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ember 17, 2023

“교회의 비극” (The Tragedy In The Church)

Preacher:
Passage: 사도행전 (Acts) 5:1~3
Service Type:

“교회의 비극”

(The Tragedy In The Church)

12-17-23

본문말씀: 사도행전 (Acts) 5:1-3

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2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설교 요약]

오늘 본문말씀은 신약성경에 기록된 교회의 첫번째 비극적 사건입니다. 사실 그 어떤 교회도 완전한 교회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불행한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함께 영적 교훈과 가르침을 받을수 있기를 원합니다.

말씀 가운데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아나니아를 꾸짖습니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v.3)라고. 그렇다면 과연 이들 부부의 심각한 죄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첫째,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부부의 은밀한 죄를 드러내신 것은 성령이십니다. 이렇게 성령께서 긴급하고 준엄하게 이들 부부의 죄를 다스리시는 이유는 이들의 마음에 사단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v.3). 곧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그 속에 없고 거짓의 아비인 사단 마귀 (요.8:44)에게 사로잡힐 때 자신과 공동체를 영적으로 파괴하는 ‘거짓말’은 시작됩니다.

둘째, ‘위선을 행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들의)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v.1-2)라는 기록합니다. 그 누구도 밭을 팔거나 말라고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들 부부는 소유를 팔아 그중 얼마를 감추고 나머지를 주면서 ‘밭을 판 전부’라고 거짓말했던 것입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그 동기는 ‘위선’ (hypocrisy)입니다. 하지도 않고서 한 것처럼 부풀리고, 하나님의 눈을 두려워 않고 사람의 눈을 의식하는 것이 위선의 가공할 죄입니다.

셋째, ‘성령을 모독한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심각한 죄는 ‘성령을 모독’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v.3-4) 예수 그리스도께서 경계하셨듯이,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막. 3:28-29)라는 것입니다. 아나니아 부부의 이런 거짓된 행위는 단순히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성령을 속이고 시험한 것이라고 하나님은 준엄하게 선언하십니다.

사랑으로 충만했던 예루살렘공동체 조차도 죄와 유혹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연약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진실하게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 사단 마귀와 육신의 소욕과 싸워 나갈 때, 주께서는 그의 몸된 우리 교회를 더 강건하게 성장시키실 것을 믿습니다.

[설교 전문]

            오늘 본문말씀은 신약성경에 기록된 교회의 첫번째 비극적 사건입니다.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라는 부부의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제가 오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깨닫게 되는 사실은 이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 공동체는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연약한지라 실수하고 넘어질 수밖에 없기에, 이런 연약한 자들이 모인 교회공동체는 완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와 같이 교회공동체가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불완전하고 실수하는 공동체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좇아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하는 점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부족과 연약 가운데서도 서로를 믿음으로 격려하고 함께 사랑으로 세워줌으로 주님의 건강하고 아름다운 몸된 공동체로 성장하는 아포슬 되기를 기대합니다.

제가 이번에 사도행전을 ‘강해설교’하면서, 특히 사도행전 <4장>과 <5장>에서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게 된 사실은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행. 2장>에서 시작된 첫 초대교회인 예루살렘교회 공동체를 더 자세하게 영적으로 묘사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장> (chapter)은 다르지만, 내용면에서 이와 같은 예루살렘교회에 대한 묘사가 지난시간에 살펴본 <행. 4:32>에서 시작하여 오늘 본문말씀을 포함한 <행. 5:11>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사도행전 말씀을 설교하는 여러 설교자들이 ‘예루살렘교회’이 어떻 교회인지를 설교할 때 설교본문을 <사도행전 4:32- 5:11>까지로 잡는 경우가 많은 것같습니다. 비록 <장>으로 나눠지기는 했지만, 그 내용이 서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어찌되었건, 저자 누가는 먼저 <4장 32-37절>에서 <예루살렘 공동체>의 서로 사랑과 하나됨으로 섬기는 아름답고 밝은 면을 먼저 설명하고나서, 이제 어두운 면을 함께 소개합니다. 그 내용이 <5장 1-11절>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자세히 기록된데로, 예루살렘교회 멤버였던 ‘아나니아’라는 사람과 그의 아네 ‘삽비라’라는 부부가 그들의 소유를 팔아 그 값의 얼마를 감추고, 나머지를 사도의 발 앞에 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왜 이 부부들은 자신들의 밭을 판것일까요?’ 그것은 지난 시간에도 살펴보았듯이, 이제 막 시작된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는 타지에서 이웃으로 삶의 터전을 바꿔 이주해 옴으로써 재정적 어려움이 있는 지체들과 가난한 성도들의 필요를 따라 성도들이 기쁘고 자발적인 마음으로 자신의 물건을 아까워하지 않고 서로 통용했고, 또한 밭과 집을 팔아 그 판 값을 사도들에게 주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가졌던 것입니다 (행. 4:32-35).

이와 같은 상황속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자신의 밭을 팔아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지체들에게 함께 나눠가지고자 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밭 판 값의 일부를 감추고, 나머지를 사도들에게 가져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해보자면, 좀더 정확히 말해서, 이들 부부가 처음엔 ‘순수한 마음으로 자원하는 동기로’ 그들의 소유한 밭을 팔았는데, 막상 그들의 수중에 돈이 생기자 돈에 대한 욕심이 생겨서 그 유혹을 못 이겨서 그 중의 일부분을 숨겨두고는, 사도들에게는 “이것이 밭을 판 값 전부입니다!”라고 말한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밭을 판 값 전부를 나눠 가질 마음이 없었는데도, 겉으로는 남들처럼 나눔과 사랑이 넘치는 사람인 것처럼 보이려고’ 이런 이중적인 행동을 했던 것인지? 는 더 이상 알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경우가 되었건 관계없이 이들 부부가 저지른 행위는 매우 심각한 죄악이란 사실입니다. 이것이 베드로가 엄중하게 그들에게 이렇게 선포하는 이유입니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v.3)라고. 그렇다면 과연 이들 부부의 심각한 죄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첫째,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건에서 가장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이 죄악된 사건을 누가 인지하고 처벌한 것일까요? 물론 오늘 본문을 포함한 <11절>까지의 내용을 볼 때, 두부부의 은밀한 죄를 알고, 추궁하고, 징계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이는 사도 베드로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의 내용과 흐름을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아나니아’부부의 이런 은밀한 죄를 인지하고 드러낸 것은 베드로가 아니라, 성령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아니고서는 우리 인간의 속마음을 알 수없고, 은밀한 생각과 계획을 드러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그의 강권적인 능력으로 우리 인간의 부패한 마음의 생각을 그 의로우신 뜻대로 밝히시는 것입니다.

물론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언제나 오늘 분문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사건과 같이 성령께서 엄중하고 즉각적으로 임하셔서 교회 안에 발생하는 죄의 문제를 징계하시지는 않음을 우리는 압니다. 만약 그렇게 하셨다면, 오늘날 존재할 수 있는 교회는 단 하나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앞서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하나님이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천사가 된 것이 아니기에 공동체에 속한 우리 성도들은 여전히 실수하고 넘어지고 죄를 범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더 많은 교회가 세워지고, 공동체가 늘어나는 것은 우리가 초대교회 성도들보다 더 의롭고 믿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아나니와 부부의 죄를 하나님은 심각하게 다루시는지?’에 대해 우리가 분명한 영적 교훈으로 깨닫아야 하는 점이 있음을 저는 믿습니다. 그것은 이와 같이 주님의 몸된 교회가 이제 처음 시작된 시점에서, 아담의 타락이후로 한번도 볼 수 없었던 성령충만한 교회요, 사랑으로 서로를 섬겼던 실로 아름다운 영적 공동체가 갑작스럽게 영적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그것은 ‘거짓말’에서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 할수록, 하나님은 거짓말을 우리가 이해하는 것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심각하게 다루시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성경에서 첫 하나님을 반역하고 죄를 범한 존재가 있는데 그는 사단 마귀입니다. 그가 첫 인간부부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하나님을 거역하게 하고, 범죄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아담과 하와를 범죄하게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거짓말’로써 입니다. 사단은 거짓말로 첫 인간부부를 미혹하여 넘어지게 했습니다. “너희가 이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 3:5)라고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밝히 말씀하셨듯이, 사단 마귀는 진리가 그 속에 없고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인 것입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요. 8:44)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하듯이 지금 <사도행전 5장>의 시점은 기독교회가 처음으로 출발하는 상황입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실로 아름답고 성령으로 충만한 사랑으로 섬기는 주님의 몸된 교회가 출발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과 영의 충만한 공동체 안에 ‘거짓말’이라는 죄가 들어오게 될 때 이것이 얼마만큼 사랑의 공동체를 심각하게 파괴시킬 수 있는지를 오늘 사건은 우리에게 강력하게 경고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이렇게 신속히, 그리고 엄중하게 아나니아 부부의 거짓말에 대처하신 것은 이와 같이 거짓말은 본질적으로 악한 영, 사단 마귀에 속한 강력한 도구요, 교회를 파괴시키는 근본적인 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직까지도 하나님과 공동체 앞에서 버리지 못하는 거짓된 말과 행동은 무엇입니까?

둘째, ‘위선을 행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 부부가 무슨 위선을 행했습니까? 그들은 밭을 판 값 전부에서 일부는 감춰두고 그 나머지 값을 사도들 앞에 가져가서 마치 밭값 전부인 것처럼 속였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것처럼 “(그들의)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v.1-2)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여기서 성도 여러분과 분명히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에 속한 밭을 팔든지 말든지, 그리고 팔았다면 얼마만큼을 팔아서 공동체를 위해 사용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이들 부부의 결정사항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두 사람에게 달린 문제였습니다. 이것이 제가 지난번 몇번의 설교에서 예루살렘교회가 서로의 필요에 따라 가진 것을 나눠가지는 행위는 전적으로 자원함으로 이루워진 일이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이 초대교회가 마치 ‘공산주의’와 같은 사유재산을 부인한다든지, 그리고 사도들이 그렇게 하라고 강요했기 때문이 전혀 아니라는 점을 저는 분명히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베드로의 아나니아에 대한 이런 책망 가운데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v. 4a)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반문은 ‘아나니아가 그의 소유의 밭을 팔든지 아니든지, 혹은 밭을 어느정도 팔든지 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마음대로 결정하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 당시 교회에서 행해졌던 구제를 행함에 있어서 베드로 자신을 포함한 그 어떤 사도도 어떻게 어느정도 구제하라고 강요하지 않은 것임을 그는 분명히 되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적인 아나니아 부부의 결정에 달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밭을 전부 팔아서 그 값을 드린다고 해 놓고서는,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겉과 속이 다르게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안과 밖이 서로 다른 위선적인 모습은 그 사람 자신 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 전체에 있어서도 매우 치명적으로 암적인 것임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데 신앙공동체 안에서 이런 위선이 가져올 수 있는 위험을 예수님만큼 잘 지적하신 분도 없을 겁니다. 주님은 <누가복음 12장>에서 바리새인의 위선을 ‘누룩’이라고 표현하시면서, 이렇게 위선을 경계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눅. 12:1) 그러면, 무엇이 바리새인의 누룩 곧 위선일까요? 그것은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그)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한)” (눅. 11:39) 삶이요,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의 눈은 두려워 않고, 사람의 눈은 신경쓰고 민감해 하는 것’ (눅. 12:4-5)이며,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는 것)” (마. 7:3)입니다. 문제는 이런 바리새인의 누룩이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없어지지 않고 존재한다는 사실이요, 이런 외식이 교회 공동체의 하나됨을 그 무엇보다도 치명적으로 손상시키고 갈라지게 하는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솔직하고 진실하게 있는 모습 그대로 나의 한계와 실수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없는데도 있는 것처럼, 하지도 않으면서 한 것처럼 위장하고 표장하는 모습은 결코 올바른 신앙인의 모습이 아니요, 단지 <변질된 종교인의 위선> 그 자체인 것입니다. ‘거짓’으로 시작된 죄의 씨앗은 ‘위선’으로 자라남으로 공동체를 심각하게 갈라놓고 파괴시키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가 여전히 버리지 못한 위선은 무엇입니까?

셋째, ‘성령을 모독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심각한 죄는 ‘성령을 모독’한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이 두 사람 부부의 죄를 밝혀 말합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v.3-4)라고. 그렇다면, ‘무엇이 이들 부부가 성령을 모독한 것입니까?’ 이것을 베드로는 ‘성령을 속였다’고 지적합니다. 또한 그의 아내, 삽비라에게는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v.9)고 베드로는 그녀를 강하게 책망합니다. 이것은 곧 ‘성령님을 모독하는 것은 그분을 속이고자 함이요, 또한 성령을 시험하고자 하는 것’을 베드로는 영적으로 밝혀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 크리스챤이 성령에 있어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한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마가복음 3장>에서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막. 3:28-29)라고. 성령을 모욕하는 자는 심각한 죄를 범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겸손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과연 무엇이 주께서 말씀하신 ‘성령을 훼방하고 모독하는 것’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먼저 예수께서 <마가복음 3장>에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주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 내셨을 때 대표적인 유대인의 종교 지도자들이었던 서기관들이 ‘저가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좇아낸다’ (막. 3:22)고 주님의 메시아적 권능의 행위를 폄하하고 성령의 역사를 왜곡되게 평가했습니다. 여기에 대한 주님의 경고의 말씀이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성령을 훼방하고, 그분을 모독하는 것’은 실제 우리의 삶에서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우리 중에서 누군가가 ‘우리도 예루살렘교회와 같은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공동체를 성령님의 충만한 능력으로 이루어 가자’고 했을 때, 혹시 우리 마음 가운데 ‘성령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런 일이 일어나겠어!?’라고 성령을 의심하거나 폄하하지는 않습니까? 혹은 여러분이 뭔가 다급하고 힘들 때는 하나님께 ‘하나님 이것만 꼭 이루어 주시면,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겠습니다’라고 간절히 기도해 놓고 선, 그 일이 은혜 가운데 잘 이루어지면, 은근슬쩍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하나님과의 약속을 잊어버린 듯 외면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언제까지 하나님의 무서운 형벌과 징계가 있으면 마지못해 행하고, 자발적으로 하라면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식의 철없는 영적 아이로 살아가고자 하는 것일까요? 모든 우리의 성령에 대한 불순종과 불신의 결과가 오늘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은 심각하 결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고 할찌라도, 우리 속에 있는 이런 불신과 불순종이 얼마나 성령을 탄식시키고, 가슴 아프게 하는지,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영적 성숙을 방해하고 교회 공동체를 하나되지 못하게 하는지 성도 여러분은 깨닫고 있는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첫 사람 아담 이후에 처음으로 영적으로 출생하게 된 <예루살렘교회> 라는 실로 아름답고 사랑에 충만했던 공동체 안에서도 비극적으로 죄가 스며들고, 위선과 성령을 모독하는 악이 시작되었음을 우리는 안타깝게 보게 됩니다. 이 땅에서 죄와 허물이 없는 영적 공동체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속한 우리 모두가 연약하고 실수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성령을 의지함으로 주의 몸된 교회가 더욱 순결하고 사랑에 충만한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우리를 지켜 주심을 믿습니다. 오직 겸손하게 우리의 죄와 허물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날마다 성령의 능력으로 육신과 악한 영과 싸워 나가며, 주의 몸된 지체를 사랑으로 서로 섬겨 나감으로써 말입니다. 이런 우리 교회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