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ember 10, 2023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Being One In Heart And Mind)

Preacher:
Passage: 사도행전 (Acts) 4:32
Service Type: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Being One In Heart And Mind)

12-10-23

본문말씀: 사도행전 (Acts) 4:32

32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All the believers were one in heart and mind. No one claimed that any of his possessions was his own, but they shared everything they had.)

[설교 요약]

우리는 지난 시간 주님의 사도들이 성령의 충만으로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였음을 살펴보았습니다.

한편, 이런 ‘성령충만’은 그 무엇보다도 ‘성령을 아는 지식’에서 자란만큼 충만할 수 있음을 함께 나눴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런 성령충만을 받은 주님의 제자들에게 일어난 삶의 변화들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입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v. 32)라고.

여기서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 서로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는’ 이런 공동체의 모습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들이 단순히 물질만을 나눠 가진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의 삶 전체를 함께 나눠 가졌다는 점입니다. 시간과 관심과 섬김과 사랑을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초대교회 성도는 서로를 섬길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첫째,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으로써 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중요성’을 이렇게 선언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고전. 15:17~19) 그럼으로 오늘 본문에 이어서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v. 33)라고 그리스도의 부활이 교회가 하나되는 근거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둘째, “우리의 근거를 흔드심” 으로써 입니다: 앞절 <31절>에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라고 기록하는데, 이 ‘진동’ (=흔들림/shaken)은 ‘강력하게 임하시는 성령의 권능’을 상징할 뿐 아니라, ‘세상에 뿌리 내리고자 하는 우리의 근거’를 흔드시는 주님의 은혜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우리를 흔드심으로 바나바와 같은 ‘위로와 포용의 사람’으로 빗어 나가십니다 (v. 36-37)

셋째, “성령의 충만하심” 으로써 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엡. 5:18)고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성령충만을 도전하고 나서, 곧이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엡. 5:19-21)라고 공동체의 아름다운 섬김과 사랑을 격려하는 것입니다. 신앙공동체의 하나됨은 성령충만의 강력한 열매인 것입니다.

성령의 하나되게 하시는 충만을 통해 피차 복종하고 사랑으로 함께 세워져 나가는 우리가 되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는 지난 시간 주님의 사도들이 성령의 충만으로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합당한 증인이 됨으로 하나님의 복음이 힘있게 퍼져 나가게 되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때 우리는 ‘왜 성령 충만이 참다운 성도가 되기 위한 조건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성령충만’은 그 무엇보다도 성경에서 밝혀 주시는 ‘성령님은 누구신가?’ 그리고 ‘성령의 사역은 무엇인가?’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통하여 ‘성령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는 만큼 충만을 받을 수 있다고 저는 말씀드렸습니다. 날마다 주께 겸손히 나의 죄와 허물을 회개하면서, 기도와 말씀을 통해 더욱 성령을 이해해 가고, 이해한만큼 그분을 신뢰하고 그 뜻에 순종해 나가게 될 때 성령충만은 임함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성령의 충만함은 우리 각자의 삶에 있어서 인격과 영성 안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고, 공동체와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성령의 은사’를 통해 다양하게 섬기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런 성령의 충만을 통해 열매 맺는 공동체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말씀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된 교회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 것인지를 더욱 분명히 꺠닫고, 함께 적용해 적용해 나가는 우리 아포슬 공동체 되기를 기대합니다.

사실 신앙생활 오래한 크리스챤들 조차도 영적 이해가 많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성령의 절대적인 도우심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단지 ‘영적 출생’을 시키고자 하심만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하게 자라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영적 출생’, 곧 다른 말로 하자면 ‘천국에 들러 가는 것’, ‘구원받는 것’에는 관심이 많지만, 진정한 ‘성도의 복된 삶’을 가능케 하는 ‘영적 성장’에는 별 관심이 없은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아니며, 오늘날 수많은 성도들의 심각한 문제인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오늘 본문말씀에서 나타난 초대교회 성도들의 모습을 잘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주의 제자들은 각자 성령의 열매를 맺어 나갈 뿐 아니라,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의 은사와 가르침의 은사를 비롯하여 ‘은사의 목적’인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영적 선물로 허락하여 주신 각종 다양한 은사를 사용하여 서로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성령충만은 우리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합당한 증인이 되게 하고, 인격의 성숙과 영적 은사를 사용하여 주의 몸된 공동체를 함께 섬기도록’ 하는데 선하게 쓰임 받게 되는 것이 주께서 성령충만을 주신 목적입니다. 이것이 지난 시간 본문 <행. 4:31>에서 사도들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때, 성령충만을 받아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했고, 이어지는 말씀인 오늘 본문말씀 <32절>로 이어지는 자연스런 결과인 것입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v.32) 서로를 사랑으로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본문말씀 <32절>에서부터 끝 절 <37절>까지의 말씀은 지난번 <행. 2장>의 마지막부분과 매우 흡사한 내용입니다. 기억하시겠지만, 오순절 성령의 충만한 임재하심의 사건으로 시작된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가 어떤 모습인지를 <행. 2장>에서 살펴본 이후에 두번째로 교회 공동체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이 오늘 본문을 포함한 <행. 4장>의 마지막 부분인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함께 살펴보는 믿음의 공동체는 <행. 2장>의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으로 시작된 첫 초대교회인 ‘예루살렘교회’인 것입니다. 지난 <행. 2장>에서는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행. 2:42)고 첫 시작된 영적 공동체의 아름다운 모습을 기록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해하듯이, 주의 제자들이 갑자기 천사가 된 것은 아니지만, 성령의 충만을 받게 될 때 성도 개인과 공동체가 영의 충만함으로 성령의 다스림을 통해 그와 같이 속에서 솟아 나는 아름다운 사랑과 섬김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이해할 것은 최초의 교회인 ‘예루살렘교회’는 <2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 출발이 ‘오순절날’에 임한 성령님의 강력하신 임재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아시듯이 그 ‘오순절’은 유대인의 대표적인 명절 (4대 명절)의 하나로서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의 율법의 규례를 따라 오순절 명절을 하나님께 제사로 드리고자 각지에서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상황에서 불의 혀 같은 성령강림의 역사가 벌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그 당시 사도의 복음선포로 3천명이 회개함으로 시작된 예루살렘교회의 상당수 멤버들은 타지역에서 오순절 명절을 지키고자 예루살렘 성전에 왔다가 복음을 듣고, 주님을 영접한 유대인들이었다고 성경학자는 추정합니다.

따라서 <2장>에서 보듯이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행. 2:44-46a)라는 구절과 오늘 본문으로 이어지는 구절에서 “~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 (행. 4:32-35)고 두 말씀 사이에서 상당한 유사성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앞의 2장과 오늘 4장의 본문을 포함한 끝부분에서 <소유를 팔아 각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다> 혹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다>라는 매우 유사한 내용의 공동체의 삶의 모습을 강조하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 주된 이유는 앞서 말씀드렸듯이 ‘그 당시 타지에서 살다가 오순절날에 예루살렘 성전에 제사를 드리려고 왔다가 성령님의 불의 혀 같은 강림을 목격하고 회개함으로 예수님을 영접하여 예루살렘교회 멤버가 된 유대인 성도들이 상당수 있었는데, 그들은 예루살렘이 자신들의 본거지가 아님으로 인하여 그곳에서 재정적인 큰 어려움을 겪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이런 가진 것이 별로 없고 재정적으로 궁핍했던 성도들의 필요를 따라서 예루살렘교회 지역에 터를 내리고 살던 성도들은 자신의 소유를 기꺼이 함께 나눠가진 것이 물건을 통용하고 재물을 나눠 가지게 된 주된 이유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성도들이 서로의 소유를 나눠 가지고, 함께 공유한 것은 단순히 그런 한가지 이유가 전부가 아님을 우리는 쉽게 추측해보게 됩니다. 이런 이유 말고도 상황과 여건은 매우 다양하지만, 결론은 동일하게 ‘서로의 필요를 따라, 서로를 책임지고 섬겨 나감으로 각자의 소유를 아낌없이 나눠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이와 같이 함께 나누고 섬기는 모습이 영적 공동체의 본질임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물질만이 아니라, 우리의 시간과 관심과 삶 전체가 이와 같이 서로를 위해 함께 나눠주고, 함께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저는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함께 아름다운 영적 공동체를 이뤄갔던 초대교회의 비결은 어디에 있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다시 말해, 어떻게 초대교회 성도는 서로를 섬길 수 있었을까요? 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첫째,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으로써 입니다: 제가 신약성경을 주의 깊게 읽고 묵상하면서, 그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있어서 진정으로 소망이 되고 강력한 믿음의 근거가 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하는 가운데 제가 더욱 깨닫게 된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성도들에게 그의 첫번째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의 확실성과 그 부활의 소망’을 선언하였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 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고전. 15:3~8) 성경의 예언데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 지낸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셨고, 사도 베드로를 비롯한 12사도들과 500여 형제들에게도 일시로 보이셨고, 나중에 사도 바울 자신에게도 부활의 주께서 다메섹 언덕에서 자격 없는 자신을 만나 주셨다고 그는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고백을 통하여 ‘만약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불행한) 존재’임을 선언합니다. 이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성도가 끝까지 붙들고 놓쳐서는 안되는 우리 믿음의 근거’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고전. 15:17~19)는 것입니다. 단지 사도 바울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초대교회 성도들이 ‘나사렛 예수를 그리스도요, 주님이다’라고 고백하는 순간, 그들은 그들의 집안에서 파문당하고, 직장에서 쫓겨났고, 로마 원형경기장에서 사자의 밥이 되거나 십자가 위에서 불태워 죽임을 당하는 순교를 당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도대체 어떻게 이런 혹독한 고난의 시간을 통과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사도 바울과 초대교회 여러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로의 부활>을 목격한 증인일 뿐 아니라, <그 부활의 능력>으로 영적 승리를 누려 나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부활의 능력입니까? 그것은 주의 부활의 능력으로 인해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어지고 (롬. 8:2), 순간 순간 주의 성령의 능력으로써 약속하신 ‘영적 승리’를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렇게 우리를 도전합니다.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고전. 15:58) 이것이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33절>에서 설명하듯이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했고, 큰 무리가 은혜를 받아 서로를 섬겼던 것입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v. 33)라고.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은 자신의 것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요,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그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를 날마다 승리로 인도하시는 그리스도의 것임을 확신하기에 한마음과 한 뜻으로 감사함으로 서로를 섬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 “우리의 근거를 흔드심” 으로써 입니다: 지난 시간 살펴본 <31절>의 본문말씀에서 사도들과 제자들이 함께 모여 합심하여 기도하며,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표적과 기사가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기를 구했을 때, 그 모인 곳이 진동하며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자들이 합심으로 기도했을 때, “(그)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31)라고 누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동’했다는 의미일까요? 그것을 NIV영어성경에서 보면, “shaken” 곧 ‘흔들렸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진동은 일차적으로 주의 능력이 충만히 임하실 때, 우리가 충분히 인식할 만큼 강력한 현상을 동반하여 임재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지진이 일어나듯이 강력하게 임재 하셨다는 것입니다. 한편 이런 ‘진동’했다는 것은 영어식 표현의 ‘흔들렸다’ (shaken)에서 암시하듯이, 주의 능력은 ‘우리의 존재와 삶 전체를 흔들어 놓으심’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도 그동안 적지 않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주께서 저의 인생을 필요에 따라 자주 자주 흔드셨는지를 분명히 기억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저도 좀더 안정되고 편안한 삶을 추구하곤 했습니다. 물론, 더 편안하고 안정되게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겠지만, 그러나 주님은 제에게 더 안정되게 터를 박고 살아가는 인생보다, 비록 미래는 알 수 없을찌라도 주님을 의지함으로 따라 나서는 인생을 붙잡도록 저를 강하게 인도해 오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주께서 저의 인생을 흔드시는 목적이자, 이것이 곧 주님께서 저에게 베푸신 풍성한 은혜임을 저는 고백합니다.

오늘 <행. 4장>의 끝 절을 보면, ‘구브로에서 난 레위사람’인 <요셉>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 (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v. 36-37) 그는 사도들에 의해서 ‘바나바’라는 별명을 얻게 되는데 그 의미는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이 ‘위로의 아들’이란 바나바가 후에 사도 바울과 함께 이방선교사역의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하고 여러 성도와 동역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소중한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던 것에서 그 이름의 이유를 잘 이해하게 됩니다. 저는 이 바나바의 인생, 곧 교회 공동체를 위로하고 지체의 실수와 허물을 품어 줌으로 섬겼던 그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주님이 왜 우리의 인생을 때때로 흔드시고 스스로를 의지하지 못하게 하시는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것은 세상 그 어디에도 내가 의지하고 뿌리내릴 곳은 없음을 주님은 깨닫게 하심이요,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는 광야의 인생을 통하여 바나바와 같은 하나님의 겸손과 위로의 아들과 딸이 되도록 훈련시키시는 주의 손길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주님은 우리를 흔드심으로 더 이상 세상과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바나바와 같은 위로의 자녀되게 은혜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물질만이 아니라, 시간과 관심과 주님의 말씀으로 지체를 섬기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삶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셋째, “성령의 충만하심” 으로써 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막 시작된 첫번째 초대교회인 예루살렘교회 공동체가 이렇게 한마음 한 뜻으로 서로를 섬기고 함께 자라갈 수 있었던 것은 두말할 나위없이 성령의 충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충만이 없이 이들은 결코 이런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으로 성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성령충만의 절대적 필요성’을 영적으로 밝혀주면서 이렇게 도전하는 것을 여러분은 기억하실 겁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엡. 5:18)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사도가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성도들을 도전한 바로 다음절에 이렇게 그들을 격려하는 것입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엡. 5:19-21)라고.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주목해 보아야 할 사실은 바울이 ‘술 취하지 말고,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한 바로 다음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라고 그들은 격려한다는 점입니다. 저는 이것이 왜 우리 교회공동체가 서로 시와 찬미와 아름다운 영적 노래로 서로 화답하고, 사랑으로 피차 복종하기 위해 성령충만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인가를 사도 바울이 영적으로 잘 설명한 말씀이라 믿습니다. 성령충만 하지 않고는 이런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이 꽃필 수 없고, 성령충만 하지 않고는 주의 몸된 교회가 서로 연결되어 함께 건강하고 아름답게 자라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을 시작하고 나서, 거듭거듭 성령충만이 우리 성도 개인과 교회 공동체에 있어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침을 확인하게 되는 지점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현재의 우리 아포슬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예루살렘교회와 같이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서로를 더욱 알아가고, 서로의 아픔과 고통 그리고 기쁨과 감사를 함께 나누고 함께 성장하는 공동체입니까? 아니면 ‘형식을 갖춘 인사와 대화는 있지만, 언제나 평행선을 달리는 하나되지 못하는 남남의 공동체입니까?’ 바라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으로, 그리고 주께서 우리의 근거를 흔드셔서 오직 주님만을 바라봄으로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한마음 한 뜻이 되어 서로를 섬기는 아포슬 되기 소원합니다. 그리하여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고 함께 사랑으로 세워져 가는 우리 공동체 되길 기대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