서 사도들의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는 선언 또한 그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강하게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선언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여러 구약의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고난 받으실 것을 예언한 그리스도요,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그분을 다시 살리신 부활의 주님이시요, 주의 복음이 세상 끝까지 전파되는 날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실 주님이기에 그의 제자된 우리가 가지게 되는 승리의 확신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 어떤 고난과 핍박도,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까지도 이 복음의 승리를 막을 수 없다는 확신이라는 것입니다.

셋째, “성령충만의 능력으로써” (Through the power of the fulfilled Spirit) 입니다: 구약의 <스가랴서>를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그 당시 포로귀환을 통하여 예루살렘에 돌아온 유대민족의 지도자 스룹바벨에게 이렇게 예언하신 성전 재건축을 반드시 완성하여 주실 것을 스가랴의 예언을 통하여 선언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슥. 4:6)고 말입니다. 스가랴서를 읽어보면, 이스라엘민족이 비록 포로생활의 비참한 생활을 끝내고 다시 조국으로 돌아왔지만, 여러 적들의 방해와 공작으로 인하여 무너졌던 하나님의 성전 재건축을 이루지 못함으로 인하여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 등 여러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낙심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은 스가랴를 통하여 무너진 하나님의 성전은 반드시 다시 건축되어 질 것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힘이나 지혜나 능력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 성령의 능력으로 될 것임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살기등등한 위협의 말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v. 18)는 경고에 대해 베도로와 요한의 답변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듣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v. 19-20)라고 말입니다. 사실 베드로 사도는 불과 얼마전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 대제사장의 뜰에서 여종이 “이 사람도 그 (예수님)와 함께 있었느니라” (눅. 22:56)고 했을 때, 3번씩 주님을 저주하고 부인했었음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베드로에게 돌을 던지자는 것이 아니라, 그도 우리처럼 목숨이 두려워 사랑하던 주님을 부인했던 연약한 자였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강력한 권세를 가진 유대종교지도자들 앞에서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라고 이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요?

저는 오늘 말씀을 마무리해 가면서, 과연 무엇이 베드로를 포함한 제자들을 저토록 담대하고 충성된 주의 증인으로 변화시켰는지를 돌아봅니다. 그 최종적인 근거와 힘은 바로 우리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오직 주의 영 성령의 능력으로 비롯된다고 하나님은 밝혀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께서 승천하시면서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라’고 제자들에게 명하시면서, 동시에 어떻게 이와 같은 ‘복음의 증인’이 될 수 있을 것인지를 <행. 1장>에서 이렇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8)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몇 날이 못되어 오순절날 모여 합심으로 기도하는 제자들 위에 불의 혀같이 성령님께서 임하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성령의 충만함으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담대히 입을 열어 복음의 말씀을 증거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내 판단과 능력에 의지하여 증인의 삶을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행하기를 원하는 바는 행하고, 행하기 원치 않는 바는 안 행하는 능력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선하신 주님의 ‘사랑의 명령’에 순종하여 사랑의 섬김으로 종 노릇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대하게 선포’하는 복된 주님의 증인 되시길 축원합니다. 바리기는 성령님의 충만한 능력에 의지하여, 주님의 명하심에 순종하여 그분의 증인된 삶의 영광스러움을 영으로 깨달음으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입술을 열어 담대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축복된 삶 사시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