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tember 9, 2018

“참된 안식” (True Rest)

Preacher:
Series:
Passage: 마가복음 (Mark) 2:24~28
Service Type:

“참된 안식”

(True Rest)

9-9-18

본문말씀: 마가복음 (Mark) 2:24~28

24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희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자들이 핍절되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26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27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서 론>

저는 오늘 성도 여러분과 함께 ‘참된 안식’ 이라는 제목으로 주님의 말씀을 묵상해 보기 원합니다. 제가 지난주에 성도 여러분과 살펴본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는 제목의 <마태복음 11장>  의 말씀을 살펴 보았습니다. 삶의 무거움 가운데 힘들어 하는 우리 모든 인생들을 부르시고, ‘내게 와서 쉬어라’ 말씀 하시는 주님의 사랑의 초청을 듣습니다. 오늘 말씀은 <지난주 말씀>에 이어서 ‘주님 앞에 나와서 쉼을 얻는다’ 는 것이 무슨 뜻인가?를 말씀 안에서 살펴보기 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안식일의 주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모두 되시기를 기대 합니다.

<본 론>

오늘 본문은 어느날 예수께서 제자들과 밀밭사이를 지나실때 벌어진 사건에 대한 기록 입니다. 안식일날, 주님과 제자가 밀밭 사이를 지나게 되었는데 제자들이 보리 이삭을 손으로 비벼 먹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본 바리새인들이 그들에게서 중대한 안식일을 범한 범죄사실을 발견한 듯이 주님께 따져 묻었습니다; “보십시오, 어찌하여 이 사람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v.24) 라고 말 입니다. 그때, 우리 주님은 “다윗이 자기와 함께한 자들이 먹을것이 없어서 굶주렸을 때에,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를 너희는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V.25) 라고 그들에게 되묻으셨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다윗이 하였는지를 밝히셨습니다;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v.26)

주님께서 ‘다윗이 그와 함께 한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만 먹을수 있었던 진설병을 자신이 먼저 먹고 그들에게도 주었다’ 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말씀은 결국 그 다음절, <27절>, 에서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v.27) 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안식일의 정신을 깨우쳐 주시고자 함임을 볼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v28) 고 주님은 자신의 정체성과 안식일과의 관계를 결론적으로 선언 하십니다. 인자, 곧 주님 자신은 안식일에도 주인인 것 입니다.

이제 저는 <첫째>, ‘안식일은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신 뜻이 무엇인지?’, 그리고 <둘째>,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다’ 는 것은 무슨 뜻인지 생각해 볼수 있기를 원합니다. 이것을 통해 ‘참된 안식’을 한걸음 더 영으로 깨닫고 주께서 약속하신 참된 안식을 누리시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소원 합니다.

먼저, ‘안식일은 무엇이며, 왜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셨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안식을 이해하는 첫걸음이 될것 입니다.

성경의 기록에서 ‘안식’ 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은 <창. 2장> 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 하시니라” (창. 2:2). 우리가 잘 아는데로 하나님께서 6일동안 빛과 어둠, 땅과 하늘, 그 가운데 모든 식물과 하늘의 새들, 바다의 물고기, 육지의 짐승들 뿐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우리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6일간 만드시고, 7일째 되는 날에 안식하셨다는 것 입니다. ‘안식하다’는 말은 ‘쉬다’ 는 의미로 영어로는 ‘rest’라고 번역 됩니다. 그리고, ‘쉬다’ 혹은 ‘휴식하다’라고도 번역되는 ‘안식’에서 ‘안식일’ (Sabbath) 의 근거가 시작됨을 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7일째 쉬셨다는 안식일의 시작은 구약에서 크게 2가지로 확장되고 있음을 봅니다. 하나님은 이제 구체적으로 ‘안식일’을 지킬것을 2가지 이유로 명령하십니다. 첫째는, <창. 2장>에서 이미 밝힌데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이 안식일을 지키라는 그분의 명령 가운데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는 엿새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출. 20:11) 그리고 둘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심’이 또한 안식일을 지키는 분명한 근거임을 말씀 하셨습니다. <신. 5장>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선언 하셨습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였느니라” (신. 5:15) 라고 말 입니다. 주석가 메튜헨리는 이 두가지는 본질적으로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된다고 지적 합니다. 바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 은 우리 인간의 타락과 반역에도 불구하고 그의 선하신 뜻을 따라 그의 독생하신 아들을 통해 택하신 자녀들을 마침내 죄악의 땅 애굽에서 구원’ 하여 내신다는 것 입니다. 바로 그의 선하심과 긍휼에 넘치는 은혜로 말미암아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경의 안식의 개념은 단순히 우리 인간이 ‘육체적으로 푹 쉰다’는 것과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음을 우리는 이해할수 있습니다. 물론 맞습니다. 당연히 몸이 피곤한 사람은 몸을 쉬어줘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쉼을 누리지 못하고 안식하지 못하는 이유중에 주의 은혜 안에서 안식을 누려야 될 성도들이 주일날 예배 나와서 너무 바쁘고 피곤하게 하루를 보낸다는 사실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중에 큰 책임이 교회 지도자들에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되게 하셔서 거룩하게 구별하신 <주일> (the Lord’s Day)의 안식의 정신을 누리지 못하고 너무 바쁜 것 입니다. 마리야처럼 주님의 발 앞에 앉아 그분께서 주시는 말씀의 은혜와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너나 할것 없이 마르다 (눅. 10:38~42) 처럼 감당할수 없는 서너가지 일로 마음이 분산되고 몸이 피곤한 안식을 보내는 것 입니다. 우리 아포슬교회는 어떤가요? 솔직히 목사인 저를 포함해 우리 모든 성도들이 주일 새벽부터 저녁까지 바쁘고 힘들게 주일을 보내고 있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교회에서는 말 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여러분과 제가 더 깊은 안식을 누린다는 뜻은 아닙니다. 만약, 우리 각자가 육체의 안식 뿐 아니라 영적 안식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면 말 입니다.

다음으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다’ 는 것은 무슨 뜻인지를 살펴 봄으로서 ‘어떻게 진정한 안식으로 들어갈수 있는지?’ 이해하기 원합니다. 주님은 안식일의 뜻을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하셨고 그 안식의 정신을 추구하시는 분임을 우리는 의심치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이렇게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v.27) 라고 말 입니다. 무슨 뜻 입니까? 하나님과 본질상 동일하신 우리 주님께서, 존재하는 모든 창조물을 그의 손을 통하여 빗으신 우리 주님께서 이제 ‘안식일의 정신’에 대해서 바리새인들에게 도전하고 계신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먼저 만드시고 그 다음 안식일을 지킬 사람을 만드신 것이 아니다는 것 입니다. 그 반대로, 사람을 먼저 만드시고 그 다음 안식하시여 거룩하게 구별된 날로 안식일을 만드셨다는 것 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람을 위하여 안식일을 허락하셨다’ 는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대한 구체적인 명령을 하신 이후 수천년을 내려 오면서 변질된 것이 무엇인지를 지적하고 계시는 것 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은 인간을 위하여 있는 것 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유대종교지도자들과 정면으로 충돌하시면서 ‘안식일을 범한 자’라는 오해를 감수하신 이유 입니다. 안식일은 생명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것이라는 것 입니다. 따라서, 인자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라고 스스로 선언 하십니다. “그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v.28) 고. 왜 인자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에도 주인 입니까? 그것은 주님은 정확하게 안식일의 정신을 알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셔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참된 안식이 주님 안에서 성취되기 때문 입니다. 지난주에 함께 살펴 보았드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는 진정한 안식으로의 초청과 약속은 오직 안식의 주인되신 주님 자신 안에서만 성취되기 때문 입니다. 그러므로, 인자되신 우리 주님은 안식일에도 주인인 것 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일까요?” (How can we be rested in the Christ?) 그것은,

첫째,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와 화해하심을 믿음으로서> (By reconciliation with God through the faith of Jesus Christ) 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4장>까지 무엇이 복음이고, 왜 모든 사람은 죄인이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수 없는 존재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복음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구원하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입게 된 훌륭한 본보기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롬. 5장>을 시작하면서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롬. 5:1) 고 말 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으로 인해 어떻게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을 사도바울은 치밀하게 다시 영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 하셨느니라 ~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 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롬. 5:8,10)

사도바울이 로마서 5장을 시작하면서 밝히고자 하는 핵심은 무엇 입니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화해하기를 이미 계획하셨다는 것 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 받았다는 것은 끊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다시 사랑의 관계로 화해하게 되었다는 뜻 입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과 긍휼하신 은혜로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누린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화해한다는 뜻 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와 화해하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 입니다. 따라서, 그 누구도 안식일의 주인되신 예수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 아버지와 화해할수 없고, 하나님과 화해하지 못하는 한 결코 하나님과 인간은 참된 평화와 안식을 누릴수 없는 것 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그의 아들을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하심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은 지금 그 아들을 통해 하나님과 더불어 진정한 평화 안으로 들어가고 있습니까?

둘째, <그리스도의 마음을 배움으로서> (By learning the mind of Christ) 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과 화해할뿐 아니라, 더나아가 그분 안에서 더 깊은 평화와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바로 위에서 살펴본데로, 사도바울은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화목제물되신 죽으심으로 자신과 화해하는 길을 이미 열어 놓으셨음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한걸음 더나아가 이렇게 또한 선언 합니다.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 하느니라” (롬. 5:11)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해 (=화목) 하는 정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 한다는 것 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이것은 약속하신 영, 성령을 통해 가능한 것 입니다. 우리 신자들이 성령의 충만을 사모하고 그분께 순종해 나갈때 그의 영을 통해 더이상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양자의 영을 받음으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롬. 8:15) 되는 것 입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는 것 (롬. 8:16) 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는 영적 상태인 것 입니다.

지난주에 제가 성도 여러분에게 도전했드시,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여전히 수고하고 무거운 짐가운데 지치고 힘들어 하고 있는지에 대한 핵심은 ‘주님께 나아가 배우지 않는다’ 는 사실 입니다. 주님은 무어라 말씀 하십니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29) 라고 말 입니다. 주님의 제자라고 스스로 주장하는 우리 크리스챤들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주님께 나아와 그의 마음을 배우고자 하지 않는다는 것 입니다. 그분 앞에 나아와 배우고자 하는 자들에게, 그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고자 하는 사랑하는 제자들을 소원을 주님은 결코 거부하지 않으실 것 입니다. 우리를 살리시고자 그의 보배로우신 살을 찢으시고 피를 남김없이 쏟으신 주님께서 어찌 그의 뜻을 배우고자 하는 자를 내치시겠습니까? 그럼으로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이렇게 도전 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5) 라고. 그는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 하셨지만, 자기를 낮추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복종 하셨다는 것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한 평화와 안식을 누리기 원합니까?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마음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쉼을 얻을 것 입니다.

셋째, <우리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함으로서> (By boasting the Cross of our Lord Jesus Christ) 입니다: 만약 성도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와 그분을 배우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에게 허락하신 진정한 안식 (=평화/쉼)을 누리는 유일한 길임을 인정 하신다면, 저의 마지막 질문은 그것을 한마디로 말할수 있는가? 하는 것 입니다. 우리 주님을 통해 하나님 안에서 누릴 안식과 평화를 누리기 위해 내가 최종적으로 추구하고 끝까지 붙들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복음 가운데 그것을 밝혀 주셨습니다. 그것은 무엇 입니까? 그것은 ‘우리 주님의 십자가’ 입니다. 이 십자가 안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예정하신 모든 충만이 있습니다. 이 십자가 안에 하나님의 측량할수 없는 긍휼하신 사랑과 죄에 대해 진노하시고 반드시 심판 하시는 그의 의로우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의로우심과 끊을수 없는 긍휼하신 사랑이 불길처럼 타오르는 것을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마감하면서 이렇게 결론적으로 고백 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 6:14) 고.

왜 여러분과 저는 십자가를 자랑해야 할까요? 아니 십자가만을 자랑해야 할까요? 그 이유는 우리 주님의 십자가 이외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기 때문 입니다. 그밖의 모든 것은 다 ‘더러운 옷’ (사. 64:6) 과 같은 것 입니다. 나의 스마트한 머리, 나의 멋진 외모, 나의 투철한 의지, 나의 자랑스런 혈통과 나의 의는 모두 철저하게 ‘더러운 옷’과 같다고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선언 하시는 것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자랑 합니까? 십자가만을 자랑 합니까? 우리 주님의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베푸신 모든 풍성하신 사랑을, 평화와 안식을 성령님의 충만한 도우심으로 누리십니까?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자녀에게 허락하신 참된 안식은 바로 우리 주님의 십자가 안에서 온전케 됨을 믿으십니까? 성도 여러분은 주의 십자가를 사랑 합니까?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사랑하는 제자 사도 요한은 그의 마지막 생애를 밧모섬에서 보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부활하신 우리 주님의 영을 뵈었습니다. 주의 영, 성령님은 사도 요한을 통해 흩어진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각각 메세지를 보내셨습니다. 믿지 않는 세상을 향한 메세지가 아니라, 바로 그를 믿는 일곱 교회를 향한 사랑과 꾸짖음의 메세지 입니다. 오늘날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여러분과 저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을 그의 영광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은 주의 몸된 소아시아 일곱교회에 칭찬과 격려와 함께 심판과 회개의 메세지를 동시에 선포 하십니다. 왜요? 이제 마지막날을 사는 성도들이 악한 영들의 유혹과 세상의 핍박을 이기고 믿음으로 최후의 승리를 하도록 힘주시고 축복하시고자 함 입니다. 우리 주님 안에서 장차 누리게 될 진정한 영광을 바라보면서 끝까지 싸워 이기라는 것 입니다.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 이러라” (계. 7:17)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서 자신을 드리심으로 그를 믿는 우리들은 생명수 샘을 마시게 되는 것 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 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말 입니다.성도 여러분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평화의 관계를 맺고, 주님의 마음을 더욱 배워 나가며, 우리 주님의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진정한 안식을 더욱 넘치게 누리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복 합니다. 바라기는 주님 만나는 날까지 이 평화와 안식 안으로 더욱 나아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 합니다. 아멘.