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ember 3, 2023

“성령이 충만하여” (Filled With The Holy Spirit)

Preacher:
Passage: 사도행전 (Acts) 4:31
Service Type:

“성령이 충만하여”

(Filled With The Holy Spirit)

12-3-23

본문말씀: 사도행전 (Acts) 4:31

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After they prayer, the place where they were meeting was shaken. And they were all filled with the Holy Spirit and spoke the word of God boldly)

[설교 요약]

우리가 ‘사도행전’을 처음 시작하며 살펴봤듯이 ‘사도행전’을 한마디로 정의하라고 했을 때, 많은 성경학자들이 동의하는 것이 <성령행전>이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살펴보는데로, 사도행전 곳곳에서 주요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성령충만’함이 있었음을 우리는 보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성경말씀, 특히 신약성경을 묵상하면 할수록 깨닫게 되는 것은 ‘성령충만의 중요성’입니다.

그렇다면, 왜 성령충만이 참다운 성도의 조건이 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첫째, “<성령의 거하심>과 <성령충만>은 전혀 다른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 8:9)라고 선언했습니다. 모든 구원받은 자에게 성령께서 내주 하시지만, 모든 거듭난 자가 성령충만 받은 것은 아닙니다. 성령충만은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도 아니요, 받지 않아도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엡.5:18).

둘째, “성령충만은 <성령님을 아는 지식>만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충만을 받는 것은 먼저 ‘성령님은 누구신가?’ (성삼위일체의 성령 하나님)하는 것과, ‘성령님의 사역은 무엇인가?’ (A. ‘창조사역’, B. ‘구원의 사역’, C. ‘평생동안 성도를 다스리고 도우시는 사역) 라는 성령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는 만큼 가능한 것입니다.

셋째, “성령충만 없이는 <육신과 죄>를 이길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제자들이 하나님께 합심하여 기도했을 때, 모인 곳이 진동하며 모두 성령의 충만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충만을 통해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 (행. 1:8)이 될 뿐만 아니라, 성도의 평생토록 ‘육신의 정욕과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갈. 5:16).

궁극적으로 성령충만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섬김으로 드러나는 각종 ‘성령의 은사들’ (고전.12:28-31)과 함께, 각자 내면적으로 맺히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같은 ‘성령의 9가지 열매’ (갈.5:22-23)를 통해 아름답게 열매 맺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날마다 회개하는 심령과 말씀과 기도 가운데 성령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가고, 자란만큼 성령님께 순종함으로 성령의 충만한 열매를 맺어가는 복된 성도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가 ‘사도행전’을 처음 시작하며 살펴봤듯이 ‘사도행전’을 한마디로 정의하라고 했을 때, 많은 성경학자들이 동의하는 것이 <성령행전>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자동차가 ‘게솔린’의 힘으로 시동을 걸고 도로위를 질주하듯이, 사도행전 곳곳에서 주요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성령충만’함이 있었음을 우리는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그동안 제가 여러 번 말씀드린데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성부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비해 성령 하나님은 상대적으로 그분이 누구시지를 아는 것이 쉽지 않고, 그분의 사역을 이해하는 것도 명확치 않음으로 인해 신학적으로 많은 혼돈이 있는 것도 사실임을 말씀 나눈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성령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회피하거나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 구원받은 자들에게 있어서 성령님의 사역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만큼 중요하고 결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다시 한번, 우리 성도를 향한 성령님의 사역, 곧 ‘성령충만함으로 우리를 구비 (준비)시키고, 그리스도의 충성된 증인으로 세우시는 역사가 무엇인지를 더 밝히 깨닫는 시간되어, 온전히 성령께 순종함으로 성령충만을 누려 나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마 기억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저는 그동안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성령충만의 중요성’을 강조한바 있습니다. 우리 거듭난 성도,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자들에 있어서는 ‘성령충만’은 반드시 받아 누려야 할 절대적인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 중에 “목사님, 저도 ‘성령충만’ 받는 것이 믿음 좋은 크리스챤이 되기 위한 중요한 하나임은 인정하겠지만, 그렇다고 모든 크리스챤이 반드시 ‘충만을 받아야만 한다’고 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확대해석이 아닙니까?”라고 반문하고 싶은 분은 혹시 없습니까? 만약 여러분 중에 이와 같이 우리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성령충만의 절대성’을 아직까지 확신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다면, 저는 성경말씀에서 성령과 우리 성도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한번 살펴보기 원합니다.

그렇다면, 왜 성령충만이 참다운 성도의 조건이 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첫째, “<성령의 거하심>과 <성령충만>은 전혀 다른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8장>에서 ‘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죄씻음 받고, 죄와 사망에서 해방된 거듭난 자인지?!’를 이렇게 한마디로 선언한바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 8:9)라고. 여기서 사도가 분명히 강조하는 것은 모든 거듭난 자는 그리스도의 영, 성령께서 그 안에 내주해 계신다’는 것입니다. 단 한 명의 예외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께서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 3:5)고 선언하신 뜻입니다.

거기에 비해, ‘거듭났다’ (=구원받았다)고 해서 모든 성도가 ‘성령충만 받은 것은 아니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구분해야만 합니다. 성령께서 모든 성도 안에 거하신다는 것, 즉 ‘성령이 내주하신다’는 것과 ‘성령의 충만을 받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이런 차이는 교리적일 뿐 아니라, 우리 각자가 경험적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바입니다. 그럼으로 어떤 성도들의 주장처럼 ‘성령이 우리 거듭난 자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나는 이미 성령충만 받은 것이다. 따라서 나는 더 이상 성령충만을 추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영적 이해임을 우리는 인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충만은 내가 거듭났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성경은 한결같이 밝히고 있기 때문이요, 반대로 성령충만은 언제나 성도의 인격적인 결단과 성령을 향한 신뢰와 전적 순종을 통해 임함을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지점이 자연스럽게 우리 성도가 ‘어떻게 성령충만을 받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살펴볼 시점인 것입니다. 그것은

둘째, “성령충만은 <성령님을 아는 지식>만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구약 성경전체에서 확인해 나갈 수 있는 ‘성령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 없이는 성령충만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많은 문제를 발생시킴을 우리는 직시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성경에서 ‘성령님은 누구신가?’에 대해 우리에게 밝혀 주시는 ‘성령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없이 소위 ‘성령체험’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관적인 경험을 토대로한 성령충만을 추구함은 진정한 성령충만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고, 또한 영적으로 위험한 상태임을 우리는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을 아는 지식을 위한 두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A) <성령님의 본질은 무엇인가?>하는 것이요, 바로 ‘성령님은 누구신가?’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앞서도 잠깐 말씀 드린데로 성령님은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 (The Trinity God)입니다. 바로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성삼위 하나님의 세번째 위격에 해당하는 거룩한 ‘성령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 하나님은 각각 독특한 위격을 가지시고 존재하지만, 그 본질이 하나이신 ‘성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놀랍고도 신비로운 이런 삼위일체로서 하나님의 존재하심은 우리 인간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지각(인식)을 초월한 개념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성령님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흔히 ‘성령충만 받았다’고 스스로 주장하는 사람들이 말하듯이 성령님을 마치 자신들이 함부로 ‘받아라, 말라’라고 그렇게 부릴 수 있는 존재가 결코 아닌 것입니다. 그들은 마치 성령님은 ‘하나의 에너지나 하나님께로 부터 나오는 비인격적 능력’으로 취급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그렇게 성령님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와 반대로, 성령님은 우리가 날마다 신뢰하고 추구해 나가야 할 선하신 하나님이시요, 그분을 깨닫은 만큼 그 뜻에 순종해 나가야 할 분인 것입니다.

또 한편 ‘성령님을 아는 지식’ 가운데서 두번째 질문은 B) <성령님의 사역은 무엇인가?>하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성부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에 비해서 성령에 대한 많은 오해와 영적 혼돈이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그 근본원인은 방금 말씀드렸듯이 ‘성령님이 누구신가?’라는 그분의 정체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함께 ‘성령님의 사역’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비롯되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의 주요사역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성령님은 <창세기 1장>에서 보듯이 성부 하나님께서 첫 천지창조의 순간부터 ‘성부 하나님의 영(=신)’으로써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창조하는 사역>을 주체적으로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라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창. 1:1-2)라고.

또한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주께서 밝혀 주셨듯이, 성령님의 중요한 사역은 <성도를 거듭나게 하는 사역>을 행하십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 3:5) 주님은 그 누구도 성령님의 능력 (=사역)이 아니고는 ‘거듭남’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 받고, 천국을 소유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삶’을 누릴 수 없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성령님은 우리 <성도의 평생의 삶을 통해 도우시고, 인도하시는 사역>하시고 역사하십니다. 제가 이런 성령님에 대해 강조하기 원하는 것은 앞서도 언급했듯이, 오늘날 수없이 많은 크리스챤들 중에서 <예수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성령님의 도우심 곧 ‘성령의 사역’은 마치 우리가 ‘받아도 되고, 안받아도 되는 것>쯤으로 취급하는 잘못된 인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성령충만은 우리가 크리스챤이 되면 자동적으로 주어지든지, 안 받아도 별 문제없는 것 쯤으로 치부한다는 것이죠. 결코 그렇치 않습니다. 성령님의 충만한 다스리심과 인도하심은 성도가 성도답게 살아가기 위한 필수적 조건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의 평생을 통한 성령님의 사역은 무엇일까요? 이점에 있어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시고 ‘보혜사 성령님’을 약속하셨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해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요. 16:7-8)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바로 ‘보혜사’ (The Comforter) (위로자/도우시는 분/보호하시는 분)되신 성령을 보내셔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죄와 심판과 세상을 책망하시는 것이 성령님의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한 책망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죄와 맞서 싸우게 하시고, 육신에 속한 모든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것들을 물리칠 수 있도록 우리 안에서 떠나지 않으시고 평생토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결론적으로 성령과 우리 성도와의 관계를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지점이 왜 우리가 성령충만을 통하지 않고는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성품으로 자라날 수 없는지를 깨닫게 되는 마지막 이유입니다. 그것은

셋째, “성령충만 없이는 <육신과 죄>를 이길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 함께 살펴본 것처럼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로 살아가던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온전하게 회복시키는 기적의 능력을 행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영접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복된 계기가 되었을 때,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사도들을 위협하여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도무지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엄히 경고했지만, 사도는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v. 19-20)고 담대히 선언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베드로와 요한은 이런 세상이 감당치 못할 담대한 예수님의 충성된 증인으로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저는 그것은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그리스도의 복음전파에 대한 명령의 절대성’을 깨닫았고, 주께서 함께 하심으로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졌고, ‘성령충만의 능력’으로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사도들을 어찌할 수 없이 놓아주었을 때, 이들이 다른 제자들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자신들에게 말한 바를 다 알리니, 이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해 소리쳐 기도하며, 이렇게 간구했습니다.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이시요” (v.24)라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합심기도를 시작합니다. 그리고나서, <시편2편>에서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신 바를 선언합니다.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v.25-26)라고. 다윗이 성령의 감동으로 오실 메시야에 대해 예언했듯이, 과연 헤롯왕과 유대 총독 본디오 빌라도는 유대종교지도자와 이스라엘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지금도 하나님의 뜻과 복음을 거스리고자 이 예루살렘성에 모여 주의 사도들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제자들은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합니다.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v.29-30)라고.

이렇게 기도했을 때, 오늘 본문에서 보는 것과 같이 ‘모인 곳이 진동하였고, 그 곳에 모인 모든 제자들이 다 성령이 충만하여져서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성령충만을 받게 될 때, 이적과 능력이 임하게 되었다’는 것보다도, ‘왜 이런 성령님의 충만이 믿는자들에게 임하게 된 것일까?’하는 점입니다. 이것은 짧게 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합당한 증인이 되게 하고자 함’ (행. 1:8)입니다. 그리고 좀더 풀어 설명한다면 이것은 구약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인 것인데, 하나님께서 구약의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예언하셨듯이, ‘새 영을 주셔서 육신의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심’으로 우상숭배의 더러움에서 정결케 되고, 하나님의 율례를 지켜 행함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겔. 36:26-28). 그리고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어느 한날을 정하시고 이스라엘과 유다집에 새언약을 세우시고, 그날 이후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법을 그 백성들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판에 기록할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 그 때는 작은 자부터 큰 자까지 모두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하나님은 미래에 이루어질 일들을 말씀하셨습니다 (렘. 31:31-34).

여기서 에스겔이 예언한 <새 영>은 성령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심이요, 예레미야가 말한 새언약을 통해 우리의 <마음판에 기록>한다는 것은 장차 오실 메시야의 보혈의 피로서 우리와 새언약을 맺으시고, 성령으로 우리의 마음판에 그의 율법을 새겨 주신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나무판이나 돌판이 아니라, 마음판에 온전히 하나님의 법을 새겨 주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예언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그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시고, 이미 구약시대에도 계셨던 성령이지만 새언약을 통해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의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며, 우리의 마음판에 하나님의 선한 율법을 새겨 주신다는 것입니다. 온전히 행할 수 있도록! 이것이 바로 성령의 사역이요, 이것은 바로 ‘성령의 충만’을 통해서 역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성령의 충만하게 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이미 앞서 말씀드린데로 ‘합당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의 삶을 살게 됨’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기쁨으로 부르게 되고, ‘성령이 우리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임을 증거’하시는 충만한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롬. 8:14-17). 또한 ‘육신의 정욕을 좇지 않고’ (갈. 5:16-17), ‘죄와 싸워 승리하게’ 능력주시는 것입니다 (롬. 8:12-13).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를 향해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 5:16)고 육체의 소욕을 다스리시는 성령의 사역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영과 인격으로 충만한 상태가 바로 ‘성령의 9가지열매’를 맺게 되는 상태인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2-23). 여기서 ‘성령의 열매’는 사랑을 포함한 9가지 열매인데, 성령의 은사는 ‘방언과 병고침과 예언과 다스림과 구제와 섬김’ (롬. 12:6-8/고전. 12:28-31)으로서 주께서 주신 목적은 ‘주의 몸된 교회공동체의 유익을 위함’ (고전. 12:7)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이런 여러 은사의 종류과 목적을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상세하게 설명하고 나서 이렇게 결론적으로 말합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고전. 12:31)라고. 그 어떤 은사보다도 더욱 큰 은사요, 아니 성령의 열매인 ‘사랑’을 추구하고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고전. 13장).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제자들은 함께 모여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을 낫게 하며 표적과 기사를 행할 수 있도록’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인 곳이 진동하며, 그곳에 모인 모든 제자들에게 성령의 충만이 임하심으로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였습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 이어지는 말씀에서 볼수 있는 것처럼 ‘한 마음과 한 뜻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는 것입니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v.12)는 것입니다. 이런 성령의 충만으로 우리 각자 성령의 9가지 열매들을 풍성해 맺어가고, 우리 공동체가 함께 한마음 한 뜻이 되어 사랑으로 섬겨 나가는 복된 아포슬 공동체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